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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권태균의 오지 기행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강원 영월 흥교리

  •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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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건너면 단양, 산 넘으면 봉화

눈앞 계곡을 건너면 충북 단양이고 건너편 산을 넘으면 백두대간의 절대 오지라는 경북 봉화 땅이다. 그래서 궁예가 뒷일을 모도하기 위해 신라 관도를 따라 숨어든 곳이 바로 이곳 흥교리였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폐사찰인 흥교사(興敎寺) 절터 뒤로는 등산인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태화산이 우뚝 서 있다. 흥교사는 681년에 세달사로 창건됐다. 궁예는 여기서 청·장년기를 보냈다. 이후 고려시대에 흥교사로 개칭됐다.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에는 영월 태화산 서쪽에 흥교사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한때 열두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사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든 절터만 남아 있다. 바로 1999년 폐교된 흥교 분교 자리가 절터다. 1984년 운동장에 뛰놀던 아이들은 석가여래입상과 영월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기와를 찾아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해발 500m에 위치한 마을이다보니 물이 귀하다. 논농사는 어렵고 주로 밭작물로 생업을 이어간다. 이 인적이 뜸한 곳의 단골손님은 현대판 박물장수 1t 트럭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트럭에는 생선, 휴지, 플라스틱 그릇 등 산간오지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트럭이 오는 날 장이 열리는 셈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흥교마을 들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검은빛 수숫대다. 널찍한 들판에 수수가 일렁인다. 어른 키보다 큰 수숫대는 바람에 ‘쏴아’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수숫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상상하는 사람이 지금은 몇이나 될까? 나 역시 박정만의 ‘헤매는 벌판’이라는 시를 알기 전에는 수숫대를 상상하지 못했다. 수숫대에 이는 바람소리는 박정만의 시와 많이 닮아 있다.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고구마를 수확하는 모습.

누이여, 벌판에서는 새소리 들리고

수수밭 머리에서는

아직도 바람소리 끝나지 않았다

바람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너는 너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철새마저 다 떠나가고 말면

세상에는 무엇이 남아 벌판을 흔드랴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 시인은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숨져갔다. 그 외에 내가 아는 것은 검은 수숫대로도 이렇게 비감 어린 시를 쓸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비극적인 삶을 살아갔음에도 그의 시에 나타나는 토속적인 시골 풍경은 정겹고 안온하다.

2m가 넘게 자란 수수밭 속에서 사람은 상대적으로 아담하다. 잘 익은 수수 머리를 연신 잘라 담는 유봉열(74)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가을볕이 영글었다. 영월중학교 교사인 아들 내외를 따라 이곳에 정착한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는 끝이 없다. 아마 사람이 몹시도 귀했나보다. 수수가 익어가는 가을 들판에 서면 누구나 옛날 생각이 엉킨다는 할아버지는 그래도 건강해 보였다.

수수밭 속 인생이야기

마을 사람 대부분은 이곳이 고향이다. 살기가 힘들어 외지로 떠났다가 이제 늙어 여윈 몸으로 돌아와 새로운 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가을은 고향을 찾는 데 제격이다. 이름 없는 골짜기에 정착한 사람마다 저마다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있다. 장년 세대에게는 “돌아가리로다/ 전원이 장차 거칠겠으니/ 어이 돌아가지 않으리까?”로 시작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있다. 7080세대에게는 대학가요제의 ‘귀거래사’가 먹힌다. “하늘아래 땅이 있고 그 위에 내가 있으니/ 어디인들 이내 몸 둘 곳이야 없으리/ 하루해가 저문다고 울 터이냐 그리도 내가 작더냐/ 별이 지는 저 산 너머 내 그리 쉬어가리라.” 똑같이 귀향을 그리는 노래도 세대에 따라 갈라지고 달리 이해된다.

깊어가는 가을, 바람은 늘 골짜기 낮은 곳에서부터 불어와 산을 넘어 사라진다. 가을은 늘 안타깝게도 짧기만 하다.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마을 주민이 수수 머리를 잘라 담고 있다.



신동아 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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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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