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백 선생’ 詩에 붙인 ‘민중의 애국가’

김종률 ‘임을 위한 행진곡’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석재현 | 사진작가, 경일대 교수

    입력2015-03-24 0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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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사 애국가’ ‘민중의 애국가’ ‘어두운 시대의 진혼곡’….
    •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 시청 앞 광장, 종로거리, 선술집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 민중운동가 백기완이 쓴 시에 대학가요제 출신 대학생이 곡을 붙였다.
    • 월드컵 응원가로도 쓰인 이 노래는 요즘 동남아 국가들의 시위 현장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온다는 소식이다.
    ‘백 선생’ 詩에 붙인 ‘민중의 애국가’

    광주시립묘지 이한열 열사 묘지, 멀리 보이는 조기 태극기가 눈길을 끈다.

    1980년대에는 ‘애국가가 2개’란 말이 있었다.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다 있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1980년대를 살아온 지금의 기성세대에게는 정말 그랬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진짜 애국가’가 있었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로 시작되는, 진짜 애국가보다 더 자주 불리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유사(pseudo) 애국가’가 있었다.

    재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말을 붙이고 김종률이 곡을 만든 이 노래는 가사의 높은 서정성과 투쟁성,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비장미에다 운동권 가요로는 보기 드물게 멜랑콜리한 곡조로 인해 이 땅의 재야운동가, 대학생, 노동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퍼져나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100만 인파가 시위 시작과 끝을 알리며 부른 노래는 ‘진짜 애국가’가 아닌 바로 이 노래였고,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기정 씨가 아들의 재를 뿌리며 부른 것도 이 노래였다. 어려웠던 시절, 경찰은 마지못해 시위대를 막았고 시위대는 동년배 전경들을 증오보다는 측은함으로 상대했다.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그래도 서로서로 무언의 교류가 있었다. 화염병과 최루탄 속에서도 우정은 꽃피고 한판 엉킨 뒤 도시 뒷골목에서는 담배를 나눠 피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런 시절의 노래였다.

    수출된 운동가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음성적으로 불리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후 상당 기간 운동권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사랑을 듬뿍 받았다. 시위 진압에 지친 전경들이 단체회식 때 부른 것도 이 노래였고 한동안 화이트칼라들이 연말 송년모임 때 마지막으로 부른 것도 이 노래였다. 심지어는 강남 룸살롱의 ‘나가요 걸’들도 다투어 불렀다. 나중에는 제3세계 운동권으로 수출되기도 했다니 한류의 원조쯤 된다고나 할까.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함께 1980년대를 관통한 이 노래는 운동권 가요도 대중가요가 될 수 있다는 첫 사례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봄·가을 직원단합대회에서 스스럼없이 불렀다. 사이가 안 좋은 사람도, 사내 라이벌도 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동지였다고들 한다. 맞다. 한 시절, 모두가 한마음으로 불렀다.

    그런 만큼 이 노래는 별명도 많다. ‘민중의 애국가’ ‘우리 시대 마지막 민요’ ‘어두운 시대의 진혼곡’…한결같이 암울한 시대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당초 이 노래는 독립곡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노래극 ‘넋풀이’에 삽입된 곡이다. 탄생 뒷얘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여러 매체에 등장한 줄거리를 종합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980년 민주화의 기쁨과 기대도 잠시, 군부의 등장으로 패배감과 자괴심의 깃발만 나부끼던 1981년 늦가을, 광주 운암동 소설가 황석영의 집 2층 구석방에 이 지역 문화운동패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황씨를 비롯해 윤만식 전 놀이패 ‘신명’ 대표, 오창규(전남대 연극반 출신), 임희숙, 대학가요제 출신의 김종률(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4학년) 씨 등이었다. ‘빛의 결혼식’으로 이름 지은 노래극 ‘넋풀이’ 제작을 위한 모임이었다.

    ‘빛의 결혼식’은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서 숨진 윤상원 씨와 그의 대학 후배로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숨진 박기순 씨의 영혼결혼식을 모델로 했다. 밀폐된 골방에서 꽹과리, 징, 기타, 카세트 녹음기 같은 소도구만 갖고 작업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노래극이 대강 완성됐다.

    그러나 노래극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갈 ‘부활의 노래’를 만드는 일이 난산이었다. 영혼 결혼식의 주인공인 두 남녀가 자신들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산 자들을 격려하는 노랫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누군가가 당시 지하유인물에 실린 재야운동가 백기완 씨의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묏 비나리’를 찾아냈다.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입에서 입으로

    황석영이 시 구절을 노랫말에 맞게 고친 뒤 김종률 씨가 밤샘 작업 끝에 곡을 붙였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완성된 노래가 불려지자 방 안 곳곳에서 흐느낌이 배어나왔고, 그것은 마침내 통곡의 외침으로 변했다.

    이들의 외침은 4개월 후인 1982년 봄 전국 대학의 집회와 노동 현장에서 거대한 함성으로 되살아났다. 비밀리에 복제된 테이프를 입수한 대학가 노래패, 연극 동아리들에 의해 소개된 노래는 서슬 퍼런 당국의 단속과 탄압에도 불구,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날 이후 모든 집회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필수곡으로 자리매김한다.

    ‘백 선생’ 詩에 붙인 ‘민중의 애국가’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의 위용. 나주로 옮겨간 뒤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노래가 확산되면서 선율이 주는 비장미와 함께 노랫말이 던지는 궁금증 등이 맞물리면서 ‘광주항쟁 당시 뿌려진 유인물에서 채록됐다’ ‘도청에서 숨진 대학생이 남긴 유서다’ 등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노랫말의 모태가 된 ‘묏 비나리’는 1979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주모자로 붙잡힌 백기완 씨가 모진 고생을 하며 서울 서대문교도소에서 1980년 말쯤 지은 시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찬 시멘트 바닥에 누워 천장에 매달린 15촉 전구를 보고 있노라면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절망에 몸부림칠 때가 많았다. 극한 상황에서 자꾸만 약해지는 정신을 달구질하기 위해 비나리 시(詩)를 지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웠다.”

    이렇게 쓰여진 그의 시편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나 경기도 덕소의 한 농장에서 요양 중일 때 의사나 간호사, 문병 온 후배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백씨는 1983년 2월 대구에서 열린 ‘기독교예장 청년대회’에 참석했다.

    “막 연단에서 나서는데, 앉아 있던 청년들이 일제히 일어나 노래를 부르더군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 노래를 듣고 있는데 왜 그리 설움이 복받치던지, 한동안 펑펑 울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오랫동안 재야에서 불리던 그의 시 ‘묏 비나리’는 민주화 이후 1990년 12월 시집 ‘젊은날’에 실림으로써 정식 출판물에 수록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이듬해 4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3집 음반에 공식적으로 실려 ‘불법’ 딱지를 떼어냈다. 노래극 ‘넋풀이’가 만들어진 지 근 10년 만에 노래와 시의 온전한 복원이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그 10년의 세월은 노래극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삶에도 많은 굴곡을 가져왔다.

    “저작권 행사 않겠다”

    비록 포효하듯 사자후를 토하던 예전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민중운동가 백씨는 여전히 백발이 성성한 모습, 두루마기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1998년 그는 “이 노래의 주인은 새날을 염원하는 모든 민중”이라며 “저작권 행사를 하지 않겠다”고 밝혀 “역시 백 선생”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곡자 김종률 씨는 재야에서 ‘재조(在朝)’로 들어온 느낌. 그는 현재 광주시 고위 공무원 격인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다. 김씨는 이 노래를 만들기 2년 전인 1979년, 제3회 대학가요제에 지극히 사적이고 감성적인 노래 ‘영랑과 강진’을 들고 참가해 은상을 수상했다. 세계적인 음반사 BMG와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도 지냈다. 올해 초 김씨가 그리 크지도 않은 지방 문화재단으로 자리를 옮겼는데도 많은 언론이 일제히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자가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에 취임한다는 사실을 앞다퉈 전했다. 이 노래의 영향력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백 선생’ 詩에 붙인 ‘민중의 애국가’

    (왼쪽) 5·18 자유공원 내 민주항쟁을 재현한 조형물들. (오른쪽) 망월동 시립묘지에 있는 시인 김남주 묘. 많은 참배객이 찾는 묘지 내 명소다.



    ‘백 선생’ 詩에 붙인 ‘민중의 애국가’

    광주시내 중심가 충장로 뒷골목. 쏟아져 나온 젊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사실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수많은 국민이 애창한 이 노래는 이젠 5·18을 넘어 대한민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 됐다. 광주의 노래에서 한국의 노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제2의 애국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특히 현재 우리 사회 주류를 이루는 386에게는 비록 운동권이 아니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고 불러본 노래다.

    정치권에선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1년 만들어진 이후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으나 재야에서만 불리다가 19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도 추모곡으로 지정됐다. 2004년 5·18 기념식 때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해 함께 이 노래를 불렀으며 당시 야당 대표이던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취임 첫해인 2008년 기념식에 참석해 대형 스크린에 나오는 가사를 보며 따라 불렀다. 하지만 이후 이명박 정부는 기념식에서 이 노래의 퇴출을 시도한 끝에 2009년엔 노래 제창이 식전행사로 밀렸고, 2010년에는 이에 반발한 5·18단체들이 기념식을 따로 치렀다. 2011~2012년에는 제창이 아닌 합창단의 합창으로 변경됐다. 2013년에는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5·18 기념행사에서 부를 별도의 공식 기념노래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다시 4월이 오면

    정치권에서의 논란과는 별개로 이 노래는 나라 밖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동남아 국가 시위 현장에서 단골로 불리고 있는 것. 손동작 몸동작까지 1980년대 우리의 그것들을 고스란히 빼쏘았다고 한다. 그네들이 보기에는 한국이 민주화 선진국이고,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르면 자신들도 민주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염원이 담겨 있지 않을까.

    어쨌든 ‘임을 위한 행진곡’은 세월을 거치면서 이제는 대항의 노래, 투쟁의 노래라기보다는 그 시절을 추억하는 회고의 노래쯤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가 선정한 공식 응원가에도 이 노래가 등장했다. 그날 경기장에 울려 퍼진 이 노래에서 처절한 비장미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립 5·18 민주묘지, 속칭 망월동 국립묘지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다. 고개를 들어 낮달을 쳐다보니 멀리 무등산 기슭에는 잔설이 덮여 있다. 마지막 미련을 간직한 채 응달에 숨어 있던 눈들도 4월이 올 때쯤이면 사라진다. 4월이 오면 지난겨울의 기억은 이제 간 데 없고 사람들은 새봄의 희망을 얘기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용케 붙잡은 희망은 그래서 유독 사월에 더 도드라지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격동의 세월 속에 깨진 보도블록을 던지며 “산 자여 따르라”를 목놓아 외치던 나도, 작곡자도, 핏발 선 눈으로 그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도 이제 모두 중년이 됐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그날 종로에서, 신촌에서 돌을 던지며 눈길이 마주쳤던 그 단발머리 여대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아직은 바람이 싸늘한 망월동 묘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으니 문득 스크럼을 짜고 종로 뒷골목을 돌아다니던 젊은 날의 내가 보인다. 그렇게 노래와 함께 우리의 청춘도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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