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일본은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몽골이 고려와 함께 일본을 침략하려 한 때부터 중국과 대척점에 있었다. 청일, 중일전쟁을 치른 역사도 있기에 같은 한자-유교 문화권을 이루고 있어도, 절대로 중국 세력권에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과거 미국은 소련이 태평양으로 나오려는 것을 막아 소련을 무너뜨렸다. 지금은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오는 것을 막아 중국 공산 정부를 붕괴시키려 하는 것 같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유이(唯二)하게 군사동맹을 맺은 한국과 일본을 이 정책에 협조할 나라로 꼽는다. 그런데 한국이 경제에 이어 외교에서도 중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자 ‘한국은 태생적으로 중국 문화권에 속하지 않는가’ 의심하는 것 같다. 반면 중국과 센카쿠 문제로 다투는 일본은 대(對)중국 봉쇄의 선봉을 자임한다. 그러니 미국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인정하고 무기 수출을 허용하는 등 친일노선을 강화한다.
맹방인 미국과 일본이 등을 돌리면, 통일외교는커녕 우리의 안보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왜 박근혜 정부는 한 가지 외교노선만 고집하는가. 박근혜 정부는 미국 중국의 실력자와 바로 통할 수 있는 친미·친중 인사는 물론이고 일본 러시아와 가까운 친일·친러 인사도 확보해야 한다.
시진핑 방한처럼 미국과 일본이 주시하는 정상외교를 했으면 즉시 두 나라와 통하는 실력자를 보내 설명하게 해야 한다. 아베가 밉다고 이를 등한히 하면, 결정적인 시기에 우리를 골탕 먹일 적만 늘어날 뿐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내하면서 왜 일본에 대해서는 못하는가. 외교부가 서울에 있는 두 나라 대사관에 설명했으니 ‘됐다고 치는 것’은 정말 안이한 판단이다.”
노태우의 북방외교가 전범
또 다른 전직 외교관은 우리가 가야 할 4강 외교의 방향을 이렇게 정리했다.
“세계적으로는 우리도 강한 나라이지만 동북아에서는 약자다. 4강을 사냥꾼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사냥감에 해당한다. 사냥감이라고 해서 만날 도망만 다니면 살 수가 없다. 내 먹이는 물론이고 사냥꾼의 먹이도 훔쳐 먹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사냥꾼 것을 훔쳐 먹으려면 그가 자거나 쉴 때 움직여야 한다. 선제적으로 기동해야 하는 것이다. 4강 외교도 선제적으로 해야 한다.”
그는 노태우 정부가 한 북방외교를 선제외교의 전범으로 꼽았다. 공산국가인 헝가리로부터 소량의 양파를 수입하며 조금씩 헝가리를 두드리던 한국은 1989년 헝가리와 정식 외교를 맺었다. 공산국가와 수교해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킨다는 북방정책에 시동을 건 것이다. 여기에는 88서울올림픽의 성공도 큰 힘이 됐다. 그런데 공산국가와 처음 수교하는 것이라 한국은 극비리에 추진했다. 수교가 확정되고 발표만 남았을 때 비로소 미국에 알려주었다.
그러자 미국은 “헝가리 측을 통해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다”고 한 뒤 “한국은 우리와 군사동맹을 맺은 맹방인데, 왜 우리가 헝가리로부터 먼저 한국과 수교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청와대는 크게 놀라 미국에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 일을 계기로 노태우 정부의 안보팀은 ‘우리도 미국에 한 방을 먹일 수 있다’와 ‘미국에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선제적으로 미국을 끌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유럽국가와 일사천리로 외교관계를 맺은 노태우 정부는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그중 클라이맥스는 공산종주국 소련과의 복교(復交)였다. 당시는 소련의 힘이 중국보다 월등히 강했기에,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북한이 외교적으로 크게 고립된다고 보고, 소련과 외교 정상화를 먼저 추진했다.
한소관계는 1990년 6월 5일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노태우-고르바초프) 이후 급진전해, 그해 9월 30일 복교로 이어졌다. 12월 14일엔 모스크바에서 2차 정상회담을 하며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1991년 9월 17일)에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회담 후 복교 전부터 소련이 요구해온 경협차관 제공이 본격화했다. 이 차관을 받으면서 소련은 북한과의 거래를 정상화했다. 특혜와 외상거래 등을 차단한 것이다.
그러자 북한은 생필품은 물론이고 식량과 유류가 부족해져 수백만 명이 굶어죽는 ‘고난의 행군’에 빠지게 됐다.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에 빠진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소련을 움직여 북한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벌교(伐交)’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는 외교안보수석이 안보의 컨트롤타워였다. 분수령을 이룬 모스크바 회담 직후 노태우 대통령은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을 미국과 일본으로 보내 소련과 회담한 경과를 설명하게 했다. 오해가 발생할 소지를 없앤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계속해서 대미관계를 선제적으로 이끌어갔다. 미국이 세계적으로 핵무기를 철수한다는 것을 알고, 북한의 핵개발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비핵화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북한의 동의를 끌어내고(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미국으로부터 ‘이를 증명하기 위한 북한 지역 사찰을 한국이 한다’는 합의도 받아냈다. 대북관계에서도 선제권을 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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