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京 베이징을 바꾼 자가 천하를 바꾼다

  • 글·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4-12-19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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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 어디가 더 좋아?”

    베이징이 고향인 친구 제임스가 물었다. 중국에선 베이징 시민인 것만으로도 상당한 특권이다. 주택, 교육, 취업 등의 형편을 고려하면 베이징 호구(戶口)의 가치가 100만 위안(약 1억7000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제임스는 영국 유학생이니 상당한 고위층 자제일 가능성도 높다. 훗날 제9세대 공산당 지도자가 될지도 모를 전도유망한 중국 청년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수준의 질문을 하다니.

    “둘 다 각자의 장점이 있지만 난 베이징이 더 좋더라. 베이징은 유서 깊은 도시여서 가는 곳마다 역사와 고유의 문화가 있잖아. 상하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만 할 뿐이고.”

    제임스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지금 나한테 어디가 더 좋으냐고 묻는 거니?”



    아아, 그 거만한 웃음을 본 순간 절감했다. 이 녀석, 뼛속까지 베이징 사람이구나. 천하의 중심이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 베이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구나. 만약 내가 상하이가 더 좋다고 했다면, 적어도 3박4일은 ‘정신교육’을 받을 뻔했다. “그 따위 천박한 도시가 뭐가 좋다고?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를 가진 중국의 중심, 베이징의 진가를 모른단 말이야?”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경산에서 굽어본 자금성의 전경.

    베이징의 약칭은 ‘서울 경(京)’ 자다. 京은 원래 침수되지 않도록 인공으로 만든 언덕을 뜻한다. 의도적으로 만든 터전 위에 도시가 탄생했고, 정치의 중심 궁궐이 세워졌다. 이제 京은 도시 중에서도 최고의 도시, 수도(首都)를 뜻한다. 베이징을 京으로 약칭한 데서 ‘베이징은 수도다. 더는 말이 필요 없다’는, 베이징 사람들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京이 말해주듯 베이징은 인공적으로 건설된 도시다. 도시 중의 도시인 수도이며, 중국의 중심이다.

    “이게 불상이야, 마징가 제트야?”

    옹화궁 만복각(萬福閣)의 미륵불상은 너무나 컸다. 불상의 키가 18m. 지나치게 크다보니 흡사 마징가 제트처럼 보였고, 만복각은 마징가 제트 격납고 같았다.

    그러나 이건 약과였다. 서태후의 별장이었던 이화원을 찾았다. 만수산 위의 불향각(佛香閣)에서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니 절로 호연지기가 생기는 듯했다. 그런데 이 산과 호수는 모두 가짜다. 순전히 인간의 손으로 평지를 파서 여의도공원 면적의 10배(2.2㎢)에 달하는 곤명호를 만들었다. 파낸 흙은 쌓아올리니 높이 60m의 만수산이 됐다.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옹화궁 만복각의 미륵불. 높이가 18m에 달한다.

    대륙의 기상은 만리장성에서 절정을 이룬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 위로 만리장성이 쭉쭉 뻗어나간다. 거대한 용이 산 위에서 춤추는 듯하다. 그런데 이 높은 산으로 돌을 날라 와 하나하나 쌓아올렸다니! 내가 만리장성의 인부가 아님을 천지신명께 감사드렸다.

    흔히 중국을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나라’라고 한다. 땅은 넓고 물자는 풍부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인다(人多)’,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의 저력은 바로 사람, 많고도 많은 사람에서 나온다.

    부수고 새로 만든다

    베이징은 ‘사람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공 도시다. 연암 박지원은 “(베이징) 도성이 바로 서자 천하가 바로잡힘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는 너스레가 아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유학자 박지원은 베이징에서 유교의 질서를 읽어냈다. 공자는 평생 주례(周禮)의 회복을 염원했고, 유교는 예(禮)가 실현되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주나라 예법인 주례는 일종의 국정관리 매뉴얼이다. 6대 부처 산하 360개 관청의 인원과 직무를 명시했다.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에 해당하는 각종 부처를 나누고 국가의 예산 운용, 산업·물류 등 국정 전반을 체계적으로 논한다. 또한 주례는 국가 운영과 인프라 구축을 강조한다. 주례 고공기(考工記)는 도성의 설계를 설명한다. 성벽을 둘러 성의 방위에 만전을 기하되, 원활한 물류 관리에도 차질이 없도록 동서남북 네 방향마다 세 개의 성문을 뚫고 각 문을 넓은 길로 연결했다. 도성 중심에는 종묘사직, 시장, 조정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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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 정원이었던 북해공원은 오늘날 베이징 사람들의 쉼터가 됐다(왼쪽). 베이징 근교에 만리장성이 있다는 사실은 이 도시가 북방 변경의 군사도시에서 정치의 중심지로 변해왔음을 나타낸다.

    주례 고공기의 법도에 맞게 도시를 건설하니 예의가 확립되고, 예의가 확립되니 질서가 바로잡히고, 질서가 바로잡히니 천하가 바로잡힌다…. 계획도시 베이징이 구현한 유교 질서에 연암 박지원은 감탄했으리라.

    베이징은 이처럼 인공(人工), 즉 사람이 만들었으며, 인위적인 법도에 따라 움직이는 도시다. 하늘이 내린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은 얼마든지 부수고 새로 만들 수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바로 황제의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어차피 사람은 넘쳐나니까.

    몽골족의 원나라는 금나라를 정복한 후 베이징을 사흘 동안 불태우고 쿠빌라이의 야심 찬 기획 아래 새로운 베이징을 건설했다. 그 뒤 명나라는 원대 성벽의 기초 위에 명나라의 성벽을 쌓고 원나라의 연춘각이 있던 자리에 인공 토산 ‘진산(鎭山)’을 쌓았다. ‘누를 진(鎭)’은 몽골족과 원나라의 기운을 누른다는 뜻이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은 명나라 때 건설된 자금성만 남기고 베이징성의 내성과 외성을 모조리 파괴했다.

    현재 내성 자리엔 지하철 2호선, 외성 자리엔 베이징시 이환도로가 들어섰다. 관광객은 자금성만 보고도 그 엄청난 규모에 감탄하는데, 지금 내성과 외성까지 존재했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러나 중국인은 스스로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을 파괴했다. 중국인에게 파괴와 재건설은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여는 역사적 전통이다. 베이징성의 보존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불붙자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과거를 경시하고 미래를 맹신한다’라고 비판하는데, 설마 전족을 경시하고 변발을 경시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경시하고 미래를 믿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과격한 마오쩌둥이 아니라 온건파 지도자라고 해도 별로 다르지 않다. ‘영원한 인민의 총리’라 칭송받는 저우언라이는 베이징 궁성 보호론자인 량쓰청과 두 시간 대화를 나눴다. 량쓰청은 노을 지는 패루(牌樓)가 먼 산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시로 읊었다. 그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고시의 한 구절을 빌려 화답했다. “노을은 더없이 좋지만 황혼에 가깝구나.”

    이 말은 당시 공산당의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따라서 수도 베이징은 황제들의 절대 권력이 아닌, 사회주의의 이상을 표현해야 했다. 더욱이 베이징성 보존 논쟁이 공산당 찬반론으로 변하자 더 이상 합리적인 토론이 어려워졌다. 결국 베이징은 모스크바 방식을 따르기로 한다.

    이처럼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가 된 이래 시대가 변할 때마다 변신을 반복했다. 베이징의 새 주인은 기존 베이징을 파괴하고 재건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됐음을 천하에 알렸다. 베이징을 바꾸는 자가 천하를 바꾼다.

    40%가 입과 붓으로 먹고살아

    도시는 잉여의 산물이다.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먹을거리 등 온갖 물자가 유입되지 않는다면 도시는 죽어버린다. 그러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장악한 도시인들은 거꾸로 도시 밖 세상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베이징은 도시의 잉여적 특성이 극대화한 곳이다. 이 천자(天子)의 도시엔 황족, 재력가, 관료, 선비가 모여들었다. 청나라 말기인 1908년 베이징 인구 70만 명 중 28만 명이 직접 생산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구의 40%가 공문서를 꾸미고 간언하는 등 입과 붓으로 먹고산 셈이다.

    베이징은 생산하지 않으나 군림한다. 일례로 요리를 보자. 베이징만의 요리나 특산물은 없다. 하지만 전국 각지의 요리를 죄다 불러들여 맛이 있네, 없네 품평하며 요리를 발전시켜왔다. 팔자 좋고 입맛 까다로운 나리가 많아서 어지간해서는 합격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최고만 살아남았다. 그 유명한 ‘베이징덕’도 산둥성의 오리 요리를 몽골족 궁중 요리사 흘사혜(忽思慧)가 발전시킨 것이다.

    요컨대 베이징은 스스로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서 생색은 다 내고 특혜는 다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대감 같은 도시다. 호의와 특혜가 계속되면 당연한 권리인 줄 아는 법. 천하가 있기에 베이징이 있는 것이지만, 800여 년 동안 이어져온 특혜는 베이징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낳았다.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베이징 뒷골목 후퉁의 인력거꾼과 그의 딸. 베이징의 명동 격인 왕푸징의 포장마차 거리에는 전갈, 해마 꼬치 등 온갖 요리를 판다. 베이징의 이태원이라 할 싼리툰(三里屯)의 살사 바 공연 모습(왼쪽부터).



    ‘중(中)’을 숭상하는 중국인에게 ‘천하의 중심’, 베이징은 가장 높고 귀한 존재다. 천하는 마땅히 베이징을 따라야 한다. 베이징어는 중국의 표준어 보통화(普通話)가 됐고, 베이징의 방송국 베이징뎬스타이(北京電視臺)는 중국의 중앙방송 CCTV(China Central Television)가 됐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베이징은 사실 오랫동안 변방이었다. 베이징은 베이징원인(北京原人)의 흔적이 발견될 만큼 일찍부터 인류가 살던 곳이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베이징은 주나라 제후국인 연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이었고, 북방유목민족 요·금나라의 송나라 공략기지였다. 즉 주나라부터 요·금나라까지 2000여 년 동안 지방 정권의 수도에 불과했다.

    칭기즈 칸의 원나라가 아시아 일대를 석권한 뒤에야 베이징은 제국의 수도가 됐다. 그러다 명 태조 주원장이 원나라를 물리치고 난징(南京)에 도읍을 정하자 베이징 시대는 끝난 듯했다. 하지만 주원장이 죽고 난 후 조카의 황제 자리를 빼앗은 영락제가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로써 베이징은 다시 중심을 차지했다. 한족 문화를 존중한 여진족의 청나라는 명나라의 베이징과 자금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세월이 흐르고 청나라가 서구열강과 민중의 손아래 무너졌다. 그 와중에 야심가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을 새롭게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됐고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지만, 장제스에게 토벌된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난징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물리치고 수도를 다시 베이징으로 돌린다.

    이처럼 중국 역사를 되짚어보면 베이징은 정통성을 가진 수도라고 하기엔 어딘가 찜찜하다. 베이징은 변방 도시였고, 이민족의 경영 기지였으며, 찬탈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이제 중국 정부와 역사학계는 ‘칭기즈 칸도 중국인’이라며 원나라를 중국 안으로 끌어들인다. 영락제는 카리스마와 능력을 겸비한 명나라 최고의 군주로 손꼽힌다.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의 아버지다. 오늘날 베이징은 ‘천하의 중심’과 동의어가 됐다. 시간은 새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고 강력한 권력은 가짜를 진짜로 만든다. 베이징의 아이러니를 보며 사람과 시간의 힘을 느낀다.

    5월 35일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다산쯔(大山子) 798 예술구에서 만난, 해태를 타고 천하를 호령하는 인민해방군 조각상. 정치의 중심지답게 예술도 강한 정치성을 띤다.

    “손님, 이 신발을 사십시오. 신발의 수명이 선생님의 수명과 같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빨리 죽을 거라고요?!”

    베이징의 신발가게에서 주인과 손님이 나눈 대화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던 베이징답게, 베이징 사람들은 언변이 뛰어나고 유머감각이 있다. 그리고 정치에 관심이 매우 많다. 정치의 중심지로서 온갖 정치담론을 생산하던 곳답게, 베이징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정치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정치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는 없다. 언론의 자유가 있지만 반쪽에 불과하다. 당과 국가, 정부기관 등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할 순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해 소설가 위화는 독일 기자에게 재치 있게 말했다.

    “어느 국가든 간에 언론의 자유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국민이 총리를 욕할 수 있지만 이웃 사람을 욕해선 안 될 겁니다. 중국에서는 총리를 욕해선 안 되지만 이웃은 욕할 수 있지요.”

    비판조차 자유롭지 않은데, 집단행동이 용인될 리 없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광장에 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인민이 모였다.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을 모델 삼아 중국의 민주화를 촉구했지만, 덩샤오핑은 탱크까지 동원하며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오늘날까지 중국에선 톈안먼 사건을 자유롭게 언급할 수 없다. 중국 정부가 ‘6월 4일’을 인터넷에 올릴 수 없게 막자 중국 네티즌은 ‘5월 35일’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위화는 “우리에겐 6월 4일의 자유는 없고 5월 35일의 자유만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은 검열받고, 톈안먼광장에는 자유롭게 모일 수 없다. 중국 인민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길은 ‘상팡(上訪)’뿐이다. 베이징의 중앙 관료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아뢰고 정부에 선처해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으로, 조선 시대의 신문고와 유사하다. 베이징 남역 주변에는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상팡하러 온 사람이 넘쳐나고, 상팡인을 위한 쪽방촌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임금체불, 공안비리, 토지보상, 의료사고 등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위에 정책이 있다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나라다. 지방공무원들은 상팡을 저지하는 제팡(截訪) 조직을 만든다. 상팡을 가는 사람을 곧장 쫓아가 갖은 회유와 협박을 해서 상팡을 막는다. 시 단위 이상 지방정부는 제팡을 위해 베이징 출장소를 항상 잡아둔다고 한다.

    설령 상팡에 성공했다 해도 상팡인은 맘 편히 살 수 없다. 고향 공무원들이 사사건건 트집 잡고, 심지어는 뇌물수수 등 억울한 누명을 씌워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허용된 언로인 상팡마저 좌절되면서 중국 네티즌은 “얼빠진 신문들이 ‘상팡이 줄었다’고 써대는데, 사실은 이런 식으로 상팡 자체를 막는 것”이라며 울분을 토한다.

    13억 개의 꿈

    중국의 정치는 여전히 공산당의 정치다. 그래서 ‘베이징’의 또 다른 동의어는 ‘중국 공산당’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정한 인민의 정치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인류학자 김광억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베이징 뒷골목 ‘후퉁(胡同)’을 찾아갔다. 중국 정부는 세계에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후퉁에 담장을 쳐놨다. 담장에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라는, 올림픽 표어가 붙어있었다. 후퉁에 살던 허난성 출신 농민공은 그에 대해 “저건 후진타오의 꿈이지, 내 꿈은 아냐”라고 말했다.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김용한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중국 공산당은 하나의 천하를 꿈꾼다. 획일화한 천하를 베이징이, 중국 공산당이 통치하기를 바란다. 하나가 아닌 것은 곧 분열이요, 분열은 대혼란을 가져온다고 인민에게 공포를 주입한다. 하지만 13억 개의 꿈을 품에 안는 자세가 중국에 진정한 안정을 가져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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