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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앞으로’ 호암 앞에서 삼성맨은 나자빠졌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㉝]

반도체 신화 일군 결정구 “웨이퍼 크기 늘려라”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돌격 앞으로’ 호암 앞에서 삼성맨은 나자빠졌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㉝]

  • ● ‘피자의 도우’ 혹은 농사에서의 논밭
    ● 돈 먹는 장비만 가득한 반도체 산업
    ● 日 샤프도 5인치 기술뿐이던 시절
    ● 위대한 리더십, 위대한 팔로워십
    ● 이건희 회장이 스스로에게 한 다짐


5월 20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에서 만나 방명록 대신 반도체 회로가 새겨진 웨이퍼에 서명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됐다. 두 정상이 반도체를 통한 경제안보 동맹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방명록 대신 웨이퍼에 서명한 한미 정상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에서 서명한 반도체 웨이퍼.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에서 서명한 반도체 웨이퍼.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에서 최첨단 3나노 공정 반도체 웨이퍼에 사인을 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에서 최첨단 3나노 공정 반도체 웨이퍼에 사인을 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웨이퍼는 반도체 하면 떠오르는 반짝반짝한 동그란 얇은 판이다. 쉽게 말해 반도체 회로를 그려 넣는 도화지다. 주성분은 실리콘(규소)이다. 실리콘은 모래에서 추출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래가 웨이퍼로 탈바꿈한다고 생각하면 모래로서는 엄청난 신분상승(?)이 되는 셈이라고나 할까.

모래에서 추출한 실리콘 입자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둥근 용해로에 담겨 결정체로 만들어지는데, 회전 봉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녹아야 성질이 균일해진다. 이렇게 해서 추출한 원뿔 모양의 실리콘 결정체를 ‘잉곳(ingot, 녹인 금속을 일정한 형틀에 부어 응고시킨 것)’이라고 한다. ‘잉곳’을 동그란 형태의 소시지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얇게 썰어 만든 것이 웨이퍼다.

웨이퍼 크기는 지름에 따라 6인치(150㎜) 8인치(200㎜) 12인치(300㎜)로 나뉜다.(웨이퍼의 어원 Wafer는 얇은 조각을 뜻한다. 유럽에서는 얇고 바삭한 과자를 일컬었다. 우리가 ‘웨하스’라고 부르는 과자도 여기서 왔다)



반도체 산업이 처음 시작됐을 때는 3인치였다. 대한민국 최초 반도체 회사인 한국반도체가 바로 3인치 웨이퍼 제조공장을 갖고 있었다. 이후 1980년대로 들어서며 6인치가 주류가 됐다. 1990년대 8인치, 지금은 12인치 시대를 맞고 있다.

반도체 칩은 웨이퍼의 얇은 기판 표면에 미세한 회로를 새겨 만드는 데 우리가 흔히 먹는 와플을 생각하면 쉽다. 원형 와플에 새겨진 네모 칸 하나하나가 바로 반도체 칩이다.

‘잉곳’에서 얇게 썰어내 만들어진 웨이퍼는 표면을 거울처럼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연마 작업을 제일 먼저 거치는데 이걸 잘해야 정밀도가 높아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 본격적으로 반도체 회로라는 멋진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도화지가 완성되는 것이다.

반도체 종류와 제품 특징에 맞게 회로 패턴을 만드는 것을 ‘회로 설계’라고 한다. 건축물에 비유하면 집주인의 다양한 취향에 맞춰 침실, 부엌, 조명, 수도, 난방, 내부 인테리어 등을 디자인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가장 먼저 결정할 일이 웨이퍼의 크기다. 그게 결정돼야 공장 구조와 설비를 디자인할 수 있다.

굳이 빗대자면 웨이퍼는 ‘피자의 도우’에 해당한다. 농사로 비유하면 논밭이라고 할 수 있다. 둥근 웨이퍼 위에 네모난 형태의 칩들을 잘라 만들기 때문에 웨이퍼(논밭)가 커지면 여기서 나오는 칩 개수(수확량)도 늘어난다.

웨이퍼 크기를 늘리는 것이 생산성 면에서야 당연히 좋지만 기업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향후 시장 상황에 대한 불안과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 감당할 기술적 불확실성이 크다고 판단되면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한 대에 5000억 원 하는 노광기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엔지니어들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엔지니어들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반도체는 장비가 차지하는 비용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표적 장치 산업이다. 예를 들어 빛을 쪼여 웨이퍼에 회로를 그릴 때 쓰는 장비인 노광기(네덜란드 회사 ASML이 독점적 기술력을 갖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월 유럽 출장 당시 직접 본사를 찾아 화제가 됐다.)만 해도 한 대에 2000억 원이 넘는다. 인공지능 시대에 각광받고 있는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기는 한 대 값이 무려 5000억 원인 데도 물량 확보가 어렵다고 한다.

반도체 공장에는 이 노광기만 해도 수십 대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돈 먹는 장비가 하나둘이 아니다. 웨이퍼 인치를 바꾸면 노광기 같은 기계도 그것에 맞게 바꿔야 한다. 반도체 공장에서 웨이퍼 인치를 늘리는 것은 아예 다른 공장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계만 갖춘다고 다가 아니다. 그에 따라 공정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기술자들을 다시 재교육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웨이퍼가 깨지거나 휘어지기가 쉬워 수율이나 품질의 균질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피자 도우를 크게 만들수록 모서리를 균일하게 다듬는 일도, 두께를 일정하게 맞추는 일도 힘들어 지듯 말이다.

이러다보니 반도체 업계에서는 차세대 웨이퍼 투자 타이밍을 놓고 치열한 눈치작전이 펼쳐진다. 남보다 앞서가기는 해야겠는데, 언제 어느 시점에 들어가야 투자비용을 제대로 뽑고 불확실성을 줄일지 고도의 판단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한 배를 타게 될 장비업체들까지 지휘할 수 있는 강하고 설득력 있는 리더십도 필요하다.

삼성 반도체가 오늘날 세계 1위 자리에 우뚝 서기까지에는 이 웨이퍼 투자를 둘러싼 호암과 이건희 회장의 과감하고도 대담한 결정과 그 결정을 완벽히 수행해낸 삼성맨들의 팔로워십(followership)이 있었다.

5인치 아닌 6인치에 손들어준 호암

지난 회에서 반도체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데도 공장 증설을 밀어붙인 호암의 공격경영을 소개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웨이퍼 크기를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호암은 기흥 1공장이 착공된 지 불과 두 달여 만인 1983년 11월 256K디램(이하 256K)을 생산할 2공장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64K디램 완전 동작 칩이 아직 나오지도 않은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2공장을 세울 때 떠오른 쟁점이 웨이퍼 지름을 5인치로 할지, 6인치로 할지였다. 5인치의 경우 웨이퍼 한 장당 칩이 60~70개 정도, 6인치에서는 100개 정도 나왔다.

다들 5인치로 결정되리라고 생각했다. 세계적으로도 5인치가 대세였고 기흥 1공장도 5인치였다. 그런데 일부 실무진이 이참에 6인치로 가자는 안을 내면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때 호암이 6인치 도입 결정에 손을 들어줬다. 김광호 전 부회장 말이다.

“반도체 값 폭락으로 생산할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1공장도 제대로 가동을 못 해 속이 까맣게 타고 있는데 2공장을 지으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웨이퍼 지름까지 6인치로 하자고 하시니 다들 뒤로 나자빠졌지요. 당시 일본 샤프가 우리 쪽 공장 설비 기술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자기네들도 5인치 기술 밖에 없다면서 난처해 했어요. 하지만 선대 회장이 물러서지 않으시니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반도체업계에서 웨이퍼 크기 늘리기 경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지름 3인치, 4인치, 5인치는 미국이 선도했지만 6인치는 일본이 먼저 치고 나갔다. 미국을 뒤쫓던 일본이 미국을 추월해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국으로 부상한 배경에도 공격적인 6인치 투자가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호암이 6인치 도입을 결정할 당시엔 일본에서도 제대로 만드는 회사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설사 만든다 해도 성능이 입증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주문을 해도 최소 10개월에서 20개월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도 호암은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

결과적으로 호암의 6인치 결정은 3공장 증설과 함께 또 다른 신의 한수였다. 1988년 삼성 반도체 대반전의 역사는 256K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가능했는데 이는 256K 양산 라인이던 2공장의 6인치 웨이퍼가 결정적으로 효자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1위에 서기까지

지금까지 필자는 삼성 반도체의 초기 역사를 훑었다. 요즘 ‘반도체’는 주지하다시피 산업의 쌀 수준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기술 혁명을 이끄는 원천이자 각 나라의 경제와 안보를 담보할 전략자산이 됐다. 한국 반도체의 오늘은 위대한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결과물이다. 취재하면서 호암의 초인적 판단과 결단력 덕분에 반도체 신화가 가능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다.

자, 이즈음에서 호암의 이야기를 마치고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가보려 한다. 이건희 회장은 호암 곁에서 반도체 산업에 대한 영감을 계속 심어줬다. 호암은 이를 결단하고 실행했다. 그리고 지옥 같은 적자의 터널을 뚫고 과감한 투자를 이어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호암은 대반전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다.

이 회장의 마음과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앞으로 소개될 ‘이건희 반도체’ 편은 그와 함께 역사를 이뤄나간 삼성전자 최고경영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고비마다 나온 이건희 회장의 결정과 리더십을 생생한 육성으로 들으면서 오늘날 삼성 반도체 신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일군 기적의 성취였는지를 소개하고 싶다.

우선 이번 회에서는 6인치 웨이퍼 지름을 결정한 호암의 과감함에 이어, 6인치에서 8인치로, 8인치에서 12인치로 대담한 결단을 했던 이건희 회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이 회장은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실은 ‘반도체 1위에 서기까지’라는 글을 통해 반도체 사업을 하면서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결정적 선택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고인이 회고하는 두 가지 중 하나가 바로 ①웨이퍼 인치에 대한 과감한 결정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②4M(메가) 이후 칩 개발 방식을 스택(stack)으로 할 것인지, 트렌치(trench)로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었다. 이 회장의 글은 시기상으로 먼저였던 스택과 트렌치에 대한 회고부터 시작하고 있다. 글 전문을 읽어보자.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언어

반도체 산업은 ‘타이밍 업(業)’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해서 수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선행 투자를 최적의 시기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사업에서 최적의 투자시기를 결정할 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이 뒤따른다.

87년 반도체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중대한 고비가 있었다. 4메가 D램 개발 방식을 스택(stack)으로 할 것인가, 트렌치(trench)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두 기술은 서로 장단점이 있어서 양산 단계에 이르기 전에는 어느 기술이 유리한지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 일본의 업체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일본 반도체 회사의 제조 과장들을 저녁때 만나 새벽까지 토의했다. 이렇게 몇 차례를 거듭했지만 확실한 정답을 얻지 못했다. 반도체 전문가들도 두 기술의 장단점만 비교할 뿐 어느 쪽이 유리한지 단정 짓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화해 보려고 한다. 두 기술을 두고 단순화해 보니 스택은 회로를 고층으로 쌓는 것이고, 트렌치는 지하로 파 들어가는 식이었다. 지하를 파는 것보다 위로 쌓아올리는 것이 더 수월하고 문제가 생겨도 쉽게 고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스택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훗날 트렌치를 채택한 도시바가 양산시 생산성 저하로 D램의 선두자리를 히타치에 빼앗겼고, 16메가 D램과 64메가 D램에 스택 방식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리고 1993년 또 한 번의 승부수를 띄웠다. 반도체 5공장을 8인치 웨이퍼 양산 라인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세계 표준이었다. 면적은 제곱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6인치와 8인치는 생산량에서 두 배 정도 차이가 난다. 그것을 알면서도 기술적인 위험 부담 때문에 누구도 8인치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고심 끝에 8인치로 결정했다. 실패하면 1조 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되는 만큼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1위로 발돋움하려면 그때가 적기(適期)라고 생각했고, 월반(越班)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판단했다.

반도체 집적 기술은 1983년에서 1994년까지 10년 동안에만 무려 4000배가 진보했다. 그만큼 기술개발 주기가 계속 단축되고 있어서 단기간에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엄청난 기회 상실을 초래한다. 그래서 나는 단계를 착실히 밟는 편안한 길을 버리고 월반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1993년 6월 5라인을 준공했고 숨 돌릴 새도 없이 6, 7라인에 착공하여 이듬해 7월부터 가동했다. 당시 각종 전문기관의 수요 예측이나 내부의 자금 사정은 추가 투자가 무리한 상황이었으나 일본 업체들이 투자를 머뭇거릴 때 투자를 감행하는 공격 경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 16메가 D램 개발은 일본과 동시에 했지만 양산시기를 앞당기고 8인치 웨이퍼를 사용함으로써 생산력에서 앞설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세계 시장에서 일본 업체를 따돌리고 93년 10월 메모리 분야 세계 1위에 서게 된 것이다.

반도체 사업이 세계 정상에 오른 날, 나는 경영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표가 있으면 뒤쫓아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번 세계의 리더가 되면 목표를 자신이 찾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리더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 이는 나 스스로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언어로 자기과시 없이 써 내려간 글에서 필자가 가장 주목한 대목은 마지막 문장이다. 한번 세계의 리더가 되면 목표를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걸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을 다름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라고 하는 표현 말이다. 평생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늘 시선을 미래에 두고 ‘위기’를 말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쳤던 고인의 내면이 읽히는 문장이다.



신동아 2022년 7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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