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바르바리 해적

  • 김석균 | 해양경찰청장 sukkyoon2004@hanmail.net

    입력2014-03-19 09:4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활약한 바르바리 해적은 선배 격인 사라센 해적보다 세력이 강하고 악행도 심했다. 유럽 열강은 이들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신생국 미국은 달랐다. 미 해군의 강력한 소탕 작전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소멸 위기를 맞는데….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바이킹 해적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로부터 400~500년 후에 지중해,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바르바리(Barbary) 해적이 활개를 친다. 바르바리 해적은 오늘날의 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의 해안을 이르는 바르바리 해안(Barbary Coast, 베르베르 해안이라고도 한다)을 중심으로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300년 동안 전 유럽을 상대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던 이슬람 해적 집단이다.

    Barbary라는 말은 그리스인들이 타민족을 야만인, 즉 Barbarian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나중에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유목민인 베르베르(Berber) 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바르바리 해적은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한 후 지중해를 건너와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을 약탈하던 사라센 해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사라센 해적이 8~13세기에 활약했다면 바르바리 해적은 이후 몇 세기 뒤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활약했다.

    유럽인에게 공포의 대상이던 사라센 해적의 후예인 바르바리 해적은 규모와 악행에서 사라센 해적을 압도했다. 또한 바르바리 해적은 사라센 해적보다 이슬람의 색채가 한층 더 짙었고 활동 영역도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확대됐다. 사라센 해적이 중세 지중해에서 극성을 부린 해적이었다면 바르바리 해적은 근세 대항해 시대에 지중해를 넘어 먼 대양까지 진출해 약탈을 일삼던 해적이었다.

    사라센 해적의 후예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바르바리 해적에게 포로로 잡힌 적이 있던 ‘돈 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오른쪽)와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

    유럽 지역 곳곳이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에 시달리고 수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소설 ‘돈 키오테(Don Quixote)’의 저자 세르반테스(Cervantes)도 바르바리 해적에게 포로로 잡힌 적이 있었고, 100년 후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의 저자 다니엘 디포(Daniel Defoe)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바르바리 해적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보자. 십자군전쟁은 1303년 끝났지만 그 여파는 바다에서 계속됐다. 아랍인과 바르바리 해적이 바다에서 기독교도와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슬람교도의 배와 해안은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로부터 안전했지만 이른바 ‘신앙심이 없는 자’들에 대한 공격은 그들 해적질의 유일한 대의명분이었다. ‘신앙심이 없는’ 이교도에 대한 해적질은 ‘이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민족은 죄인이며 따라서 그들을 발견하고 전쟁을 벌이며 포로로 잡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코란의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바르바리 해적이 발호한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원인은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지역의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사막 지역으로 둘러싸인 북아프리카 해안지역은 생존을 위해서는 해상무역이 필수적이었지만 해상무역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었다. 결국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나 물품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해적질에서 얻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획득한 전리품을 사용하거나 팔고 포로를 노예로 활용하거나 몸값을 받았다. 또한 약탈을 면하려 바치는 공물도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이렇게 지속되던 바르바리 해적질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확대된 역사적 사건이 1492년 발생했다. 스페인이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와 800여 년 동안 머물던 이슬람 세력을 1492년 반도로부터 완전히 축출해버린 것이었다.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거점이던 그라나다에서 무어인들이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잃고 북아프리카로 쫓겨왔다. 복수심에 불타오른 무어인들이 기독교인과 그들의 선박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지하드(성전)’를 시작한 것이 바르바리 해적이 지중해와 대서양 해적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대양 진출

    바르바리 해적은 먼 지역을 항해했던 바이킹처럼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까지 진출했다. 그들이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갤리선 대신 범선을 띄우기 시작한 17세기부터였다. 노잡이가 노를 저어 나아가는 방식인 갤리선은 물살이 비교적 잔잔한 지중해를 항해하는 데 적합했다.

    바이킹이 갤리선을 타고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이라 불리는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먼 대양까지 모험을 하기도 했지만 노잡이의 힘으로만 대서양의 높은 파도와 거친 해류를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범선이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범선은 거친 대양에 훨씬 잘 적응하게 해주었고 ‘측면대포(Broadside Gun)’까지 장착하면서 무력이 한층 강화됐다.

    바르바리 해적이 이런 범선을 활용하면서 해적질의 영역이 크게 확대됐다. 그들의 손길이 미친 곳은 이들이 약탈한 곳의 지명과 수많은 지역에서 수백만 명의 노예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의 해안 중에서 ‘라치아(Razzias)’라 불리던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바르바리 해적은 스페인·포르투갈·이탈이아·그리스·프랑스와 잉글랜드뿐 아니라 북극권의 아이슬란드·덴마크 해안까지 공격해 그곳 주민을 노예로 끌고 갔다. 대양으로 진출하던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페인의 선박 수천 척이 이들 해적의 먹잇감이 됐다.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을 받은 해안가 사람들은 살던 곳을 버리고 손길이 미치지 않는 안전한 내륙으로 떠났다. 이들 해적에 의한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해적의 약탈 대상이 된 해안에서 사람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가 지나서였다.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이슬람 국가들은 15세기부터 바르바리 해적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을 섬기며 해적질과 이슬람 군주를 위한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 1511년 스페인은 오늘날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Algiers)를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과 동맹

    막강한 스페인 함대의 침입으로 근거지를 빼앗긴 바르바리 해적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동맹을 청했다.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긴 셀림 칸 1세는 알제에 군대를 파병했고 1529년 스페인인들은 알제에서 쫓겨나게 됐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막강한 스페인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1533년 해적 바르바로사를 총제독(Admiral in Chief)으로 임명하고 거대한 함대의 지휘권을 맡겼다. 그로부터 5년 후 함대는 동부 지중해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 이후 33년 동안 동부 지중해는 오스만 제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술탄은 바르바로사에게 사령관 중의 사령관이라는 뜻의 ‘베이르베이(Beylerbey)’라는 직위를 주고 오스만 제국 지중해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알제·튀니스·트리폴리 등 남부 지중해 해안에 뻗은 수많은 해안 도시의 영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방 영주들은 해적들에게 은신처와 노예, 약탈물을 거래하는 시장을 제공했다. 대신 해적의 노획물에서 생기는 이익의 일정 몫을 챙겼다. 지방 영주는 노획물의 10%를 요구했고 이와 함께 항구 이용료도 챙겼다. 해적과의 거래는 지방 영주들에게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한편 유럽 열강은 해적의 피해를 당하고도 계속해서 유화책을 썼다. 거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16∼18세기 유럽은 내전이나 종교전쟁, 그리고 다른 지역과의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해적 퇴치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해 전쟁을 벌이는 비용보다 이슬람 국가들과 상업적 평화협정을 맺고 뇌물이나 원조를 제공해 나포된 자국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낫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작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바리 해적의 먹잇감이 됐던 것은 경제적 협상 능력이 없었던 투스카니·사르디니아·시칠리·베네치아 등 반도의 소국 선박들이었다.

    다른 한편 유럽 열강은 해상무역의 경쟁국이나 적국의 선박을 공격하도록 바르바리 해적을 부추기기도 했다. 프랑스는 오랜 경쟁 관계이던 스페인의 여러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해적을 적극 이용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도 대(對) 프랑스 외교정책에 해적을 한 수단으로 삼았다. 유럽 열강은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애써 이들의 해적질을 막으려 하지 않았고 원정에서도 강력한 선제공격을 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예사냥

    바르바리 해적은 무차별적인 노예사냥에 나섰다. 해적질에서 가장 수지가 맞는 것이 약탈 지역 주민을 납치해 노예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환락가에 내다 팔 수 있는 백인 여성을 선호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기본적으로 ‘신앙심 없는 자들’, 즉 이교도들에게 가혹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슬람 여성이라고 납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돈이 되는 상품이라면 이슬람과 이교도를 가리지 않았다.

    ‘붉은 수염(Red Beard)’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르바로사 형제는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공격해 40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들은 나중에 리파리 섬에서 추가로 잡힌 포로 9000명과 함께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갔다. 노예사냥으로 악명을 떨친 자 중에는 바르바로사 형제의 친구였던 투르구트가 있었다. 그는 1551년 지중해의 몰타 제도에 속한 고조(Gozo) 섬에서 주민 전체인 6000명을 잡아다 노예시장에 내다팔았고, 스페인의 그라나다 해안가 마을을 습격해 4000명을 추가로 노예시장으로 보냈다.

    다른 바르바리 해적들도 노예사냥에 몰두했다. 1554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비스테(Viste)를 공격해 주민 70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1558년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에 속하는 메노르카(Menorca) 섬의 시우타텔라(Ciutadella)를 침공해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 대다수를 살육하고 살아남은 3000명을 이스탄불로 끌고 갔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해적이 가장 빈번하게 약탈을 일삼던 곳이었다. 이러한 노략질에 시달리다 못해 포르멘테라(Formentera) 섬 주민 전체가 아예 살던 곳을 버리고 내륙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19세기 초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영역.

    바르바리 해적은 1627년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해 수도인 레이캬비크(Reykjavik)를 약탈했다. ‘터키인의 습격’이라고 불리는 약탈에서 해적은 30명 정도를 죽이고 400명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 습격은 도시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 사건 직후 아이슬란드에서는 터키인은 눈에 띄면 무조건 즉시 죽여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이런 운명을 맞은 터키인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 법은 이후 350년이 지나서야 폐기됐다.

    해적의 노예사냥은 무차별적이었다. 신분의 차이나 사회적 지위는 상관없었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갔다. 누구나 쓸모가 있었으므로 모두가 해적의 납치 대상이었다.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사람들은 몸값에 걸맞은 수입을 챙길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노예로 내다 팔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예로 잡혀간 자들 중에서 많은 수가 해적선의 노잡이로 팔려나갔다. 일단 노잡이 노예가 되면 사슬에 묶여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야 하는 운명으로 전락했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집안일을 하거나 정원을 관리하는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매력적인 육체를 가진 백인 여자들은 술탄의 궁정 시녀나 귀족의 첩이 돼 일부다처제하의 이슬람 사회에서 부인들이 기거하던 ‘하렘(Harem)’에 평생 갇혀 살아야 했다.

    바르바리 해적의 노예사냥 대상이 돼 모로코와 알제리로 끌려간 사람은 150만 명에 달한다. 16세기 지중해에서 납치된 노예와 약탈한 물건이 거래되는 가장 중요한 시장은 알제리의 노예시장이었다. 포로로 잡힌 자들이 처음 끌려가는 곳이 알제의 감옥이었다. 17세기 초 노예시장 판매용으로 2만 명이나 되는 포로를 상시 수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당시 해적이 납치한 노예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 해군의 강력 대응

    1700년대 후반 신생국 미국은 자국민이 바다에서 해적으로부터 나포돼 노예가 되는 것을 막고 초기 해상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수년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군주들에게 보호료를 바쳤다. 많은 미국인은 이것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아마 미국으로서는 이 부분을 역사에서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은 자국 선박이 바르바리 해적에게 약탈당하자 원정대를 보내 해적과의 정면대결이나 회유책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건국 초기의 사정상 원정을 할 수 있는 해군력을 갖추지 못한 미국으로서는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1784년 모로코 해적은 독립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미국의 선박을 나포했다. 같은 해 두 척이 추가로 알제리 해적에게 약탈당했다. 납치된 선원들은 내륙으로 끌려가 요새를 구축하는 강제노역에 투입됐다. 초기에 미국은 자국 선박이 대서양을 항해할 때 해적에게 피습당하지 않도록 뇌물을 준 다른 나라의 선박에 따라붙어 항해를 하게 하거나 아예 뇌물을 제공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 그러나 배는 여전히 해적에게 나포됐고 납치된 선원은 노예로 팔려갔다. 또한 중요한 화물이 강탈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1793년에는 미국 선박 12척이 다시 나포됐다. 미 의회는 지중해를 비롯한 문제 지역들에 무장한 미군을 주둔시켜 더 강력하고 본격적인 행동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794년 3월 27일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미국 해군의 창설과 더불어 6척의 호위함을 건조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그전에 미 해군은 1775년 대륙해군으로 출발했으나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지 2년 후인 1785년 해군 함정을 전부 팔아버려 사실상 한동안 미 해군은 존재하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되는 해적의 약탈 앞에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 대통령은 해적에 대한 전쟁을 불사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1801∼1805년 트리폴리 전쟁을 벌인 제퍼슨 대통령은 해적이 요구한 보상금 지불을 거절하면서 지중해에 호위함을 파견했다. 1803년에는 바르바리 해안을 봉쇄하고 폭격한 다음 상륙해 해적이 지배하는 도시들을 공격했다. 미국 호위함이 트리폴리의 항구를 순찰하다 좌초돼 해적에게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4개월 후 특공대를 침투시켜 나포된 배를 불살라버림으로써 해적의 수입원을 원천적으로 끊어버렸다.

    해적과의 전쟁을 통해 미 해군은 해전 경험을 풍부하게 쌓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경험은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 때문에 해적과의 싸움이 일시적으로 중단됐다가 1815년 10척으로 구성된 미군 함대가 다시 지중해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2차 바르바리 해적 소탕작전에서 미국은 짧은 결전으로 해적을 물리쳤고 그 우두머리를 압박해 항복을 받아냈다. 해적 우두머리는 미국 선박의 항해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뇌물을 받지 않겠다는 내용의 조약에 서명했다.

    유럽 열강은 신생국 미국이 해적에게 취한 강경한 조치를 보고는 많은 자극을 받았다. 그간 해적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한 것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합리화하긴 했지만 미국의 대응방식을 보고는 자신들의 행동이 합당한 것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김석균

    1965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 대학원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 행정학 석사, 한양대 행정학 박사, 미국 듀크대 visiting scholar

    37회 행정고시

    남해지방해양경찰청장, 해양경찰청 기획조정관, 해양경찰청 차장

    2013년 3월~제13대 해양경찰청장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기로 하고 먼저 프랑스가 1830년 군대를 알제리에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된 움직임은 해적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군사작전이 시작되자 그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132년간 통치했고 1865년 이후에는 바르바리 해변 자체를 합병했다. 이후 유럽 제국들이 바르바리 해안으로 진출을 확대하면서 오랜 세월 지속돼 오던 바르바리 해적의 활약도 종지부를 찍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