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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⑨

아디다스 vs 나이키

스포츠용품 시장의 영원한 맞수

  • 전성철 |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dawn@donga.com

아디다스 vs 나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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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 vs 나이키

아디다스 매장에 진열된 기능성 운동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아디 다슬러는 미국 높이뛰기 선수 딕 포스버리의 의견을 신발에 반영했다. 포스버리는 오늘날 모든 높이뛰기 선수가 따라 하는 ‘배면뛰기(포스버리 점프)’를 선보인 전설적인 선수다. 아디 다슬러의 신발을 신은 포스버리는 이 대회에서 2.24m를 넘어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해 밥 비몬은 멀리뛰기 종목에서 기존 세계기록을 55㎝ 경신한 8.9m를 뛰었다. 그 해의 모든 ‘점프’는 아디다스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아디다스는 자국 독일에서 열린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세 개의 나뭇잎 모양 밑에 삼선이 들어간 ‘트레포일(Trefoil)’ 로고를 선보였다. 독일 선수 하이데 로젠달은 홈그라운드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아디다스를 신고 멀리뛰기와 400m계주 금메달, 5종 경기 은메달을 땄다. 아디다스는 그녀를 통해 많은 제품을 테스트하면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이던 석션컵 아웃솔 패턴과 단거리용 신발을 개발할 수 있었다.

‘쿠바 경주마’ 알베르토 후안토레나가 800m와 400m에서 잇따라 금메달을 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신은 신발도 아디다스의 ‘아디스타 2000’이었다. 이 신발은 바닥이나 취향에 따라 교체가 가능한 스파이크 시스템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해 아디다스를 빛낸 가장 큰 별은 15세의 루마니아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그녀는 2단 평행봉에서 10점 만점을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치열한 냉전으로 반쪽짜리 올림픽이 돼버린 모스크바 올림픽(1980)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84)에서도 아디다스는 여전히 압도적인 브랜드였다. 모스크바에서는 자토팩처럼 5000m와 1만m를 동시에 석권한 에티오피아의 미루츠 이프터 선수를 비롯해 80% 이상의 선수가 아디다스를 착용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140개국 중 124개국 선수가 아디다스를 착용했고 그들이 딴 메달은 모두 259개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당대 최고의 여성 테니스 선수 슈테피 그라프도 아디다스를 신은 스타였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이전에 이미 4개의 메이저 테니스 대회를 석권한 상태였던 그녀는 결승전에서 가브리엘라 사바티니를 누르고 ‘그랜드 슬램’을 넘어 ‘골드 슬램’을 달성했다.



트럭 행상으로 출발한 나이키

아디다스가 초창기부터 최고의 스포츠 스타에게 자사 제품을 신기며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반면 나이키의 출발은 평범했다. 나이키는 1964년 육상선수 출신 필립 햄슨 필 나이트와 오리건대 육상코치 빌 보워먼이 세운 회사다. 오리건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나온 나이트는 그해 일본 신발회사 오니쓰가 타이거의 러닝화를 수입해 파는 일로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필 나이트는 처음에는 트럭에 러닝화를 싣고 경기장을 찾아다니며 판매를 했다. 회사 이름은 ‘블루리본스포츠’라고 붙였다. 일본 회사와 계약이 끝날 무렵인 1972년 두 사람은 직접 신발을 만들기로 하고 회사 이름을 나이키로 정했다. 나이키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나이키는 당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던 대학생 캐롤린 데이비슨에게 로고 디자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필 나이트는 데이비슨이 만든 디자인들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차선으로 하나를 선택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형상화한 유명한 나이키의 로고 ‘스우시(Swoosh)’ 마크는 그렇게 탄생했다. 나이키가 데이비슨에게 지불한 돈은 불과 35달러였다. 2011년 기준으로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가 139억 달러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로도 한참 부족한 금액이었다.

나이키에게 도약의 발판이 된 운동화 ‘와플 트레이너’도 스우시 로고만큼이나 우연하게 탄생했다. 필 나이트의 대학시절 코치이자 동업자인 보워먼은 아내가 사용하는 와플 굽는 틀을 바라보다가 문득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와플 틀 속에 고무를 집어넣고 고무와플을 만든 것이다. 그는 고무와플을 잘라 신발 밑창에 아교로 붙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던 팀 선수들에게 신발을 나누어주고 뛰어보도록 했다.

보워먼이 아내의 와플 기계를 엉망으로 망쳐놓으면서 만든 신발에 대한 선수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와플 무늬의 고무 밑창이 달린 신발은 탄력성이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신발 밑창 무늬가 달 표면에 새겨진 우주인의 발자국과 비슷하다고 해서 ‘달 신발’로 불린 와플트레이너는 나이키에 큰 명성과 상업적 성공을 안겨줬다.

스타 마케팅은 나이키의 성장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나이키가 가장 먼저 스폰서십을 맺은 스타는 루마니아 출신의 테니스 선수 일리에 너스타세다. 1970년대 최정상급 테니스 선수였던 그는 57개의 단식 타이틀과 51개의 복식 타이틀을 품에 안았다.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7번이나 우승한 너스타세를 후원하면서 나이키는 글로벌 스포츠용품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발을 뗐다.

아디다스 vs 나이키

통기성과 색감이 좋은 나이키 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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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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