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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가난과 사막화에 신음하는 마화룡의 기개

寧 | 大夏의 영광 꿈꾸는 변방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가난과 사막화에 신음하는 마화룡의 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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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닝샤는 면적 6만6400㎢, 인구 660만 명의 작은 지방이다. 중국 내에서 티베트, 칭하이 다음으로 가난한 지역이지만 1000년 전에는 간쑤, 내몽골 초원을 기반으로 300만 백성을 거느린 대하(大夏) 제국의 심장이었다. 청나라의 공격에도 인육을 먹으며 결사항전한 이슬람의 후예(回族)들은 오늘날 ‘사막과의 전쟁’을 치르며 중국판 할리우드를 만들고 있다.
며칠 전 친구들과 저녁식사 중 한 친구가 “신동아 3월호에는 어느 지방에 대해 쓸 거니?” 하고 물었다. 닝샤(寧夏) 지방에 대해 쓰고 있다고 하자 모두들 내게 되물었다.

“닝샤가 어디야?”

중국은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나라다. 그러나 닝샤는 생소하다. 서북 변방의 조그만 땅이라 존재감도 약하다. 그런데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한국인 상당수가 대중문화를 통해 닝샤를 본 적이 있다. 서북 변방을 배경으로 찍은 중국 영화 상당수가 닝샤에서 촬영됐기 때문이다.

저우싱치 주연 ‘서유기: 선리기연’에서 손오공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후회한다.

“저는 과거에 사랑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습니다…(중략)…하늘이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겠소.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그리고 구법 여행을 떠난 손오공은 모래투성이 성벽 위에서 다투는 석양무사와 그의 연인을 본다. 자신의 옛모습을 떠올린 손오공은 두 사람을 맺어주고 다시 길을 떠난다.



天下 黃河 富寧夏

이 밖에도 맹렬한 모래 폭풍 속에서 린칭샤, 장만위, 전쯔단 등이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이는 쉬커 감독의 ‘신용문객잔’, 노을 아래 사람의 살결도, 모래도 붉게 타오르던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 등 많은 영화가 닝샤에서 촬영됐다. 김용의 무협지 ‘천룡팔부’에 등장하는 서하국(西夏國) 근거지도 바로 닝샤다. 서하국은 잔인한 4대 악인 등 무림 고수들을 고용해 중원을 위협하다가, 절정고수 허죽이 서하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송나라와 좋은 사이가 된다. 이처럼 닝샤는 알게 모르게 친숙한 곳이다.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약칭은 ‘편안할 녕(寧)’ 자다. ‘寧’ 자는 중국의 지명에 곧잘 쓰인다. 동북지방을 대표하는 랴오닝(遼寧), 광시좡족자치구의 성도 난닝(南寧), 칭하이성의 성도 시닝(西寧) 등 ‘寧’ 자가 들어간 지역의 공통점은 중원에서 멀고도 먼 변방이라는 것이다. 변방이 시끄러우면 중원이 불안해졌고, 중원이 흔들리면 변방이 무너졌다. 중국의 안정은 변방에 달려 있었기에, 중국인들은 변방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했다. 닝샤라는 이름에도 이 지역에 난리가 일어나지 않고 평온하기를 바라는 중국인의 염원이 녹아 있다.

칭하이성에서 발원한 황하는 굽이굽이 북쪽으로 흐른다. 간쑤성 성도 란저우에서 몽골의 오르도스 초원까지 흐른 황하는 내몽골의 낭산(狼山)에서 비로소 남쪽으로 꺾여 중원으로 흘러든다. 즉, 황하는 중원 농경민의 강이기 이전에 초원 유목민의 강이다. 황하가 란저우에서 오르도스로 흐르는 중간에 닝샤의 성도 인촨(銀川)이 있다.

닝샤는 허란산(賀蘭山), 오르도스 고원, 황토고원, 리우판산(六盤山) 등 산과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안에는 황하가 흐르는 닝샤 평원이 있다. 연평균 강수량이 100~400mm로 매우 건조하지만(한국 중부는 1100~1400mm), 황하 덕분에 땅이 비옥하고 녹지가 많아 ‘천하의 황하, 닝샤를 부유케 했다(天下黃河富寧夏)’는 말이 생겼다.

특히 인촨은 황하를 끼고 있으며 하란산이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배산임수 지형이라 닝샤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인촨은 ‘은빛 하천’이라는 뜻이다. 황하와 72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햇살에 은빛으로 빛난다는 의미다. 인촨 근교의 사호(沙湖)는 300여ha의 사막섬을 감싸고 있는 660여ha의 큰 호수다. 사호를 보면 인촨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이해가 간다.

초원과 황하를 낀 닝샤는 농경과 목축이 모두 가능한 땅으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다. 닝샤의 고대인들은 3000~1만 년 전에 하란산의 바위에 많은 그림을 남겨 옛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게 한다.

진(秦)나라는 일찍부터 닝샤 지역에 장성을 쌓으며 세력을 뻗쳤다. 닝샤는 진나라의 근거지인 산시(陝西) 성 서북방을 감싸고 있는 ‘관중의 장벽(關中屛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경 지역의 특성상 닝샤는 중원이 혼란스러울 때 독자성을 드러낸다. 5호16국 시대로 가보자.


흉노가 부활시킨 漢나라

진무제(晉武帝) 사마염은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를 열었다. 사마염은 조위(曹魏)가 할아버지 사마의에게 권력을 뺏긴 까닭을 황족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위를 거울 삼은 사마염은 사마씨 일족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일족에게 강한 권력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조치가 진을 와해시켰다.

사마염 자신은 말년에 사치 향락에 빠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명민한 군주였다. 그러나 사마염의 아들 혜제(惠帝) 사마충은 ‘백치 황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는 것은 유언비어지만, 혜제가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라고 말한 것은 정사인 ‘진서 혜제기’에 버젓이 기록된 사실이다.

황제는 멍청하고 황족들은 제각기 병권을 갖고 있으니 저마다 권력을 갖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팔왕의 난(八王之亂·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황족들의 내란) 중에 장군 왕준이 선비족·오환족과 결탁해 공격하자, 성도왕 사마영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이때 사마영에게 볼모로 잡혀 있던 흉노 유연(劉淵)은 “동호(東胡)가 아무리 날래다고 해도 5부 흉노는 당해내지 못합니다”라고 호언장담하며 자신을 흉노에 보내주기를 청했다. 흉노로 돌아간 유연은 바다에 들어간 교룡(蛟龍)과 같았다. 유연은 사마영의 숙적 사마등을 격파하고 산시(山西)성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위진(魏晉)에 의해 끊어진 한나라를 부활시키겠다며 ‘한(漢)’의 황제를 자처했다.

한고조 유방이 흉노 묵돌선우에게 패하고 화의를 맺은 후에 한나라와 흉노는 “근심과 안락을 함께” 한 형제의 나라가 됐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뒤를 계승해야” 하며, 유연 자신이 유(劉)씨 성을 갖게 된 이유도 한 황실 유씨 사람들이 흉노와 결혼해 사돈이 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의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오랑캐인 흉노에 의해 중국 정통 왕조인 한나라가 부활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긴 서양에서도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이 훗날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을 열었으니, 역사란 원래 얄궂은 것인가. 유연의 한나라는 5호16국 시대를 연 1번 타자였고, 이후 수많은 유목 부족국가가 명멸했다.

그중 하나가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운 하(夏)나라다. 혁련발발은 유씨였으나 ‘아름답고 빛나는(徽赫) 하늘’이라는 뜻의 흉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중국식 성에서 흉노식 성으로 개명한 것을 보면 흉노의 자주의식을 보여주는 듯하나, 왕조 이름은 얄궂게도 중국 최초의 왕국 하나라다.

문헌적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사마천은 흉노가 “하(夏)나라의 국운이 쇠하자 벼슬을 잃은 이들이 서융(西戎)에 들어가 살게 된 하후씨(夏後氏)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이는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듯, 세상 사람 모두가 천하의 근원인 중원에서 비롯됐다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말이다. 그러나 흉노 역시 이 전설을 받아들였다. 뼈대 있어 보이는 족보가 좋아서였을까, 중원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어서였을까.

혁련발발은 대단한 야심가이자 잔혹한 완벽주의자였다. ‘천하를 통일해 만방에 군림하겠다(統一天下 君臨萬邦)’는 뜻으로, 내몽골과 산시성(陝西)성이 만나는 오르도스 초원에 수도 통만성(統萬城)을 세웠다. 병기를 만들 때 화살이 갑옷을 못 뚫으면 화살 만드는 사람을 죽였고, 화살이 갑옷을 뚫으면 갑옷 만드는 사람을 죽였다. 통만성을 쌓을 때는 성벽에 송곳이 한 치만 들어가도 그곳을 쌓은 자를 그 자리에서 죽여 성벽 속에 처넣으며 성을 쌓았다. 그 결과 성벽이 어찌나 단단한지, 벽을 숫돌 삼아 칼과 도끼를 갈 수 있었고, 1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목민족이 쌓은 성곽 중 원래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성곽이다.  

혁련발발은 철옹성을 쌓고 오르도스 일대를 장악하며 북방의 강자 북위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그가 45세에 죽자 하나라 후계자들은 내분에 휩싸였고, 북위의 침공을 받고는 25년의 역사를 마감한다. 불꽃같은 창업자처럼 짧고 강렬한 역사였다.

북위는 하, 북연, 북량 등을 정복해 북중국을 통일하고, 통일왕조인 수·당의 모체가 됐다. 당나라 때 칭하이에 살던 탕구트족은 닝샤로 이주해서 살다가 ‘황소의 난(875~884년 일어난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장안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탕구트의 지도자 탁발사공(拓跋思恭)은 이 공로로 하국공(夏國公)에 봉해지고 황실의 이(李)씨 성을 하사받았고, 훗날 송나라가 5대10국을 평정할 때 이덕명은 송에게 칭신해 송나라 황실의 조(趙)씨 성을 하사받았다.



닝샤의 절정, 대하 제국

송 태조 조광윤, 태종 조광 형제는 함께 중원을 통일한 명장이었지만, 끝내 요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베이징을 포함한 연운 16주도 되찾지 못한다. 이후 송나라 군사 활동은 지리멸렬하다. 1004년 요나라가 남하하자,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보내기로 하고 화친을 맺는다(澶淵之盟). 그나마 송나라가 형이 되고, 요나라가 동생이 되기로 해서 중화의 체면만 간신히 살렸다.

의기양양한 요나라는 바로 옆에 있는 소국 닝샤를 찔렀다. 1020년 요 흥종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했지만, 닝샤의 조덕명은 이를 격퇴한다. 닝샤는 요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동시에 송나라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깨달았다.

조덕명의 아들 조원호가 송나라의 신하 노릇을 그만하자고 했을 때 덕명은 말했다.

“우리가 용병한 지 오래돼 피로하고 지쳤다. 우리 부족이 30년 동안 좋은 비단을 입은 것은 송의 은덕인데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자 야심가 원호는 당차게 말했다.

“영웅이 세상에 나왔으면 마땅히 패왕이 돼야 합니다. 비단옷을 입고 어찌 패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뒤를 이은 원호는 1036년 간쑤성 일대를 석권해 하서회랑을 차지했다. 하서회랑은 실크로드 상인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날랜 군사에 풍족한 자금이 더해지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았다. 마침내 1038년 원호는 성(姓)을 이씨로 바꾸고 ‘대하(大夏)’의 건국을 선포하며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무렵 대하는 인촨을 중심으로 닝샤, 간쑤, 산베이(陝北), 서부 내몽골 오르도스 초원을 아울렀고, 탕구트족을 중심으로 한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거란족 등 300만 백성을 거느린 다민족 제국으로 성장했다. 역사적으로는 대하가 아닌 ‘서하(西夏)’라는 송나라식 명칭으로 불린다.

무력한 송나라 군대는 소국 서하의 군대에도 연전연패했다. 다행히 송나라에 인재가 없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개혁하려다 좌천돼 고향인 산시(陝西)성에 있던 범중엄은 3년이나 서하의 침공을 막았다. 범중엄은 이 공로로 재상이 됐으나 개혁의 뜻은 펼치지 못한 채, 서하와 화친협정이 체결되자 재상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천하의 근심을 미리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누린다”는 명언을 남긴 범중엄은 나라를위기에서 구했지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는 이룰 수 없었다.


外華內貧

그러나 송나라는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며 개혁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송은 북방의 강자 요나라에 패한 것도 모자라 변방의 소국 서하에도 패했다. 송이 서하에 쩔쩔매는 것을 본 요나라는 1042년 ‘전연의 맹’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의 세폐(공물)를 매년 비단 30만 필, 은 20만 냥으로 늘려 양국 간 ‘형제애’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 1044년 송은 매년 비단 15만 필, 은 5만 냥, 차 2만 근을 서하에 보내기로 하고 전쟁을 끝냈다.

송나라는 겉은 화려했으나 실속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송은 2만 관료, 125만 대군을 거느린 데다 상업이 발달해 부유한 대국이었다. 그러나 관료는 많지만 당쟁을 일삼으며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고, 군사는 많지만 외적에게 연전연패했으며, 돈은 많지만 낭비가 심해 국고는 텅텅 비었다. 비효율의 극치였다. 관리는 남아돌고 황실은 사치를 일삼는 가운데(冗官冗費), 민중은 약해지고 가난해져만 갔다(積弱積貧).

당나라가 강력한 지방절도사들의 반란으로 쇠망의 길을 걸은 것을 보고, 송나라는 무신을 경계했다. 장군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임시로 임명했고, 지방에 파견한 군대도 3년마다 교체했다. 그래서 “장수는 병사를 모르고, 병사는 장수를 몰랐다(將不識兵,兵不識將).” 장수와 병사의 자질도 북방 유목국가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데, 설상가상으로 송나라의 국방정책은 장수와 병사 간의 호흡마저 안 맞게 만들었다.

왕안석은 선배 범중엄보다도 훨씬  과감한 신법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과 옛법을 옹호하는 구법당의 반대가 심했고, 신법 개혁도 많은 진통과 부작용이 있어 결국 개혁은 실패했다. 구법당과 신법당은 이후 송나라 당파싸움의 씨앗이 된다. 그나마 구법당의 사마광과 신법당의 왕안석은 일파의 종주들답게 진충보국의 마음만큼은 한결같은 명신이었으나, 후대의 붕당들은 권력을 차지하고 적대 세력을 없애기 위한 당리당략에 의해 움직였다. 송나라는 더더욱 병들어갔다. 이처럼 변방의 사건은 중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서하는 송의 세폐를 받으며 강소국의 지위를 누린다. 서하가 하서회랑을 장악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송나라 모두 서하를 통해야만 서역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하란산을 병풍 삼은 벌통 모양의 서하왕릉(西夏王陵)과 서하문자 등은 서하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준다. 서하는 요나라가 망했을 때도 건재했고 금나라 말기까지 살아남았다. 서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당대 세계 최강 몽골군이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의 모진 탄압을 이겨내고 끝내 몽골을 통일한다. 칭기즈칸이 숙적 금나라를 치기 전에 서하를 침공한다. 금나라와 몽골군이 정면에서 맞붙을 때, 서하는 몽골의 중심부를 측면에서 노릴 수 있었다. 일찍이 한무제가 흉노를 토벌할 때도 산시에서 정면으로 들이친 전법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명장 곽거병이 먼저 흉노의 한쪽 날개를 꺾고 하서회랑을 장악한 뒤, 흉노의 본진을 치면서 한나라는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전법을 금나라가 활용한다면 몽골이 위태로웠다. 따라서 금을 치기 전에 서하를 제압해야 했다.



빈자리 채운 回族

1227년 서하의 수도 영하(寧夏)를 친 것이 칭기즈칸 최후의 전쟁이었다. 칭기즈칸은 영하를 함락하기 전 눈을 감았고, 몽골군은 영하를 함락한 후 영하의 모든 백성을 도륙해 칭기즈칸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서하는 이로써 189년의 역사를 허망하게 끝냈다.

서하의 빈자리는 중동의 이슬람 상인들이 채웠다. 하서회랑·장안과 가까이 있어 교역이 편리하고 황하를 끼고 있어 입지조건이 좋은 데다, 주인 없던 땅인 닝샤는 이슬람 상인들에게 매력적이었다. 닝샤는 후이족(回族)의 땅으로 점점 변해갔다.

당나라 때부터 활발해진 서방 교역은 원나라 때 절정을 이뤘다. 교역이 활발해지며 후이족의 수도 점점 많아져 명나라 때에 이르면 무시 못할 수준이 되었다. 이재(理財)에 밝은 후이족은 상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사업 영역은 다양했고, 소금 밀매조직 같은 어둠의 사업까지 포괄했다. 한족과 후이족의 갈등이 있을 때 관아는 종종 편파적으로 한족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후이족은 사회에 불만을 품었다.

농경·목축·상업이 고루 발달한 닝샤는 ‘변방의 강남(塞上江南)’이었다. 강희제의 평가를 보면 이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청나라 초기 몽골계 준가르의 갈단은 외몽골에서 칭하이성에 이르는 광활한 서부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준가르 토벌은 강희제 최대의 숙원 사업이었다. 강희제는 친히 고비사막을 넘어 갈단을 토벌했다. 이 과정에서 강희제는 북중국 일대를 지나며 유목민다운 평을 남겼다. 산이 많은 산시(山西·陝西) 지역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좋은 곳은 ‘제법 볼만’ 하지만, 안 좋은 곳은 “가소로움의 극치를 이룬다”고 비평했다. 그나마 이런 평가는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두 곳(山西·陝西)의 산천과 황사(黃沙), 사람을 놀라게 하는 높은 절벽들을 떠나오니 참으로 기쁘다”는 말에서 강희제의 속내가 드러난다.

이에 비해 닝샤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곳의 풍경은 비록 남방지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번 순행에서 짐이 지나온 지방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이곳에는 온갖 물자가 다 있고 식품 값도 싸다. 서쪽으로는 허란(賀蘭)산맥에 가깝고 동쪽으로는 황허에 임하고 있으며 성의 주변은 모두 논이다. 예부터 구변진(九邊鎮)의 하나였다. 짐은 이미 칠변진(七邊鎮)에 다다랐는데 지나온 변진 가운데 오직 닝샤만이 언급할 만하다.”



게다가 강희제는 닝샤를 떠나고도 닝샤의 음식을 찾았다.

“짐은 닝샤로 사람을 보내 음식과 곡식, 국수 등을 구해 오게 하였다. 국수는 궁궐에서 먹는 것보다 더 낫고 포도도 아주 맛있다.”

초원과 황하가 어우러지는 닝샤가 강희제의 피 속에 흐르던 유목민 여진족의 영혼을 깨웠기에 이토록 애착을 보였던 것이리라.

그러나 청나라 초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국운이 기울며 악화됐다. 태평천국 난이 중국을 한바탕 휩쓸던 1862년 간쑤·닝샤·신장 등 서북 지역에서 후이족의 반란이 크게 일어났다. 발단은 지극히 사소했다. 한족 상인과 후이족이 대나무 장대 값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 싸움이 일어났다. 개인의 싸움은 곧바로 패싸움으로 번졌다. 한족 주민들이 후이족 마을을 습격해서 불을 지르고 무고한 양민들을 죽였다. 분노한 후이족 20만 명이 봉기를 일으켜 18대영(十八大營)을 이루었다. 서북에 주둔하던 관군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어, 청 조정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전쟁영웅 좌종당을 급파했다.



人肉 먹으며 결사항전

당시 자흐리 교단의 제5대 교주인 마화룡(馬化龍)은 후이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의 고향인 닝샤 금적보(金積堡)는 중요한 종교·상업 중심지였다. 그는 이곳을 기반으로 내몽골·베이징과 교역하며 부를 축적했고, 후이족들의 힘을 모아 수로와 500여 개의 요새를 구축하며 세력을 떨쳤다.

문무를 겸비한 좌종당도 전 병력을 동원해 금적보를 포위했지만 16개월이나 마화룡을 제압하지 못했다. 후이족들은 화살이 떨어져도 돌을 던지고, 식량이 떨어져도 인육을 먹어가며 결사항전했다. 그러나 끝내 모든 힘을 다 소진해버린 마화룡은 항복했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예언자 마호메트처럼 추앙받던 마화룡을 제압하자 각지의 후이족 반란 진압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러나 청 조정은 후이족의 근본적인 불만과 민족 간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후이족은 음력 1월 13일에 비참하게 순교한 마화룡을 ‘13일의 어르신(十三太爺)’이라고 부르며 추모했다.

오늘날 후이족은 여러모로 특이한 존재다. 1000만 후이족은 중국에서 좡족 다음으로 많은 소수민족이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후이족은 중국 전역에 퍼졌다. 정작 닝샤에 살고 있는 후이족은 200만 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성도 인촨의 중심 상권은 한족이 장악해 ‘후이족의 고향’에 온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후이족이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1000년이나 중국인과 통혼해왔기 때문에 종족적으로 한족과 구별할 수 없고, 언어 역시 중국어를 써온 지 오래다. 현실적으로 후이족을 후이족답게 구별하는 것은 이슬람 종교와 문화뿐이다.

‘한화(漢化)=문명화’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한족은 한화되지 않은 후이족을 기묘한 존재로 치부한다. 일단 식사 문제부터 부딪힌다. 중국인이 원체 먹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함께’ 먹는 것이다. 중국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식욕을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서 ‘관시(關係)’를 맺는 첫걸음이다. 그런데 이슬람교도는 한족이 사랑하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이슬람풍(清真)’이라고 쓰여 있는, 이슬람 교리를 따르는 식당에 간다. 이처럼 함께 밥 먹는 것부터가 쉽지 않으니 많은 한족이 후이족과 거리감을 느낄 만도 하다.

또한, 현대의 탈종교화 추세에 따라 후이족이라고 꼭 이슬람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국의 호구제는 출신 민족을 명기하게 되어 있어서, 출신 민족은 후이족인데 후이족다운 정체성은 하나도 없는 상황도 연출된다.

변방은 권력에 저항하는 자를 유배시키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은 현대사 최다의 유배자를 양산했다. 닝샤 역시 서북 변방으로서 최적의 유배지였다. 많은 지식인과 청년, ‘반동분자’들이 닝샤에 끌려왔다. ‘반동학술권위’ 혐의로 닝샤 노동개조소로 끌려갔던 저우유광(周有光)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닝샤에 있을 때도 노동개조범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 1개 단위에 5000명씩, 모두 24개 단위가 있었는데…(중략)…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운 좋게 죽음을 피한 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참혹한 역사가 오늘날 닝샤를 ‘중국의 할리우드’로 만들었다. 닝샤 노동개조대로 끌려갔던 12만 명 중에 21세의 청년 장셴량(張賢亮)이 있었다. 그는 장쑤성 난징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강남 문인의 후손답게 그는 13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문학소년이었지만, 반우파투쟁 중 반동분자로 몰려서 21세에 닝샤의 노동개조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당시 나이보다 더 긴 세월인 22년 동안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중국의 할리우드

변방에 많은 것 중 하나는 요새다. 명나라는 변방 닝샤에 보루를 설치해 몽골의 재남침을 막았는데, 그중 하나가 진북보(鎭北堡)였다. 장셴량 당시 진북보는 버려진 채 오래된 폐허로 노동개조대의 숙소가 근처에 있었다. 장셴량은 노동개조대에서 풀려나 명망 있는 작가가 된 후 1992년 진북보에 ‘화하서부영화촬영지(华夏西部影视城)’를 설립했다.

미국의 할리우드가 비는 적고 해는 길어 영화 촬영의 메카가 된 것처럼, 닝샤 역시 일조량은 풍부하고 강수량은 적어 영화 촬영에 적합했다. 더욱이 버려졌던 만큼 오히려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명나라 때의 고성은 돈을 따로 들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세트장이었다.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을 비롯해 숱한 영화가 여기서 촬영되었다. 서부영화촬영지는 “중국 영화는 이곳에서부터 세계에 진출했다(中國電影從這裡向走世界)”는 찬사를 받았다.

오늘날 닝샤는 면적 6만6400㎢, 인구 660만 명의 작은 지방이다. 성급 행정구역 중에서는 하이난 섬 다음으로 면적이 작고, 인구는 홍콩(약 700만 명)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2015년 명목 GDP(국내총생산)는 42억 달러로 티베트·칭하이 다음으로 끝에서 3위다. 뚜렷한 산업이나 차세대 동력도 없다. 중국 정부가 지역별로 전략적 신산업을 토론할 때도 베이징·광둥성은 IT, 상하이는 항공·위성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명확히 밝혔지만, 닝샤는 구체적인 분야를 언급하지 못했다.

더욱이 사막화가 심각한 환경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닝샤의 현들은 개간한 농지를 숲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방사림(防沙林)·방호림(防護林)을 조성하는 등 ‘사막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20세기 최대의 잔혹한 유배로부터 ‘중국의 할리우드’를 낳은 것처럼, 닝샤가 오늘의 도전을 이겨내고 다시 한 번 대하(大夏)의 영광을 부활시킬 수 있을까.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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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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