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호

〈새 연재 〉이선경의 讀書, 督書, 毒書

집을 지키는 문학 집을 부수는 문학

  • 이선경 | 문학평론가 doskyee@daum.net

    입력2016-06-20 16: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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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에는 정유정의 ‘7년의 밤’과 ‘종의 기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땅이 단단하고 푸른 대지가 아니라 깊은 수렁 위였다거나, 삭막한 쇳소리와 적막한 살풍경만이 펼쳐진 도살장의 한가운데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느닷없이 고의적인 일격에 의해 찾아올 때가 있다.

    어떤 책들은 때로 독소(毒素)를 뿜어낸다. 특히나 최근의 책들은 겨우 안전하다고 여겼던 일상이 사실은 불안과 공포라고 냉소하며, 우리가 믿는 것은 다 거짓이며 가짜라고 이간질한다. 그래서 독서(讀書)를 하기보다는 독서(毒書)를 경계하게 된다.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진부한 말이나, 때로는 그런 위태로운 놀이를 즐겨야 한다는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지금 여기의 독서(讀書, 毒書)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말해두고자 한다.

    ‘어쩌면 독(毒)이 될지도 모르는 서(書)’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 더 이상 스위트홈을 지켜주지 못하는 책, 추리소설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



    추리소설, 범죄소설, 탐정소설 장르의 기원을 아는가. 원래는 집을 지키려고 탄생한 장르다. 고전적 추리소설이라면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떠올릴 것이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생각해보라. 대충 이런 내용 아닌가. 시체가 발견됐다 → (독자 포함) 등장인물은 충격과 공포에 빠진다 → 탐정 혹은 경찰이 나타난다 → 범인이 잡힌다 → 모두는 안심하고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고전적 추리소설을 읽을 때 나타나는 서프라이즈와 서스펜스, 사건 해결 후의 안도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상치 못하게 발생하는 범죄에도 나와 나의 집은 보호받는다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적 장르로 탄생한 추리소설은 개인의 사유재산, 이를 위협하는 범죄자, 그럼에도 모든 것을 지켜주는 경찰(혹은 탐정)이라는 삼각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사유재산 보호제도가 일찍부터 마련된 영미권에서 추리소설이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추리 장르의 발생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세한 얘기가 알고 싶다면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을 참고).



    누가 집을 지켜주는가

    한국은 어떤가. 자본주의나 사회제도의 안정성이 추리소설 발생의 전제라면, 오랫동안 이렇다 할 추리소설이 한국에 없었던 것이 어느 정도 설명은 된다. 그럼에도 그간 번역된 추리문학이나 범죄 드라마에 대한 한국 독자(시청자)의 열광을 고려한다면, 추리소설에 대한 요구, 추리소설이 주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욕망만큼은 상당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2000년대 후반이 돼서야 한국 사회는 정유정이라는, 대중적 공감을 얻어내는 한국적 추리소설 작가를 만났다. 추리소설이라는 고전적 장르의 기원에 걸맞게 작가는 줄곧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한국적 추리 장르를 탄생시킨 정유정의 ‘7년의 밤’(2011)은 인물들 각자가 자신들의 집을 지키는 이야기다. 사건의 가해자인 최현수는 이제 막 중산층 진입을 가능케 해준 33평 아파트를 지키려 필사적으로 범죄로부터 도망친다. 사건의 피해자인 오영제는 자신의 왕국인 세령마을과 세령호 안에 침입해 딸 세령까지 죽인 최현수를 용서할 수 없어 법 밖의 방식으로 복수를 감행한다.



    자기 집은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한다는 것, 그것이 한국적 추리소설의 법칙이다. 집을 지키는 방식에서 한국적 추리소설은 경찰이나 법에 의지하는 서양의 고전적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어쩌면 근·현대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국에서의 집 지키기는 공권력에 맡겨둘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나서야 추리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정유정에 의해 한국적 추리소설은 그렇게 한국적 상황에서 자기 집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런데 정유정은 최신작 ‘종의 기원’(2016)에서 애써 지켜온 집을 부숴버린다. 이 신작은 간신히 유지되던 집이 아주 깊은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었던 이야기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인공 유진은 피를 뒤집어쓴 괴물이 돼 있고, 집은 어머니의 살인사건 현장으로 변해 있다. 누가, 언제, 왜, 그랬는지 파악하고자 유진은 집을 위협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추리한다. 그러나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것, 모든 의심과 소거법 이후에 결국 남은 단 하나의 가능성은 유진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이다.



    실용성이 일깨우는 실용성

    이 소설은 존속살해의 표면적 이유를 유진 안의 병리적 본성, 그가 사이코패스의 최고 레벨인 프레데터(포식자)라는 것에서 찾는다. 그러나 자신의 증상을 간질이라 믿고 있던 이 포식자의 심장을 뛰게 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의 본성을 발화해 어두운 숲을 열리게 한 걸까.

    그의 본능을 점화시킨 것은 집터와 집안이다. 아마도 군도신도시라는, 이제 막 야생의 틀을 벗은 부동산 개발지가 아니었다면 그의 수렵 본능은 발휘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직 덜 완성돼 유령섬이라 불리는 이곳은 밤이 되면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만큼 을씨년스러운 곳이며, 초고층 고급 아파트가 산업 폐기물과 후쿠시마산 쓰레기 시멘트로 지어졌다는 게 알려지면서 더는 가망 없는 곳이 됐다.

    이 폐허에서 밤마다 조깅을 하며 유진은 그의 야수적 본능을 점점 깨워간다. 또한, 아마도 유진을 무해한 존재로 만들고자 과도하게 노력하는 가족들이 없었다면, 그래서 원인 모를 적개심과 분노가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지 않았다면, 그가 가족 모두를 죽이는 비극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윽고 탄생한 한국적 추리소설은, 지금 여기에서 가장 한국스러운 집의 문제를 건드린다. 지금 여기의 한국적인 집은 지켜져야 할 것이 아니라 부서져야 할 것이다. 무리하게 계획된 자본주의의 집은 실용성에 바탕을 두지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포식자의 행동 법칙이기도 한 실용성을 일깨운다. 유전자의 대물림을 담보로 행해지는 과도한 집착과 통제적 가족 질서는, 결국 저주가 되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물려준 유전자에 의해 다시 통제되고 파괴당한다.



    포식의 질서  

    작가가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채 사이코패스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아슬아슬한 방법을 선택한 것은 깊은 기원에서부터 집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 대부분이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은 유진일 것이다. 때로는 이 포식자의 시선에서 무저갱(無底坑)의 상황을 빠져나가는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권력의 추적이 포식자의 유전자를 제압하지 못하게 되기를 은밀히 바라기도 하면서.

    그리고 그의 완전범죄와 앞으로도 이어질 살인에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그가 살아남은 것에 대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 도덕적 국경을 넘어야 즐길 수 있는 이 ‘위험한 광기’에 독자가 동참하게 되는 것. 그것은 이 사이코패스가 무너뜨린 한국적 집의 질서 역시 포식의 질서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최근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너무나도 명징하게 환기시킨다. 이기심과 실용성 위에 건설된 기형적인 한국의 집. 그 집 안에서 광기에 싸인 이기적 유전자들이 본성을 깨워간다. 결국 아주 오래된 기원적 악의 유전자를 다시 부른 것은 집이다. 그래서 한국적 추리소설은 집을 마비시키는 독소를 뿜어낸다. 한국적 집의 토대를 다시 한 번 점검할 때다. 지금, 당신의 집은 얼마나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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