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상속의 역사

종가(宗家)는 양반의 보루

  •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종가(宗家)는 양반의 보루

2/2

기업 못잖은 청나라 ‘종중’

종가(宗家)는 양반의 보루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 원정을 묘사한 1940년대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도레의 그림.[사진제공 문학동네]

서양의 유대인도 그러했지만, 고대 중국인은 장자 중심의 부계 혈연조직을 강화했다.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는 방법이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면 끝도 없다. 이 글에선 청나라 시대에 국한해 상속제도의 몇 가지 특징을 간단히 소개한다.

중국의 상속제도는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과거시험은 신분을 유지하는 수단이자 신분 상승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시험 준비기간이 수십 년이나 요구됐기에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중국의 많은 종족은 공동기금을 조성했다. 결과적으로, 과거 합격의 영광은 당사자뿐 아니라 종족 전체의 공유물이 됐다.

청나라에선 성인 남성의 2%가 신사(紳士)였다. 한국으로 말하면 그들이 양반이었다. 청나라의 과거 합격자는 대체로 상위 10% 이내에 속한 종족집단에서 배출됐다. 그 밖의 절대 다수 종족집단은 희망을 아예 내려놓을 수 없어서 패배가 예정된 경쟁에 뛰어들었다.

16세기 이후 중국의 신사들은 많은 특권을 향유했다. 신사의 대다수는 퇴직관리로 대지주 가문에 속했다. 초시(初試) 이상 과거시험 합격자들도 신사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고전에 대한 박식을 자랑하며, 품위 있고 유족한 생활을 즐겼다. 또한 자신의 종족 조직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지방행정에도 참여했다. 그들이야말로 향촌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신사에겐 다양한 수입원이 존재했다. 그들은 위세를 이용해 전당포를 운영하거나 고리대금업자로 활동했다. 불법적인 상업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급 신사들 가운데는 마을이나 집안의 훈장으로 밥벌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필작가로 활동하거나, 대놓고 상업작가로 출판에 관여하기도 했다. 과거시험 참고서를 출판하거나 상업성이 있어 보이는 출판물의 교정도 맡았다. 다른 사람의 저술에 서문을 써주고 보수를 요구하기도 했다.



신사는 상인단체 임원이 됐다. 향촌공동체 사업에도 간사로 참여했다. 그 밖에 의연금 모금을 주관하거나 수리사업 전문가로 일하기도 했다. 신사는 의학이나 법률 전문가로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지식과 명성에 힘입어 종족단체인 종중(宗中)의 대표가 돼 사당의 운영을 전담하는 등 종중 사무를 담당했다. 이처럼 신사의 역할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신사가 많이 나오면 친척들이 여러모로 혜택을 보는 구조였다.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종족기관, 즉 종중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지레짐작과 달리 중국의 종중은 상업에 훨씬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예를 들면, 안휘성 휘주부는 상업으로 이름난 지역이었고, 투자자의 상당수가 유력한 종중이었다. 강소성의 남심진은 이름난 비단 산지였다. 다수의 종중이 그곳의 비단 사업에 투자했다. 사천성 남부지방은 소금 산지로 유명해 소금 채취에 거액을 투자한 종중도 많았다. 물론 종중은 농업에도 투자했다. 그들은 광동성 주강 하류의 개간사업에도 앞장섰다.

이처럼 청나라 종중은 현대적 기업 또는 투자기관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었다. 자본이 넉넉해야만 집안의 유망한 청년들을 제대로 후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중의 투자이익은 간부들에게 큰 혜택으로 돌아갔다. 가난한 친족의 생계를 돕는 데도 사용됐다. 양자강 하류 지방에선 여러 종중이 공동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것을 상인들에게 빌려줌으로써 대부은행과 같은 구실을 했다. 한국의 문중과 달리 중국인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았다. 

종족이란 무엇인가. 조상을 공유한 집단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조상의 성을 바꾸거나 시조를 조작해 명성을 허위로 꾸미는 경우도 있었다. 종중은 공동재산을 소유한 게 사실이지만, 그 편차는 심했다. 상당수 종족은 몇 칸에 불과한 사당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들도 종중의 공동자본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중국인들은 종중의 재산이 흩어지는 걸 수치로 여겼다. 재산이 넉넉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 그 재산의 일부는 아들들이 나눠가졌으나, 대부분의 재산은 공동소유로 묶어 종중 재산으로 만들었다.

청나라 조정은 종중이 유교적 이념을 심화함으로써 지배체제를 안정시킨다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종중을 믿고 장려했다. 그러면서도 조정은 종중의 부작용을 의식해 감시의 눈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종중 가운데는 약자를 괴롭히거나 무리한 개간사업을 벌여 홍수를 초래하는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종중이 추진한 사업이 사회문제를 낳기도 했다.

청나라는 상업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였다. 만주족은 본래 동북지방에서 모피 무역으로 돈벌이를 했던 만큼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에 관심이 많았다. 18세기 청나라의 생활수준은 유럽을 능가했다. 당시 중국의 종중이 현대의 기업체를 연상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종가 문화’로 생존 도모

조선시대의 ‘문중(門中)’도 상속제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특히 영남지방에서 발달한 ‘종가(宗家)’와 ‘종손(宗孫)’은 더욱 그러했다. 이는 균분상속제도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장자상속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였다.

영남에서 두드러졌던 종가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집안 재산을 오롯이 이어받은 종손이 문중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재산 분할을 막음으로써 종손은 조상 전래의 지도적 위상을 유지했다. 그들은 다른 집안 종손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조상의 사당을 수호함으로써 양반 가문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또한 종손은 종토(宗土)를 효율적으로 관리해 문중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안전망을 만들었다. 계속된 인구 증가로 생계를 잇기 어려운 친척들에겐 땅을 빌려줬고, 그들의 경조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거듭된 흉년이나 큰 난리를 겪은 끝이라도 조상을 같이하는 일가친척이 대대로 한 지역을 차지하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는 없다. 종가는 가난에 시달리는 일가를 모두 구제할 수 있을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문중에 속한 유능한 청년들에게 장기간의 학업을 뒷바라지할 만한 여력도 없었다. 대다수 종가엔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후기엔 기호지방의 몇몇 양반 가문이 권력을 독점했다. 다른 양반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도 어려웠고, 합격의 관문을 뚫더라도 이권이 보장된 자리에 등용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세월이 계속되자 대다수 양반은 종가라는 지위 자체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종가란 ‘불천위(不遷位)’가 있어야 했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계속해서 사당 제사를 누릴 신위를 모셔야만 종가가 되는 법이다. 높은 벼슬을 지낸 조상이 없으면, 불천위로 지정된 조상의 신위가 나오지 못한다. 그러면 이제 종가는 더는 형성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양반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영남지방 양반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려 한 가지 독특한 방안을 마련했다. 이른바 ‘향불천위(鄕不遷位)’라는 존재였다. 한 고장의 양반들이 의견을 모아 불천위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많은 종가와 종손이 새롭게 등장했다. 오늘날 경북 안동 한 지역에만도 이른바 ‘47종택(宗宅)’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0개 종가는 벼슬에 나간 적 없는 순전한 유학자를 불천위로 모신 집안이다.

종택의 성립으로 이어지지 못한 향불천위의 수는 훨씬 많았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서원과 사우(祠宇)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위가 존재했다. 그들은 향불천위인 셈이었다. 그 대부분은 문중서원 또는 문중사우에 모셔져 각 문중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권력에서 멀어질수록 양반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각별했던 것이다.

유교 사회인 중국과 한국의 부계 혈연조직은 차이점이 명확했다. 중국에선 ‘종재(宗財)’, 곧 종중 재산을 공동으로 상속하고 공동으로 경영했다. 그 중심엔 과거시험에 합격한 신사들이 있었다. 중국에선 한 마을에 사는 종족이라도 신분과 직업이 다양했다. 신사가 있었는가 하면 농민, 상인 및 수공업자가 공존했다. 그들의 신분과 직업은 노력과 운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달랐다. 권력에서 소외된 양반도 기득권 신분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들은 상공업에 종사하지 않았고, 신분 이동 자체를 금지하려 했다. 종가를 세움으로써 종손이 조상 전래의 인적·물적 자원을 사실상 독점케 했다. 그것이 양반 가문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한국의 ‘종가 문화’는 양반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사한 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양반들은 ‘반맥(班脈)’, 곧 양반의 혈통이 맥맥이 흐른다는 사실을 인정받고자 종가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동일한 상속제도라도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은 독특한 운영 방식을 고안했다. 이것이 결국 저마다의 사회적·문화적 특성으로 발전해갔다. 어떤 경우든지 상속제도는 집단의 생존을 위해 고안된 일종의 전략이었고, 거기엔 집단의 소망과 지향점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종가(宗家)는 양반의 보루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신동아 2017년 7월호

2/2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목록 닫기

종가(宗家)는 양반의 보루

댓글 창 닫기

2019/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