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진보-보수 지식인이 제시하는 ‘한국호’ 항로

“국내 모순의 ‘외부화’로 숨통 틔우자”
“한쪽이 ‘2등 시민’ 되는 통일론은 위험”

  • 패널 : 안경환 이영훈 사회·정리 : 김진수 기자

    입력2014-12-22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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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70년이라는 시대적 분기점에 다다른 오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문턱 앞에서 내부 동력은 분열되고 외부 정세는 혼란스럽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커지고 위기론이 힘을 얻는다. 진보-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두 지식인의 대담을 통해, 집단 무기력증에 빠진 대한민국호(號)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본다.
    ■ 일 시 : 12월 8일 오전 11시

    ■ 장 소 : 한국프레스센터 프레스클럽

    ■ 패 널 :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 사회·정리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사회 ‘신동아’의 대담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른바 ‘정윤회 사건’으로 나라가 들썩입니다. 양파껍질처럼 벗겨지는 연쇄 폭로에 가히 총체적 난국이라 할 만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조망하자면 최고 통치자의 리더십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집권 3년차를 맞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우리 정치문화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영훈 통상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때를 우리 역사인식의 원점이라 생각하죠? 저는 ‘광복’ 대신 ‘해방’이란 용어를 씁니다만, 어쨌든 역사인식의 출발점이 70년밖에 안 된다고 보는 데 문제가 있어요. 한국 지성사회가 지닌 총체적 지적능력 속에서 정치적 리더십이 탄생하는 것이지, 어느 한두 개인의 문제가 아니란 거죠.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을 발가벗겨 비판하기보다 그들의 리더십이란 게 결국 우리 정신문화의 소산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 하필 해방 70년입니까. 일제강점기 35년은 긴 역사에서 보면 극히 짧은 기간이에요. 저는 적어도 300년쯤 되는 역사적 지평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18세기 영·정조 때 10년, 30년 단위로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다는 정도는 지성사회가 상식으로 여겨야 한다는 거죠. 일제 치하 35년을 비판하기 위한 역사의식은 매우 단견적입니다. 이건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의 정신문화적 한계 탓이죠.

    정치적 리더십은 시대적 과제를 꿰뚫는 예리한 지성의 능력입니다. 정치는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예지와 용기 두 가지가 결합된 높은 품격의 인간성이고요.

    그런데 박 대통령에겐 그게 없어요. 제가 비록 ‘우파’로 분류되지만, 현 정부나 이전 정부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집니다. 역대 모든 정부가 시대정신을 꿰뚫는 예지와 용기를 보여주는 리더십에선 근본적 한계를 지녔다고 봅니다.

    안경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광복과 대한민국 탄생 이전부터 이미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겁니다. 조선이란 나라가 500년 지속된 가장 큰 이유는 절대왕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금과 신하 간에 주고받는 소통 구조가 있었어요. 그게 나중에 문민정부와 그 후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된 거죠.

    그런 자산에 대해 우리는 청산해야 할 과거처럼 여길 뿐, 현재의 민주정치에 적용하려는 생각을 못합니다. 불모의 나라에서 국제사회에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적절히 결합해 이만큼 성공한 거잖아요. 따라서 급한 마음에 가시적 수치상으로만 선진국 진입을 바라는 건 경계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사회적으로 얼마나 무리가 따랐습니까. 이젠 그 무리했던 부분을 꼼꼼히 따져야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요.

    대통령의 리더십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 개인의 리더십은 사회 전체 시스템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고 권장하는 습관과 경험이 부족합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지만 행정부 수장인 동시에 국회와 협력해야 할 파트너입니다.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체질을 그대로 현 시스템에 적용하려는 듯합니다.

    진보-보수 지식인이 제시하는 ‘한국호’ 항로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의 일정

    이영훈 박 대통령의 통치 리더십이 문제라는 데 동의합니다. 얼마 전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니 한국인이 싫어하는 아베 일본 총리와 박 대통령의 일정을 비교해놨던데, 아베 총리는 하루에 10개 일정을 소화하더군요. 오전 10시 22분에 자민당 정조회장단을 만났다, 35분 뒤엔 시내 어디로 가서 무슨 회의에 참석해 연설을 했다, 다시 40분 뒤엔 또 뭘 했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200~300명을 만나서 어젠다를 주고, 보고를 받는 초인적 일정을 소화하면서 광범위하게 소통하니 일본이란 큰 나라 전체가 총리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하루 일정은 3개가량입니다. 공식 사이트에 뜨는 걸 보면 오전 1~2개, 오후 1~2개. 그것도 어디서 연설했다, 회의 주재했다, 그런 정도죠. 저녁시간 이후엔 ‘블랙홀’이에요. 이 점에 심각한 개인적 결함이 있다고 봅니다. 국가와 사회라는 경영체를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이끄는 리더들, 그 조직 구성원들과의 부단한 접촉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어젠다를 부여하고, 토론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의견이 갈릴 땐 타협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걸 결여하니 문제죠.

    그렇다면 이전 대통령들은 달랐을까. 국가 경영에 있어 큰 비전을 내놓지 못하거나 잘못된 방향을 제시했다는 면에선 다들 마찬가지라 봅니다. 저는 정치적 리더십의 문제는 정치인 개인만의 책임이라기보다 궁극적으로 한국 지성사회의 병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진사회의 지성인

    안경환 10여 년 전 어느 일본인이 제게 “한국에선 아직도 지성인의 구실이 강조되는 게 참 부럽다”고 했어요. 그런데 통합적 지혜를 가진 지성이 가능합니까. 각자 전공 분야와 이해관계가 다르잖아요. 통합적 지성이란 있을 수 없고, 지성인의 구실이 강조된다는 것 자체가 곧 후진사회임을 의미합니다. 정치를 포함해 사회 전체 지성의 수준이 향상돼야 해요.

    이영훈 오늘날 한국 정치의 현실은 과거사 해석을 둘러싼 분열에서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분열은 미래를 공유하지 못해 발생합니다. 분열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새누리당이란 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란 야당의 주요 구성원이 지닌 역사의식은 크게 달라요. 과거사를 보는 눈이 달라서죠. 그러니 선진국 진입이니 통일이니 떠들면서도 어느 한쪽도 국민에게 통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어젠다를 내놓지 못해요. 10년, 20년, 30년 뒤 한국 사회가 어디쯤 가 있어야 한다는 비전에 대해 공유하지도 않고 토론하지도 않아요. 이 간극은 쉽게 극복되기 힘들고, 다음 세대에서나 해결될 것으로 봅니다.

    사회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보수를 표방합니다. 그렇더라도 정권 초기에 독단적 국정운영과 부패·비리 의혹으로 얼룩진 이전 정부의 과오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앞섰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일각의 지적도 있습니다.

    안경환 저는 좀 달리 생각합니다. 현 정부와 이전 정부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건 맞죠. 이전 정부의 잘못이 있으면 물론 바로잡아야죠. 그런데 일례로 4대강 사업의 경우 아직 확실한 선악 관계가 드러난 건 아니잖아요. 예컨대 5·18민주화운동 같은 명백한 사건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죠. 게다가 부패와 비리가 있었다는 걸 밝히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이전 정부의 과오를 우선적으로 처리했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와 별개로 박근혜 정부가 제시한 창조경제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비전과 관련해 얼마만큼 국민이 납득할 만한 후속조치를 내놨는가 하는 부분에서 신뢰감을 잃은 게 더 문제죠. ‘사자방’(4대강 사업·자원외교·방위산업) 같은 문제는 나중에 적정한 절차를 거쳐 해결해도 늦지 않아요.

    이영훈 자원외교의 경우 정책 추진 과정에서 실패한 것이지, 의도적으로 부정한 자금을 조성하거나 착복하기 위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4대강 사업에도 찬반 양론이 있었는데, 그 부작용 또한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각종 부패·비리가 끊이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고 봐요.

    첫째, 기득권을 먹고사는 계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정점에 자리한 게 저 같은 교수이고, 바로 아래는 공무원, 좀 더 밑은 기자, 대기업 사원, 그 아래는 공기업 및 금융기관 직원들이죠. 한국에선 이들이 귀족이에요. 이들을 다 합쳐봤자 전체 국민의 10%밖에 안 되는데, 나머지 90%는 옛날로 치면 유랑하는 하층민쯤 될 거라는 거죠. 이런 구조가 지난 20~30년 동안 형성됐어요. 이들 특권계층이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학연·지연 등의 집단 연고주의를 공공연히 재생산하는 겁니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선후배들이 원자력발전소에 포진해 서로 봐주기 한 것 보세요. 이렇듯 신분제적 위계가 아직도 공고합니다.

    둘째, 우리 정신문화가 일견 우수한 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돈과 직위 등 물질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에게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냐’고 묻는 앙케트 조사를 하면 ‘빌 게이츠’라고 응답하는 비율이 전 세계에서 제일 높아요. 물질주의 지향과 신분제적 사회 편성이 결합돼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는 이 고질적 구조를 과감히 깨뜨리는 게 선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체계 없는 경제정책

    진보-보수 지식인이 제시하는 ‘한국호’ 항로
    안경환 어디든 중산층이 튼튼해야 나라가 견고해요. 그런데 우리가 중산층을 판단하는 기준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 어떤 차를 모느냐처럼 대다수 지표가 물질적이죠. 반면 유럽 등지에선 중산층 판단 기준이 다양해요.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가, 직접 참여해 즐기는 스포츠가 있는가, 악기를 다룰 줄 아는가, 정기 구독하는 시사 잡지가 있는가 같은. 수입은 단 한 가지 요소일 뿐이죠. 저급한 자본주의 문화가 보편화한 한국은 그렇지 못해요.

    또한 소규모 집단의식이 매우 강해요. 사회가 다원화하면서 연고주의가 많이 극복된 걸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분화하는 것 같아요. 언론조차 누가 어떤 자리에 오르면 어느 학교 출신인지부터 따지죠, ‘서금회’ 같이.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특권을 가장 많이 누리는 이는 교수예요. 사회가 주는 막연한 가치부여란 게 있거든요. 흔히 대학에 몸담으면 지성인이라 여기지만 각 분야 최고 인재는 대학 바깥의 현장에 있어요.

    사회 먹고사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중차대합니다. 장기불황 등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되살리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이영훈 지금의 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진단할 컨트롤타워가 없는 게 문제입니다. 현 정부 들어 지하경제를 양성화한다고 했다가 경제민주화, 또 얼마 전부터는 규제 혁파 등 여러 얘기를 하는데, 중심이 없습니다. 확실한 메시지가 없어요. 과거 우리 경제정책에 훌륭한 점이 있었다면, 1962~96년의 고도성장기에 정부가 이제 어떤 일을 할 테니 국민이 경제적 보상을 받거나 성장을 꾀하려면 뭘 어떻게 하라는 걸 일관된 메시지로 전달한 겁니다. 그게 사회 전체의 생산적 에너지를 동원하는 데 큰 구실을 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죠.

    저는 좌우, 둘 다 비판합니다. 박 대통령이 규제를 혁파한답시고 소상공인을 불러 모았죠. 길거리에서 화물차로 이동상점을 운영할 자유, 강원도 어느 청정지역에 빵공장을 세울 자유…. 그런 자유는 안 됩니다. 우리 경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국제경쟁력이 없는 영세 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전체 사업체의 3분의 2, 종업원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예요. 종사자가 하도 많아 제 살 깎기 식 출혈경쟁을 하는 자영업자들 불러놓고 자유를 더 주는 방향으로 규제혁파를 한다? 기본적으로 정책의 체계가 안 잡혀 있습니다.

    안경환 저는 경제 분야는 잘 모르지만, 이 교수 말씀대로 우리 경제가 지금껏 성장하면서 국가가 ‘큰놈’ 중심으로 이끌어온 것 아닙니까, 대기업 중심으로. 산업화 역군도 엘리트, 좋은 대학 나오고 행정고시 합격한 사람들이 중심이 됐죠. 이젠 나라 규모가 커져 그런 것만으론 안 된다고들 생각하죠. 그럼 아까 이 교수가 말씀하신, 10%쯤 되는 기득권 계층을 뺀 나머지 90%를 위한 정책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나온 게 경제민주화, 동반성장 등입니다. 다만 그 취지는 좋은데, 거의 실현되지 못하는 게 탈이죠.

    비정규직 문제만 해도 그렇잖아요. 국가 재원 부족을 얘기하면서도 결국 부자 증세는 안 한다는 원칙을 세웁니다. 절대다수의 사람이 소외되는 불평등이 계속되고 극단화하는 분위기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니 지금 이렇게 힘든 것 아닐까요. 사실 보수의 가치란 게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진짜 보수’를 ‘진보’라고 부릅니다. 강자의 미덕으로 약한 사람을 온정이든 제도로든 보살피는 게 보수의 진정한 가치 아니겠어요?

    그런데 시스템은 그런 부분을 더 억누르고 배척하는 쪽으로 흘러가요.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비록 무능하더라도 국가가 최소한 보살펴야 합니다. 복지로 연결돼야 합니다.

    ‘자립경제’는 탈피해야

    사회 국가 간 관계가 네트워크화한 시대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더라도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미래 먹을거리로 삼을 것인지가 큰 과제입니다.

    이영훈 종합적인 진단과 방향 제시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조업의 경우만 놓고 보면 지난 20년 동안 종업원 300명 이상 대기업이 1300개에서 600개로 절반 이상 줄었어요. 대신 소기업과 소상공인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현재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50%와 전체 사업체의 66%가 제조업에 종사합니다. 특히 기간제·일용직 근로자가 전체의 3분의 2 이상입니다. 대기업은 전체 종업원의 4분의 3이 정규직, 4분의 1은 일용직·기간제이고. 그런데 나라를 먹여 살리는 수출은 대기업이 거의 다합니다. 중소기업 수출 비중은 2013년 통계에 의하면 17%에 그쳐요. 그런데도 대기업을 자꾸 규제해요. 그런 가운데 국내시장만 두고 각축하는 소기업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질 낮은 고용, 빈곤, 실업의 온상을 형성합니다.

    가장 시급한 일은 경제의 콘셉트를 바꾸는 겁니다. 아까 안 교수 말씀대로, 한국인이라면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 일본어 정도는 자유롭게 구사하는 국제화한 인간이 돼야 합니다. 자립적 국가경제라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틀에서 벗어나야 해요. 지금 어느 선진 강국이 자립적 국가경제를 외칩니까.

    국제사회에 적응 가능한 후세대를 키워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취업하고, 동시에 중국·일본 기업 들어오라고 해서 한국을 자유로운 국제지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탈(脫)규제 하면서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개방화·국제화·선진화한 인간들이 사는 사회로 바꿔야죠. 그래야 이 좁은 국내시장에서 아웅다웅하는 기업들의 숨통도 트입니다. 그렇게 국내의 모순을 외부화해야 합니다.

    진보-보수 지식인이 제시하는 ‘한국호’ 항로
    안경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남북한의 모든 지표 수준이 비슷했어요. 북한이 좀 더 낫다고도 했죠. 그런데 이제 남북한은 비교가 안 됩니다. 가장 큰 이유가 뭘까요. 북한이 고수해온 자립경제 때문이죠.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성공모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는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는 우리 국민 90%의 일상이 중국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 봅니다.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죠. 그러니 나머지 10%에 속한 사람들은 중국에 대한 비교우위를 극대화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적어도 경제에서만큼은. 한국의 대졸자가 다른 나라에 가서 취업할 수 있어야 국제경쟁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후세대가 아주 많아져야 하고, 또한 그러도록 적극 권장해야 합니다.

    독립정신 안 가르치는 교육

    이영훈 경제민주화? 동반성장? 물론 해야죠. 하지만 지금은 시장 환경이 그렇지 못해요. 진정한 동반성장은 1970~90년대 초반까지는 가능했어요. 대기업이 잘하면 중소기업도 따라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기술체계와 시장 환경이 바뀌면서 대·중소기업의 하도급 관계가 한때 69%까지 치솟았다가 지금은 40%대까지 내려갔어요. 이제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따로 놉니다. 양자는 시장과 기술체계가 다릅니다. 그래서 동반성장을 하려고 한들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대기업 이윤을 어떻게 좀더 사회정책적으로 많이 빼내 중소기업으로 돌릴까 하는데, 그건 시장 원리에 맞지 않아요.

    경제민주화니 동반성장이니 하는 자체가 자립적 국가경제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단지 국경 내에서 어떻게 하면 수많은 이가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좁은 생각에서 비롯된 거죠. 이젠 국경 밖으로 나갈 사람은 뛰쳐나가야 합니다. 안 교수 말씀처럼 국제적 교양 수준을 지닌 중산층을 갖춘 나라, 그게 선진국입니다.

    사회 양극화가 갈 데까지 간 듯한 형국입니다. 사회 각 분야가 마치 극과 극을 향해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폭주기관차들 같습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요.

    이영훈 가령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대기업 문제가 아닙니다. 중소기업 문제죠. 중소기업은 정규직이라도 평균 근속연수가 3~5년에 불과해요. 왜 한국의 사업주와 종업원 관계가 이렇듯 저(低)신뢰 관계인지를 봐야 합니다. 청년실업도 지난 20~30년 동안 국가경영 시스템이 잘못돼 발생한 겁니다. 주된 이유는 취업 준비 때문이죠. 모두가 전체 취업자의 10%밖에 안 되는 대기업 사원과 공무원이 되려고 하니 그래요. ‘공시족(公試族)’만 50만 명, ‘삼성고시족’만 40만 명입니다. 이건 가치구조의 문제예요. 반면 중소기업은 숙련된 인력이 부족하다고 난리입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우수한 학생들이 없으니 당연하죠.

    건전한 국가경영 시스템이 없어요. 교육이 잘못돼서 그런 겁니다. 교육이란 건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가치관을 부여하는 과정인데, 과연 뭘 부여하느냐 이거죠. ‘국민행복’을 외치는 박 대통령이 ‘꿈과 끼를 살리는 교육’을 하자고 했어요. 각자 소질에 맞춰 꿈을 성취하고, 그다음엔 혼자만 잘 먹고살지 말고 남도 배려해라, 그런 얘기를 해요. 그런데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해 먹고살아야 한다는 건 안 가르치죠. 그러니 독립정신이 없어요. 독립정신의 기초는 자유입니다.

    한국 교육계를 저는 ‘교피아’라고 부르는데, 이것만큼 강한 이너서클을 형성하면서 기득권을 향유하는 집단도 없어요. 현 교과과정은 어떤 환경에도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즉 슈퍼맨을 기르자는 겁니다. 반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자기 힘으로 먹고살며 지역사회를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들자는 삶의 가치는 가르치지 않아요. 다들 우수한 사람 되라고 가르칩니다. 국가가 해마다 죽기 살기로 한 골목으로만 수십만 명의 학생을 몰아넣는 직무유기와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요.

    학교교육-인성교육 분리해야

    사회 교육은 비단 그 자체만의 문제가 아닌데, 앞으로 교육 패러다임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안경환 학교교육과 인성교육을 분리해야 합니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상 대학입시 제도에 관해선 답이 없어요. 모든 학부모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서죠. 기본적으로 돈 많은 학부모가 공부 더 시켜 자식 출세시키겠다는 욕망을 어떻게 막습니까.

    학교가 서열화하고 스펙에 따라 인생이 거의 결정되는 현실을 개선하려 해도 세부적 변형이야 가능할지 모르지만 근본은 또다시 돌아옵니다. 입시제도를 바꾼다고 사람의 오랜 관념까지 바뀌지는 않거든요. 따라서 심성에 대한 고찰이 먼저입니다. 장관 중에서 교육부 장관이 가장 힘들답니다. 1년 이상 버티기 힘든 자리니까.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해야 하는데도 톱클래스 몇 %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시스템 하나 바꾼다고 교육 문제가 해결될 순 없어요.

    이영훈 현 교육과정이나 교육이념엔 ‘민주시민’이란 대목이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형식적일 뿐, 내용은 없죠. 민주시민의 기본 덕목은 자유, 독립, 자율입니다. 기성세대가 그 점을 새롭게 인식하고 교육이념으로 강화해야 합니다. 외국에선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붙어 있으면 바보 취급당해요. 한국에선 서른, 심하게는 마흔 살 때까지도 부모 밑에 한데 엉겨 살아가니 부모, 자식 양쪽 다 불행한 거죠.

    사회 저출산·고령화가 심화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 재원이 2050년쯤이면 고갈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옵니다.

    이영훈 지금의 신분제적이고 서열화한 사회구조에선 저출산 풍조를 피할 수 없어요. 그래서 단기적으론 해답이 없다고 봅니다. 장기적 비전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한 세대에 걸쳐 해결할 문제죠. 다만 단기적으로는 외국인 이민을 많이 받아들이는 국제화 정책을 취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안경환 동의합니다. 젊은 부모가 출산을 기피하는 까닭은 대개 자식을 엘리트 계층으로 키울 가능성이 낮기 때문 아니겠어요? 그러니 발상 전환을 해서 자꾸 국민한테 애 더 낳으라고만 할 게 아니라 외국 인력을 수입해야죠. 우리가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단일민족이라고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땐 옳은 말이 아니에요. 족보가 집집마다 있지만, 누군가가 연구를 해보니 자기 조상이 한반도 밖에서 왔을 거라는 사람이 전체의 27%랍니다. 한국은 원래부터 다민족국가예요. 국제사회에서도 강대국은 거의 다민족국가입니다. 일본만 유일한 예외죠.

    한국의 이민정책은 너무 경직돼 있어요. 그래서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들도 잠시 머물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걸 당연시합니다. 한국에서 자녀를 출산해도 그래요. 그러나 이젠 아닙니다. 여기서 낳은 자녀가 언제든 잠정적으로 한국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고령화는 좀 다른 문제인데, 형편이 좀 나은 고령자, 예컨대 저처럼 연금을 받는 사람의 혜택을 좀 줄여서라도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고령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형편이 되는 고령자는 사실 지금껏 사회적 혜택을 많이 누린 이들 아닙니까.

    ‘통일대박’은 물질주의 지향

    사회 광복 70년은 분단 70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통일은 매우 중요한 국가적 현안입니다. 통일정책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안경환 박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간단명료한 용어를 선택하려다보니 그렇게 말한 듯합니다. 통일이 마치 우리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쪽으로 들리기 쉽죠. 기대하지 않았던 로또처럼. 물질주의적 어감이 상당히 짙은 표현이죠. 우리가 주도하는 경제구도 아래서의 통일을 뜻하는 용어라 봅니다.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건 상호 신뢰구축인데, 어느 한쪽이 통일을 주도하고 다른 한쪽을 2등 시민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도라면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설사 그렇게 통일이 이뤄진다 해도 엄청난 후유증이 따를 것이고, 국민통합도 어려워집니다.

    북한 인권과 관련해서도, 북측이 이미 인권 문제를 인지하는데 우리가 자꾸 그 점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 들면 부작용이 생길 겁니다. 탈북자에 대해선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경험한 건데, 북한 인권을 외치는 사람들이 정작 국내의 탈북자 인권엔 더 관심이 없어요. 북측에 대한 정치공세 수단으로 인권을 외쳐요. 고향을 떠나온 그들과 어떻게 같은 시민으로서 공생할 수 있을지에 대해 더 신경 써야 합니다.

    이영훈 “통일은 대박”이란 말이 갖는 물질주의적 지향을 저도 경멸합니다. ‘대박’이란 게 ‘흥부전’에 나오는 표현 아닙니까. 흥부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부자가 된 건 아니죠. 도참(圖讖)을 믿고 제비의 힘을 빌려 부자가 된 건데, 저는 그런 ‘흥부전’을 철저한 물질주의로 배격합니다. 한국인의 물질주의 문화는 예전에도 극명히 드러났죠.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까지 있었죠. 무슨 그런 인사가 있습니까. 통일과 관련해서도 통일이 되면 한국 경제가 발전한다, 선진 강국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건 잘못이라 봅니다.

    저는 통일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얼마 전 미국의 저명한 한국계 정치학자를 만났더니 자기가 평생 세 번 실수를 저질렀답니다. 북한이 곧 망할 것이란 얘기를 여러 사람이 하도 해대기에 자기도 세 번 따라서 했더니 벌써 20년이 지나 죄다 거짓말이 됐다는 거죠. 저는 그 얘기를 들은 후론 절대로 미래예측적인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류사회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지극히 모진 현실이 전개됐다는 데는 동의하죠. 가족끼리 왕래는 물론이고, 편지조차 주고받지 못하잖아요.

    이런 비극적 현실을 두고 몇몇 당위론만으로 접근해선 안 됩니다. 예를 들죠. 한 탈북자가 서울대에서 강연을 했는데 청중이 고작 20~30명이었어요. 그 후 그가 어느 시사주간지에 쓴 글을 보니 일본 도쿄대나 미국 대학에서 강연할 땐 200~300명이 몰려 관심을 표하고 울기까지 하더라는 거예요. 정작 한국에선 동포 얘기를 하는데도 그렇다는 거죠. 그 격차엔 건너기 힘든 깊은 강이 있다고 봐요. 그래서 통일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지성사회가 좀 더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랑캐들의 합창’

    사회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층 탄력적이고 유연한 외교가 필요할 텐데요.

    안경환 각론은 달라도 답은 하나입니다. 전부 균형 있게 해야 한다는 것. 그동안 한국이 미국이란 제국 옆에 있었다면 이제 새로운 제국으로 등장한 중국이 바로 곁에 있습니다. 그 둘의 미묘한 이해관계 때문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자 간 관계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특정 이슈에선 일정한 득실이 생기겠죠.

    저는 예전부터 대중 관계에 있어 이른바 ‘오랑캐들의 합창’이란 표현을 해왔습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댄 나라가 14개국입니다. 바다를 낀 대만도 있죠. 이들의 공통점이 중국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중국 처지에서 볼 땐 그 변방 국가들은 다 오랑캐들입니다, 한국도 그렇고. 그래서 우리도 중국과 다른 변방국가 간의 관계를 항시 염두에 두고 중국과 교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일본은 한국과 특수한 관계죠. 역사에선 피해자가 떼를 쓸 수 있는 정서적 권리란 것도 있어요, 유대인이 그렇듯이.

    이영훈 외교에선 확고한 방침을 가져야 해요. 일본과 왜 싸웁니까. 해방된 지 70년입니다. 게다가 우린 반일(反日)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일본이 동맹국은 아니지만, 우리 동맹국의 동맹국이고 바로 옆 나라로서 그동안 한국이 경제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긴요한 협조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니 이젠 서로 예절을 지키면서 과거사 때문에 분쟁하는 건 초월해야 합니다. 과거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게 진정한 실존주의적 인간의 모습이듯, 한 나라의 진정한 선진화는 스스로 과거를 청산할 때 비롯됩니다.

    또한 한국은 중국의 제1 교역국입니다. 양국 간에 철저히 호혜적인 관점에서 협조해야죠. 대중·대미 외교에서 우리부터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중국도 착각하기 쉬워요. 가뜩이나 중국 측은 한국 정부가 대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과, 중국과 전면적으로 호혜협력하는 건 절대 모순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회 이젠 국가 100년 미래 전략이 절실한 시점인 듯합니다. ‘미생(未生)’의 대한민국, 1년 뒤 우리는 또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2015년은 ‘완생(完生)’의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두 분 말씀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청양띠 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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