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그런가. 왜 자신의 삶인데 즐겁게 살지 못하고 힘들다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살아야만 하는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교육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인성이 메마르고 체육이 사라지고 다스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남긴 가장 뛰어난 유산이 지혜로운 삶의 방법론이었음에도 이를 까맣게 잊고 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유산 중 일부를 지금의 시대에 되살려 정말로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한번 되새김할 때다.
몸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그 진동수를 낮추어 다르게 드러낸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몸이 그 진동수를 높여 보이지 않게 한 것이다. 몸이 곧 나라는 믿음은 운전자 없는 자동차를 믿는 것과 같다. 바야흐로 몸을 통해 마음공부에 들어가는 시대다. 역사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아야 변화하는 시대의 신인류가 된다. 적응자는 생존이요, 부적응자는 퇴출이다.
나는 기(氣) 수련을 하는 명상가다. 이를 체험하고 학문화하는 데 30여 년을 투자한 사람이다. 주변에선 나를 도사라고 한다. 기학박사이기도 하다. 내 자랑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까닭은 도사는 예언을 하고 박사는 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요인이 딱 겹치면 세상의 변화를 미리 읽을 수 있다. 앞으로 변화하는 세상을 예측적인 면에서 살필 수 있고 예언적인 변화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말하건대, 시대정신이 개인의 위대함, 스스로 각성하는 시대로 변화할 것임을 예언한다. 산업화, 정보화 시대를 거쳐 영성의 시대로 바뀔 것임을 예측한다. 다른 말로 하면 물질주의 시대에서 정신의 시대로 변증법적 변화를 이룰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예를 두어 개만 들자면 간단하다. 경제라고 이름 붙여진 생존의 시대는 한계에 다다랐음이 첫 번째다.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1000만 년 전(이것은 고고학의 역사적 사실이 아닌 수련자들의 내부적 정보다)부터 지금까지 인간의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첫째도 생존이요, 둘째도 생존이다. 생존이 뒷받침됐을 때 가치 실현의 욕심이 드러났다.
그 생존의 철학이 모든 문제의 알파요 오메가다. 생존이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족 보전의 욕심이 뒤따라 나타난다. 개인 중심의 확대가 가족인 것은 종족 보전의 울타리인 것이다.
몸 가지고 놀기
이것이 해체되고 있다. 시집장가를 안 가고 자녀 생산이 둔화된다. 단순히 경제적 면에서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지만 시대정신의 변화에 대응하는 인간 본성의 외부적 드러남이 답이다. 생존의 욕망과 종족 보전의 욕망에서 인간 개개인의 영성의 발로가 시작됐음을 뜻한다. 내 자신의 소멸이 몸의 사라짐뿐이지 생명 그 자체의 흐름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무의식이 알아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