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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하늘에서 내려온 자 ‘새벽별 (Chorbon, 졸본)’에 터 잡다

東漢 vs 부여족·선비제국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하늘에서 내려온 자 ‘새벽별 (Chorbon, 졸본)’에 터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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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는 동아시아 역사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고, 고구려가 백제를 잉태했으며, 백제는 왜(倭)와 연결된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간 이어지는데…
한(漢)과 조선의 갈등이 첨예화하던 기원전 2~3세기 ‘단군(檀君)’, 즉 ‘텡그리 임금’의 나라 탁리국(橐離國)에서 떨어져 나와 남하한 일단의 무리가 만주 땅 쑹화(松花)강 유역 창춘(長春) 지역의 예족(濊族)을 흡수해 부여를 건국했다.



‘텡그리’ 신봉한 부여

‘탁리’는 ‘텡리 또는 텡그리(Tengri, 하느님)’를 음차한 것으로 부여의 원류는 ‘하늘의 신(하느님)’ 텡그리를 신봉하는 부족이다. 부여는 물론 부여를 기원으로 한 고구려도 ‘하늘의 신’을 섬겼다는 것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鄒牟)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解慕漱)로 알려진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해(解)’는 음차로 우리말 ‘해(태양, 太陽)’를 뜻한다.

부여의 주류를 형성한 부족이 외부에서 이주해왔다는 사실은 부여 건국설화 ‘동명성왕(東明聖王)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동명성왕 설화는 남부 시베리아-북몽골·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의 남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부여는 기원전 107년 한나라에 멸망당한 조선보다 동아시아 역사에 더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고, 고구려에서 백제가 잉태됐으며, 백제는 왜(倭)와 연결된다.

선양(瀋陽)과 창춘 사이에 금강 유역의 ‘부여(扶餘)’와 똑같은 이름의 도시 ‘푸위(扶餘)’가 있다. 왜 금강 유역 부여로부터 북쪽으로 1600㎞ 넘게 떨어진 쑹화(松花)강 유역에 부여라는 도시가 하나 더 있는 걸까.



강원 강릉(江陵)과 경남 함양(咸陽)은 통일신라 이후 중국 후베이(湖北)성 장링(江陵)과 산시(陝西)성 셴양(咸陽)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이는 데 비해 금강 유역 부여는 훗날 부여족의 원류가 되는 탁리국 출신의 한 무리가 남부 시베리아 일대를 출발해 쑹화강과 압록강, 한강을 거쳐 금강 유역까지 수천㎞에 걸친 민족 이동의 결과로 생겨났음이 분명하다. 부여족이 만주 쑹화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 각기 ‘부여’라는 이름의 도시를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부여는 어떤 나라였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는 ‘초기에는 오랫동안 어느 나라에도 패해본 적이 없다 한다.’ 고구려가 융성하기 시작한 3세기 중엽 이전까지 부여는 만주 지역 최강국이었다. 2세기경 부여는 보기(步騎) 7만~8만을 동원해 다링허(大凌河) 유역으로 진출해 동한군(東漢軍)과 싸울 정도였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에게 멸망하기까지 고구려, 모용선비(慕容鮮卑), 읍루(挹婁) 등과 싸워가면서 700여 년간 나라를 유지했다.

나라가 멸망한 5세기 이후 부여의 지배층 대부분은 고구려 지역으로 이주했다. 잔류한 부여인들은 오늘날의 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몽골계 부족과 힘을 합쳐 ‘두막루(豆莫婁)’를 세웠다. 두막루는 300여 년간 나라를 이어가다가 726년 발해 2대왕 대무예(大武藝)에게 멸망당했다. 부여의 흔적은 쑹화강 상류의 백금보-한서2기 문화 및 지린(吉林) 일대 서단산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한무제(漢武帝)의 공격적 대외정책은 북방의 흉노는 물론, 동방의 선비(鮮卑)와 예맥(濊貊), 서방의 저·강(氐羌), 월지(月氏), 남방의 월(越) 등 인근 부족에 큰 영향을 줬다. 문화와 문화, 부족과 부족이 혼화(混化)했으며, 발전이 뒤처지던 다양한 부족이 한나라와 흉노에 자극받아 스스로 나라를 세우는 등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특히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기원전 1세기 부여를 이탈한 일단의 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해모수)의 아들’로 알려진 추모를 지도자로 랴오닝(遼寧)성 동남부 압록강 중류 지역으로 남하해 원주민을 흡수한 후 졸본(Chorbon, ‘새벽별’이라는 뜻의 고대 터키어)을 근거로 고구려를 세웠다. 고구려의 수도가 ‘Chorbon’으로 불렸다는 것은 고구려에 투르크적 요소가 포함됐음을 뜻한다.


100개의 나루, 百濟

고구려가 국가 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소서노(召西奴)와 비류(沸流), 온조(溫祚)가 이끄는 해상 연계 세력이 이탈했다. 이들은 서해 뱃길을 타고 내려가 한강 하류 서울 일대를 점거하고 ‘100개의 나루(항구)를 가진 나라’라는 뜻의 백제(百濟)를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 이후 곧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두각을 드러냈다. 고구려와 백제 건국을 전후해 낙동강 좌안, 오늘날의 경주 지역에는 신라(新羅), 낙동강 우안, 오늘날의 김해 지역 등에는 가야(伽耶)가 출현했다. 신라나 가야의 건국 모두 북방에서 남하한 부족과 한계(韓係) 원주민이 혼화한 결과였다.

무제의 증손자인 선제(宣帝)는 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 즉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고 흉노에 공세를 취하는 등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흉노는 한나라군의 잇단 공격, 불순한 기후에 따른 기아(饑餓), 선우 계승 문제가 겹친 끝에 기원전 55년경 동·서로 분열했다. 동부를 대표하는 호한야(呼韓耶) 선우가 한나라에 항복하는 등 흉노는 존망의 위기에 내몰렸다. 서부를 대표하는 질지(郅支) 선우는 탈출구를 찾아 북쪽의 정령(투르크족의 한 갈래)과 서쪽의 견곤(투르크족의 한 갈래로 키르기스인의 조상)을 정복했다.

또한 카자흐스탄 동남부 일리강 유역의 강거(투르크족의 한 갈래)를 복속시킨 후 오손(투르크족의 한 갈래)을 합병해 키르키스의 추(Chu)강으로부터 우즈베키스탄 서부 아랄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서흉노는 기원전 41년 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에 큰 성을 쌓았다. 서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공격은 집요했다. 한나라와 동흉노 연합군 7만여 명이 성을 에워싸고 격렬히 공격해왔다. 끝내 성은 함락되고 질지, 선우 등 서흉노 지도부 1500여 명이 살해당했다. 한나라도 선제를 마지막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선제의 아들이자 유교적 이상주의자인 원제(元帝)와 방탕한 쾌락주의자 성제(成帝)를 거치면서 난숙기(爛熟期)의 퇴락을 경험하고, 기원후 8년 외척 왕망(王莽)의 신(新)에 나라를 찬탈당하고 말았다.



고구려와 ‘하구려’

한나라를 빼앗은 왕망은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해 서주(西周)에서 시행됐다’는 정전제(井田制)를 도입하는 한편, ‘한나라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존의 정부 기관명과 지명 또한 거의 다 바꿨다. 심지어 외국인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망전(王莽錢)을 도입하는 등 화폐개혁을 실시했으며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해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하고, 소금과 철, 술을 비롯한 중요 산물을모두 정부 통제하에 뒀다.

왕망의 섣부른 경제·사회개혁은 경제난을 가중시켰으며, 호족(豪族)은 물론 그가 보호하려던 소상인과 농민도 불만을 품게 했다. 왕망의 실패는 이전 왕조(王朝)의 것은 덮어놓고 부정한 데서 출발했다. 과도한 이상론은 이에 기름을 부었다.

농민의 불만은 ‘녹림적(綠林賊)의 난’ ‘적미(赤眉)의 난’ 등 전국 규모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왕망은 왕읍(王邑)과 엄우(嚴尤) 등에게 40만 대군을 줘 막 국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갱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의 녹림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공격 목표는 녹림군의 장수 왕봉(王鳳)과 유수(劉秀)가 수비대장으로 있던 허난성 소재 곤양성(昆陽城)이었다.

유수는 13기(騎)만 거느리고 포위된 곤양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유수는 성 부근에서 구원병 7000명을 모아 다시 곤양성으로 향했다. 유수의 탁월한 지휘와 병사들의 일당백 전투력 등에 힘입어 녹림군은 곤양성 전투에서 신나라 40만 대군을 괴멸시켰다. 이 전투로 인해 신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이때가 기원후 23년이다.

승세를 탄 갱시제군은 신나라의 수도 낙양(뤄양)을 점령한 데 이어 장안(시안)도 손에 넣고, 새 정권의 도읍으로 삼았다. 갱시제 유현은 유수를 경계했다. 유현은 기주(冀州)와 유주(幽州) 즉, 허베이 지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수를 허베이 지역에 파견했다. 유현과 그의 측근들은 유수가 사라지자 권력에 도취했다.



‘득롱망촉(得隴望蜀)’의 유래

유수의 군대가 허베이 지역을 떠돌 무렵 한나라 성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왕랑이 이끄는 세력이 황하 중하류에 면한 한단(邯鄲)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왕랑의 세력은 급격히 불어났다.

유수는 허베이 지역의 최강자가 진정왕 유양이라고 판단한 후 그에게 접근했다. 유수는 다리를 놓아 유양의 질녀인 곽성통을 아내로 맞이했다. 유수는 유양을 후원자로 두면서 그가 거느리던 10만 대군을 확보했다. 유수의 인품과 능력을 눈여겨보던 어양(漁陽), 상곡(上谷) 등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지방관들이 휘하에 모여들었다. 결국 유수는 왕랑을 손쉽게 격파했다. 어양은 지금의 베이징시 일원, 상곡은 산시성 북부 일대로 흉노, 선비, 부여, 고구려 등 북방 민족 나라들에 접한 곳이다.

유현은 왕랑이 제거된 것에 기뻐하기보다 유수의 세력이 커진 것에 불안을 느꼈다. 유수의 군대는 지방 호족과 옛 한나라 관리의 군대까지 흡수해 수십만 명에 육박했다. 유수는 기원후 25년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이제 천하 패권의 향방은 유수와 갱시제 유현, 그리고 번숭(樊崇)이 주도하는 적미군으로 좁혀졌다. 광무제 유수는 유현을 압박했으며 세가 불리해진 유현은 적미군에 투항했다. 유수는 적미군과 천하를 건 일전을 준비했으나 거듭된 한발과 기아로 인해 오합지졸이 돼버린 적미군은 기원후 27년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유수에게 항복했다.

유수는 적미군의 항복을 받은 후 독자 정권을 수립하고 있던 간쑤성 동남부 롱(隴)의 외효(隗囂)와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세력을 멸했다.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또 한 가지를 바라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의미하는, 즉 롱을 얻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또 촉을 노린다는 뜻의 ‘득롱망촉(得隴望蜀)’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어쨌거나 광무제 유수의 한나라, 즉 동한(東漢)이 기원후 36년 모든 적대 세력을 제압하고 중국을 재(再)통일한 것이다.


고구려의 베이징 침공

유수군과 갱시제 유현군, 적미군, 왕랑군 등이 얽히고설킨 내전이 지속됐지만 약화될 대로 약화된 흉노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흉노가 약화되고, 한나라 멸망에 이은 신나라 왕망 정권의 실정으로 인해 20여 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는 등 중원이 혼란에 빠져들자 만주와 한반도에서 새로 일어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자기들끼리는 물론, 한족과 선비·오환족, 왜족 등과도 존망을 건 전쟁을 벌였다.

특히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동예와 옥저 등 인근 부족은 물론 동한 등 외부 세력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취했다. 5대 모본왕(慕本王)은 기원후 49년 동한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틈을 노려 선비·오환족 기병과 함께 멀리까지 휘몰아 쫓아가 장성 이남의 북평, 어양, 상곡, 진양 등을 침공·약탈하는 등 동한에 대해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 따르면 ‘모본왕이 기원후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진양)을 침공했다’고 한다. 삼국사기도 ‘모본왕이 49년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고 기록한다.

북평, 어양은 오늘날의 베이징·허베이 일대, 진양(태원)은 산시(山西)성 성도(省都) 타이위안(太原)시다. 한족과 북방 민족이 혼거하던 베이징과 타이위안 일대는 언제나 북방 민족의 작전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다. 고구려가 초기부터 다링허와 롼허 유역을 넘어 베이징과 타이위안 등 중국 내지(內地) 깊숙이 군사를 보낸 것을 특별한 일로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수가 왕망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끝에 재건한 동한은 일종의 호족연합체제(豪族聯合體制) 국가였다. 유수는 고향 허난성 난양(南陽) 인근 출신인 음(陰), 등(鄧), 래(來), 양(梁)씨와 허베이성 진정(眞定) 출신 유(劉), 곽(郭)씨 등 호족의 협조에 힘입어 동한을 창건하는 데 성공했다.

동한은 ‘난양 유씨 회장’ 밑에 호족이 지분을 가진 ‘호족 주식회사’ 형태의 나라였다. 동한은 광무제에 이어 명제(明帝)와 장제(章帝) 때까지는 융성했으며, 흉노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취했다. 장제를 계승한 화제(和帝)도 고구려와 흉노 등 북방 민족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동한의 정치 공작과 심각한 한발이 야기한 내전 탓에 동흉노는 기원후 48년 남·북으로 분열했다.



흉노, 카스피海 거쳐 유럽으로

북흉노가 재기하자 동한은 기원후 73년 두고(竇固)와 경병(耿秉)을 시켜 흉노 정벌을 재개했다.

동한은 반초(班超)를 시켜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하는 등 통상로를 망가뜨리는 방법으로 북흉노의 경제력을 고갈시켜 나갔다. 동한은 또한 85년 남흉노, 정령, 선비·오환을 사주해 북흉노를 공격게 했다. 북흉노는 외몽골 전투에서 남흉노 연합군에 대패했으며, 20만 명 이상이 남흉노에 항복했다. 87년 선비의 공격을 받은 북흉노는 또다시 패배했다. 91년 서몽골 알타이산 부근에서 유목하던 북흉노는 동한의 대장군 두헌(竇憲)의 공격을 받아 세력을 거의 잃고, 잔여 10여만 호가 선비에 합류했다.

또한 단석괴(檀石槐)가 몽골을 중심으로 선비제국(鮮卑帝國)을 세우자 몽골 지역에서 흉노의 존재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선비에 항복하지 않은 북흉노 본류는 키르키스 탈라스강 유역의 동족들과 합류해 서천(西遷)했다. 이들은 아랄해와 카스피해, 남부 러시아(키흐차크) 평원을 거쳐 4세기 무렵에는 훈족의 모습으로 로마 동북부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흉노는 남천(南遷)했다. 한지(漢地)로 이주한 남흉노는 산시(山西), 산시(陝西), 간쑤(甘肅), 닝샤(寧夏) 등지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동한 말과 삼국시대, 서진(西晉)을 거쳐, 5호 16국 시대에 민족 최후의 불꽃을 피웠다. 이들은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서진을 멸망시키고 중국 내지에 한(漢), 전조(前趙), 후조(後趙), 하(夏), 북량(北凉) 등을 세웠다.

화제 이후 유씨 황실은 계속 약화되고, 외척을 포함한 호족 세력은 강화됐다. 등(鄧), 염(閻), 양(梁)씨 등 외척이 득세하면서 동한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나라가 됐다. 유소년이던 질제(質帝)는 외척 출신 권신 양기(梁冀)에게 독살당했다. 질제를 이은 환제(桓帝) 시기에 이르러서는 양기를 타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환관(宦官)이 호족을 능가하는 권력 집단이 됐으며, 환제를 이은 영제(靈帝) 때는 이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영제는 십상시(十常侍)를 포함한 환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심지어 환관 장양을 아버지, 환관 조충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했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은 친인척을 대거 관리로 기용했으며, 수탈과 탐학(貪虐)으로 날을 지새웠다. 환관들의 행태는 일반 백성뿐 아니라 호족들의 이익 또한 심각하게 침탈하는 것이었다.

동한의 호족과 사대부 관료들이 십상시를 포함한 환관을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이민족인 강족(羌族) 군단을 배경으로 한 서량 군벌 동탁(董卓) 집권 초기 호족 등이 그를 전폭 지지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호족이 동한 조정에 등을 돌림으로써 동한의 지배 체제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투르크-몽골계 ‘선비제국’

화제 이후 동한이 크게 약화되자 흉노를 대신한 고구려와 선비 등 북방 민족이 수시로 동한을 침공했다.

안제(安帝)는 고구려의 거듭된 침공에 대응해 121년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선공하게 했다. 풍환은 요동태수 채풍, 현도태수 요광과 함께 3만 연합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태조왕(太祖王)의 아우 수성(나중 차대왕으로 등극)은 동한군에 포위당한 예맥성을 구원하러 가던 중 이미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항복하는 척해 풍환을 방심하게 한 후 예맥성 탈환에 나섰다. 유인책에 걸려든 풍환은 고구려군의 매복공격에 대패하고 달아나다가 예맥성을 빼앗기고 도망쳐 오던 채풍과 만났다. 풍환과 채풍은 요서 요수현(遼燧縣)으로 후퇴해 반격을 준비했다. 태조왕은 선비 병사 8000명을 포함한 정예군을 이끌고 수성의 부대에 합류했다. 태조왕이 지휘한 고구려군은 즉각 공세를 취해 동한군을 대파했다. 채풍은 전사하고 요광은 달아났으며, 유주자사 풍환은 나중에 요동의 6개 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고구려와 화친조약을 맺었다.  

흉노가 약화되자 투르크-몽골계 선비가 흥기(興起)해 흉노의 빈 자리를 메웠다. 선비족 족장 단석괴(137~181)는 2세기 중엽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수도 후허하오터(呼和活特) 서쪽 탄한산(彈汗山, 텡그리칸의 산이라는 뜻)을 중심으로 군대를 모아 남쪽으로는 동한의 변경을 공략하고 북쪽으로는 남시베리아의 투르크계 부족 정령(丁零)의 침공을 저지했다. 또한 그는 동쪽으로는 부여, 서쪽으로는 오손을 제압하는 등 흉노가 다스리던 땅 거의 전부를 평정해 동서 5600㎞, 남북 2800㎞에 달하는 강대한 선비제국을 세웠다.

단석괴는 156년 장성 이남의 운중을 공격했으며, 158년 이후에도 허베이성, 산시(山西)성 지역과 요동 지역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단석괴는 나라를 3부로 나눈 후 각부에 대인을 둬 다스리게 했다. △우북평(베이징 동쪽) 이동 부여, 예맥 접경 지역의 우문부(宇文部)와 단부(段部)를 포함한 20여 개 부를 동부 △우북평 이서 상곡 지역 모용부(慕容部) 등을 중부 △상곡 이서 탁발부(拓跋部) 등을 서부로 나눴다.



황건군의 봉기

원래 남흉노 일파인 우문부는 훗날 탁발선비의 북위(北魏)를 대신해 북주(北周)를 건국하고, 산둥의 북제(北齊)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그 뒤를 이은 수(隋)가 서진(西晉) 이후 350년 만에 다시 중국을 통일할 기반을 구축했다. 선비 세력의 부상(浮上)에 위협을 느낀 동한 조정은 177년 오환교위(烏丸校尉) 하육, 선비중랑장 전안, 흉노중랑장 장민 등으로 하여금 3만~4만 명의 동한-남흉노 연합군을 지휘해 산시성 북부 안문(雁門)에서 장성을 넘어 선비군을 공격했지만, 단석괴의 전략에 말려 대패하고 병사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단석괴가 사망한 후 선비족 연맹은 곧 와해됐다. 우문부, 모용부, 탁발부, 단부, 독발부, 걸복부, 독고부, 하란부, 을불부 등 많은 선비부족은 이합집산하면서 각자 생존의 길을 찾아 나섰다.

환관의 발호라는 내우(內憂)와 단석괴가 야기한 외환(外患)에 시달리던 동한은 분열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영제가 재위하던 184년 도교 계통의 태평도 교주(敎主) 장각(張角)의 주도로 허베이 거록(鉅鹿)에서 시작된 황건군의 봉기는 허베이와 허난, 산둥 지역 대부분을 휩쓸어 동한 통치 체제와 경제·사회질서를 붕괴시켰다.



위(魏) 촉(蜀) 오(吳)의 정립

농민 저항운동 성격을 지닌 황건군의 봉기는 뿌리째 흔들리던 동한 정권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았다. 장각 3형제가 사망한 후에도 황건군의 봉기는 이어졌다. 장각 추종자들은 동한 지배층의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을 이끌고 동한 정권에 대한 저항을 지속했다.

동한은 혼란을 더해갔으며 그 틈을 타 조조, 유비, 손책·손권, 원소, 원술, 공손찬, 유장, 마등, 여포 등의 군벌이 호족(豪族)과 새외민족(塞外民族)의 무력을 배경으로 새 질서 구축을 위한 축록전(逐鹿戰)에 뛰어들었다. 이 중 조조, 유비, 손권 3인만 나라를 창업하는 데 성공했다.

 동한의 정치·경제 중심지는 수도 낙양이 위치한 황허 중류의 허난으로 산시(陝西)와 산둥이 각기 부중심(副中心)을 형성했다. 간쑤 남동부와 산시 서부, 충칭-쓰촨(巴·蜀), 창장(長江) 이남 지역은 각기 티베트계 저·강(氐·羌)과 동남아계 무릉만(武陵蠻), 묘(苗), 월(越) 등 이민족이 산재했다.

또한 산시(山西), 산시(陝西), 오르도스, 간쑤, 닝샤, 허베이 등에는 한족과 흉노·갈, 선비·오환 등 여러 민족이 혼거했다. 조조의 위(魏), 유비의 촉(蜀), 손권의 오(吳)가 황허와 창장 상류, 창장 중하류를 중심으로 분열·정립한 것도 이 같은 중국의 지리 및 사회·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조조가 위나라를 건국한 220년을 전후한 때 중국 인구는 약 1400만 명으로 황건군의 봉기가 발생하기 이전의 3분의 1 정도로 줄어 있었다. 내란 와중에 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거나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로 숨어든 것이다.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중국은 인구밀도가 지나치게 낮아지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져 분열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황건군 봉기 이후 나타난 삼국시대와 당나라 시대 황소(黃巢)의 난 이후 찾아온 5대 10국 시대가 대표적이다.



백 범 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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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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