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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이난영 ‘목포의 눈물’

  • 글 · 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 · 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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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는 이난영으로 대표되고 기억된다. 한국인은 목포를 생각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목포의 눈물’을 떠올린다. 그래서 목포는 이난영 때문에 동경과 그리움의 항구가 된다. ‘목포의 눈물’은 좁은 한반도에서 악다구니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년시절 고향집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은 노래다.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순전히 개인적인 주장 또는 감상이다. 유년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노래는 ‘클레멘타인’ 이다. 1960~1970년대에 꽤나 유명하던 노래다.

“엄마 엄마 내 죽거든 뒷동산에 묻어줘/ 비가 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줘….”

어릴 적, 아무런 의미도 모르면서 많이도 따라 부르던 구전 동요다. 고무줄, 공기놀이에 맞춰 불리던 이 노래가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에서 곡조를 따왔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다.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은 영문과 여자 교생선생님이 칠판에 가사를 써놓고 우리더러 따라 부르게 했다. 교실 뒷자리에 앉은 짓궂은 친구들은 일부러 음정을 틀리게 불렀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교생선생님은 송골송골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열심히 가르쳤다.

한국판 클레멘타인?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붉은 벽돌 교실 옆에는 요즘은 보기 드문 샐비어와 칸나 꽃이 흐드러지고, 그 향기가 창문을 넘어오던 어느 여름, 까까머리들은 교생선생님의 맨손 지휘에 맞춰 목청껏 이 노래를 불렀다. 장난기에서 시작했다가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로 이어지며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달할 때쯤이면, 싱숭생숭하던 꿈 많은 사춘기, 어떤 녀석들은 제풀에 눈시울도 조금 붉어졌다.

그랬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애잔한 멜로디와 슬픈 노랫말 덕에 노래는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로 시작되는, 한국인의 정서에 딱 떨어지는 우리말 가사는 박태원이 번안해 보급했다. 그는 ‘오빠생각’으로 유명한 작곡가 박태준의 친형으로 이 노래를 ‘스와니 강’과 함께 3·1운동 직후 이 땅에 소개했다고 전한다.

나는 애상적인 ‘클레멘타인’과 기막히게 딱 떨어지는 노래가 이 땅에도 하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목포의 눈물’이다. 왜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이 바다 건너 먼 나라 민요 ‘클레멘타인’처럼 여겨지는지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굳이 부연하자면, ‘클레멘타인’은 1800년대 중반 금광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부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의 노래, 열악한 환경에서 가혹한 삶을 살던 개척민의 슬픔이 밴 노래라 일제강점기 헐벗은 식민지 백성들이 목메어 부르던 노래의 정감과 비슷하게 느껴져서다. 결국 노래에 관한 나의 편향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을 배우기 훨씬 전,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내 유년시절, 어머니는 동구 밖 시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 왔다. 머리에 이고 온 젖은 옷을 말리려고 마당 한 곳의 빨랫줄 바지랑대가 낮아지고, 어머니는 거기에 빨래를 널면서 당신의 애창곡인 “사아아고오옹의 밴노오오래…”를 불렀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치마를 끌며 흉내 내기에 바빴다. 바지랑대에는 고추잠자리가 선명하고 텃밭의 과꽃이 오후 햇볕에 졸고 있던 어느 더운 여름날의 풍경이다.

유년시절과 ‘중년 증상’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이상하게도 어제 일은 생각나지 않는데 아득한 과거의 일이 어제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주변에선 이를 ‘중년 증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 시절 지겨울 만큼 부르던 ‘클레멘타인’은 이제 섭섭하게도 더 이상 이 땅에서 잘 들리지 않아 기억 속 노래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가끔 술자리에 이어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을 들을 때 불현듯 또렷하다 못해 어제 같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침이면 이슬 머금은 노란 호박꽃이 담장 위에 무성하고, 밤이면 마당 구석에 피워놓은 매운 모깃불에 눈물짓던 그런 유년의 날들이다. 그래서 ‘목포의 눈물’을 듣는 순간 나는 예닐곱 살 소년으로 돌아가 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그 옛날 시골집 아이가 돼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호남선 열차에 몸을 던져 서너 시간 달리다보면 목포역이 나온다. 기차가 플랫폼에 닿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노래. “사아아고오옹의 밴노오오래….” 그 옛날 이난영이 부른 이른바 오리지널 ‘목포의 눈물’이다. 목포의 노래로, 나아가 전남의 애국가로, 이제 전설이 된 해태타이거즈의 공식 응원가로,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십팔번’으로 기억되는 바로 그 노래다. 목포역장이 스스로 결정했는지, 아니면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인지 확인할 길 없지만, 열차가 오고 갈 때마다 목포역에는 늘 ‘사공의 뱃노래’가 흘러나왔다.

목포항도 마찬가지다. 까마득한 대학시절 홍도, 흑산도를 다녀오던 길에 이용한 목포항 연안부두 선착장에서도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불과 얼마 전에 찾아갔을 때도 ‘목포의 눈물’은 구성지게도 흘러나왔다. 목포에는 눈물이 그칠 날이 없나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애달픈 정조’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울린 노래 ‘목포의 눈물’은, 그러나 격변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정치적인 노래로 탈바꿈한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특별히 호남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래 제목을 두고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호남의 눈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전라도를 배경으로 한 노래는 1930년대 ‘목포의 눈물’을 시작으로 1950년대 ‘비 내리는 호남선’을 거쳐 1980년대 김수희의 ‘남행열차’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호남선 트리오’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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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 · 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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