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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문자향(文字香) 일깨운 지극한 서자 사랑

조선 최고 서예가 김정희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문자향(文字香) 일깨운 지극한 서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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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편지에서 고백한 말, ‘겨우 두어 글자를 쓰면 글자 글자가 따로 놀아, 결국은 귀일(歸一)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깨침이 귀하다. 네가 (서법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진경(進境)이 거기서 시작되느니라. 잠심(潛心)하고 힘써야 한다. 괴로움을 참고 이 한 관문을 넘어서야 통쾌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깨침을 이루기가 지극히 어렵더라도 절대로 물러나지 말라. (…) 나는 지금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귀일됨을 찾지 못하였다. 너와 같은 초학자야 말해 무엇하랴. 너의 그 한탄 소리를 듣고 나는 도리어 기쁘구나. 장래에 있을 너의 성공이 그 한 마디에서 시작되리라.


셋째, 예서체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아버지는 “예서는 모든 서법의 조상”이라면서 한나라 때 성행한 예서의 묘미가 고졸함에 있다고 했다. 김정희의 예산 본가엔 훌륭한 서첩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서협송(西狹頌)’ 같은 책자를 눈여겨보면 서법의 정수를 익힐 수 있다는 게 아버지의 믿음이었다.



양자와 서자

문자향(文字香) 일깨운 지극한 서자 사랑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 시절 그린 ‘세한도(歲寒圖).’
사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했다.

넷째, 조선 최고 서예가 김정희에게 기예는 오히려 사소한 것이었다. 성공의 관건은 선비로서의 충실한 학식과 인격이라는 점, 아버지는 그림에서든 글씨에서든 늘 그 점을 강조했다. “예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없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다. 또, 그것은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없다면 완하(腕下, 팔꿈치)와 지두(指頭, 손가락 끝)에서 표현되지 못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평생의 위업을 전수하는 데 한 통의 편지로 족할까. 아들 상우는 바다를 건너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는 한동안 아버지 곁에 머물며 지도를 받았다. 김정희는 막역한 친구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가아(家兒, 즉 김상우)가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내게 약간의 위안이 됐다오. 그런데 지금 되돌아가게 되었소. 아이가 보서(寶棲, 초의선사)를 찾아가고 싶어 하오. 한 번쯤 웃으며 서로 만나기를 바랍니다.”(‘초의선사에게’, ‘완당전집’, 제5권)

8년 만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린 김정희는 다시 서너 해 만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다(1851~1853). 그러자 김상우는 북청으로 달려갔다. 그들 부자는 스승과 제자요, 서로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친구였으리라.

김정희에겐 아들 하나가 더 있다. 제주도 유배 시절에 맞은 양자 김상무(金商懋·1819~1865)다. 양자는 서자인 친아들보다 두 살 아래였다. 김정희는 집안 여론을 무시하지 못했다. 대대로 이어온 명가의 전통을 빛내려면 적통(嫡統)을 이을 양자가 꼭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양자 김상무에게도 여러 차례 편지를 썼다. 그런데 양자에게 가는 아버지의 편지는 기조가 달랐다. 무엇보다 집안의 전통을 강조했다. “우리 가문에 전해오는 규범은, ‘올곧은 도로써 행하는 것(直道以行)’이다.”(‘무아에게 주다(與懋兒)’, ‘완당전집’, 제2권)

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정희는 입신양명의 과거 공부를 주문했다. 북청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일절을 보자. “등잔불 아래 일과로 글 읽는 것은 중지하지 않았느냐? 늙은 나는 잠이 없다. 너희들의 글 읽는 소리가 어슴푸레 귓가에 늘 들리는 듯하니, 이 마음이 참으로 괴롭다.”(‘완당전집’, 제2권)

양자에게 과거 공부를 당부할 때도 서자 상우는 김정희 곁에 있었다. “우(佑, 상우)는 아직 별로 아픈 데 없이 지낸다.” 아버지의 이 짤막한 말이 인상적이다. 김정희는 양자와 서자에게서 얻은 손자들도 빠짐없이 챙기고 아꼈다. 하지만 서자 김상우에 대해서 유독 애잔한 부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내에게 투정 편지

김정희는 자신의 속내를 좀체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감정의 동요를 위장하는 데 익숙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김정희는 현대적 감각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아내를 대할 때도 여느 선비들과 달리 솔직했다.


지난번 가는 도중에 보낸 편지는 받아보셨지요. (…) 그 사이 인편이 있었는데도 답장을 못 받았습니다. 부끄러워 아니 하셨던가요. 나는 마음이 몹시 섭섭했다오.


아내로부터 답장을 못 받아 섭섭하지만 또 편지를 쓴다는 뜻이다. 이번엔 제발 답장을 빨리 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행간에 숨었다. 마치 연애편지 같다. 김정희가 재혼한 지 10년째 되는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편지다. 김정희는 젊어서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했다.

김정희가 남긴 한글 편지는 40통이나 된다. 그중 38통이 아내에게 보낸 것이다. 나머지 2통의 수신자는 며느리였다. 편지를 쓸 때 김정희의 나이는 30~50대였다. 발신지는 서울, 예산, 대구, 평양, 제주로 바뀌지만, 유배지 제주에서 보낸 편지가 가장 많았다.

편지를 읽어보면 김정희가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는 대목이 눈에 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더러 그런 적이 있지만, 아내에게 보낸 글월에선 유독 자신의 잔병을 늘어놓을 때가 많았다. 요즘 말로 그는 눈곱이 자주 끼었고, 구내염 증상도 되풀이됐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호사스럽게 살았던지라 유배지의 거친 음식과 볼품없는 의복에 대해서도 군말이 많았다. 체모를 중시하는 양반이라면 꺼내지 못할, 볼멘소리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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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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