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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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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의 고향

새뮤얼 데이비스(Samuel C. Davis)는 호러스 스워프(Horace M. Swope)와 함께 1940년 미술관의 소장품 목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의 창시자인 드와이트 데이비스의 형. 그는 1893년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미술품 수집을 위해 세계 여행을 다닐 정도로 미술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202점이나 되는 중국 도자기를 포함해 수많은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호러스 스워프 역시 하버드를 졸업한 지식인으로 700점이 넘는 인상파 작품을 비롯해 광범위한 장르의 작품을 미술관에 넘겨줬다.

퓰리처상(Pulitzer Prizes)은 유명한 저널리스트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의 손자 조지프 퓰리처 주니어 역시 세인트루이스 태생의 저널리스트로 1940년대 후반부터 50여 년간 변함없는 미술관 후원자였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현대 작품을 많이 기증했다.

이처럼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이 지역 부자와 명사들의 기여로 명문 미술관으로 성장했다. 미술관 설립 초기인 1917년에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큰 담배회사를 경영하다 작고한 대니얼 캐틀린의 부인이 바비종파와 헤이그파 그림을 30점 기증한 바 있다. 1920년대에 와서는 주물공장과 철도사업을 운영하던 윌리엄 빅스비가 중국 작품들을 미술관에 헌납했다. 그는 미술품 수집을 목적으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까지 여행했다.

제약업으로 부를 쌓은 제임스 발라드는 카펫에 미친 사람이다. 그는 카펫을 수집하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40개가 넘는 나라를 찾아다녔다. 1929년 70여 장의 카펫을 미술관에 기증했고, 딸에게 물려준 카펫 중 일부도 그 딸이 1972년 미술관으로 보냈다.



1950년대에는 변호사이자 은행가인 제이 라이언버거 데이비스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균형 있게 수집한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해 소장품 목록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 또한 중개회사 점원으로 시작해 투자중개업 등으로 대부호가 된 마크 스타인버그는 아내와 함께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유럽의 근·현대 회화와 조각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부부의 딸과 사위도 미술관의 주요 후원자로 활동했다.

시드니 쇤버거는 백화점과 금융업을 하면서 큰돈을 번 사업가다. 그는 1955년 쇤버그 재단을 만들어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 큰돈을 기부했다. 미술관은 이 돈으로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팝아트 등 2차 대전 후의 미국 현대 그림을 대량 구매할 수 있었다. 그의 두 아들도 미술관 후원을 이어나갔다.

베크만과의 인연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막스 베크만, ‘푸른 재킷을 입은 자화상’, 1950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독일 표현주의의 대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다(미술사가들은 베크만을 표현주의로 분류하지만, 화가 스스로는 표현주의라는 사조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다). 미술관은 큰 전시실 하나를 그의 작품으로 가득 채워놓았다. 이는 베크만과 세인트루이스 사이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고, 모튼 메이(Morton D. May)라는 부호 덕분이기도 하다.

베크만은 독일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매우 지적인 화가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이미 크게 성공한 화가였고, 렘브란트와 피카소처럼 한평생 자화상을 그려온 작가로도 유명했다. 1925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예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러나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리던 그의 인생은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헝클어지고 말았다.

1933년 베크만은 문화 반역자로 몰려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1937년부터는 그의 작품도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작품은 몰수됐고, ‘타락 작품’이란 딱지가 붙여진 채 별도 전시되기도 했다. 베크만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0여 년간 가난에 찌들린 채 숨어 살았다. 미국으로 탈출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44년, 심장병으로 고통받던 이 60대 노인은 군대로 소집될 뻔도 했다. 이런 연유에서 그의 암스테르담 시절 작품은 이전 작품에 비해 치열한 인생이 녹아 있다고 평가받는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베크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바로 여기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과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돼 그의 많은 작품이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 남게 됐다.

또한 백화점 부호 모튼 메이는 5100점이 넘는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는데, 그중에는 베크만 작품이 많았다. 모튼은 ‘메이 백화점’ 설립자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부모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면서 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그의 첫 수집 작품이 베크만의 것으로, 그는 이후 독일 표현주의에 깊게 매료되었다.

미술관이 소장한 베크만의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푸른 재킷을 입은 자화상(Self-Portrait in Blue Jacket)’이다. 그는 죽기 직전인 1950년에 이 그림을 그렸다. 담배를 꼬나문 채 어느 한곳을 응시하는 모습은 이지적이고 사색적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와 자신감을 되찾은 남자가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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