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을 권력의 시녀라고 하듯이 평론가들을 출판 자본의 시녀라고도 한다. 문학권력 빅3는 모두 문예지를 출간하고 문학상 제도를 시행한다. 이를 통해 작가의 등단에서부터 문학적 권위를 부여하는 일까지 일관공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상식적으로 평론가는 출판 자본이나 작가들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이들은 반대로 시장의 윤활유 구실을 한다. 대단치도 않은 작품에 예술성을 부여하고 마케팅 포인트까지 제공한다. 이런 평론은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다는 의미에서 ‘주례사 비평’으로 불렸다.
신경숙의 남편 남진우는 평론가 출신이다. 이응준은 남진우에 대해 “여러 문인을 표절작가라며 그토록 가혹하게(아아, 정말로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괴롭혔다”고 묘사한다. 남진우는 진정 싸움닭 같은 평론가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작가들에겐 주례사 비평을 선사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다. 남진우가 주축인 문학동네는 1993년 설립됐다. 창비나 문지에 비해 역사는 짧지만 매출 규모에선 수위를 고수한다. 이런 초고속 성장의 신화 덕분에 문학동네는 출판가의 벤처기업으로 통한다.
‘주례사 비평’과 베스트셀러
신경숙은 1993년 ‘풍금이 있던 자리’로 주목받은 후 한 일간지에 ‘깊은 슬픔’을 연재했다. 그러나 이 연재는 어떤 사정인지 중단되고 말았다. 이를 문학동네가 1994년 장편소설로 묶어 출간한다. 당시 문학동네는 순수문학 작품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언론 광고를 내며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이런 모험 덕분인지 ‘깊은 슬픔’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후 문학동네의 성장사는 한국 대기업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대대적인 물량공세로 젊은 작가들을 저인망식으로 영입했다고 한다. 파격적인 광고 집행, 주례사 비평이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이는 작품성과 상업적 성공 간의 괴리를 빚었다.
문학평론가 김정란은 신경숙에 대해 스타 마케팅 덕에 ‘웃자랐다’고 평가한다. 신경숙은 자본이 만들어낸 문단의 아이돌이었던 걸까.
신경숙은 세 번째 책 ‘외딴방’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다. 소설 뒤에 평론가들의 해설이 실렸다. 이를 통해 소설은 예술적 권위를 부여받았다.
순수문학은 다른 말로 근대문학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특정 시기에 통용되던 문학 방식이다. 선진국일수록 이런 문학은 거의 사라졌다. 서사의 중심은 영상으로 넘어가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문학판을 떠난 지 오래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문학은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이다.
한국에서 근대문학이 늦게까지 연명한 데는 독재정치와 민주화가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1980년대엔 소설책이 100만 부씩 팔렸고 시집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곤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한국 사회의 비정상성이 갑자기 사라지자 문학 시장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러한 위기는 일부 출판사에 새로운 기회가 됐다. 신경숙은 대중성을 갖춘 순수문학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신경숙이 창비에 미친 영향을 보면, 2008년 127억 원이던 매출이 그해 말 ‘엄마를 부탁해’가 출간된 후 2009년 192억 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신경숙 효과가 절정이던 2011년엔 300억 원까지 올랐다. 그런 과정에 표절 의혹이 묵인됐는지 모른다.
김누리 중앙대 독문학과 교수는 “미문(美文)주의의 위기”라고 말한다. 너도 나도 아름다운 문장을 짓는 데에 열중할 뿐이지 인간과 시대에 대한 고뇌와 성찰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작품성은 작품성대로 저평가를 받는다. 나아가 스토리로서의 가치도 현저히 낮아 한국 소설은 ‘핵노잼’이라는 비난을 곧잘 듣는다.
사실,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작가들은 선배 문인들에 비해 협소한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이들은 삶의 무대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 만주벌판, 남방에 이를 만큼 광대했다. 비록 그 인생은 고달팠지만 말이다. 6·25라는 대사건은 전쟁문학을 남겼다. 전쟁은 잔인한 것이지만 인간의 극한 상황을 경험한 것은 작가에게 큰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작가들은 대개 공간적으로는 한반도 남단을, 시간적으로는 현재시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시대를 주도할 담론이나 남다른 이야깃거리가 나오기란 쉽지 않다.
창작기능인 양성소
한국문학이 획일화한 원인으로 ‘대학 문예창작학과’라는 작가 양성 시스템도 비판을 받는다. 이것은 창작기능인 양성소다. 소설가가 주문생산자로 전락한 것은 이런 교육 시스템의 당연한 귀결이다. 문예창작학과 출신으로 등단 30년차를 맞은 신경숙이 지속적으로 표절 논란을 일으킨 것은 필사와 표절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그의 과 동문인 조경란도 ‘혀’라는 작품으로 표절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미문을 추구하는 작가는 표절 논란에 빠지기 쉽다. 여기저기에서 괜찮은 문장을 수집해 써먹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미문형 필사 기능인들이 문단을 장악하면서 소설 시장에는 ‘문학소녀들’만 남은 듯하다. 고급 독자들은 모두 소설 시장을 떠났다는 진단도 나온다.
신경숙의 최고 히트작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서도 표절 의혹이 제기되는 실정이다. 이 소설은 한국 문학을 대표해 해외로 진출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망신살이 해외에까지 뻗치게 된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 영문으로 출간됐을 때 한 미국 평론가는 “김치 냄새 나는 크리넥스 소설”이라는 신랄한 비평을 남겼다. 미국에선 주례사 비평이 안 통한다. 내부자로서의 이해관계를 벗어나면 그 본질이 정확히 보인다.
남진우는 아마 계속 침묵할 것 같다. 부인의 일이라는 점에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평론가로서는 사실상 절필한 셈이다.
백낙청은 내년 총선거에서 정치활동을 할지 주목된다. 그의 사회적 발언권은 문학적 성취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사회는 표절 논란 작가에게 절필을 요구한다. 그런 작가를 키워 큰 수익을 올려온 출판자본가는 계속 사회적 발언을 해도 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신경숙 뒤의 백낙청은 한국 문학의 기둥인가, 우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