2012년 10월호

무의식의 발견, 인간의 마음을 향한 첫걸음

  • 김학순│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입력2012-09-20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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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식의 발견, 인간의 마음을 향한 첫걸음

    ‘꿈의 해석’<br>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798쪽, 1만8000원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의 정신을 이성의 산물로 믿어왔다. 적어도 19세기까지는 과학과 합리성으로 세계를 인식하려 했다. 서양철학은 인간의 가장 탁월한 특성으로 성찰하는 능력과 사고, 합리성을 꼽았다. 지식과 판단의 주인은 명징한 ‘의식’이라고 계몽철학자들은 설파했다. 꿈에 대한 생각도 이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꿈은 신비한 예언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로 이해했다. 꿈을 꾼 사람의 정념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기로 여겼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꿈은 기껏해야 꿈을 꾼 이에게 그가 지은 죄를 보여줄 뿐”이라고 가르쳤다.

    19세기 말 혜성처럼 등장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런 서구 지성계를 단숨에 뒤집어놓았다. 프로이트가 20세기의 문을 여는 순간 세상에 던진 ‘꿈의 해석’(원제 Die Traumdeutung)은 가히 혁명이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무의식’ 세계의 발견을 선언한 것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를 일거에 무너뜨린 사상사적 전환점이 됐다. 무의식은 꿈이나 최면, 정신분석 등에 의하지 않고선 의식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의식의 작은 세계를 품는 더 큰 세계’라고 표현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 성적(性的)이고 무의식적인 쾌락의 원리와 의식적인 현실의 원리를 보여준다. 그는 노이로제 환자들이 들려준 1000개 이상의 꿈을 해석한 뒤, 표출되는 생각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자아’에 동조하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아에 의해 억압된 ‘이드(id)’의 욕망에 관한 생각이다. 정상인은 두 정신을 조화시키지만, 신경증 환자는 두 정신 간의 조화를 상실한 인간이라고 프로이트는 진단한다.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들이 아버지를 시기하고 어머니에게 갖는 성적인 사랑의 감정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꿈을 인용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있는 무의식적 소망과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결했다. 그는 인간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성적인 정념의 지배를 받으며, 의식은 이런 정념을 아주 희미하게만 알 뿐이라고 믿는다. 그런 성적 활동의 기본 동력을 ‘리비도(libido)’라고 불렀다.

    리비도는 생체 에너지의 하나인 성적 에너지다. 꿈이라는 폐쇄된 지각에 투영된다. 섹시한 꿈을 꾸면 몽정으로 나타나는 것도 리비도다. 불안한 꿈은 성적인 내용을 가진 꿈이므로 그에 속해 있는 리비도가 불안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여겼다. 아들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아들은 아버지의 세계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꿈의 동기는 소망

    프로이트는 성인의 꿈 대부분이 성적인 재료를 다루고 있으며, 이게 꿈의 해석 원리와 완전히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언니의 외아들이 관 속에 누워 있는 광경을 본 여자의 꿈은 그녀가 어린 조카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과의 재회를 소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팡이·나무줄기·우산처럼 기다랗게 생긴 것, 칼·단도·창같이 길고 뾰족한 무기는 남자의 성기를 대리한다. 작은 궤·상자·장포(長砲)·난로·동굴·배·그릇들은 여체의 상징으로 쓰인다. 층계·사다리·발판이나 그런 곳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행위는 성행위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몸에 걸치는 것 가운데 여성의 모자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 꿈에서 어린아이와 놀거나 업어주는 것은 흔히 자위행위의 상징이다. 또 거세의 상징적인 표현은 대머리나 머리를 자르는 일, 이가 빠지는 일, 목을 베이는 일 등이다. 꿈속에서 음경의 상징이 둘 이상 나오는 경우에는 거세에 대한 항의로 보아야 한다. 꽃의 상징은 여성의 처녀성, 강간과 관련된 것들을 내포한다.

    꿈의 동기는 소망이며, 꿈의 내용은 소망 충족이라고 프로이트는 단정한다. 이 말이야말로 프로이트의 꿈 해석을 다른 것과 다르게 만든다. 꿈은 과거의 체험을 압축한다. 꿈은 왜곡되어 나타난다. 꿈은 상징으로 이루어진다. 꿈은 미래 아닌 과거를 알려준다. 꿈은 억눌린 소원의 성취다.

    프로이트는 꿈의 힘을 발견한 것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뿌듯해했다. 그만큼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꿈의 해석은 마음 생활 속의 무의식적인 내용을 알아내기 위한 대도(大道)이다”라고 쓴 대목에서 프로이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길이 꿈의 분석에 있음을 깨닫는다. 1900년에 초판이 나온 뒤 1929년 8판에 이르도록 개정판을 낸 이 책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저작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꿈의 해석’에 목적이 있지 않다. 꿈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투시하는 데 있다. 어제 꾼 꿈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그의 주관심사가 아니다. 꿈의 발현에 있어 무의식이 작용한다고 하는 것도 그의 독특한 주장은 아니었다. 이 책은 심리분석 이론과 실제 적용에 대한 기본적 특징들을 제시해준다. 예를 들면 꿈의 성적 특성,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리비도, 소원충족 이론, 자아와 무의식으로 분열된 심리, 노이로제, 상징적 암호화, 억압이론과 실제 증세들, 의식화 방법 같은 것들이다. 그는 “꿈에 의해 전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검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책의 출간은 정신분석이 독립적인 분과학문으로 자리 잡게 해준 분기점이 된다. ‘꿈의 해석’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신분석학 입문’과 함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모든 혁명적 이론이 그렇듯 처음에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때까지 인간 존재의 주변에 밀쳐두었던 무지, 비합리성, 섹스에 주의를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자아가 자신의 집 주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다름없었던 탓이다.

    폄훼 vs 찬사

    ‘꿈의 해석’은 출간 직후 일반인에겐 주목받지 못했다. 1년 동안 초판 600부 가운데 불과 123부만 팔렸고, 소진되기까지 8년이나 걸렸다. 그럼에도 프로이트는 “이러한 통찰력은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얻을 수 없다”며 감격했다. 그 사이 권위 있는 학술지에 10편의 서평이 실릴 만큼, 학계의 반응은 대조적으로 폭발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제시한 ‘정신분석’은 20세기를 지배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의식의 발견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견주기도 한다. 지동설이 인류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렸다면, 진화론은 인류에게서 불가침의 신성(神性)을 추락시켰다. ‘꿈의 해석’은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의 노예임을 만천하에 선포했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고,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역사의 중심이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그 인간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주었다”는 명언으로 극찬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에 영향을 끼친 인물 50명 가운데 맨 앞자리에 프로이트를 올려놓았다. 무의식의 발견과 꿈의 해석은 서구 문명사와 사상사는 물론 현대인의 생활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이 인문학, 사회과학의 여러 이론에 미친 충격은 실로 깊고 크다. 지지자든 비판자든 프로이트 이후의 인간 이해는 정신분석이 설정한 인간관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이론은 대중에게 당연한 것으로 인식됐고,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상품은 대중을 사로잡았다. 예를 들면 영화계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등장 이래 영화·소설부터 ‘심슨 가족’ 같은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프로이트 이론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렵다.

    이 책이 던진 무의식과 정신분석 이론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프로이트 심리분석 이론을 혹평하는 이들은 그것이 당초 목표로 내세웠던 과학성과 거리가 한참 멀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실증주의 학자들은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을 ‘무가치한 사이비 과학’이라고 매도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학적 상상력의 허구로 폄훼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신분석은 그 자체가 치유할 수 없는 정신질환’이라는 독설까지 나왔다.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말로 하는 프로이트식 치료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의 이론을 역사·종교·미술·도덕·정치 등 사회 전분야로 확대, 적용했기 때문에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부분도 쟁론의 대상이다.

    프로이트는 페미니스트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여성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임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저항의 본질적인 내용은 성적인 것’이라 결론짓고, ‘신경증의 여러 증상이 성적 감정이나 충동, 이에 대한 정신적 방어 사이의 갈등에 기인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의 평가는 한층 더 냉혹하다. 세계 학계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오래전에 과학의 영역에서 쫓겨나 임상에서도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꿈의 해석’은 심리학·철학·사회학·교육학·신학·문예학 같은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인식 도구로 따뜻한 대접을 받는다. 인문학자들은 프로이트 이론의 사상사적 가치에 주목해야한다고 받아친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이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가자’며 그의 명예회복을 선언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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