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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안영배 기자의 풍수와 권력

황룡사 9층목탑은 김춘추 세력의 풍수 조작품

  • 안영배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획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황룡사 9층목탑은 김춘추 세력의 풍수 조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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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목탑은 김춘추 세력의 풍수 조작품

디지털 기술로 재현한 황룡사 9층목탑.

우리 조상이 남긴 유적의 경우 통일신라 이후 유입된 중국 풍수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고인돌, 평지에 세워진 신라 고분, 비탈진 돌벼락에 세워진 암자 등은 중국 풍수 논리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곳이다. 산의 모양새를 보는 형세파 이론이나 좌향과 방위를 따지는 이기파 이론을 끌어들여 해석한 시도도 있으나 견강부회라는 비난을 비껴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풍수 이론으로 살펴보면 이들 유물 대부분이 지기와 함께 천기, 혹은 수정 기운이 뭉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기운이 눈에 보이거나 이론적 틀로 설명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중국 풍수의 그늘에 가려져 묻혀 있었을 뿐이다.

심초석에 떨어지는 황룡의 기운

황룡사 9층탑은 바로 천기가 나선형으로 회오리치듯 탑지 전체로 내려 쏟는 형국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곳은 당연히 탑지 중앙의 심초석이다. 심초석으로 떨어지는 천기는 심초석을 덮은 큰 암석에서 휘어지면서 굴절되는 양상이다.

심초석 구조는 땅바닥에 박힌 타원형의 거대한 심초석 위에 다면체 모양의 육중한 암석이 얹힌 형태다. 전체 무게만도 30t에 달한다. 심초석에 올려진 암석은 그 윗면이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경사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선형으로 내려오는 하늘의 천기가 이 암석의 경사진 면을 따라 회전 방향이 틀어지면서 서쪽으로 직진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필자는 눈을 들어 서쪽을 바라봤다. 봄비가 살포시 내려 주변이 맑게 보이지 않았으나 저 멀리 선도산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기운은 선도산으로 뻗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작위적인 냄새가 풍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심초석을 덮은 이 돌의 이상한 모양새에 주목했다. 원래 심초석은 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받침돌을 가리키는 것으로 수평으로 평평한 게 대부분이다. 백제 미륵사지 석탑이나 신라 감은사지 석탑 등 지금까지 전국의 탑을 발굴, 복원하는 과정에서 황룡사의 것처럼 윗면이 경사진 뚜껑돌이 배치된 심초석이 나타난 경우는 없었다.

물론 무게가 10t이나 되는 이 암석이 심초석에 보관해놓은 부처의 사리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올려놓은 것이라고 볼 수는 있다. 1964년 정부가 목탑터를 재정비하려고 민가의 담장을 헐어내는 과정에서 이 돌이 발견됐는데, 바로 그해 12월 어느 날 도굴꾼이 공업용 잭으로 이 돌을 들어 올려 심초석 상단면 가운데에 있던 구멍(사리공)에서 부처의 사리함과 공양구 일체를 훔쳐가는 사달이 생김으로써 돌의 용도가 밝혀졌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이 돌은 단순히 심초석의 사리공을 보호하려고 마련해놓은 장치일 뿐인가. 하필이면 그다지 멋있게 생기지도 않은 화강암에 윗면이 경사지도록 깎아놓고 배치해놨다는 건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인근에 조성한 장륙존상의 그 웅장하고 화려한 면모의 주춧돌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촌스러운 모양새다. 그것도 장륙존상이 조성된 후 몇 십 년이 지나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까지 데려와 심혈을 기울여 지은 9층목탑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 암석은 심초석이 아니라고 보거나, 고려 시기 목탑이 소실된 후 어떤 목적으로 심초석 위에 가져다 놓은 것일 수 있다는 등 추측만 남발했다.

사실 심초석을 덮은 돌에는 역사의 숨은 내막이 있다. 기록엔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 풍수의 눈으로 보면 이 심초석의 비밀이 자연스럽게 풀린다. ‘심초석’이란 ‘타임 게이트(time gate)’를 통해 1400여 년 전의 역사 속으로 날아가보자.

때는 진흥왕 14년 봄꽃이 화려한 2월 어느 날, 진흥왕은 담당 관청에 명해 월성(月城·반월성, 경주시 인왕동 소재)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한다. 그런데 진흙의 늪지대인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궁궐 조성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절을 짓게 했고, 대공사 끝에 완공된 절 이름도 황룡사라 부르게 한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이 간단한 문구가 황룡사의 건립 연유다. 이로써 황룡사는 신라를 지키는 호국사찰로 그 입지를 다지게 된다.

전설적 영물인 용이 황룡사 터에 출현했다는 건 다분히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다. 용의 출현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신성한 용을 끌어들임으로써 왕권 강화를 꾀한 진흥왕의 정치적 술책일 수 있다는 설도 제기된다.

그러나 풍수적으로 보면 용의 출현이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황룡사 터에 스크루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듯 쏟아져 내리는 에너지(천기) 덩어리는 기에 민감한 사람에겐 마치 용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씩 동해에서 일어나는 용오름 현상을 승천하는 용의 출현으로 인식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실제로 천 년 전의 신라인들은 수중릉인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다에서 용오름 현상이 발생하자, 자신이 죽은 뒤 동해를 지키는 호국의 용이 되겠다고 다짐한 문무대왕이 용으로 현신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무튼 용(천기)을 호국의 상징이자 왕권 수호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 밑그림은 승려 안홍(安弘·579∼640)과 자장에게서 이미 나타나 있었다. 안홍은 그가 지었다고 하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신라 제27대 여왕이 임금이 되는데, 비록 도는 있으되 위엄이 없으므로 구한(九韓·아홉 나라)이 침범하게 된다. 만일 용궁(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분히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 같은 참서적 성격이 짙은 이 기록의 저자가 당대의 고승으로 인정받는 안홍이라는 점에서 예언의 신빙성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643년(선덕여왕 12년)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 자장(590~668) 역시 안홍과 같은 제안을 함에 따라 9층탑 건립의 명분이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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