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산의 오래된 달동네.
함박눈 하얗게 온 세상 덮이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군산으로 향하는 길. 배경음악으로 이문세의 ‘기억이란 사랑보다’가 적격이다. 남녀 간에 남겨진 아픈 기억이라는 게, 그간 둘이 사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마음 아프다고 얘기하는 이 노래. 그의 목소리보다 훨씬 구슬프고 서럽다. 이문세 이 사람 참, 노래를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노래를 가만히 따라가다보면,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기억이란 사랑보다’는 목포나 여수, 부산 혹은 전주 같은 곳이 아니라 군산으로 가는 길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그건 분명, 황정민 주연의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 때문일 수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노래가 나온다.
여주인공 호정(한혜진)이 자신이 일하는 수협에서 퇴근해 마을버스에 오르는 장면이다. 남자 태일(황정민)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마을버스는 마침 태일의 아버지(남일우)가 몰고 있다. 호정은 버스에 오르면서 시아버지가 될 뻔했던 남자에게 살짝 눈을 맞춰 인사한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바깥 풍경에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버스에 앉은 여자는 언젠가부터 조금씩 흐느낀다.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의 한 장면.
늙은 남자는 며느리가 될 뻔했던 여자를 위해 라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실컷 울어라, 아가야.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로 감춰줄 테니 마음껏 울거라. 에그 불쌍하기도 해라’ 하는 것처럼. 이상하게도 흐느끼는 여자의 모습보다 우는 그녀를 바라보는 노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저 마음은 도대체 어떨까. 자식을 가슴에 묻은 후 그 자식을 사랑했던 여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또 어떤 마음일까.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는 지나치게 신파로 포장된 영화다. 주인공 태일은 군산의 허름한 시장과 상가를 돌아다니며 일수 이자를 받으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발사인 형 영일(곽도원)은 그런 동생을 거의 원수처럼 대한다. 영일이 그러는 데는, 과거에 자신의 아내 미영(김혜은)과 동생 사이에 ‘뭔가’ 있었다고 질투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싸움으로 집안은 늘 개판이다. 집보다는 바깥 생활이 더 개판인 태일에겐 솔직히 미래가 없다. 그런 그는 어느 날 한 여자를 보게 된다.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에 신체 포기 각서까지 쓰고 사채 빚을 쓴 호정. 태일은 이자를 받는다는 명분으로 호정에게 다가서기 시작한다. 여자는 이 ‘쓰레기 같은’ 남자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결국 좋아하게 된다고 했던가. 호정은 곧 거칠지만 진솔한 태일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으로는 솔직히 ‘우웩!’이다. 진부하기 이를 데 없고, 손발이 오그라들기에 충분하며, 얘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두 눈 감고도 충분히 짐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라면 TV드라마 같은 데서 수십, 수백 번은 봐온 탓이다. 뭐 이딴, 낡은 영화가 있을까 싶을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영화는 기이하게도 사람들을 한 뼘 한 뼘 스크린 앞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마치 호정이가 태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며 가깝게 못 오게 했다가 오히려 남자를 자신의 가슴속 깊이 안으로 끌어안는 여자처럼. 영화는 스스로를 사람들 마음속 깊이 파고들게 만든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말 그대로 펑펑 울기 시작한다.

이 영화, 진부하다. 그런데 사람들을 스크린 가까이로 다가서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