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아’는 최근 2006년 7월부터 2008년까지 원씨를 내사한 소진만(61) 전 경기지방경찰청(경기청) 보안수사대장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원씨 사건을 최초로 내사했던 인물이다. 2007년 초까지 보안수사대장으로 수사팀을 이끌었고, 보안수사 2대장으로 물러난 후에도 수사에 직·간접으로 간여했다. 원씨 사건 당시 그는 기무사 관계자에게 “원씨는 간첩이 아니라 경찰의 협조원이라 말했다”는 내용의 진정서 때문에 감찰조사를 받기도 했다. 진정서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012년 초 소씨는 기무사를 상대로 ‘음해 투서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검찰에 내기도 했다. 그러나 기무사와 경찰 고위 인사의 간곡한 요청과 사과를 받고 소를 취하했다.
소씨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나는 1979년부터 30년 넘게 대공사건만 수사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간첩은 처음 봤다. 원씨는 자기 손으로 e메일도 못 만드는 간첩이었다. 원정화는 특수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남파간첩도 아니다. 원씨 사건은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부풀려졌다. 간첩을 잡은 게 아니고 만들었다. 다시는 이런 식의 간첩 사건이 만들어져선 안 된다.”
다음은 소 전 대장과의 일문일답.
핵심은 ‘김 선생’ 실체
▼ 여간첩 원정화 사건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
“2006년 7월 경기청 보안수사대장으로 부임했다. 보안수사대가 2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내가 통합대장을 맡았다. 발령을 받고 보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공작비를 허투로 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대원 중 3분의 1은 술이 취한 채 출근해 자기 의자도 못 찾고 있었다. 수사회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보안수사대 건물이 지하 1층, 지상 2층이었는데, 지하에 가 보니 보안수사대의 온갖 공작서류가 물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지하에 물이 새서. 보름 넘게 그걸 정리했다. 트럭 2대 분량의 공작서류를 소각하고 쓸만한 정보를 추리는 과정에서 캐비닛에 잠자던 원정화 관련 첩보서류를 처음 확인했다.”
▼ 어떤 내용이었나.
“정신적으로 불안한 증세가 있고 군 관계자나 경찰 등 정보요원들과 접촉이 잦다는 정도였다. 집중관찰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첩보는 A4 2장 분량밖에 안 됐다.”
▼ 그때부터 내사에 들어갔나.
“확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점 공작사항으로 분류했다. 원씨를 아는 전직 경찰 이OO 씨 등 동료들의 도움도 받았다. 그들도 확인이 필요하다고 알려왔다.”
(소 전 대장의 동료인 이OO 씨는 2005년 원씨와 중국에 다녀왔을 만큼 가깝게 지낸 인물이다.)
▼ 어떻게 내사를 진행했나.
“2006년 말, 원씨와 가깝게 지내던 경찰 Y를 내가 정보원으로 포섭했다. 당시 Y는 용인의 한 경찰서에 근무 중이었다. Y에게 구두 각서를 받고 임무를 부여했다. 원정화에 대한 내사 사실·수사 방향을 알렸다. Y를 정보원으로 포섭한 사실은 경기청 윗선에도 보고했다.”
▼ 당시 무엇을 확인하고자 했나.
“훈련을 받고 남파된 간첩인지, 지도원이 있는지, 있다면 누구인지였다. 지도원이 없는 간첩은 없다.”
▼ 수사팀은 어떻게 구성됐나.
“원씨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 중에 군인이 유독 많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무사와 협조했다. 총괄지휘는 내가 맡았다. 기무사 요원들도 내 지휘를 받았다.”
▼ 내사 당시 검찰에는 보고를 했나.
“안 했다.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