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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힘’은 어디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가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한 사람의 힘’은 어디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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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결함

전쟁 당시 군의관이던 하타가 끝애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는 바로 ‘조선어’였다. 하타는 조선인 출신의 일본인 입양아였던 것이다. 끝애는 하타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제발 나를 죽여달라고. 저들이 내 몸과 내 넋을 산산조각내기 전에, 나를 죽여달라고. 죽을 자유조차 박탈당한 조선인 위안부 끝애는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일본인 군의관에게 자신을 좀 더 쉽고 빠르게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하타는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고 ‘이런 일’로 자신의 경력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의 지상 과제는 일본인 양부모에게 인정받는 것, 진정한 일본인이 되는 것, 그리고 최고의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조선 여인 끝애에게서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지도 모르는 인간의 고결함을 발견한다. 이제 그의 지상명령은 극적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녀를 살리는 것.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 그리고 그녀의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이 과정은 결코 감상적이거나 로맨틱하지 않다. 그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명철한 사람이기에, 결코 함부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분투하는 세속적인 삶이 아니라 단 하나 남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한 인간의 처절한 존엄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위안부 끝애를 ‘양호한 상태’로 보호해 상관이 지시할 때 그녀를 ‘제물’로 보내줘야 하는 끔찍한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그녀를 보호하고 관찰하고 관리하는 동안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타는 그녀에게 끝없이 이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믿지만 그녀에겐 그것이 ‘폭력’으로 받아들여진다. 하타는 끝애에게 ‘결혼하고 싶다’고까지 고백하면서 그녀에게 육체적으로 다가갔지만, 남성의 육체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던 끝애는 그것을 폭력으로 받아들인다.



하타는 전쟁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었기에 그녀가 ‘조금만 견뎌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단 한 순간도, 위안부의 삶을 견딜 수 없었다. 함께 위안부로 끌려온 친언니마저 일본군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상태에서, 그녀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지키고 싶었만, 끝내 그녀는 일본 군인들에게 도륙당하고 만다. 그는 어디가 땅인지 하늘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 속에서 그녀의 시신을 수습한다.

희망과 연대의 고리

그 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그 처참한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되는 것조차 포기하고, 결혼은 물론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조차 포기한 그였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는 그저 ‘모범 시민’으로서의 조용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깊이 아끼고 배려한다. 하타가 자신의 모든 기억의 편린을 불태우고 싶어 하다가 집에 화재가 나자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미국인 친구였고, 그가 비록 직업으로서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그를 마음속 깊이 ‘진짜 의사’라고 생각해준 것도 미국인 이웃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과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의 건강과 안녕과 행복에 항상 예민한 마음의 안테나를 세우고 있었다. 그는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갚을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끝없이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지만, 가슴 깊숙이 지울 수 없는 사랑과 열정의 체온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진심을, 사람들은 끝내 알아봐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타가 원하는 것은 뜻밖의 구원이나 타인의 이해가 아니다. 그는 끝애와의 인연과 그 파국의 과정을 서니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어려움에 처한 주변 사람들과 서니, 그리고 서니의 아들 토마스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속죄를 다 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한 여자를 지켜주지 못한 개인적 죄의식, 조선인 위안부 강간과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의 본의 아닌 방조자가 되어버린 역사적 죄의식, 그 모두로부터 끝까지 도피하지 않는다. 그 죄를 생의 끝까지 자신의 심장에 품은 채, 그의 환상 속에서 ‘이 집에서 죽기는 싫어요’라고 고백하는 끝애를 마음속에 품은 채, 아무리 애를 써도 영원히 풀 수 없는 속죄의 길을 홀로 걸어가려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더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비슷한 상황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딸들과 어머니들과 우리 자신들을 지킬 수 있을까. 걸핏하면 망언을 쏟아내는 일본 정치인들은 차치하고라도, 보다 양심적이며 진정으로 인권과 자유를 걱정하는 사람들끼리, 국적과 출신성분 그 무엇도 따지지 않은 채, 희망과 연대의 고리를 만들 수는 없을까.

신동아 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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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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