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인터넷산업 판도 바꾼 ‘SNS 황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주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4-03-19 09: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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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잣집의 똑똑한 아들로 태어나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컴퓨터만 끼고 사는 괴짜 대학생으로 지내다 틀에 박힌 학교생활이 지루해 교내 ‘퀸카’를 뽑는 투표 사이트를 만들었다. 학교로부터 혼쭐이 났지만 학생들의 반응이 뜨겁자 아예 이를 응용해 인터넷 커뮤니티 회사를 차렸다. 10년 후 괴짜 대학생은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가 됐고 회사는 세계 최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업체로 성장했다. ‘제2의 빌 게이츠’ ‘하버드가 배출한 최고 천재’라는 별명이 붙은 마크 저커버그(30) 페이스북 창업주 이야기다.
    2014년 2월 4일 전 세계 인터넷 세상이 난리가 났다. 페이스북이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회상하기(look back)’ 기능 때문이다. ‘회원님을 주인공으로 한 동영상이 준비됐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해당 링크를 클릭하면 1분짜리 동영상이 잔잔한 음악과 함께 흘러나온다.

    나의 페이스북 가입 첫날, 그간 올린 글과 사진, 다른 이용자들이 ‘좋아요’ 버튼을 많이 누른 게시물들을 보다보면 나조차 잊고 있던 지난 몇 년간의 내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자녀나 가족의 사진을 많이 올린 이용자는 이 동영상을 보고 폭풍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 그래. 이런 일도 있었지. 여기도 갔었지”라며 회상에 잠기자마자 어느새 동영상이 끝난다. 마지막에는 ‘감사합니다. 마크와 페이스북 팀으로부터’란 글이 뜬다.

    고객 맞춤형 감성 마케팅의 진수를 보여준 이 ‘회상하기’ 기능은 한낱 인터넷 커뮤니티에 불과한 페이스북이 왜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의 문명사학자 겸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의 본성은 호모 엠퍼티쿠스(homo empathicus)”라고 정의했다. 페이스북은 바로 이 공감(empathy), 즉 사람들의 정서에 호소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을 파는 기업이다.

    프로그래밍에 재능 보인 ‘엄친아’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누구나 외롭다. 하지만 먹고살기 바쁜 데다 낯선 타인과 관계 맺는 일도 쉽지 않다. 이때 간단한 글 몇 줄, 사진 한 장으로 그간 몰랐던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고,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있는 지인들과 안부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창구가 바로 페이스북이다.



    설립 10주년을 맞은 페이스북의 성장세는 그야말로 놀라운 수준이다. 현재 페이스북 이용자 수는 12억3000만 명으로 인도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세계인 6명 중 1명꼴로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셈이다. 올해 갓 서른 살이 된 창업주 저커버그의 재산은 274억 달러(약 29조3000억 원)로 이건희 삼성 회장의 130억 달러보다 2배 이상 많다. 2013년 기준 매출과 순이익도 각각 78억7200만 달러, 15억 달러에 달한다.

    휴대전화나 자동차처럼 손에 잡히는 물품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 정도 규모로 회사를 키웠을까. 과연 저커버그는 어떤 인물일까. 대학생 저커버그와 페이스북 창업 초기 시절을 파헤친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 ‘자연인 저커버그’는 일종의 강박증과 편집증을 앓고 있으며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한 외골수다. 절친 겸 창업 동지들과 잇따른 소송을 벌인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경영자 저커버그’의 능력 또한 뛰어나다는 점도 분명하다. 한국의 싸이월드, 미국의 마이스페이스 등 페이스북과 비슷한 콘셉트를 지닌 수많은 SNS가 있었음에도 현재의 위치에 오른 기업은 페이스북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 비결을 탐구해보자.

    저커버그는 유대계 ‘엄친아’다. 그는 1984년 미국 뉴욕 주에서 모두 유대계인 치과의사 아버지와 정신과의사 어머니 사이에서 1남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3세 때 유대교 성인식 바르 미츠바를 치렀지만 이후 무신론자임을 자처해왔다.

    저커버그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소년시절 이미 부친의 치과와 집에 있는 컴퓨터를 서로 연결하는 ‘저커네트’라는 이름의 프로그래밍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들의 능력을 눈여겨본 그의 부친은 현직 프로그래머에게 아들의 프로그래밍 과외를 부탁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저커버그는 명문 프렙 스쿨(아이비리그대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로 유명한 뉴햄프셔 주 필립스 엑세터 아카데미를 다녔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비롯한 고전문학, 수학, 물리학 등 각종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학교 펜싱팀 주장으로 활동했다. 이 와중에 인공지능 음악 재생 프로그램인 ‘시냅스 미디어 플레이어’도 만들었다.

    퀸카 뽑는 사이트가 페이스북 시초

    그의 전기를 쓴 작가 호세 안토니오 바르가스는 “그때 다른 10대들은 컴퓨터 게임을 즐겼지만 저커버그는 이를 만드는 일을 즐겼다”고 말했다. 저커버그 본인은 “당시 그림 잘 그리는 친구가 많았는데 이들이 이것저것 그려놓으면 이를 바탕으로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프로그래머 저커버그의 능력을 눈여겨 본 마이크로소프트(MS), 아메리카온라인(AOL) 등의 대기업에서 입사를 제의했지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2002년 9월 하버드대에 입학한다.

    저커버그의 전공은 컴퓨터공학과 심리학. 대학 생활을 무료하게 보내던 저커버그는 2003년 10월 자신의 이름을 교내에 널리 알린다. 하버드대 여학생들의 얼굴을 비교해 누가 더 예쁜지를 고르게 하는 사이트 ‘페이스매시(facemash)’를 만든 것이 계기였다. 순간 접속자가 5000명에 달할 정도로 공부벌레 하버드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학교는 하루 만에 사이트를 폐쇄했다. 하버드대 교내 신문 ‘하버드 크림슨’은 “점잖지 못한 여성비하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일부 여학생은 얼굴 사진을 도용당했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인터넷산업 판도 바꾼 ‘SNS 황제’

    2013년 6월 18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는 마크 저커버그.



    이 사건으로 저커버그의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이 하버드대 조정팀의 쌍둥이로 유명했던 캐머런과 타일러 윙클보스 형제. 이들은 인도계 하버드생 디비야 나렌드라와 함께 하버드대 교내 데이트 서비스인 ‘하버드 커넥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로그래머가 필요했던 윙클보스 형제는 자신의 사업 구상을 밝히고 저커버그에게 동참을 제안한다.

    저커버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2004년 2월 갑자기 자신의 친구인 더스틴 모스코비츠, 크리스 휴즈, 앤드루 매컬럼, 에두아르도 새버린과 함께 하버드생들끼리 사생활을 공유하는 사이트 ‘더페이스북(thefacebook)’을 만든다. 오늘날 페이스북의 원형이다. 적록색맹인 저커버그가 비교적 구분하기 쉬운 색이 파란색이었기에 페이스북 바탕이 푸른색이 됐다는 것 또한 이제 고전에 속하는 일화다.

    저커버그는 더페이스북 오픈 초기에 가입자를 하버드생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입소문이 나자 하버드가 있는 보스턴 거주자, 예일 컬럼비아 등 인근 동부 지역의 명문대 재학생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업 첫해인 2004년 이용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거듭된 소송

    사업을 확장해야겠다고 결심한 저커버그는 2004년 6월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창업 동지들과 함께 동부 보스턴을 떠나 서부 실리콘밸리의 팰러앨토로 회사를 옮긴다. 이때 더페이스북에 합류한 사람이 바로 음악 파일 공유 사이트 냅스터의 창업자이자 벤처 투자자로 유명한 션 패닝이다.

    패닝은 저커버그에게 중요한 제안을 한다. 바로 ‘더페이스북(thefacebook)’에서 ‘더(the)’를 빼고 기업명을 단순화하라는 것. 저커버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패닝의 소개로 실리콘밸리 벤처 투자자와의 교류도 늘렸다. 회사는 쑥쑥 성장했다. 2005년 600만 명, 2007년 5700만 명까지 늘어난 가입자는 2008년 1억 명을 돌파했다.

    이때부터 내분도 본격화했다. 페이스북 초기에는 프로그램 개발 및 서비스를 저커버그가 맡고 회사 운영 및 마케팅을 새버린이 담당했다. 하지만 회사가 커가면서 둘은 종종 성장 전략을 두고 충돌을 빚었다. 이 와중에 패닝이 저커버그에게 “새버린의 역할이 미미하다. 그를 몰아내라”고 종용하자 둘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던 저커버그는 결국 새버린과 결별했다. 분노한 새버린은 친구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새버린 이전에 이미 윙클보스 형제와 나렌드라 또한 페이스북이 자신들의 사이트 하버드 커넥션을 모방했다며 저커버그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복잡다단한 소송에 지친 저커버그는 결국 이 모두에게 상당한 양의 주식을 주고 합의했다.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윙클보스 형제에게 준 페이스북 주식만 6500만 달러에 달한다. 현재 가치로는 최소 3억~4억 달러가 넘는 엄청난 규모다. 저커버그는 결국 패닝과도 이별했다.

    진흙탕 소송전을 통해 저커버그가 얻은 점도 많다. 무엇보다 1인 지배체제를 굳건히 확립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회사를 키울 수 있었다. 페이스북과 마찬가지로 2004년 설립됐지만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에 인수된 후 방향성을 잃어버린 경쟁 사이트 마이스페이스와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특히 저커버그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의 유연함과 편의성을 잘 살리면서도 페이스북의 핵심 키워드인 ‘실명성’을 놓치지 않았다. 13세 이상인 사람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지만 출신학교, 거주지, 기혼 혹은 연애 여부 등 개개인의 상세 정보를 세세하게 기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 아무리 온라인상의 친구나 지인이라고 해도 허무맹랑한 가짜 프로필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번듯한 직업과 취향을 가지고 있어 오프라인에서도 해당 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는 여지를 주는 데 주력했다는 의미다. 온라인 사이트지만 온라인 인맥을 오프라인 인맥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주기 위해서다.

    샌드버그의 가세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한 저커버그에게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다. 이때 천군만마와 같은 조력자가 나타났다. 바로 2008년 3월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된 셰릴 샌드버그(45). 최근에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독려한 베스트셀러 ‘린 인(Lean In)’의 저자로 더 유명한 샌드버그는 저커버그와 같은 유대계이자 하버드대 선배다.

    1995년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를 졸업한 그는 매킨지 컨설팅, 미국 재무부 등 거대 조직에서 일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재무부 재직 시절 당시 재무 장관이던 로런스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의 눈에 띄어 그의 특별 보좌관으로 활약했다. 이를 통해 샌드버그는 미국 사회를 주무르는 정재계 거물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2001년 당시 떠오르던 기업 구글에 입사한 샌드버그는 이곳에서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2004년 성공리에 기업공개(IPO)를 마치고 세계 최대 검색엔진이 된 구글은 애초에 페이스북을 인수합병(M·A)의 대상자로 봤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구글과 같은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품고 구글의 핵심 인재 샌드버그에게 접근했다. 2007년 12월 워싱턴의 한 파티에서 샌드버그를 만난 저커버그는 “당신을 위해 COO직을 만들겠다”며 집요하게 구애했다. 결국 샌드버그는 석 달 후 성공이 보장된 안락한 구글의 부사장 자리를 박차고 페이스북으로 왔다.

    인터넷산업 판도 바꾼 ‘SNS 황제’


    샌드버그가 오기 전 페이스북은 ‘치기어린 20대 젊은이들의 집합소’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사용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아직 수익원이 불투명했고 인사관리(HR) 체제도 엉망이었다. 회사 전반적으로 아이디어와 의욕만 앞섰을 뿐 이를 차분히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큰물에서 놀던’ 샌드버그는 회사에 오자마자 현재 페이스북의 가장 큰 수입원인 온라인 광고 사업을 안착시켰다. HR 시스템도 손봤고 외부 인재 영입에도 적극 나섰다. 페이스북은 점차 대기업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언론이 샌드버그를 가리켜 ‘페이스북의 성인 감독관’ ‘저커버그의 가장 가치 있는 친구’라고 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저커버그도 샌드버그를 잘 예우했다. 그는 종종 “샌드버그가 없었으면 페이스북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호평했다. 2012년 6월 샌드버그는 페이스북 이사회 최초의 여성 멤버로 뽑혔다. 그의 연봉 2620만 달러(약 280억 원)는 저커버그의 연봉 200만 달러보다 13배 이상 많다.

    성장과 내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페이스북은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기업공개를 준비한다. 2012년 5월 18일 페이스북은 나스닥 시장에 데뷔했다. 2004년 구글 상장 이후 오랜만에 눈여겨볼 만한 IT 업체가 등장한 터라 전 세계 투자자가 페이스북의 주가를 주시했다.

    IPO와 깜짝 결혼

    초기 상황은 좋지 않았다. 공모가 38달러로 데뷔했지만 실적 부진, 고평가 논란 등으로 한때 주가가 17달러까지 추락했다. 하지만 2013년 들어 페이스북 매출과 이익이 빠르게 성장하자 주가도 빠르게 상승했다. 올해 2월 말 기준으로 페이스북의 주가는 68달러, 시가총액은 1745억 달러에 달한다. 2013년 12월에는 미국 대기업의 집합소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에도 편입됐다. 상장 19개월 만에 S&P 500 지수에 편입된 것도 유례없는 일이다. 상장 다음 날인 2012년 5월 19일 저커버그는 또 한 번 유명세를 치렀다. 대학 시절부터 오랜 연인인 프리실라 챈과 자신의 집에서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 중국과 베트남계 피가 섞인 챈은 하버드가 있는 매사추세츠 주 토박이다. 2003년 하버드대 교내 모임에서 만난 둘은 저커버그가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가 됐음에도 미국 20대 젊은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버드대 졸업 후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 의대로 진학한 챈은 2012년 6월 의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초 저커버그의 집에 초대받은 100여 명의 지인은 챈의 의대 졸업 축하 파티인 줄 알고 참석했다 결혼식을 지켜봤다.

    두 사람이 결혼을 알린 방법도 독특했다. 결혼식 직후 둘은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상태를 ‘연애 중’에서 ‘결혼함’으로 바꾸고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수수한 흰색 드레스와 검은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만 120만 명이 넘는다.

    두 사람의 결혼이 화제가 된 이유는 단순히 저커버그의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다. 저커버그는 늘 페이스북이 중국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챈과 함께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처가 식구들과 대화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웠다고도 밝혔다.

    잘 알려진 대로 중국은 인터넷 검열이 엄청나게 심한 국가. 구글, 야후 등 세계적 인터넷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했다 중국 정부와 마찰을 빚고 사업을 축소해야 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페이스북 또한 2009년 중국 정부로부터 차단 명령을 받았고 아직 이를 복원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창업주의 부인이 중국계라면 페이스북의 중국 재입성이 좀 더 원활하지 않겠느냐는 점, 또 이 과정에서 역시 하버드대를 졸업한 수재인 챈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의 관측이다.

    이미 챈은 남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페이스북에 장기기증 관련 기능이 추가된 것도 소아과 의사를 꿈꾸는 챈 덕분이다. 그는 워커홀릭에 외골수인 남편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도 상당한 실력자다. 연애 시절부터 ‘일주일에 최소 100분 이상 데이트하기’ 등 몇 가지 규칙을 만들어 9년간의 오랜 연애를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 저커버그 역시 한 방송에 출연해 “아내가 훌륭한 소아과의사가 될 것”이라며 팔불출 면모를 드러낸 바 있다.

    페이스북의 성장통

    놀라운 성장세를 보인 페이스북도 ‘성장통’을 겪는다. 특히 페이스북의 본산인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10대 이용자가 외면하는 조짐이 뚜렷하다. 실명을 기반으로 한 SNS여서 부모와 교사의 감시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다. 한마디로 ‘엄마나 선생님과 같이 메신저를 쓸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

    실제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미국 성인 이용자의 43%가 “내 자녀의 생활을 감시할 목적으로 페이스북에 가입했”다고 밝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미국 조사회사 아이스트래티지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년간 13∼17세 사용자 300만 명이 페이스북을 떠났다. 프린스턴대도 “향후 3년간 페이스북이 사용자의 80%를 잃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10대가 익명성과 일회성이 강한 트위터, 스냅챗 등으로 옮겨가자 페이스북은 스냅챗 인수 제의를 포함한 다양한 인수합병(M·A)을 시도하고 있다. 2012년에는 사진 공유 SNS인 인스타그램을 약 1조1000억 원에 인수했고 올해 2월에는 모바일 메신저 회사 왓츠앱을 무려 17조 원을 들여 인수했다. 직원이 50명에 불과한 소규모 회사 왓츠앱 인수에 너무 많은 돈을 쓴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지만 10대 소비자와의 접점을 늘려야 한다는 긴박감이 그만큼 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트위터처럼 화젯거리를 한눈에 보여주는 ‘해시태그’ 및 ‘트렌딩’ 기능도 추가했다.

    다만 성인 가입자의 지지는 여전하다. 미국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현재 약 64%의 미국 성인이 매일 페이스북을 방문한다. 2010년의 51%보다 높은 수치다.

    페이스북은 아직 젊은 기업이다. 창업자도 여전히 젊다. 그 때문에 일부 성장통에도 페이스의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크다. 저커버그가 지난달 10주년 기념 축사에서 “지난 10년은 믿을 수 없는 여정이었고 그 놀라운 여정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 감사한다. 하지만 아직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페이스북의 미래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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