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중에 제일 예쁜 여자가 있어요?”
“있지. 아, 있지. 있어요. 젊어서 스위스에서 본 여자야.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올라오던 여자였지. 우연히 쳐다보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어. 사람이 너무 고와도 사람이 죽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녀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요. 예쁜 여자를 자꾸 보면 빨리 죽을 거야.”
선생은 그때 생각을 하시는지 빙그레 웃으면서 “너무 아름다운 건, 남을 병들게 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청춘의 한 시절, 이제는 지나가버린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에 선생과 비슷한 나이였다면 천상의 어느 곳으로 갔거나, 장미로 피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선생이 좋아하는 꽃 장미로 이어졌다.
“내가 꽃을 사랑하는데 말이지요. 장미를 사랑하지요. 꽃도 미운 놈이 있어요. 붉은 장미를 보고 있으면 그 빛에 검게 보일 때가 있지요. 장미가 제일 아름다워요. 내 시에도 장미가 제법 등장하지요. 어려운 시절에 꽃집 앞을 지나가다가 내 눈을 붙잡는 장미를 발견하고 무턱대고 들어갔지요. 내가 장미꽃을 파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주인이 꽃집에서 꽃을 파는 거지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비싸게 부르지 마시오, 내가 돈이 없으니 말이오. 그랬더니 돈이 없으면 사지 말고 보기만 하라는 거야. 돈이 없어도 한 송이를 샀어요. 그날 장미를 가지고 집으로 와서 밤새도록 봤어요. 그리고 아침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어 봤어요. 장미 꽃잎이 모두 몇 갠 줄 알아요?”
언젠가 문학평론가 김재홍 선생이 달걀 한 개 값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는데, 선생이 150원이라고 웃으면서 알려줬다. 시인이라면 달걀 1개 값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오래 남았다. 우리는 주로 한 판을 사고 돈을 낸다. 장미 꽃잎이 몇 장인지도 노시인에게서 받은 화두 같은 질문이었다. 역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선생이 웃으며 알려주셨다.
“모두 쉰두 장이었어요.”
장미는 52장의 꽃잎으로 이뤄진 꽃이다. 꽃이 꽃잎이 되는 순간 지는 것이다. 꽃잎이 떨어진다는 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날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꽃은 덩어리로 지는 것이 아니라 눈송이처럼 한 잎 한 잎 떨어져 사라진다. 지난 봄날에 본 매화 꽃잎이 떠올랐다. 선생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선생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씀은 잘 간직하고 있었다. 기분에 따라 젊은 시절로 갔다가, 중년으로, 어린 시절에서 다시 노년으로 선생은 자유롭게 자신의 전 생애를 돌아보면서 소풍을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송이의 장미도 여러 겹의 꽃잎으로 이뤄져 있다. 숲은 풀과 나무, 샘과 바위로 이뤄져 있다. 그 어떤 인생도 꽃잎처럼 낱장으로 뜯어내면 모두가 작고 귀한 것이다. 우리가 좌절하는 순간은 인생을 덩어리로 보기 때문이다. 탐욕덩어리, 욕망덩어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과연 인생은 낱장으로 뜯어낼 수 없는 덩어리일까, 아니면 꽃잎처럼 서로 떨어져 이뤄진 것일까. 삶을 거대한 덩어리로 생각할 때 당신은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삶의 디테일에 주목하면 작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위대한 작품의 포인트는 디테일에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어떤 시련이 다가온다면 그것을 꽃잎 한 장처럼 떨어지는 것이려니 생각하시길.
선생이 지나온 좁은 문들
올해 황금찬 시인의 시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황금찬 문학상’이 제정됐다. ‘문학신문’과 문예지 ‘문학광장’이 주관하는 제1회 수상자들의 이름을 보면서 선생이 자주 다니던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을 서성거렸다. 5월 23일 혜화아트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선생이 재직한 동성고등학교 옆, 시상식 장소 역시 정감이 있다. 감회가 새롭다.
이제 선생은 우리 시문학에 이정표로 남을 수 있는 큰 나무처럼 우뚝하시다. 하지만 선생은 언제나 기둥이나 뿌리이기보다는 줄기로 남기를 원한 분이다. 세속적인 명예를 초탈해 그저 허허 웃으면서 묵묵히 시를 적었다. 문체나 사상보다는 정신이 더 드러나는 선생의 시는 간혹 욕심 사나운 문장에 회초리를 드신다. 가령 이런 시다.
회초리를 드시고
‘종아리를 걷어라’
맞는 아이보다
먼저 우시던 어머니
-시 ‘회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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