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 5화. 他者로부터의 신호

  • 입력2017-11-12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1.
    시작은 무겁고 깊은 잠이었을 것이다. 전날 저녁 9시 뉴스가 끝나고부터 쓰기 시작한 새 장편 초고가 이튿날 새벽 4시를 넘기면서 한 단락이 마무리되자마자 그는 거의 혼절하듯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그 잠의 끝은 가위눌림과도 같은 현란하면서도 집요한 꿈의 뒤엉킴이었다. 그는 난데없이 스핑크스를 만난 재수 없는 나그네같이 되어 끊임없는 고문같이 이어지는 수수께끼의 정답을 허겁지겁 골라대야 했다. 

    처음에는 낱말 고르기 같은 것으로 시작된 것 같다. 광간(狂簡) 청광(淸狂) 견개(狷介) 생광(生光) 견경(見輕)같이 주로 기역자로 시작되는, 옛날에는 중국과 우리가 같은 말처럼 썼으나 이제는 점점 낯선 말이 되어가고 있는 단어들이 몰려와 제자리를 찾으려고 아우성이다가, 다음은 응대 수작(酬酌)에 따르는 미사여구 잇기가 되었다. 남녀가 정담을 나누거나 술꾼들이 풍류를 드러내고, 문인들이 재담이나 경구를 주고받을 때, 또는 세상에서 밀려난 자들이 눈을 허옇게 치뜨고 세상을 흘겨보거나 저희끼리 허세를 부리면서 주고받는 대구(對句)와 대련 같은 것들이 한동안 허황하게 부딪치며 북새를 떨었다. 

    그가 듣기로는, 아무리 긴 꿈이라도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마지막 짧은 순간의 뇌 활동 해리(解離) 상태에서 일어나는 표상(表象)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아침의 느낌으로는 간밤 내내 그런 꿈에, 추궁과도 같은 말과 글의 홍수에 시달린 것 같았다. 동양고전적인 지식이나 정보 혹은 교훈이 저장된 위치나 대강 알아둔다는 기분으로 설읽은 시경과 초사(楚辭)에, 여기저기서 조각으로 주워 읽은 진문(秦文) 한부(漢賦), 육조 병려(騈儷)에 당송 고문(古文)이며 당시(唐詩) 송사(宋詞)가 무의식의 바닥에서 떠올라 기억으로 인출되기를 기다리며 꿈속에서 와글거렸다.
     
    그런 것들로 미루어 그 아침의 꿈은 간밤 새로 시작한 그의 두 번째 장편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이미 한 권의 책을 냈고, 다시 중단편집 한 권이 연말 출간을 앞두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자전적인, 혹은 지나온 지 오래지 않은 삶을 추체험하는 글쓰기로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주제를, 환상적인 리얼리티로 가공된 세계와 목적적으로 창조된 인물이 어우러져 펼쳐내는 일종의 건달소설로 세상을 만나볼 작정을 했다. 

    첫 소설 ‘인간의 대지’는 남보다 등단이 늦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조급해져 먼저 중편으로 발표되었고,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600매 남짓의 경(輕)장편 형태로 자랐지만, 처음부터 장편으로 구상된 소설이었다. 그 바람에 서쪽으로는 로마로부터 동쪽으로 인더스 유역까지 액자 속 주인공의 10년에 걸친 순례기 혹은 종교적 편력 시대는 짧게 인용된 기행문 형태로 요약되거나 수백 개의 각주(脚註) 처리로 대치되어 있다. 하지만 그 진진한 내용은 몇 권의 창작노트와 자료집으로, 그리고 1970년대 후반 들어 점차 활발해지는 인구어(印歐語) 원서 보급으로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자라고 있는 정격의 장편소설이었다. 

    그런데 간밤 서장을 마무리한 가제(假題) ‘백제실록’이란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은 그 무대와 문화적 배경에서 첫 번째와 아주 달랐다. 동양의 고전적 언문(言文)과 사유로, 편집증적 과대망상에 좀 별난 서광(書狂) 기질까지 있는 구한말의 한 일탈적 지식인을 정색하고 서술함으로써 오히려 희화화한, 의사(擬似)실록체 장회(章回)소설이었다. 망국과 피식민 시대, 그리고 해방과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아시아적 봉건국가의 황혼과 근대를 관통해 현대로 행진해 들어가는 그를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돌아보고, 거친 대로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중요한 병증이 근대 유럽 원산(原産)의 이념 과잉임을 진단하는 서술 구조로 되어 있다. 



    20대 후반 세상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다시 문학으로 패퇴한 직후부터 시작된 그 구상은 늦은 군복무 시절에 이미 대강의 얼개를 갖추었지만, 구체적인 착수는 근래까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양의 고전적인 언문과 사유로 서술해간다는 것은 의고적 문틀과 어휘로, 남만의 왜가리 소리를 내는 무리(南蠻 鴃舌之·許子의 무리, 여기서는 되지도 않는 말과 논리로 시끄럽게 떠드는 외국인)처럼 밀려드는 서양오랑캐(西夷)의 언설과 논리를 지운다는 것이니, 예상되는 그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그는 언해류(諺解類)를 참고로 한 우리말 의고문체(擬古文體)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어(死語)가 되어가고 있는 한자 어원의 고전적 문어들, 그리고 흔히 인용되는 전고(典故)와 사적(史蹟) 요약에다 아직도 우리말의 일부처럼 사용되는 고사성어, 그리고 의고문에서 인용하기 좋은 명문 가절(佳節) 따위를 나름으로 분류해 창작자료 노트란 이름으로 모아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 새벽꿈의 마지막을 그렇게도 요란하게 닫은 것은 어젯밤 집필이 시작되면서 의식 속에서 펼쳐지게 된 그 노트가 그 새벽 꿈속에서 일제히 들고일어나 무의식에 잠겨 있는 자기 존재를 주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에서 깬 뒤에도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한참이나 더 그 요란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말과 글의 충돌을, 힘들여 모았으나 그토록 순서 없이 한꺼번에 인출할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한 언술(言述)과 기록의 난동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의도나 인과관계의 고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서열도 우선순위도 없는 돌출과 우발의 무질서한 충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깨어날 때쯤 인상적인 기억처럼 떠올린 단어들에 더해 어절이나 단문이 몇 개 더 떠올랐는데, 그중 하나가 ‘광휼(狂憰)과 화사(華士)의 노래’였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광휼과 화사라면 주공단(周公旦)이 제왕(齊王)으로 봉한 태공망에게 죽은 고전적인 아나키스트 형제의 이름이다. 마르크시스트를 처리할 때 쓰기 위해 ‘맹자’ 속 고전적 공산주의자 허자를 그 노트에 올려두었던 것처럼, 서구 근대의 아나키스트를 처리하기 위해 ‘한비자’ 속에서 찾아두었던 주나라 초기의 고전적 자유인 또는 자주인(自主人) 형제….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내처 잠자기를 포기하고 눈을 떴다. 새벽 4시가 넘어 든 잠자리라 점심 때까지 푹 자둘 생각이었으나, 꿈을 기억해내는 동안에 활성화된 뇌가 더는 평온한 수면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다시 거실의 벽시계가 느린 소리로 한동안 딩딩거렸다. 차분하게 헤어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열 번은 넘은 듯했다. 그제야 간밤 잠들기 전에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잔 것을 상기한 그는 일어나는 대로 창문 커튼부터 젖혔다. 어깨에 걸린 창틀 너머로 내다보니 벌써 정오에 가까운 듯한 늦가을 햇살에 눈부신 이웃집 정원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미련 없이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책상머리로 갔다. 그리고 새 소설을 시작하면서 책상머리 책꽂이로 뽑아 올려둔 ‘백제실록’ 창작노트 둘째 권에서 그 두 사람의 출처가 ‘한비자’ 외저설(外儲說) 편이란 것을 알아내고, 다시 ‘한비자’ 국역판을 들췄다. 그러나 ‘광휼과 화사의 노래’ 같은 것은 없고 태공망이 제왕으로 봉해져 산동으로 내려갔을 무렵 동해 바닷가에 살며 현자로 칭송받던 그 두 형제의 자부심에 찬 논의 한 구절만 나왔다. 

    ‘우리는 천자의 신하도 아니고/ 제후의 벗도 아니다./스스로 밭 갈아 먹고 살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며/ 아무것도 다른 이에게 빌고자 하지 않는다./위로부터 받은 명예도 없고/임금으로부터 받는 봉록도 없다./벼슬할 뜻 없이 스스로 일해 살아간다.’ 

    그리고 나머지는 고전적 국가주의자 혹은 절대왕권론자인 태공망이 왜 그들 형제를 잡아 죽였는지 설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주공단이 제나라로 사람을 보내 현자를 죽인 까닭을 묻자 태공망은 답한다. 

    ‘그들은 천자의 신하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조정의 신하로 쓸 수도 없고, 제후의 벗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제가 부릴 수도 없습니다. 또 스스로 밭 갈아 먹고, 스스로 우물을 파 마시며 다른 이에게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에, 상을 주어 권하거나 벌을 내려 못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또 위로부터 내려지는 명예를 원하지 않으니, 비록 슬기롭다 해도 쓰이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임금이 내리는 녹봉을 받지 않으려 하니 또한 어질다 해도 공 세우기를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벼슬하지 않겠다는 것은 다스려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일을 맡지 않겠다는 것은 충성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외저설의 장구를 더듬어가고 있을 때 그가 깨어난 기척을 느낀 아내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래도 일찍 일어났네요. 날이 희붐할 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았는데. 아침상 차려도 되겠어요?”

    2.
    방금 지은 듯 따뜻한 밥상 때문에 밤샘으로 깔깔한 입안이지만 반 넘어 그릇을 비우고 일어나는데, 화사하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왠지 좋게 보이는 얼굴로 건넌방에서 나왔다. 뒤로는 유치원에 다니는 큰아이가 할머니 치마꼬리를 놓칠세라 따라붙고 있었다. 

    “곧 점심때인데, 어딜 가시려고요?” 

    “오늘 옻골(漆谷) 힝아(형님) 칠순 잔칫날이따. 토요일이다마는 니는 거다 갈 시간 없제?” 

    “아 예, 오늘은 좀…. 오후에 찾아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는 얼른 그렇게 대답하고 어머니를 문간까지 바래다주었다.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으니 언제나처럼 탁자 위에 중앙지 둘과 자신이 다니는 지방 신문사 그날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전날 편집한 스포츠 면과 금요 특집판을 펼쳐 대강 훑어본 뒤 중앙지로 넘어갔다. 언젠가부터 머리기사가 엇비슷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그날은 제목까지 같았다. 

    <崔 代行 ‘평화적 정권이양이 내 사명’> 

    10·26 사건이 있고 벌써 한 달, 무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정국 이면과 달리 태평스러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그런 원론적인 다짐이 그랬고, 기사가 크지는 않았지만 왠지 눈길 가는 신군부 실세와 기자들의 면담 같은 것도 그랬다. 그리고 무슨 수군거림 속에 진행되는 것 같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과정이 풍문과 억측 속에 온갖 야살을 떨고 있을 뿐. 

    신문은 입안에서만 웅얼거리는 듯 아직도 잘 알아들 수 없는 말을 호외로 전하는 느낌이다. ‘괴물’은 아직도 엘바 섬을 탈출하지 않았는가. 그 ‘살인마’는 언제 주앙에 상륙할 것인가. 그 ‘찬탈자’는 언제 60시간이면 서울로 들어오는 거리에 이를까. 그리하여 다시 ‘우리 대통령 각하’는 언제 청와대로 돌아오실 것인가. 

    하지만 확신에 가까운 단정도 있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은 가동되기 시작했고, 순서가 바뀌고 시차가 있었지만 결국 왕과 왕비는 단두대에서 나란히 처형되었다. 울고불고하며 장례를 뒤따르는 국민들도 있지만, 200년 전 파리에서도 그랬다.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 패륜의 자식들처럼 많은 파리 시민이 울고불고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민중의 날이 온다. 시민의 날이 온다. 권력은 모두 그들에게로. 모두가 한배에서 난 개새끼 같은 그들의 지도자에게로. 

    벌써 몇 달째 이란 사태를 중심으로 기사를 쏟아 내고 있는 국제 면도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엔테베式 기습 검토’는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 방안을 놓고 하는 논의에서 뽑은 제목 같고, ‘호메이니는 소련諜者’는 회교혁명을 바라보는 미국 정보기관의 인식을 단면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제목인데, 전체적으로 신문마다 들려주는 게 그 소리가 그 소리인 듯했다. 

    그가 공연히 못마땅해하며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아내가 막 잠에서 깨어나 칭얼거리는 둘째를 안고 나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늦은 제대 뒤에 얻은 아이라 둘째는 이제 겨우 두 돌을 넘긴 터였다. 잠에서 막 깨어나 그리 좋은 심사는 아니었으나 어미가 제때 안아주었고, 맞은편에는 아비까지 있어선지 아이는 곧 칭얼거림을 멈추었다. 아내가 그런 둘째를 따로 떼어 곁에 앉히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청계(靑溪) 이모님 왔다 가셨어요. 둘째 교육보험을 들어달라고 왔는데….” 

    “작년에 큰애 보험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어? 둘째 이제 겨우 두 돌인데, 벌써 무슨 교육보험이야?” 

    “그렇지만 안 들어줄 수도 없었어요. 할 수 없어 적금(積金)식으로 했는데, 좀 비싸네요.” 

    “적금식이 뭔데? 그렇다고 왜 비싼 거야?” 

    “2년만 넣으면 중도해지해도 우리가 낸 원금을 다 돌려준대요.” 

    그 무렵은 때 아닌 보험의 계절이었다. 있던 것이든 새로 생긴 것이든 보험회사마다 서투른 설계사를 양산해 친인척과 연고 판매로 직장마다 집집마다 골머리를 앓게 했다. 그도 신문사란 직장과 그사이 책권 팔아 얻은 이름 때문에 아내가 새로 넣은 보험을 합치면 그해만 보험이 다섯 계좌 늘었다. 

    “그럼 그사이 불입한 돈의 이자만으로 이모님 수당 계약 수수료, 저희 해당직원 임금까지 다 나온다는 얘기군. 차라리 그냥 교육보험 싼 걸로 하나 넣지 그랬소.” 

    귀찮기는 하지만 아주 못 견딜 액수도 아니라 그가 그렇게 마무리를 짓는데, 아내가 다시 풀죽은 소리를 보탰다. 

    “어제는 포항 원길 아주버님이 왔었어요.” 

    원길이라면 집안 아재비뻘이지만 동갑내기에 어릴 적 한때 이웃에서 함께 자라 족친이라기보다는 고향 친구처럼 여기고 있었다. 부모를 따라 포항으로 나간 뒤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연고도 많아 아내는 그를 ‘포항 아주버님’이라 불렀는데, 예전 대학을 그만두고 잠시 고향에서 어정거릴 때는 그와 좋은 술동무로 어울리기도 했다. 제대 뒤 대구로 나올 때 보니 아직도 반건달로 고향을 떠돌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구로 찾아 왔다는 게 좀 난데없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대? 우리 집에는 어떻게 온 거고?” 

    그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해서 그렇게 들떠 묻자 아내가 조금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어머님과 얘기하시는 걸 들어보니 요즘 아주 고단하게 지내시는 것 같네요. 작년에 다시 포항으로 나갔는데 이것저것 해봐도 잘 안 돼 여름에 부산으로 옮겼다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거기서도 일자리를 못 얻어 이리저리 겉돌다가 요즘은 월부 책을 판다네요.” 

    “부산서 월부 책 판다며 대구 우리 집까지는 어떻게?” 

    “월부 책 좀 사달라고 오신 것 같아요. 아주버님께 책을 대는 출판사가 아주 커서 전국구로 영업이 가능하다나요. 내일 다시 온다고 했는데, 여기 광고 팜프렛 한 자락 두고 갔어요.” 

    아내가 그러면서 재떨이로 눌러두었던 할부서적 판매 선전 전단과 전집류 도서목록 같은 것을 한 묶음 펼쳐놓았다. 그가 보니 알만한 출판사고, 도서 목록에는 장서로 받아두어도 될 만한 전집류도 있었다. 그가 특별히 성가시다는 기분 없이 도서목록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는데, 아내가 다시 둘째를 안으면서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이 집 일, 이거 너무 일찍 벌였는가 봐요. 우리한테는 두 칸 전세방이나 주방 넣고 방 두 개 뽑은 차고 방 전세가 제격인데. 실속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일을 크게 벌여놓았으니….” 

    그는 아내가 뭘 후회하는지 금방 알아들었다.

    지금 그가 있는 집은 그전에 살고 있던 범어동 골짜기에서 로타리 쪽으로 많이 나온 곳에 새로 조성된 주택단지 안의 한 동(棟)이었다. 여남은 집 되게 단지를 만들고 정원까지 제법 모양 나게 꾸며 고급 주택단지 흉내를 냈지만, 그 지역이 아직은 도심에서 멀고, 주변 개발도 잘 되어 있지 않아 일반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자 건설회사는 한없이 늦어지는 분양을 기다리지 못하고, 분양 못한 집을 1년 단위로 전세를 놓게 되었는데, 그리 되다보니 일반 전세보다 전세금이 터무니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분양에 대비해 전세 기한을 1년 단기로 한 게 주거의 안정성을 해쳐 전셋집을 찾는 이들이 선뜻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시원하게 뽑은 거실과 주방에다, 일곱 평이 넘는다는 안방 말고도 제대로 된 방이 둘이나 더 있는 주택 규모나, 아직 자리 잡지는 못해도 예순 평은 넘어 보이는 정원이 잠시 살 전셋집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부담이 된 듯했다. 

    수습 끝나자마자 경제부에 떨어져 그때는 주택건설과 부동산 쪽을 출입하는 동기 하나가 전셋집을 구하는 그에게 처음 그 집을 소개했을 때, 갑자기 배로 치솟을 전세금에 겁부터 먹은 그는 한번 구경이나 한다는 기분으로 따라가 보았다. 몇 년 불편 없이 살던 부엌 딸린 두 칸 방 전셋집에서, 거실 주방 화장실이 따로 갖춰진 단독주택이나 다를 바 없는 2층 전셋집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라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집 구경을 하면서 안방 말고도 거실 건너 있는, 서재 또는 집필실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널찍한 방 한 칸이 먼저 마음을 끌더니, 모든 게 시원스럽게 빠진 집 구석구석과 아직 지주목을 대고는 있어도 제법 저택의 정원같이 설계된 조경 배치에 정원수라고 할 만한 품종과 수령의 나무들이 어우러진 게, 진작부터 마음 들어 하며 살아온 집 같은 애착까지 느끼게 했다. 

    “그래봤자, 한 해 살고 어찌 될지 모르는 전셋집인데 뭘 그리 서둘러요?” 

    나중에 함께 집을 보러 온 아내가 턱없이 반해 계약에 매달리듯 서두르는 그에게 핀잔처럼 그렇게 말했다. 머쓱함을 감추느라 그는 갑자기 무슨 대단한 영감이라도 받은 것처럼 멀쩡한 얼굴이 되어 되받아쳤다. 

    “살다보면 우리 집이 되는 수도 있지, 사람마다 달팽이처럼 날 때부터 제집을 달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날부터 터무니없고도 엉뚱한 내 집 마련에 들어갔다. 먼저 배로 늘어난 전세금은 은행 출입하는 선배기자에게 부탁해 대부를 얻고, 때마침 들어온 첫 번째 인세는 집을 꾸미고 그 집에 맞는 가구를 들이는데 썼다. 그러다 여름 늦게 은행 빚의 배는 되는 두 번째 인세가 들어와 우선 은행 빚부터 갚으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은 건설출입 동기가 다시 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어차피 잘 팔리지도 않는 눔의 집, 차라리 명신주택 그놈아들한테 그따우 각박한 단기 전세 말고 아파트처럼 분납으로 그 집 분양해줄 수 없는가 함 물어보까요? 봄에 낸 전세금을 계약금하고 선급금으로 돌리고, 차라리 은행 빚 갚으려는 이번 인세 그거 몽땅 주택 분양 중도금으로 돌리면 어떻겠십니꺼? 그러면 잔금이 한 1500 남게 될 낀데, 그걸 내년 말까지만 완납하면 일반 아파트 분양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대금 완납이 되니까는 그렇게 함 해보시지요. 내가 잘 아는 그 회사 전무한테 말해보믄 우째 될 것도 같십니다마는.” 

    따져 보면 그 제의는 전에 살던 방 두 칸짜리 2층 전세금에다 은행 빚 얹은 1800만 원을 계약금 및 선급금으로 시작해 2년 만에 4500만 원짜리 신축 주택을 분양받겠다는 어림없는 계획인데, 이상하게도 그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그 무렵 한꺼번에 들어온 책 10만 부 인세가 그의 간을 키운 듯했다. 

    “그럼, 한번 그래볼까요? 좀 떨리기는 합니다만.” 

    그가 엄살 섞어 그렇게 말끝을 흐리자 뭐가 신이 났는지 건설출입 동기가 더 호기를 내어 일을 굳혔다. 

    “까짓 거. 마 그라입시다. 모 아이믄 때(도)지 뭐. 내 보이 이형 같으면 우째 잘 후아(휘어)낼 거 같구마는.” 

    다음 날 명신주택 쪽에서도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주어 그가 낸 전세금은 분양대금 선급금으로 바뀌고, 그 무렵 들어온 인세는 은행 빚을 갚는 대신 모두 명신주택 쪽에 중도금으로 지불되었지만, 아직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아내는 그렇게 큰 주택을 전세 내어 겉만 번지르르 해 보이게 된 것만으로도 걱정이 태산 같은 표정이었다.

    3.
    어중간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물었다. 

    “어제 밤샘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대로 외출해도 괜찮겠어요? 어딜 가려고요?” 

    “말하지 않았어? 이번 주말에는 무하유(無何有) 선생을 만나러 간다고?” 

    그가 무심하게 대꾸하자 무언가 석연찮은 게 있을 때 그러듯 아내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무, 뭐라고요? 무하유? 그분이 누구시더라…. 당신이 잘 안 쓰는 선생이란 호칭을 가져다 붙이니 어째 낯설게 들리네요.” 

    “신문사 수습 시절부터 몇 번 사적으로 드나든 허항(許恒) 교수 말이야. 전에 경대(慶大)에 오래 계셨다는. 70년대 초에 정년하고 몇 년 쉬시다가 가까운 지방대에 대우교수로 다시 나가시게 된 것 같아. 작별인사라도 올린다는 게 차일피일 하다 보니 이리 늦었어. 벌써 대학 부근으로 이사나 가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어차피 내 쪽에서도 머지않아 작별인사는 드려야 할지 모르는 분인데, 그간 이래저래 신세진 일도 감사드리고 가져온 책 몇 권도 돌려주고.” 

    “아, 당신의, 그 늙은 동지….” 

    그제야 아내가 누군지 알겠다는 듯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말투로 그렇게 받았다. 그가 무하유 선생을 처음 만나고 돌아온 날을 기억해낸 것 같았다. 

    “이달 들어 주말마다 별렀는데 이제야 찾아보게 됐네.” 

    그가 그런 말로 어머니께 고해야 할 유필유방(遊必有方)을 아내에게 대신하고 대문을 나섰다. 주택단지를 나서 큰길로 접어들면서 새삼스레 주변을 돌아보니 저만치 건너보이는 인근 야산에는 이미 초겨울이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어차피 도심으로 편입될 곳이라 마음먹고 심은 듯한 야산비탈의 잎 진 은행나무나 참나무붙이가 그랬지만, 그 안쪽 샛노란 낙엽송 숲이 더욱 그런 정취를 느끼게 했다. 그는 처음 범어로터리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집을 나서기 전에 서가에서 찾아낸 책 몇 권이 든 서류 봉투가 갑자기 짐스러워져 버스 정류장에 이르기도 전에 택시를 잡았다. 

    “효목동으로 갑시다. 군인아파트 덜 가 옛날 동네 입구 쪽으로.” 

    택시기사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갑자기 내려야 할 곳이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근간 몇 달 머릿속에서 이따금 떠올려보아서 말로만 또렷하지, 실제 길 찾기는 그리 자신이 없었다. 드나든 3년 동안에 딱 세 번 찾아가 보았는데, 그것도 한번은 선배 기자의 안내를 따르기만 했고, 마지막 방문은 또 1년 가까이 지난 터라, 그 동네 어귀에 내린다 해도 선생의 집을 찾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가 무하유 선생을 처음 찾아본 것은 3년 전 늦깎이 기자 수습 막바지 무렵이었다. 그날은 문화부 수습으로 대학 및 학술 담당 선배를 따라나서게 되었는데, 그 선배는 뒷날까지도 오래 그에게 인상을 남긴 사람이었다. 일본 무슨 제국대학을 나왔고, 일제 때 골동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파로 철학을 시작해, 1970년대까지는 아직 박래(舶來) 신상품에 속하는 실존주의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설까지 훤히 꿰고 있다는 국보급 철학도사의 수제자를 자처하는 지방대학 철학과 출신인데, 신문사에서는 벌써부터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는 홍선루(紅仙樓) 논단의 소장(小壯) 고수로 자리 잡아가는 여섯 기 선배 기자였다. 

    그 선배의 장기는 담론에 슬그머니 대학 전공을 끌어들여 때가 오면 무서운 암기(暗器)처럼 불시에 흩뿌리는 것인데, 그도 뒷날 기자 초년병 시절 홍선루 논단에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하이데거가 어떤 소논문에서 분석한 휠덜린의 시 한 구절을 잘못 인용했다가 며칠 두고두고 홀로 낯붉힐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오후에는 우리 도시에만 있는 진품 골동 한번 보러가지. 보니 이형도 그쪽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 같지는 않던데.”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일전에 보니 E.H. 카가 쓴 바쿠닌 전기 들고 다니는 것 같았는데.” 

    “아, 그거 경제부 수습 따라 나갔다가 신문사 돌아오는 길에 헌책방 골목에서 그런 영문판 책 한 권이 눈에 띄기에…. 크게 쓰인 바쿠닌이라는 이름만 보고 그저 잡아둔 겁니다. 아직 제대로 한번 훑어보지도 못했어요.” 

    “바로 그거야. 바쿠닌이라는 이름만 보고 책을 사둘 정도라면 아나키즘에 관심 있을 거라는 추측이 생판 틀리지도 않겠지. 오전에 수습이라고 경북대 한번 둘러보았으면 됐고, 오후에는 따로 가볼 만한 곳도 없으니, 이제 이 나라에서는 희귀종이 된 늙은 아나키스트나 보러 가지 않겠어?” 

    “아나키스트라고요? 아직도 아나키스트를 자칭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수채화 물감으로 인공기(人共旗) 그려 하숙방 벽에 붙여놓고 김일성 만세 부르는 아이들 말고.” 

    “그럴 것 같았지. 다른 사람들은 이형이 데모하다 퇴학당한 걸로 의심하기도 하는 것 같더라만, 나는 진작부터 그게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지. 한 배에서 난 개새끼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괴상한 소리로 짖어대는 격세유전형 지진아도 아니고.”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아나키즘에 관심 있을 것이란 추측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절 데려가시려는 곳은 어딥니까” 

    “무하유(無何有) 선생을 한번 찾아가볼까 해. 효목동이니까 멀지 않은 곳이야.” 

    “무하유라면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그 무하유입니까?” 

    “아마 그럴 거야.” 

    사수인 선배가 그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대학 교문 쪽으로 좀 걸어 나와선지 교문 안으로 들어오는 택시들이 더러 보였다. 그중에 빈 채 나가는 택시 한 대를 불러 세운 사수가 먼저 조수석에 타며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효목동 쪽으로 가다가 세워달라는 곳에 좀 세워주쇼.” 

    그리고 등 뒤 쪽 자리에 탄 그가 자세를 잡고 앉기 바쁘게 무슨 긴한 통보처럼 말했다. 

    “점심때가 끼어 아무래도 먼저 민생고를 해결하고 무하유 선생 댁을 찾아야겠어. 장의사 옆 뼈다귀 해장국 집에 가서 속이나 좀 풀고 가자고.” 

    장의사와 뼈다귀 해장국이란 단어가 묘하게 연결돼 식욕을 반감시킨 원인도 있지만, 그보다는 무하유란 선생의 호에 궁금한 게 많아 그가 동문서답처럼 사수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하유란 호, 그거 자호(自號)한 겁니까. 어디서 받은 거랍디까?” 

    “그건 물어보지 않았는데…, 뭐가 궁금하지?” 

    “무하유지향의 무하유라면, 인위(人爲) 또는 유위(有爲)와 자연 또는 무위로 대립된 세계에서 인위 또는 유위가 전혀 없는 어떤 이상향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장자(莊子)류의 이해일 테고, 아나키스트의 또 다른 이름인 자주인 또는 자유인의 자주나 자유와 대립되는 인위 또는 유위가 없는 세계일 수도 있지. 조직이나 지배 통제 같은 인위와 유위 말이야.” 

    다행히도 그들이 택시로 달린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신천동과 만촌동 어름의 어느 큰길가 뼈다귀 해장국 집에서 별로 내키지 않은 점심을 먹었는데, 바로 옆 상점이 장의용품을 점포 여기저기 늘어놓고 쌓아둔 장의사 사무실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철학과를 나온 사수는 뜯고 있는 게 돼지뼈다귀라서 그런지 뼈다귀해장국을 달게도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그날의 일로 더 기억나는 것은 학부 시절에 무하유 선생의 강의를 들은 적도 있는 선배가 공손한 인사 뒤에 그를 소개하자마자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반기던 무하유 선생이었다. 아무 연고 없는 젊은 동지가 스스로 찾아와 자주인(自主人)으로서 함께 어깨 겯고 갈 뜻을 밝힌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구먼. 반갑네. 잘 찾아주었어. 젊은 동지.

    4.
    길이 조금 헷갈려 택시에서 내린 후에 골목 한두 개를 돌기는 했지만 무하유 선생은 여전히 한 해 전 그 자리, 초가삼간 이엉을 걷고 기와만 얹은 것 같은 낡은 일자집 한옥에, 역시 한 해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그가 올린 절을 맞절로 받는 것도 변함없었다. 그는 꼭 한 해 만에 다시 찾아보는 게 적잖이 마음에 걸렸으나, 선생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중간한 변명을 다 듣지도 않고 그의 편치 않아 하는 속을 풀어주었다. 

    “별 소릴. 한 해 한 번 찾아주는 것도 요새 세상으로 봐서는 대단한 정성이지. 더군다나 동지는 아직 기자 초년병 아닌가? 나도 예전 부산에서 작은 신문사 주필로 일해봤는데, 기자 노릇 그거 제대로 하자면 현장 취재만으로도 정신없지. 더군다나 대구서는 동아 조선 중앙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읽히는 게 귀(貴)신문사 아닌가?” 

    선생은 그가 편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한결 편해져 그는 바로 찾아온 까닭부터 털어놓았다. 

    “최 선배 얘기 들으니 선생님께서 다시 지방 대학에 강의 나가시게 되었다기에 한번 찾아뵌다는 게 이리 늦었습니다.” 

    “아 그거, 뭐라더라. 대우교수라고, 일주일에 한 번 나가면 돼요. 강의안 따로 제출 안 해도 되는 특강으로다.” 

    “그래도 캠퍼스가 직할시 밖이라. 선생님께서 이 집에 그대로 계실지도 잘 모르고….” 

    “그것도 괜한 걱정이네. 택시든 뭐든 경산 넘어가는 길까지만 나가면 시내버스 시외버스 할 것 없이 그 대학 가는 차는 총총 있으니까. 바쁜 동지가 그렇게 날짜를 꼽아가며 힘들여 찾아올 일도 아닌데.”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선생의 말이 재촉처럼 되어 그는 우선 긴한 용건부터 처리한다는 기분으로 들고 간 서류 봉투에서 먼저 책 세 권을 꺼냈다. 정색을 하고 만들었지만 어딘가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은 두꺼운 사륙배판 하드커버 장정의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전편(前篇)과 얇지만 청색 헝겊 하드커버로 정성 들여 만든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이라는 번역서였다. 앞엣것은 ‘한국무정부주의 운동사 편찬 위원회’ 편찬에 선생의 서문이 붙은 책이었고, 뒤엣것은 크로포트킨이 쓴 책을 어떤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의 번역자가 번역한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 영어판이었다. 

    “그동안 제가 한번 읽어보겠다고 가져갔다가 아직 돌려드리지 못한 선생님 책들입니다. 대부분 선생님도 여분이 없는 것들이라기에 진작 돌려드린다고 돌려들었는데 그래도 이 세 권이 남아 있더군요.” 

    그리고 다시 두 권을 더 꺼내 그 책들 위에 얹으며 덧붙였다. 

    “이건 수습기자 시절에 남산동 대도극장 뒷골목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얻은 것인데, 카(E.H.카)가 쓴 ‘바쿠닌 전기’입니다. 선생님 장서에 없는 것이면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이 책은 언젠가 선생님께서 원래 가지고 있었는데, 없어져버려 아쉬워하시던 우드코크의 ‘아나키즘 운동사’ 영어판입니다. 지난번 서울 길에 종로서적 외서부(外書部)에 주문한 ‘비교종교학 사전’과 엘리아데의 ‘종교사상사’를 찾으러 갔다가 서가 한구석에 이 책이 눈에 띄기에 선생님을 위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무하유 선생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그를 뻔히 쳐다보다가 그중에서 먼저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을 집으면서 말했다. 

    “이 크로포트킨 번역판은 국한문 혼용 인쇄에 어휘가 구투고 한자를 너무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나? 요새 젊은 사람들 읽기에는…. 그래서 내가 새로 번역해보려고 하는데 젊은 동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선생님이 지적하시니까 좀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책은 제겐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크로포트킨은 혁명가나 사상가, 사회운동가, 학자 같은 그 어떤 호칭보다도 문필가나 문장가로 더 우러러보입니다. 제가 다른 책들보다 그 책을 오래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과 충격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구절은 그걸 쓴 크로포트킨에게서 고결한 인격을 넘어 거룩한 성자의 기품 같은 것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그의 인간에 대한 다함없는 믿음과 샘솟는 연민과 정애며 상호부조의 본성에 대한 종교적 신앙과도 같은 확신은 내가 읽은 그 어떤 언지(言志)나 문사(文詞)에서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잠깐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의 어떤 감동적인 구절들에서 받은 강렬한 충격이 되살아나 선생의 문의를 잊고 있던 그가 거기서 퍼뜩 정신을 차려 에둘러도 너무 에두른 대답을 했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하지만 번역은 별로 신경 안 쓰고 읽어 그때는 선생님이 지적하신 걸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요새 사람들이 읽기에는 아무래도 한자와 한문 어투가 너무 많이 쓰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자 선생도 그의 과장 섞인 서평은 듣지도 않은 사람처럼 자신의 주제 쪽으로만 대화를 몰아갔다. 

    “번역한 그 이, 젊은 동지는 잘 모르겠지? 선대 아나키스트로 일제의 옥고까지 치른 분인데, 내게는 중학교 시절부터 흠모해온 은사와도 같은 분이네. 내가 처음 읽을 때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읽혔는데, 세월이 가니 문장도 사람 따라 늙고 낡아지는 것 같네. 그래서 더 늙기 전에, 번역을 새로 한다기보다는 선생의 번역을 새롭게 해석하고 다듬어 볼까 하네. 그 분의 번역을 완결해드린다고나 할까. 따라서 머지않아 새 번역판이 나올 듯하니 크로포트킨의 책은 이 동지가 그냥 간직해도 될 것이네.” 

    그래놓고 나니 선생도 자신이 처음 주고받던 말에서 벗어나 있는 걸 알아차린 듯 주제를 바로잡았다. 나머지 다른 두 권을 가리키며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이 두 편, 카와 우드코크도 나 같은 늙은이가 아직까지 싸안고 있을 책은 아니네. 세상도 언제까지고 이런 책을 금서로 묶어둘 수도 없고, 그래서 혼자서 안고 가는 비장(秘藏)의 책일 수만도 없을 것이네. 그렇다고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처럼 이제 와서 내가 새로 번역해보겠다고 나설 엄두도 나지 않고.…. 참고가 되어도 젊은 동지에게 더 참고가 될 테니, 그 둘도 도로 가져가게.” 

    그런데 그 같은 무하유 선생의 사양이 애써 무덤덤하게 치르려고 하는 작별의 의식을 콧등 시큰한 감동으로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 책들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으로 하지요. 실은 저도 이제 더는 그 책들을 힘들여 끌어안고 다닐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이제는 아주 마음을 비워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자 선생이 갑자기 아연해하며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차분하게 물었다. 

    “젊은 동지, 무슨 일인가? 갑자기 내 집 마당에 지고 온 책 보따리 다 풀어놓고 맨몸으로 훨훨 먼 길 떠날 사람같이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3년 전 최군과 함께 찾아온 동지를 자주인의 길을 함께 하려고 찾아온 동도(同道)로 여기고 기꺼이 맞았네. 정밀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여러 해 홀로 자주인의 의식과 의지를 길러온 듯하고, 또 외로운 그 길을 걷기에 좋은 품성도 지닌 듯해 반가웠네. 이 오두막을 찾아준 것은 몇 번 안 되지만, 다수하지도 않고 정예하지도 못한 대로 자주인의 이상을 품고 모인 사람들과의 자리 또는 둘만의 사적인 담화에서 말을 섞고 생각을 나눈 자투리 시간만도 다 이으면 며칠 밤낮은 될 것이네. 그런데 처음부터 떠날 작정으로 잠시 머문 사람처럼 말을 하니 참으로 알 수 없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니, 애초에 동지는 어떻게 나를 찾아왔는가. 그래도 여기 올 때는 매번 바쁜 중에도 어렵게 시간을 내는 것 같았는데.” 

    그런 무하유 선생의 물음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날 선생을 만나러 오면서 막연히 생각해온 대로 그저 무심한 작별 인사로만 끝낼 것인가, 아니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가는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자신의 삶에서 지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자취를 더듬어보는 길에 지나지 않았음을 밝힐 것인가. 그러나 머뭇거림은 오래지 않았다. 외로운 자주인을 더욱 외롭게 만들게 되더라도 그는 자신의 출처를 속이거나 향방을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소년 시절 끄트머리쯤 저는 제법 진지하게 아버지를 찾아 나섰는데, 그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어머니였습니다.” 

    그가 장황하게 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허두를 꺼내는데, 선생이 과장된 끄덕임과 함께 그의 거리낌 없는 토로를 격려하듯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 그 동경대학에서 농경제학을 했다는 춘부장. 박헌영이 따라 월북했다고 들었고. 그런데 자당께서는 어디서 무얼 공부하셨는지….” 

    “겨우 천자문이나 떼고 여사서(女四書) 몇 구절 귀동냥한 것밖에 없는 무학의 잔반(殘班) 규수였습니다. 결혼 뒤에 유학 중인 아들에게 소박(疏薄)받지 않게 하려는 시어머니의 배려로 1930년대 후반에 신설된 여학교에 한 학기 다닌 적이 있지만, 그걸로 교육받은 신여성이 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한때 열렬한 당 일꾼이었고, 여맹(女盟)에서 선전 선동에 동원된 적도 있었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것을 듣고 저는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이 아버지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를 찾아보았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아나키스트 흔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주인의 길을 그런 이상한 경로로 접어들게 되는 수도 있군. 그래 자당께서 보여준 춘부장의 자취는 어떤 것이었는가?” 

    “아버님께 들은 대로 전한다는데, 어머님이 전하는 마르크시즘의 여러 개념이나 용어 대부분이 제게는 묘하게도 아나키즘의 그것들로 들렸습니다. 물론 그때 내가 이해하는 아나키즘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모퉁이에 나오는 아나키즘 소개 수준을 크게 넘지는 못했겠지만, 어쨌든 계급과 사유(私有)의 발생, 노동, 분배, 임금 이자, 잉여가치로 이어지는 일련의 개념은 어머님이 주입받은 시기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그때의 회상에서도 고색창연한 아나키적 빛과 열기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구체적 상황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상화(理想化)된 과거로서의 원시공산사회나 공상적 사회주의 쪽의 상징적 비유가 제게 그런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만, 어머니는 적(赤)과 흑(黑)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고향에도 아나키즘 전통 같은 것이 희미하게 살아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젊은 동지가 한 번도 하지 않은 얘기를 떠나가는 이 마당에야 듣게 되는군. 그렇지, 그들과 우리는 배가 다른 형제, 그러나 생래적으로는 그래서 오히려 적개심과 정통 시비가 많은 앙숙(怏宿) 형제지.” 

    그날 그는 이상하게도 무하유 선생의 집에 오래 머문 것 같은 기억이 없다. 그때까지의 이야기도 한 자리에 선 채로 다 한 것 같고 그 뒤의 조금 더 이어진 것 같은 대화도 그리 인상 깊게 기억에 남은 게 없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선생의 집을 나설 때 들은 말은 오래 가슴 저려하며 기억했다. 

    “나는 일본 유학 시절에 처음 대면한 자주인의 이상과 일부 내 고향 안의(安義)의 어두운 지적 전통을 물려받아 한평생 이 길을 걸어왔네. 처음 대학 강단에 서면서는 더 많은 젊은 동지들과 함께 이 길을 가는 꿈도 꾸었지만 이제는 나도 늙었네. 세월은 우리에게 냉담했으며 인터내셔날에서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격돌로 드러나고 풍뢰회(風雷會) 흑도회(黑濤會) 시절과 우리 동란에서는 서로 피탈까지 보기를 서슴지 않았던 적(赤)도, 먼저는 일본 제국주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지없이 우리의 싹을 짓밟고 분단 뒤에는 철저한 냉담과 묵살로 우리를 고사시켰던 백(白)도 한가지로 우리에게 가혹했지. 하지만 젊은 동지가 오든 가든 나는 이 길을 가는 수밖에 없네. 그것도 전 시대의 미망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찬연한 자주인의 세계로 행진해갈 것이네. 잠깐이라도 멈추면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릴 행진일지라도. 잘 가게. 젊은 동지. 아버지를 지운다는 것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끝내 다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돌아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돌아오게.” <계속>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