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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이 다시 쓴 6·25전쟁 16大 쟁점

내쟁적 요소 지닌 국제전…스탈린이 휴전회담 막아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김학준이 다시 쓴 6·25전쟁 16大 쟁점

  • 어느덧 광복 이후 최대의 민족 참사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한민족 모두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했다. 이 계제에 이 전쟁을 둘러싼 수많은 쟁점 가운데 16가지만 가려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전쟁이 남긴 유산을 앞으로 어떻게 청산하고 무엇보다 이 전쟁이 남긴 강고(强固)한 남북 대결체제를 와해시켜 궁극적으로 남과 북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길로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작업은 훗날의 과제로 남기기로 한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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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의 출발점: 전쟁의 명칭을 규정하는 방식

이 전쟁의 쟁점들 가운데 출발점은 명칭에 관한 논쟁인데,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전쟁의 명칭을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학계에서 어떤 전쟁의 명칭을 정할 때 몇 개의 기준이 있다. 첫째, 전쟁이 일어난 장소 또는 국가의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스파르타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쟁은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명명했고, 19세기 초기에 미국이 멕시코의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멕시코와 벌였고 결국 미국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이 전쟁에 저 유명한 알라모전투가 포함된다-은 멕시코전쟁으로 명명했다. 

19세기 중엽 제정러시아가 터키의 크리미아반도를 군사점령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파병해 러시아를 패퇴시킨 전쟁은 크리미아전쟁으로 명명했다. 바로 이 전쟁 때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명성이 확립됐다. 

20세기에 들어와 일제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마침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다가 패망하고 말았는데, 스스로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 또는 ‘대동아민족해방전쟁’이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에 대항해 싸운 미국은 이 전쟁을 ‘태평양전쟁’으로 명명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 일어난 전쟁들을 살펴보자. 베트남에서 일어난 남·북베트남 사이의 전쟁에 미국이 참전했으며 결국 북베트남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명명했고, 이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전장(戰場)이 이웃 라오스와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자 인도차이나전쟁으로 명명했다. 194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중동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아랍권 사이의 전쟁은 경우에 따라 팔레스타인전쟁 또는 수에즈전쟁으로 불렀으나 전반적으로 중동전쟁으로 명명했다. 

1970년대 영국이 포클랜드를 되찾으려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벌여 승리를 거둔 전쟁은 포클랜드전쟁으로, 그리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괴뢰정부를 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결국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전쟁으로 명명했다. 



둘째, 전쟁의 상대방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고대 로마가 오늘날의 레바논 일대에서 상업국가를 세웠고 오늘날의 튀니지 일대에 진출한 페니키아(당시 로마인들의 발음으로는 포에니) 사람들을 상대로 두 차례에 걸쳐 싸운 전쟁은 포에니전쟁으로 명명했다. 오늘날의 튀니지에 자리를 잡았던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 활약했다. 

19세기 전반에 영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된 연합국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상대로 싸우면서, 이 전쟁을 나폴레옹전쟁이라고 불렀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남부에 이미 정착해 국가를 세운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그 네덜란드인을 통칭한 보어(Boer)를 따서 보어전쟁이라고 불렀다. 훗날 영국의 총리로 선출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정하게 이바지한 처칠은 이때 종군기자로 참전해 전쟁의 실상을 영국에 널리 알렸다. 

셋째, 교전국 쌍방의 이름을 함께 넣는 방식이다. 유럽에서 프로이센(한문으로 普露西亞, 영어로 프러시아)과 프랑스가 벌인 보불전쟁이 그 한 보기다. 이 전쟁의 이름을 들으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알자스로렌이다. 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는 이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방식으로 명명된 사례는, 아시아에서 청국과 일본이 벌인 청일전쟁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 미주에서 미국과 스페인(한문으로 西班牙)이 싸운 미·서전쟁,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함으로써 시작된 중·일전쟁 등이다. 중국이 통일된 베트남(한문으로 越南)을 상대로 벌였으나 승패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끝난 전쟁은 중·월전쟁으로 명명됐다. 

넷째, 전쟁의 어떤 뚜렷한 특징으로써 명명하는 방식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이 청을 상대로 아편을 마구 팔아 아편중독자가 늘어나자 청에 수입된 영국의 아편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일어났고, 결국 영국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을 아편전쟁으로 명명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비슷한 사례가 제4차 중동전쟁인 ‘욤 키푸르 전쟁’이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참패한 이집트와 시리아는 복수심에 불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바로 이날은 유대인의 전국적 큰 행사 ‘욤 키푸르’ 곧 ‘성스러운 속죄일’이었다. 이스라엘이 방심한 틈을 노린 것이었다. 

다섯째, 전쟁의 기간을 중심으로 명명하는 방식이다. 14세기로부터 15세기까지 1세기에 걸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간헐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난 전쟁은 백년전쟁으로 명명됐다. 1967년 발발해 이스라엘의 승리로 귀결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만에 끝났기에 6일전쟁으로도 불렸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 모세 다얀이 세계적인 장군으로 떠올랐다. 

여섯째, 많은 열강이 개입한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대표적 사례다.

전쟁의 명칭을 둘러싼 논쟁

그러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7개월에 걸쳐 진행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어떻게 명명돼 왔는가. 일본은 남북한 전체를 ‘조선’으로 통칭하는 관행을 적용해 ‘조선전쟁’으로 명명했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에서는 압도적으로 ‘코리안 워(Korean War)’를 사용했다. 프랑스어권이나 독일어권 그리고 러시아어권에서는 모두 ‘코리아의 전쟁’으로 번역될 수 있는 명칭을 사용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개전 초기에는 ‘6·25사변’ ‘6·25동란’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면서 그것이 ‘사변’이나 ‘동란’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 국제정치학이 말하는 전쟁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해 곧 ‘한국전쟁’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명명은 우리로서는 어색하다. 흔히 ‘한국’이라고 하면 그것은 대한민국을 가리키는데,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대한민국 안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조선인민에 의한 정의의 조국전쟁’ 줄여서 ‘조국해방전쟁’ 또는 ‘정의의 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명명은 소련이 나치독일의 침략을 받아 거기에 저항한 전쟁을 ‘조국수호를 위한 위대한 애국전쟁’으로 부른 전례와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나치게 북한 중심적인 것이면서 일방적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민족적 참극을 초래한 사실을 가리고 있다. 

유엔군의 성공적인 반격으로 북한 정권의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서 북한 정권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은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 아래 파병했는데, 이 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일본의 명명이나 북한의 명명은 물론이고 중국의 명명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두 자기네 입장에서의 명명이기 때문이다. 

이 명명들을 모두 거부하면서, 김창순 전 북한연구소 이사장은 ‘6·25남침전쟁’이라는 명칭을 제시했다. 그것이 이 전쟁의 진상을 말해주는 것이기는 하나, 참전국들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많은 나라가 개입한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흠이 있고 또 외국의 연구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영춘 전 단국대 교수는 ‘김일성 공난(共亂)’이라는 명칭을 제시했다. 중국의 ‘예(禮)’에 따르면, 정통성을 가진 국가나 정부를 상대로 비정통 세력이 무력을 동원해 대항하는 경우를 ‘난’이라고 하며 그래서 한 예를 들면 홍경래의 무력 동원도 ‘홍경래의 난’이라고 하는데, 김일성의 남침전쟁이야말로 정통성을 가진 대한민국을 상대로 비정통 세력인 김일성이 무력을 동원해 대항했기에 ‘김일성의 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김일성이 ‘공산주의자’인 것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김일성 공난’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제의였다. 

이러한 모든 사례를 검토한 뒤 국내의 많은 연구자는 ‘6·25전쟁’이라는 명칭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물론 이 명칭에도 문제는 뒤따른다. 우선 세계의 어떤 전쟁에도 개전일을 앞세운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교수와 영국의 존 할러데이(Jon Halliday) 교수는 이 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전쟁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48년의 ‘제주도사건’-보기에 따라서는, ‘제주도반란’ 또는 ‘미군정의 단선단정노선에 반대하는 통일지향적 저항운동’-에서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의 ‘여순사건’ 및 38도선에서의 남북 무력 대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국내의 어떤 학자는 “이 명칭은 6·25 직후에 남한에서 고조된 반공적·반북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외치던 구호 ‘상기하자 6·25’를 연상시켜 남북 화해를 지향하는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 명칭의 사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38도선 주변에서 남과 북 사이의 무력 충돌은 1949년 이후, 특히 1950년에 들어와 이전 시기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한반도 내적 상황을 살펴보면 북한의 김일성이 개전하지 않았다면 이 전쟁은 회피될 수 있었다는 판단이다. 김일성은 1949년에 이어 1950년에도 소련을 찾아가 스탈린과 회담하면서 남침일을 6월 25일로 특정하는 데 합의했다. 그렇기에 ‘6·25전쟁’이라고 명명하는 데 일정하게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전쟁’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미국과 일본의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 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을 대체한 동북아시아전쟁’으로 명명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경청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내전이었나 국제전이었나

이 전쟁을 둘러싼 또 하나의 쟁점은 내전이었나 국제전이었나에 관해서다. 미국과 영국의 어떤 연구자들은 이 전쟁이 내전이었다는 해석을 제시하면서, ‘코리안 시빌 워(Korean Civil War)’라고 명명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과 북으로 나뉜 쌍방이 대결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해 ‘민족해방전쟁’ 또는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해석도 제시했다.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룸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지닌 북한이 친일파들이 주축이 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지니지 못한, 극단적으로 말해, ‘반민족적’ 남한을 상대로 ‘해방전쟁’을 수행했다고까지 강변했다. 

일본에서도 내전설이 유력하다. 다만 “내전으로 시작됐으나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됐다”는 해석이 뒤따랐고, 오늘날에는 대체로 이 해석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국제적 내전설’이다. 

대조적으로 서방세계의 연구자들은, 특히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 전쟁을 국제전으로 파악한다. 개전에 앞서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에 밀약이 있었고 마오쩌둥이 이 밀약에 뒤늦게나마 가담했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리고 이 밀약에 따라 특히 스탈린이 여러 방면에서 김일성을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에 미루어, 이 전쟁은 세 공산국가의 밀약에 따라 시작된 전쟁이었고, 거기에 대항해 서방국가들이 참전함에 따라 확대된 만큼 국제전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것이 진상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전쟁에는 내쟁적(內爭的) 요인이 깊이 개입돼 있다. 이 전쟁에 앞서 남과 북은 상대방을 자신에게 흡수시키려는 정책을 공공연히 추구했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비를 확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필자는 이 전쟁은 국제전이었다는 해석을 지지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 스탈린과 김일성의 밀약, 개전에 대한 스탈린의 명시적 지시와 지원, 그리고 마오쩌둥의 동의 등이 이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러나 내쟁적 성격을 일정하게 인정해 ‘내쟁적 요소를 지닌 국제전’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맥아더가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6·25 전쟁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운데).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6·25 전쟁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운데).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이 전쟁이 북한의 남침 개시로 시작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점은 어느 무엇보다도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넘겨준 옛 소련의 기밀 문서에서 재확인됐다. 우리는 이 문서를 ‘옐친문서’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나 이 문서가 공개되기 이전에는 미국이 한국을 부추겨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이 특히 미국학계 일각에서 제기됐다. 그 대표적 연구자가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 교수였다. 그는 혐의를 일차적으로 미국의 극동군총사령관이던 맥아더 원수에게 씌웠다. 1949년 10월 1일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을 붕괴시켜 세계적 영웅으로 자리를 굳히고 그 기세를 몰아 1952년 실시될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려는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부추겨 북침을 감행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의 반격을 유도해 확전되도록 계획했다는 추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 맥아더는 어떤 판단에서 이 대통령을 부추겼다는 것일까. 그는 당시 이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서 야당의 공세 앞에 궁지에 몰려 있었고 그래서 그 역시 전쟁을 통해 반전의 탈출구를 찾고자 했다는 추론을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돼야 할 것은 그는 어떠한 1차 자료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추측’을 제시했을 뿐이었다. 

그러한데도 그가 쓴 책 ‘힘의 한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이 미국 주요 대학에서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채택됐기에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콜코 교수의 추론과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은 ‘한국군의 해주침공’을 내세웠다. 6·25전쟁 직전에 한국군이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 해주를 침공해 전단을 열자 북한이 반격을 가함으로써 결국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는 가설을 제시한 것이다. 이 가설 역시 옐친문서가 공개되기 이전에 쓰인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미국의 1차 자료를 철저히 점검한 정병준 교수와 이완범 교수 등에 의해 이 가설은 완전히 부정됐다.

애치슨 선언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미끼였을까

미국의 ‘북한 남침 유도’설에 연결되는 쟁점은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전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 관련됐다. 그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말하면서 한국을 제외했는데, 유도설을 제시한 연구자들은 이 연설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미끼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애치슨 발언에 앞서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1948년 이후 일관되게 한국을 제외하는 안을 본국 정부에 올렸고, 이는 공지의 사실로 밝혀져 있었으며 애치슨 연설은 그것의 재확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냉전사 분야에서 세계 제1인자라는 평을 받는 존 루이스 개디스(John Lewis Gaddis) 예일대 교수는 애치슨 연설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해석을 전면 부인했다.

김일성의 개전 제안을 처음에는 거부한
스탈린이 나중에는 승인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1950년 김일성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대화하고 있다. [Enemy in the Mirror 홈페이지]

1950년 김일성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대화하고 있다. [Enemy in the Mirror 홈페이지]

옐친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처음에는 평양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이어 194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거듭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승인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거절했다. 미국이 군사개입할 개연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전쟁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직접적 군사 대결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0년 3월 다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끈질긴 제의를 승인했다. 스탈린으로 하여금 태도를 바꾸게 만든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옐친문서에서도 이 물음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다음의 요인들을 제시했다. 

첫째,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사실이다. 스탈린은 늦게까지도 중국대륙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장악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예상을 깨고 중국공산당은 장제스가 이끈 중화민국을 타이완으로 밀어내고 대륙을 장악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스탈린으로 하여금 ‘이제 공산주의의 물결이 아시아를 휩쓸기에 이르렀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스탈린은 1950년 2월 모스크바에서 마오와 회담하고 두 나라 사이의 상호방위원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소동맹을 형성한다. 

둘째, 1949년 10월 소련이 마침내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됐다. 이로써 미국의 원폭 독점 시대는 끝이 났다. 연구자들은 이것 역시 스탈린에게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박헌영이 남침 계획을 반대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아닌가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1946년 여름에 월북했고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됐을 때 제1부수상 겸 외무상으로 임명된 박헌영이 수상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반대했다는 주장이 퍼져 있었다. 자신이 남조선로동당의 ‘마지막 지하총책’이었다고 주장하는 박갑동이 쓴 책들은 이 주장을 되풀이해 강조했으며, 심지어 박헌영을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추진했던 사람’으로까지 묘사했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옐친문서는 박헌영이 김일성을 따라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 앞에서 북한군이 내려가면 ‘지하의 남로당원들’이 일제히 호응해 봉기할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남침 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은 애초에 제한전을 추구했는가 전면전을 추구했는가

앞에서 거론한 콜코 교수는 ‘북한은 애초에 제한전을 추구했을 뿐 전면전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추론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을 상대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협상을 제의하면 남한이 당황한 상태에서 그 협상에 응할 것으로 계산했다고 추측했다. 그는 자신의 추론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사흘 동안 ‘남진’을 중단한 채 서울에 머물러 있었던 사실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추론 역시 사실이 아니다. 다른 문서들도 그러했지만 특히 옐친문서는 북한이 처음부터 전면전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북한군은 왜 사흘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나

앞에서 방금 말했듯,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더는 남행하지 않은 채 서울에 머물렀다. 이 사흘은, 막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겸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일권이 회고했듯, 대한민국을 살려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정 총장에 따르면, 이때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남행을 계속했더라면 미군이 개입할 시간 여유가 없었고 대한민국은 결국 궤멸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북한군의 사흘 서울 체류에 대해 토론을 계속했다. 

그 결과, 춘천지구에서 국군의 선전과 선방으로 북한군 가운데 주요 부분이 그곳에 묶여 서울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훗날 공개된 소련 문서에 따르면, 북한군이 서울을 ‘완전’ 점령했다는 기존의 설명에 문제가 있었다. 서울의 중요한 부분들을 점령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영등포를 비롯한 외곽 지역은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과 평양의 본부 사이에 교신이 불충분해 본부가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남행 지시를 서둘러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의 개입은 정당했는가 정당하지 않았는가

6·25전쟁 중 수원에서 북진하는 
유엔군 탱크부대.  [동아DB]

6·25전쟁 중 수원에서 북진하는 유엔군 탱크부대. [동아DB]

쟁점 2에 연결되는 또 하나의 쟁점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의 개입이 정당했는지에 연관된다. 북한은 물론이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 모두 그리고 중립국가들 가운데 일부는 정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내전설을 제시하는 연구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것이 정당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한 민족 사이의 내전에 왜 외부 세력이 개입했느냐고 그들은 힐난했다. 

서방세계에서 좀 더 극단적 견해를 제시한 연구자는 호주국립대학교의 저명한 역사학자 게이븐 매코맥(Gavan McCormack) 교수였다. 그는 “그때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이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빨리 끝났을 것이며 비록 숙청이 뒤따랐다고 해도 그 숙청은 친일파를 비롯한 반민족 세력에 국한됐을 것이고 그 수는 많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들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이 3년 이상 계속되면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게 됐다”라고까지 썼다. 

필자는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의 개입은 정당했다고 판단한다.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에 이미 유엔이 관여했으며, 만일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유엔의 결의에 따라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붕괴는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대한민국이 북한에 의해 붕괴됐더라면 남한에 대해서도 북한식의 무자비한 공산통치가 시행됐을 것인데, 그것이 가져왔을 참극은 참으로 끔찍했을 것이다. 

현대 문명국가에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 권리가 부인되는 국가는 비문명적이면서 폭압적인 전체주의 국가일 뿐이다. 아무리 ‘친일파’였고, 또 북한이 말하는 ‘반민족분자’ 또는 ‘반동분자’라고 해도 정당한 재판을 받아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이 남침 직후의 일정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점령 지역에서 자행한 ‘인민재판’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유엔군의 38도선 월경과 북진은 정당했는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반격이 개시되고 대한민국으로서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던 낙동강전투에서 북한군을 패퇴시킴으로써 승기를 잡은 유엔군 그리고 국군은 북진을 계속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통해 마침내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으로 북진을 계속했다. 이 시점에서, 노동당이 이끄는 영국 정부를 비롯해 서방국가들 안에서는 38도선에서 정지할 것을 제의했다. 이제 이른바 전전원상(戰前原狀)이 회복된 만큼 여기서 전쟁을 멈춰야 하며, 만일 38도선 이북으로 진군을 계속하면 전쟁이 확대되면서 소련군이나 중공군이 개입할 수도 있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3차 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그 이후에도 몇몇 학자에 의해 되풀이됐다. 그때 전쟁을 멈췄더라면, 이 전쟁은 약 3개월 만에 끝날 수 있었고 피해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 전쟁은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귀결됐는데 휴전선이 38도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2년을 더 싸우며 엄청난 피해를 낸 뒤 사실상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으니 이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느냐고 그들은 반문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수긍할 만한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깊이 더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다. 우선 당시 대한민국 국민 사이에 확산돼 있던 “이 기회에 통일을 성취하자”는 열망이었다. 특히 8·15 광복 이후 북한에서 공산통치를 경험하고 혐오를 느껴 월남한 국민은 거의 모두가 북진통일을 고대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대한민국의 어떤 통치자가 억제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미국 정부는 북진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래서 미국 정부의 주도 아래 유엔 총회는 유엔군의 38도선 월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개시한 북한은 패퇴를 거듭하면서도 정전할 뜻이 전혀 없었다. 훗날 공개된 중국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 정부에 대해 “우리는 산으로 들어가서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진을 원산만~대동강 선에서 멈추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을까

학계 일각에서는, 유엔군의 38도선 이북 진격을 지지하면서도 ‘그때 북진을 원산만과 대동강을 잇는 선에서 멈추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 선에서 멈췄더라면, 훗날 중공군이 개입할 여지를 없앨 수 있었고, 또 그 선에서 멈춘 경우 북한의 ‘영토’는 극도로 제한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북한이 하나의 ‘국가’ 또는 ‘정권’으로 존속하기 어려워 결국 자연스럽게 붕괴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때의 국민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도저히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그러한 결정을 내렸더라면 우선 군부의 저항 더 나아가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을 개연성이 높다.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맥아더의
주장에는 암수가 끼어 있었나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그리고 유엔군 일원으로서 국군의 진격이 계속되면서 서방세계에서는 중공군의 개입 개연성이 예고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중공군이 결국 군사개입해 전쟁이 길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을 지휘하던 맥아더 총사령관은 반론을 폈다. 자신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압도된 중공이, 더구나 이제 ‘건국’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중공이, 감히 파병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을 뒤엎고 중공은 1950년 10월 파병했고, 이로써 이 전쟁은 맥아더의 표현대로 ‘완전히 새로운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 사실에 대해 서방세계의 어떤 연구자들은 맥아더의 호언장담에 ‘암수’가 끼어 있었다고 추측한다. 중공군이 개입할 것을 내다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전쟁이 확대되면 될수록 중공을 상대로 전쟁을 지속할 명분이 분명해지고 ‘전쟁영웅’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은 커진다는 속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연구자는 오판이었다고 본다. 합동참모본부를 비롯한 본국 정부도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던 인천상륙작전을 극적으로 성공시킨 뒤 서방권의 찬사를 한 몸에 받게 되면서 ‘오만’해졌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오만에 취해 중공군은 감히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오판했다는 것이다.

중공군의 군사개입은 정당했나

한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에 도달해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이던 1950년 10월 하순 중공군이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통일의 꿈은 좌절됐다. 

어떤 연구자들은 중공군의 개입을 ‘정당’한 것으로 봤다. 그 근거로 우선 1950년 9월 30일 밤 중공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가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한 메시지를 지적한다. 여기서 저우는 “만일 남조선 군대가 38도선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겠다. 그러나 외국 군대가 38도선을 넘어 북상한다면 우리는 파병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함으로써, 국제법의 용어로는 ‘개전의 명분’을 제시했는데도, 트루먼 대통령이 이 경고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중공은 그 이후에도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에 도달하게 되면 그들은 곧 만주를 침략할 것이고 이어 중국대륙을 침략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시하면서 ‘보가위국(保家衛國)’의 논리를 전개했다. ‘집을 보호하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파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미국 정부는 유엔군이 그 국경을 침범할 뜻이 없음을 거듭 분명히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경에 대한 우려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국경에 대해 우려하면서 동시에 스탈린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스탈린은 중공이 유럽의 유고슬라비아처럼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걷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마오가 티토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마오는 이 의심을 풀어주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중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계산하고 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파병한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으로서는 통일의 호기를 빼앗기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그것으로 말미암은 분단의 장기화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바로 중공의 군사 개입에 있다.

유엔군은 과연 세균전을 실시했나

1951년 7월 휴전회담에 참석한 유엔군 대표들. [동아DB]

1951년 7월 휴전회담에 참석한 유엔군 대표들. [동아DB]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이 확대되고 길어지던 시점인 1951년 2~3월 소련과 중공은 그리고 그들에 뒤따라 북한은 유엔군이 세균전을 실시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유엔군을 맹비난했다. 미국은 그 ‘폭로’가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모략 선전이라고 맞받아치면서, 진상을 가리기 위해 국제적십자사에 조사를 요청하자고 제의했다. 그들은 이 제의를 거부했다. 

그 이후 많은 연구서가 출판됐다. 어떤 것은 공산 측의 주장에 기울어졌고 어떤 다른 것은 공산 측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최근의 연구는 밀튼 라이튼버그(Milton Leitenberg)가 1998년과 2000년 각각 발표한 논문이다. 옛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처에서 1998년 1월 12건의 문서을 찾아낸 필자는 이 문서에 근거해 중공과 북한 및 소련이 주장했던 미국의 ‘생물학무기 사용’은 근거가 없거나 조작된 것이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휴전을 어느 쪽이 지연시켰나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국제사회는 휴전 또는 종전이 빨리 성립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회담은 예상 밖으로 길어져 무려 2년을 끌었다. 인적 희생과 물적 손실이 커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되자, 휴전을 어느 쪽이 지연시켰느냐는 논쟁이 일어났다. 유엔군 측에서는 공산군 측에, 그리고 공산군 측은 유엔군 측에 각각 책임을 돌렸다. 

이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좌파’ 역사학자들은 트루먼 행정부에 책임을 물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을 비롯한 공산 세계의 ‘비인도주의적’ 성격을 세계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포로송환 문제가 제기됐을 때 ‘전원 송환’이 원칙인데도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를 확인하자’는 안을 앞세움으로써 회담을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인 ‘반공포로 석방’의 정당성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미국의 제안이 인도주의에 입각한 것은 확실하며, 이것을 거부한 공산 측에 문제가 있었다. 그동안 지연된 휴전회담이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으면서 급격한 진전을 보인 사실은 스탈린이 휴전회담 진전을 가로막은 장본인이었음을 방증한다.

6·25전쟁은 베트남전쟁의 전례였나

1960년대 말 이후 베트남전쟁이 격화하면서, 특히 미국의 베트남전쟁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심화됐고 그 과정에서 6·25전쟁에 대해 관심이 새롭게 커지는 가운데 6·25전쟁을 베트남전쟁의 전례로 파악하는 저술들이 출판됐다. 영국의 역사학자 칼룸 맥도널드(Callum MacDonald)의 ‘베트남전쟁에 앞선 코리아전쟁’이 대표적 사례다. 

그 저서들은 예외 없이 코리아에서의 전쟁과 베트남에서의 전쟁 사이에는 닮은 점이 많다는 상사론(相似論)을 제시했다. 독립운동가 호찌민이 이끄는 북(北)이 식민지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로 구성된 남(南)을 상대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이끄는 북이 식민지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로 구성된 남을 상대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것과 닮았다는 것이다. 코리아에서 북이 전개한 민족해방운동을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가로막았듯이, 베트남에서 북이 전개한 민족해방운동을 역시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가로막았다고 그 저서들은 지적했다. 

이 상사론을 제시한 대표적 정치인이 1972년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한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연방 상원의원이다. 그는 그러한 논리에서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켜야 하며 코리아에서도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상사론에는 문제가 있다. 베트남의 경우 남쪽에서도 호찌민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코리아의 경우 남쪽에서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사람은 토착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비록 대한민국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거나 불만을 가졌다고 해도 김일성을 지지하거나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베트남과 코리아의 큰 차이였다.

김학준
● 1943년 중국 선양(瀋陽) 출생
● 제물포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미국 켄트주립대 정치학 석사 미국 피츠버그대 정치학 박사
●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 제12대 국회의원
●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 한국정치학회 회장
● 단국대·인천대 이사장
● 동아일보 회장
● 現 단국대 석좌교수




신동아 2020년 6월호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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