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따로, 그리고 같이’ 통일도 南北화합 가정인 우리를 닮으면 좋겠어요”

北男南女 김형덕 가족의 코리아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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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입력2023-01-22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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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빠는 서울, 엄마는 나주, 두 딸은 UAE

    • “1년에 두 번 봐요”

    • 목숨 걸고 찾은 南이 싫었던 ‘파피용’

    • 첫눈에 결혼 결심… “나랑 북한 갈래”

    • 家風=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자

    • 학원 대신 여행 보내 독립성 길러

    • 딸 성주·영주 “2030이 통일 싫어하지 않았으면”

    • 가족을 사랑하듯 南北도 그러하길



    김형덕 씨 가족은 아빠는 북한, 엄마는 한국 출신인 남북화합 가정이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아빠 김형덕 씨, 둘째 딸 김영주 씨, 첫째 딸 김성주 씨, 엄마 유성희 씨. [박해윤 기자]

    김형덕 씨 가족은 아빠는 북한, 엄마는 한국 출신인 남북화합 가정이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아빠 김형덕 씨, 둘째 딸 김영주 씨, 첫째 딸 김성주 씨, 엄마 유성희 씨. [박해윤 기자]

    2000년 6월 13일 북한 평양의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두 정상은 이틀뒤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동아DB]

    2000년 6월 13일 북한 평양의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두 정상은 이틀뒤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동아DB]

    초등학생 무렵 기억이다. 조각조각 난 파편 같은, 영상보다는 사진에 더 가까운 형태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금강산 관광이 가능해지고 개성공단이 열렸다.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이산가족이 만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희비(喜悲) 섞인 눈물을 쏟아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은 몰랐다. 그래도 어른들의 말로만, 책으로만 접한 북한이라는 나라가 비로소 가깝게 느껴졌다. 학교에선 친구들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불렀다. 곧 통일이 될 듯했다.

    화목(和睦)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년 되지 않아 서해에서 교전이 일어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가 신문·방송을 뒤덮었다. 부정적 소식이 시간차를 두고 꼬리를 물듯 이어졌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한국인이 북한군 총격에 피살됐다.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북한을 생각하는 마음 위에 적개심이 덧칠해졌다.

    또래 젊은이들은 더는 ‘통일’을 노래하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통일과나눔재단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30세대 1000명을 상대로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같은 민족’이라는 응답은 25.2%인 반면 ‘적’이라는 응답은 34.7%에 달했다. ‘남북통일이 돼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부정 답변(56.4%)이 긍정 답변(43.6%)보다 더 높았다. 또 응답자 62.6%가 “통일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전혀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그다지 하고 싶지도 않은데, 관심도 없다. 그렇다면 통일은 요원(遙遠)할 것이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김형덕(49) 씨가 떠올랐다. 그는 이른바 탈북민(북한이탈주민)이다. 1993년 10월 북한을 이탈했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중국, 베트남, 홍콩을 떠돌다 1994년 9월 한국에 들어왔다. 2001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후 북한이탈주민 최초로 국회의원 비서관이 돼 2004년 ‘북한 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에 기여했다. 2005년부터 운영해 온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에서 남북한 관계 발전 및 평화통일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력에 더해 눈에 띄는 점은 그의 가족이다. 대학에서 만난 아내 유성희(46) 씨는 공인회계사(KICPA)·미국 공인회계사(AICPA)·국제 공인 재무분석사(CFA)로 한국전력공사에서 해외사업기획처 리스크관리부장을 맡고 있다. 전남 나주시 한전 본사 사택에서 산다. 큰딸 성주(22) 씨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미국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NYUAD)에 다닌다. 경제학과 3학년으로 장래 희망은 사업가다. 지난 학기 본교 교환학생으로 뉴욕에서 공부했다. 작은딸 영주(21) 씨도 언니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되는 게 목표다. 컴퓨터공학과 2학년이다. 가족 모두 흩어져 사는 셈이다.

    1월 10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김형덕 씨 자택에서 그의 가족과 마주했다. 집은 2개의 방과 거실, 부엌, 화장실로 이뤄져 있었다. 냉장고, 전자레인지, 의자 등 필수적 가구 외엔 별다른 기물이 없어 다소 허전한 느낌을 줬다. 꽉 차 있는 캐리어와 대비됐다. 형덕 씨가 멋쩍은 듯 말했다.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좀 민망하네요. 여기는 연구소를 겸해 쓰고 있어요. 어차피 가족들 다 흩어져 사니까, ‘베이스캠프’ 노릇 정도 하는 거죠.”

    5개월 만의 재회라고 했다. 성주 씨는 뉴욕에서 들어왔고, 영주 씨는 이집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1년에 두 번쯤 본단다. 1월 20일 다시 흩어져 여름방학 때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2시간 남짓 인터뷰했다. 영상 촬영도 함께 해 긴장한 탓인지 중간에 다소 지친 기색도 엿보였지만 웃음꽃만은 내내 시들지 않았다. 형덕 씨는 “다 우리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특이하긴 하더라”며 “우리 가족은 ‘남북화합 가정’ ‘디아스포라 가족’ ‘글로벌 시티즌(global citizen·지구 시민)’ 3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면서 웃었다. 이어 “남북관계도 가족관계와 다를 바 없다”며 “상대의 낯섦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려해 나가다 보면 통일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 가자” “그래요, 가요”

    2021년 6월 16일 경기 파주시 인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인공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있다. 길이 막힌 이곳엔 바람만이 자유롭게 오간다. [뉴스1]

    2021년 6월 16일 경기 파주시 인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인공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있다. 길이 막힌 이곳엔 바람만이 자유롭게 오간다. [뉴스1]

    부부의 첫 만남은 1997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세대 기독교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성희 씨는 당시 형덕 씨의 첫인상이 군대 다녀온 ‘복학생 오빠’를 넘어 ‘아저씨’ 같았다고 했다. 그럴 법도 하다. 형덕 씨는 군대를 ‘잠시 다녀온’ 정도가 아니였다. 10년 의무복무인 평안남도속도전청년돌격대에서 3년 복무하다 탈북했다. 오랜 군 생활에 고생이 많았으며 탈북 과정은 파란만장했다. 아사(餓死)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체포됐다가 탈옥하기를 수차례, 산속에서 굶주리며 열흘을 버티다 몸무게가 29㎏까지 줄어들기도 했다.

    고된 시련 끝에 한국에 왔지만 자본주의 사회란 온통 낯선 세계였다. 막노동, 신문 배달, 골프 연습장 보조 등 고된 일을 전전했다. 희망을 찾아왔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형덕 씨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한국에 왔을 때) 처음엔 기분도 나쁘고 혼란스러웠다. 북한에서 당 간부를 하다가 온 사람은 정착지원금이 일반 북한이탈주민보다 10배는 많았다. 나는 북한에서 지배계급의 억압 대상이었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국군에 봉사했다. 그래서 북한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았다. 그런데 남한의 주적이던 사람은 대접받고, 나 같은 사람은 대접받지 못하다니 기분이 묘했다. 당 간부가 다시 당 간부가 되는 세상, 그게 싫어서 북한을 빠져나왔다. 북한에서 호의호식하며, 당 간부로 살았던 이들에게 남한은 정착금도 많이 주고, 출세까지 시켜주더라. 이 사실에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도 눈에 밟혔다. 1996년 가족을 보고 싶어 중국에 가려다 제지당하자 밀항을 시도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북한이탈주민은 해외로 나갈 수 없던 시절이다. 북한에서부터 이어진 잦은 체포·탈주에 ‘한국판 파피용’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2022년 8월 촬영한 형덕 씨 가족사진. [김형덕]

    2022년 8월 촬영한 형덕 씨 가족사진. [김형덕]

    어둠 속을 방황하던 형덕 씨에게 지금의 아내는 ‘빛’이 됐다. 형덕 씨는 “(그때) 연애하지 않았으면 내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를 만나고 삶의 의욕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그래서인지 2000년 7월 졸업하기도 전에 일사천리로 결혼했다. 만난 지 만 3년도 되지 않은 때다.

    결혼을 퍽 빨리했네요. 당시 기준으로도 꽤 이른 시기인 듯한데.

    성희 맞아요. 만 나이로 22세밖에 안 됐으니까(웃음).

    형덕 3년 정도 연애했는데요 뭐. 3년 넘게 연애했으면 오히려 결혼까지 못 갔을 거라고 봐요. 연애를 길게 하는 것도 진 빠지는 일이잖아요. 사실 저는 아내를 처음 보자마자 ‘저 여자는 내가 결혼할 여자다’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보자마자요?

    형덕 그냥 느낌이죠. 그때까지 쌓인 경험에 비춰 판단한 것 같아요. 굉장히 안정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저는 역동적으로 살았잖아요. 저랑 비슷한 사람과는 갈등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성희 씨도 그랬나요.

    성희 그렇진 않았죠(웃음). 같은 동아리라 밥 먹고 그러면서 여러 번 만나게 됐죠. 만나다보니 호감이 생겼어요. 영화랑 연극도 보고 그랬는데, 저를 좋아하는 티를 정말 많이 내더라고요. 지하철이나 영화관같이 사람 많은 곳에서도 ‘예쁘다’고 얘기하고, 사진도 찍고. 가족 아닌 사람이 저를 이렇게 좋아해 주는 건 처음이었어요. 사실 남편이 첫 남자친구예요. 남편은 연애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절 어찌나 놀렸는지 몰라요. 한번은 둘이 춘천으로 등산을 갔는데 ‘저기만 넘어가면 북한이야. 나랑 같이 북한 가자’라고 했어요.

    뜬금없이 북한을?

    성희 북한에 가면 잘살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가족도 거기 있고, 고생 안 시킬 자신 있으니 가서 잘살자고요. 처음엔 장난이 아닌 줄 알았어요. 부모님께 인사도 못 하고 왔다고 30분을 펑펑 우는데,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이 사람과 평생을 살 거니까. 그래서 ‘알겠어요. 가요’라고 했죠. 따라가니까 내려가는 길이더라고요. 그제야 장난인 걸 알았죠. 얼마나 밉던지(웃음).

    북한에 함께 가겠다고 할 정도면 많이 좋아하긴 했나 봐요.

    성희 신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교제하면서 느낀 건데, 정말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도 자존감이 엄청 높아요. 자신감도 있고요. ‘이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형덕 씨는 “사실 아내를 시험에 들게 했다”며 웃었다.

    무슨 시험인가요.

    형덕 결혼할 여자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잖아요. 변하면 안 되죠.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으니 유치하지만 그렇게 했죠. 북한에 같이 갈 정도면 ‘완전 통과’죠(웃음).

    자식 인생은 자식 것

    2016년 여름 중국 하얼빈역 앞에서 형덕 씨와 딸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김형덕]

    2016년 여름 중국 하얼빈역 앞에서 형덕 씨와 딸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김형덕]

    2016년 여름 중국 단둥철교 앞에서 성주 씨(왼쪽)와 영주 씨가 사진을 찍고 있다. [김형덕]

    2016년 여름 중국 단둥철교 앞에서 성주 씨(왼쪽)와 영주 씨가 사진을 찍고 있다. [김형덕]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요.

    성희 남편이 쓴 책이 하나 있어요. 탈북 당시에 대한 내용인데, 엄마한테 먼저 보여드렸더니 ‘이 정도 고생한 사람이면 널 힘들게 하진 않겠다’며 지지해 주셨어요. 아빠는 반대했고요.

    형덕 그때 아내가 정리를 잘 해줬죠. ‘나 이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라고 밀고 나갔어요. 그래서 더 아내를 믿게 됐죠. 그럴 때 중심을 못 잡고 부모에게 맡겨버리면 안 되거든요. 제 딸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면 그저 축복해 줄 겁니다.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데려와도 그럴까요.

    형덕 저희 집 가풍이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자’예요. 물론 의견은 내겠죠. 하지만 어떻게 막겠어요. 딸의 인생인데. 제가 딸의 인생을 대신 해줄 순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딸을 잘못 가르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신뢰하고요. 딸이 결정하는 것은 일단 믿죠.

    2016년 여름 러시아 울란우데 알렌산더-나타샤 부부 집에서 성주 씨(맨 왼쪽)와 영주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형덕]

    2016년 여름 러시아 울란우데 알렌산더-나타샤 부부 집에서 성주 씨(맨 왼쪽)와 영주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형덕]

    2010년 6월 성희 씨가 미국에서 MBA 과정을 마친 후 가족 및 이웃 주민과 함께 송별연을 하고 있다. [김형덕]

    2010년 6월 성희 씨가 미국에서 MBA 과정을 마친 후 가족 및 이웃 주민과 함께 송별연을 하고 있다. [김형덕]

    2003년 성희 씨가 취업한 후 자녀 교육은 전적으로 형덕 씨가 담당했다. 자녀 교육법이 다소 독특하다. 학원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함께 여행을 자주 다녔다. 2005년 가족을 데리고 금강산에 다녀왔다. 당시 북한이탈주민 최초의 금강산 방문으로 화제가 됐다. 이후에도 여정은 이어졌다. 자녀의 방학을 이용해 중국, 러시아, 몽골, 백두산 등을 누볐다. 축구, 골프, 승마, 아이스 스케이팅, 등산 등 운동도 많이 시켰다. 그 덕분일까. 성주·영주 씨는 중·고등학교 시절 학급 반장, 학생회장을 하며 이른바 ‘인싸’로 지냈다. 대학에서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있다.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는 입학하기 어려운 대학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형덕 씨는 “입학 준비부터 입학까지 딸들이 모두 알아서 했다. 지금까지 속 썩인 것도 없다. 참 감사할 따름이다”라며 대견해했다. 형덕 씨의 교육철학이다.

    “공간 이동 경험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열아홉 살에 탈북해 중국, 베트남, 홍콩에 머무르면서 책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이 너무도 다름을 느꼈거든요. 북한 주민이 해외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었다면 체제가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을 거예요. 세상을 경험하면 삶에 대한 자신감이 굉장히 높아집니다. 제 딸들도 그걸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고요. 공부하려면 체력은 기본이니까 운동도 시켰죠.”

    성주·영주 씨는 중학교 시절 성희 씨의 필리핀 발령으로 한국을 떠났다. 두 딸은 세부의 국제학교에 다녔다. 형덕 씨와 성희 씨가 귀국하면서 가족은 떨어져 지내게 됐다. 성주·영주 씨가 UAE로 대학을 가면서 거리는 더 멀어졌다. “타지 생활이 힘들진 않았느냐”고 묻자 두 딸은 “딱히 힘든 점은 없었다. 아버지의 교육법 덕분인지 용감한 것 같다”며 웃었다. 외양상 성주 씨는 형덕 씨를, 영주 씨는 성희 씨를 쏙 빼닮았다. 형덕 씨의 말에 따르면 성주 씨는 차분하고 주도면밀한 성격이다. 영주 씨는 상대적으로 언니보다 더 외향적이다. 노래를 잘해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 앞에서 뮤지컬 공연도 선보였단다. 당시 찍은 영상을 보니 실력이 퍽 수준급이다.

    형덕 씨가 교육을 전담했습니다. 어떻게 평가하나요.

    성희 제가 아이들을 돌봤으면 지금처럼 자라진 못했을 거예요. 아이를 더 보호하며 키웠을 것 같습니다. 운동 부분도 그렇고요. 회사 생활하랴, 공부하랴,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냈는데, 다행히 남편이 잘 돌봐줬다고 생각해요. 그 덕분에 아이들이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잘 큰 듯해 감사해요.

    영주·성주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학원 안 다니고 공부 따라가는 게 힘들었을 법도 한데.

    성주 공부 때문에 학원을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은 학원에서 파티도 하고 그러는데, 저는 학교 끝나면 집에 오고. 놀 사람은 아빠밖에 없고(웃음).

    그래서 아빠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밖에 없었군요(웃음).

    형덕 딸들과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덕분에 친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지금은 엄마랑 더 친해요. 애들이 사춘기가 오면서 거리를 좀 뒀어요.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내가 중재를 잘 해줘서 갈등은 없었고요.

    영주 엄마를 덜 봤잖아요. 어릴 때 많이 못 본 사람이랑 더 친해지는 거 아닐까 해요.

    Life Partner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다녔는데, 싫은 적은 없었나요.

    영주 글쎄요. 힘들긴 했어요. ‘이렇게 많이 걸어야 하나’ ‘호텔은 언제 들어가지’ 생각하곤 했죠. 어릴 때는 오래 걷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혼자 이집트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어요. 제 친구들만 해도 여행 다닐 때 오래 걸어 다니는 거 안 좋아해요. 한국 생활은 참 편리하잖아요. 지하철도 잘돼 있고, 에어컨도 잘 나오고요. 이런 것에 익숙하다 보니 여행지도 비슷하게 편한 곳으로 가려고 해요. 여행을 실제로 다녀보면 두 발로 직접 돌아다니고 경험하는 게 의미도, 재미도 더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어릴 적 아빠랑 여행을 다니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여행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여행 방식도, 여행을 통해 배우는 것도 많이 달랐을 거예요.

    성주 더 용감해지고 겁도 없어져요.

    형덕 영주가 이집트에서 매일 3만 보를 걸었어요. 깜짝 놀랐죠. 제가 생각해도 참 강하게 크기는 했어요(웃음). 그거 아세요? 체력 좋은 사람이 더 이타적이에요. 여유가 있잖아요. 전 제 딸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행복할 거라고 봐요.

    성주 물론 그러시겠죠(웃음).

    성희 당연하지, 아빤데(웃음).

    아버지로서는 딸들이 좀 이기적이어도 괜찮지 않나요. 퍼주기만 하는 것보다야….

    형덕 저는 희생한 것만큼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관계는 상대적이잖아요. 내가 희생하는데, 이와 반대로 할 수 있는 상대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성주·영주 씨 모두 연애 경험이 있다. 형덕·성희 씨에게 따로 소개하지는 않았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나 남자친구 생겼어”라고 얘기하는 정도다. 성희 씨는 “그래도 인스타그램 몰래 들어가 보면 누군지 알 수 있더라고요”라며 웃었다.

    처음 사귄 남자와 결혼했잖아요. 딸들에게는 뭐라고 하나요. 나처럼 살지는 말라거나, 해보니 괜찮다거나.

    성희 글쎄요. 연애를 여러 번 해봤으면 그 나름 재밌었을 수도 있었겠어요. 하지만 일찍 결혼해 함께 이룬 것이 참 많거든요. 어떨 때는 더 일찍 결혼할 걸 그랬다 싶어 아쉽기도 해요. 딸들은 아주 기막혀하지만요(웃음). 성주가 곧 3학년 2학기예요. 제가 졸업하던 해에 결혼했으니까, 성주에게 ‘너도 1년 반만 있으면 결혼할 나이다’라고 했더니 화들짝 놀라더라고요. 너무 빠르다고요. 그래도 30세 전엔 할 거래요.

    결혼을 빨리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군요.

    성희 가정을 이루면 그만큼 성장해요. 저 역시 그랬고요. 일찍 가정을 이룰수록 더 일찍 성숙할 기회를 얻는 거죠.

    형덕 씨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그는 SNS를 활발히 한다. 글, 사진을 꾸준히 올린다. 대개 가족 관련 게시물이다. 그 가운데 자문자답이 눈에 띈다.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이라는 질문에 “파트너 유(Partner Yoo)”라고 답한다. 형덕 씨는 “당연히 아내다. 평생 같이가는 라이프 파트너(Life Partner)”라며 애정을 드러낸다.

    부부 사이가 참 좋아 보여요.

    형덕 저와 제 아내는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해요. 서로가 못 가진 부분을 가지고 있죠. 모든 게 부족한 상태로 시작한 저로서는 감사한 점이 많습니다.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운영은 돈벌이가 아닙니다. 사회봉사죠. 가끔 강의료를 받긴 하지만 수입이 일정하지도 않고요. 사명감으로 하는 거죠. 좋아서 하는 일이어야 하고요. 제 아내는 경제적인 부분보다는 저와 행복하게 사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희
    사실 남편을 만나기 전 통일이나 북한이탈주민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었어요. 남편이 제가 본 첫 북한이탈주민이고요. 다만 한국이 성장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통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죠. 전 남편이 잘할 수 있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에서 일하는 걸 지지해요. 기회가 된다면 제가 뭔가를 도울 수 있길 바라고요.

    서로 단점만 봐서야…

    1월 13일 경기 파주시와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사이 임진강이 얼어 있다. 임진강엔 분단 75년의 한과 애달픔이 흐르고 있다. [동아DB]

    1월 13일 경기 파주시와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사이 임진강이 얼어 있다. 임진강엔 분단 75년의 한과 애달픔이 흐르고 있다. [동아DB]

    지난해 5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남북하나재단이 만 15세 이상 북한이탈주민 2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2022 북한이탈주민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7.1%가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남한 사회의 차별·편견’ 때문에 한국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또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무시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도 19.5%였다. 형덕 씨 가족도 이 같은 편견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북한이탈주민 남편, 아버지로 인해 겪은 불편한 기억이 있나요.

    성희 편견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남편이 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꺼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평직원일 때는 혹시나 이상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영주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한 것까진 아니지만 친구들이 놀리긴 했어요. 전 부정적 인식이 없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아빠 북한에서 왔어요’라고 했는데…. 당시 남북한 사이가 안 좋았나 봐요. 오히려 한국 밖으로 나갈수록 편견은 사라졌어요. 한국인이 아닌 친구들은 ‘신기하다’면서 흥미로워했죠. 그래도 불편하거나 숨겨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아빠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아빠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알면 기분 상할 수도 있잖아요.

    한국 사회에 여전히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네요.

    형덕 한국과 북한의 시대 격차가 40년쯤 된다고 봐요. 40년 차이가 나는 사회 사람들끼리 어울리기 쉬울까요. 한국 사회도 1980년대 사람과 2020년대 사람이 만난다면 물과 기름 관계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더 앞서 있는 한국 사람이 좀 더 ‘오픈 마인드’였으면 해요. 북한이탈주민이 잘 정착해야 한국에도 플러스가 되잖아요. 남북한이 서로 다른 것을 조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상호 유인점을 찾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봐요. 제 아내는 서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북한에서도 가난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오가며 한국에 왔습니다. 당연히 너무 달랐죠. 조화를 이루기 위해 아내의 호불호를 살폈고,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내는 편견 없이 제 장점만을 봤고, 저 역시 아내의 장점만을 본 겁니다. 사람끼리도 단점만 자꾸 보면 안 맞는데, 국가는 오죽하겠습니까.

    “70년 별거 아니에요”

    형덕 씨 가족이 짐을 싸고 있다. 이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사는 ‘코리아 디아스포라’다. [박해윤 기자]

    형덕 씨 가족이 짐을 싸고 있다. 이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사는 ‘코리아 디아스포라’다. [박해윤 기자]

    형덕 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실 편견이 있을 수밖에 없죠.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니 생기는 문제입니다. 장기적으론 남북관계 개선이 해답입니다. 서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편견도 생기지 않겠죠.”

    한국의 젊은이들은 통일을 그리 반기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성주 한반도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통일이 되면 좋다고 생각해요. 대개 ‘한민족이지만 나라도 다르고, 국기도 다른데 꼭 경제적 차이를 감수하면서까지 통일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듯해요. 저처럼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 눈으로만 봐도 통일이 되면 장점이 있습니다. 북한이 개방되면 값싼 노동력이 풀리겠죠. 천연자원도 많고요. 좋게 본다면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통일 비용이 관건이죠. 세금을 2~3배 내야 하는 일이 벌어져도 해야 할까요.

    성주 그 정도로 상황이 급변하진 않을 거예요. 통일에 따르는 비용이나 이익을 세밀하게 다 따져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할 수도 없고요. 북한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고 뉴스에서 접하는 소식이 다인데, 안 좋은 것을 더 크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

    영주 씨도 비슷한 생각인가요.

    영주 네. 한민족이라는 인식은 어린 세대일수록 더 흐려지잖아요. 같은 나라였다는 사실은 교과서에만 있습니다. 사실은 다른 나라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 보니 ‘왜 우리가 다른 나라 때문에 피해를 입어야 해’라고 여기는 듯해요. 저랑 언니는 아버지가 북한이탈주민이다 보니 북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민족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생각이 좀 다를 순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북한은 32차례에 걸쳐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12월 26일엔 북한 무인기가 한국 영공을 침범했다. 1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은 김승겸 합참의장을 비롯한 육·해·공군 및 해병대 지휘관들에게 “일전(一戰)을 불사한다는 결기로 적의 어떤 도발도 확실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11일 국방부 업무보고에선 “공격을 당하면 100배, 1000배로 때릴 수 있는 대량응징보복(KMPR) 능력을 확고하게 구축하라. 도발 심리 자체를 눌러야 한다”고 지시했다. 형덕 씨 가족으로서는 악화일로로 치닫는 남북관계가 달가울 리 없다. 영주 씨의 말처럼 형덕 씨 가족에게 북한이란 ‘다른 나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무뎌지긴 했지만 다가오는 설도 형덕 씨에겐 아린 시간이다.

    “어머님은 1992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땐 명절 때 마음이 많이 시렸죠. 2001년 돌아가셨어요. 그 뒤로 아픈 마음이 덜해지긴 하더라고요. 형제는 조금 다른가 봐요. 이제 제 가족은 여기 있잖아요. 딸들을 자주 보고 싶은 마음이 크죠.”

    형덕 씨는 “한국에서 가정을 꾸리면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더 커졌다”고 했다.

    이유가 뭔가요.

    형덕 나이가 이제 쉰인데, 북한에서 산 시간보다 남한에서 산 시간이 10년 더 길어요. 북한에 형제, 친구가 남아 있어요. 북한도, 한국도 제 고향이에요. 다만 한국에 영원히 살 거니까 이곳이 평화적으로, 지속 번영하길 바라는 거예요. 남북한은 같은 민족으로 수천 년을 살았어요. 중간에 잠시 떨어졌다 붙었다 했지만요. 이 시간에 비하면 분단 70년 별거 아니에요. 딸들이 살아갈 땅이기도 하니까 통일이 되는 방향으로 저부터 노력해야죠. 다른 사람이 제가 하는 역할을 계속 이어가 준다면 언젠간 통일이 될 거라고 봅니다.

    형덕 씨는 남북관계를 자신과 아내 혹은 딸과의 관계에 빗대 설명할 때가 잦다. 국가 간의 일도 가족 간의 그것과 원리는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덕 씨는 “가장 중요한 건 공존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며 다음과 같은 바람을 나타냈다.

    “남녀 관계, 가족 관계, 국가 관계가 모두 비슷합니다. 관계를 좋게 유지하다 보면 통합되는 거예요. 남녀 관계도 만나자마자 바로 결혼하자고 하면 안 되잖아요. 과정이 있죠. 남녀가 서로 잘 지내려 노력하면 사랑하게 되고, 그러다 결혼도 하는 거죠. 또 한국 사회는 너무 급해요. 북한이 40년은 뒤처져 있는데, 어떻게 따라오겠어요. 가족처럼 앞서가는 사람이 뒤에 있는 사람, 부족한 사람을 살펴야 해요. 그게 다 ‘정’이잖아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경제력이 10번째로 강한 나라고, 북한은 150위쯤 돼요. 애초에 대등한 사이가 아닙니다. 좀 느리더라도 남한이 북한을 성숙하게 이끌었으면 해요.”

    북한 남자와 한국 여자가 만나 자식 둘을 낳았다. 가족 넷은 흩어졌다 만나길 반복한다. 형덕 씨가 말한 ‘남북화합 가정’과 ‘디아스포라 가족’의 의미를 곱씹었다. 화목하지만 이들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항상 잘 맞았던 것도 아니며 서로 싸우기도, 잠시 멀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순간도 가족이란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부족함을 보듬으며 신뢰로 골을 메웠다. “국가 관계도 가족의 그것과 같다”는 형덕 씨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나뉘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남과 북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직 끈은 이어져 있는 것일까.



    이현준 기자

    이현준 기자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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