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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바르바리 해적

  • 김석균 | 해양경찰청장 sukkyoon2004@hanmail.net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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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리 해적이 이런 범선을 활용하면서 해적질의 영역이 크게 확대됐다. 그들의 손길이 미친 곳은 이들이 약탈한 곳의 지명과 수많은 지역에서 수백만 명의 노예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의 해안 중에서 ‘라치아(Razzias)’라 불리던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바르바리 해적은 스페인·포르투갈·이탈이아·그리스·프랑스와 잉글랜드뿐 아니라 북극권의 아이슬란드·덴마크 해안까지 공격해 그곳 주민을 노예로 끌고 갔다. 대양으로 진출하던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페인의 선박 수천 척이 이들 해적의 먹잇감이 됐다.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을 받은 해안가 사람들은 살던 곳을 버리고 손길이 미치지 않는 안전한 내륙으로 떠났다. 이들 해적에 의한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해적의 약탈 대상이 된 해안에서 사람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가 지나서였다.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이슬람 국가들은 15세기부터 바르바리 해적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을 섬기며 해적질과 이슬람 군주를 위한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 1511년 스페인은 오늘날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Algiers)를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과 동맹

막강한 스페인 함대의 침입으로 근거지를 빼앗긴 바르바리 해적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동맹을 청했다.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긴 셀림 칸 1세는 알제에 군대를 파병했고 1529년 스페인인들은 알제에서 쫓겨나게 됐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막강한 스페인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1533년 해적 바르바로사를 총제독(Admiral in Chief)으로 임명하고 거대한 함대의 지휘권을 맡겼다. 그로부터 5년 후 함대는 동부 지중해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 이후 33년 동안 동부 지중해는 오스만 제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술탄은 바르바로사에게 사령관 중의 사령관이라는 뜻의 ‘베이르베이(Beylerbey)’라는 직위를 주고 오스만 제국 지중해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알제·튀니스·트리폴리 등 남부 지중해 해안에 뻗은 수많은 해안 도시의 영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방 영주들은 해적들에게 은신처와 노예, 약탈물을 거래하는 시장을 제공했다. 대신 해적의 노획물에서 생기는 이익의 일정 몫을 챙겼다. 지방 영주는 노획물의 10%를 요구했고 이와 함께 항구 이용료도 챙겼다. 해적과의 거래는 지방 영주들에게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한편 유럽 열강은 해적의 피해를 당하고도 계속해서 유화책을 썼다. 거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16∼18세기 유럽은 내전이나 종교전쟁, 그리고 다른 지역과의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해적 퇴치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해 전쟁을 벌이는 비용보다 이슬람 국가들과 상업적 평화협정을 맺고 뇌물이나 원조를 제공해 나포된 자국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낫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작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바리 해적의 먹잇감이 됐던 것은 경제적 협상 능력이 없었던 투스카니·사르디니아·시칠리·베네치아 등 반도의 소국 선박들이었다.

다른 한편 유럽 열강은 해상무역의 경쟁국이나 적국의 선박을 공격하도록 바르바리 해적을 부추기기도 했다. 프랑스는 오랜 경쟁 관계이던 스페인의 여러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해적을 적극 이용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도 대(對) 프랑스 외교정책에 해적을 한 수단으로 삼았다. 유럽 열강은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애써 이들의 해적질을 막으려 하지 않았고 원정에서도 강력한 선제공격을 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예사냥

바르바리 해적은 무차별적인 노예사냥에 나섰다. 해적질에서 가장 수지가 맞는 것이 약탈 지역 주민을 납치해 노예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환락가에 내다 팔 수 있는 백인 여성을 선호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기본적으로 ‘신앙심 없는 자들’, 즉 이교도들에게 가혹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슬람 여성이라고 납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돈이 되는 상품이라면 이슬람과 이교도를 가리지 않았다.

‘붉은 수염(Red Beard)’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르바로사 형제는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공격해 40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들은 나중에 리파리 섬에서 추가로 잡힌 포로 9000명과 함께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갔다. 노예사냥으로 악명을 떨친 자 중에는 바르바로사 형제의 친구였던 투르구트가 있었다. 그는 1551년 지중해의 몰타 제도에 속한 고조(Gozo) 섬에서 주민 전체인 6000명을 잡아다 노예시장에 내다팔았고, 스페인의 그라나다 해안가 마을을 습격해 4000명을 추가로 노예시장으로 보냈다.

다른 바르바리 해적들도 노예사냥에 몰두했다. 1554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비스테(Viste)를 공격해 주민 70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1558년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에 속하는 메노르카(Menorca) 섬의 시우타텔라(Ciutadella)를 침공해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 대다수를 살육하고 살아남은 3000명을 이스탄불로 끌고 갔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해적이 가장 빈번하게 약탈을 일삼던 곳이었다. 이러한 노략질에 시달리다 못해 포르멘테라(Formentera) 섬 주민 전체가 아예 살던 곳을 버리고 내륙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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