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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④

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애틋한 ‘겨울 여자’ 장미희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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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장미희가 출연한 영화를 다시 보는 건 힘든 일이다. 영화와 여주인공에 매혹되기에 앞서, 영화를 만드는 자들과 영화를 보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거칠고 잔혹한 남자들의 시대에 영화계에 들어와 ‘예술’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확인 안 된 수많은 소문에 시달렸던 여인. 때로는 천사 같은 순수함으로, 때로는 살쾡이 같은 야성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배우 장미희를 추억한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1970~80년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큰 인기를 끌었던 배우 장미희.

1970년대‘안방극장’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다. 새하얀 고무신을 신고 치맛자락을 당겨 잡고 극장으로 몰려가 하얀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던 고무신 부대가 거실에 놓인 TV로 눈을 돌렸다. 장욱제·태현실 주연의 TV 연속극 ‘여로’(1972)는 고무신 부대가 안방에서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게 했으며, 그녀들의 아들들은 모두 동네 공터로 몰려가 바보 영구 흉내를 내게 만들었다. 박치기 왕 김일의 프로 레슬링 경기가 방송되는 날이면 집에 TV가 있는 아이들은 그 동네의 왕이 되었다. 달도 차면 기울고 활짝 핀 꽃도 시간이 지나면 지고 마는 것. 1960년대 말 서울 극장가에 가면 출연작이 꼭 한 편 이상은 걸려 있었던 문희·남정임·윤정희 트로이카의 시대는 그들이 결혼하면서 저물었다. 한때 최고의 여배우였던 최은희도, 김지미도, 간간이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그녀들의 시대는 아니었다.

구경 좋아하는 사람들을 TV에 빼앗기고, 최고의 흥행 여배우도 사라져버린 한국 영화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례없는 수난이 찾아온다. 1973년 유신정권의 영화법 개정이다. ‘저질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모든 영화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검열을 받아야 했다. 영화사 설립도 정부 허가를 받아야 했다. 결국 권력자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흥행이 보장된 외국 영화의 수입권은 한국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에만 주어졌고, 외국 영화를 수입하려면 일정 편수 이상 만들어야 했다. 영악한 제작자들은 외국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위장 합작 영화를 만들거나, 배우와 스태프에게는 한 편만 찍는다고 말해놓고 극장에는 두 편, 세 편으로 둔갑시켜 개봉하는 ‘신공’을 부렸다. 결국 제 살 깎아 먹기가 돼 관객들은 한국 영화에서 발길을 돌렸다. 한국 영화는 곧 저질 영화의 대명사. 한국 영화를 백주 대낮에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결국 영화의 제작편수가 급격하게 줄어 1960년대 평균의 절반이 될 정도였다.

새로 뜨는 별들

그러나 아무리 무시무시한 검열이 버티고 있고, 상황이 열악해도 영화는 만들어지고 새로운 스타는 태어나는 것. 한 시대를 주름잡던 여배우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여왕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나타난다.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1969)에서 깜찍한 외모로 눈길을 끌었던 아역배우 서미경이 어느새 성숙한 여인이 돼 미스 롯데에 등극하며 주가를 올렸다. 곧이어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이 개봉되고, ‘선데이 서울’ 표지에 매혹적인 반라의 모습으로 등장해 뭇 사내들과 아직 머리가 여물지도 않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미경이 출연한 영화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당시 최고 권력자의 아들과 관계된 괴소문이 흉흉하게 나돌더니, 그녀는 사라졌다. 양정화라는 신인 여배우가 주목을 받는가 싶더니 정가의 떠들썩한 스캔들에 연루돼 사라져버렸다. 1970년대 트로이카의 여왕 중 하나로 등극할 유지인은 1974년 영화에 데뷔했지만 아직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신인 중 하나였고, 또 다른 트로이카 중 하나인 정윤희도 인형처럼 예쁘지만 연기는 못하는, 아이스크림 CF나 하는 그런 정도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 그 어떤 여배우도 문희·남정임·윤정희처럼 극장가를 자신의 얼굴로 뒤덮지는 못했다. 영화 제작 편수도 얼마 안 되고 신인 감독의 놀라운 약진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미국 UCLA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온 하길종이라는 감독이 데뷔한다. 전에 없던 유학파 감독이자 서울대 문리대 출신의 4·19 세대였던 그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1972년의 데뷔작은 표절 논란으로 얼룩진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975년 하길종 감독의 새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 개봉됐다. 원작과 시나리오는 고등학생 때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돼 화제를 낳으며 문단의 신세대로 등장한 최인호가 썼다. 음악은 강근식과 송창식. 1970년대 청년문화의 주역이 다 모였고, 배우는 모두 당시 대학에 다니던 신인이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혹독한 검열의 칼날이 휘둘러졌지만, 1970년대 청년의 고뇌와 분노를 담은 이 영화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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