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청년도 노년도 고달픈 나라, 혐오·적대 싹튼다

[김호기의 고전으로 읽는 21세기] ‘유토피아’와 ‘레트로토피아’로 읽는 불안과 희망

  •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2023-09-2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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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성공한 나라에서 고립감을 느끼나

    • 르네상스 대표하는 지적 거인, 모어

    • 정의와 행복 가능케 할 사유재산 폐지

    • 국가 전체가 큰 가족처럼 운영되는 곳

    • 유럽 변방 출신 사회학 거장, 바우만

    • ‘고정화된 현대’ → ‘유동하는 현대’

    • 액체 현대 이론가의 유언장 같은 책

    • 불평등의 구조화와 세습 자본주의

    2월 6일 서울 강서구의 한 도로에서 노인이 리어카에 폐지 등 폐품을 실어 나르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2월 6일 서울 강서구의 한 도로에서 노인이 리어카에 폐지 등 폐품을 실어 나르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는 걸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게 진보의 의미라면, 인류의 역사는 진보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나의 삶이 더 윤택했다. 국가적 수준을 보더라도 전근대보다 근대가, 근대보다 21세기가 더 발전했다.

    그런데 21세기 현재의 삶이 과거보다 행복한 걸까. 우리나라 사례를 생각하면 물질적 삶이 과거보다 크게 향상된 것은 분명하다. 5000년에 이르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21세기 현재가 가장 풍요로운 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가 행복한 마음을 절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 차원과 정신 차원의 욕구가 모두 충족돼야 한다.

    우리나라가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자료를 하나 인용하고 싶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월 26일 발표한 ‘사회정책 성과 및 동향 분석 기초연구’에 따르면, 갤럽월드폴(Gallup World Poll)의 우리나라 행복 수준은 2021년 10점 만점에서 6.11점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우리나라보다 낮은 나라는 그리스, 일본, 멕시코, 폴란드, 콜롬비아, 튀르키예 등 여섯 국가다. 여기서 행복 수준이란 그 나라 국민이 스스로 인식하는 행복의 정도를 의미한다.

    국민의 행복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는 어디였을까. 핀란드가 7.79점으로 1위를 차지했고, 덴마크·이스라엘이 뒤를 이었다. 미국은 6.96점, 영국은 6.87점, 독일은 6.75점, 프랑스는 6.66점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점수가 주요 선진국들과 동일한 6점대라는 점에서 그 차이가 크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6.09점), 멕시코(5.99점) 등과 함께 낮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성공한 국가, 위기의 국민

    21세기에 들어와 우리나라의 위상이 20세기와는 다르다는 점은 국가적 자부심이다.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진입했고,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도 안정됐다. 최근에는 K-문화가 지구적으로 큰 환영을 받아 김구 선생이 소망했던 ‘문화국가’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갤럽월드폴 점수에 담긴 의미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갤럽월드폴에서 내 시선을 끈 결과가 하나 더 있다.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나 친지가 있는가’에 대한 응답이다. 이 질문에 ‘없다’고 답변한 비율에서 우리나라는 18.9%를 기록함으로써 OECD 회원국에서 네 번째로 높았다. 우리보다 사회적 고립도가 심각한 국가는 콜롬비아, 멕시코, 튀르키예뿐이었다.

    이 자료가 함의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산업화 30년과 민주화 30년이 지난 현재, 국가는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적지 않은 국민은 행복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고립감을 느낀다는, 다시 말해 삶의 위기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성공한 국가, 위기의 국민’은 최근 우리 사회가 서 있는 자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언명이라고 나는 보고 싶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해 우리가 꿈꾼 것은 ‘새로운 나라 만들기’였다.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사회라는 유토피아였다. 이 유토피아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왔고, 이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성취를 일궈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불만은 결코 작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국민은 불안과 분노를 느끼며 살아가고, 오히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마저 드러나고 있다.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과 좌절이 공존하는 나라가 우리 사회가 아닐까.

    근대와 현대의 사상사에서 유토피아의 희망과 절망을 담은 두 저작이 토머스 모어(Thomas More·1478~1535)의 ‘유토피아(Utopia)’와 지그문트 바우만(Zymunt Bauman·1925~2017)의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다. 전자는 1516년에, 후자는 2017년에 나왔다.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을 뜻하는 반면, 레트로토피아는 ‘지나간, 좋았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의미한다. 2020년대 현재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유토피아의 희망인가, 레트로토피아의 향수인가.

    한국에서 출간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 을유문화사, 2021, 개정판)’, 지그문트 바우만의 ‘레트로토피아(Retrotopia, 아르테, 2018)’. [각 출판사]

    한국에서 출간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 을유문화사, 2021, 개정판)’, 지그문트 바우만의 ‘레트로토피아(Retrotopia, 아르테, 2018)’. [각 출판사]

    ‘유토피아’의 주요 내용

    모어는 서구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지적 거인 중 한 사람이다. 네덜란드에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가, 독일에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있었다면, 영국에는 인문주의자 모어가 있었다. 법률가로서 대법관의 지위까지 오른 모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국왕 헨리 8세가 수장령을 통해 추진한 종교개혁에 반대했고, 이로 인해 결국 순교했다.

    20세기에 들어와 모어는 더욱 유명해졌다. 1935년 모어는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됐다. 법률가와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됐다. 또 모어는 1967년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받은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걸작 ‘사계절의 사나이(A Man for All Seasons)’의 주인공이었다. 헨리 8세와 맞서 싸우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모어의 삶을 다룬 영화였다. 양심과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진정한 용기의 지식인으로 고평됐다.

    ‘사계절의 사나이’라는 말을 모어에게 붙인 사람은 에라스뮈스다. 에라스뮈스는 모어보다 열두 살 많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절친이 됐다. 에라스뮈스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 ‘우신예찬’을 출간하면서 이 책을 모어에게 헌정했다. ‘우신예찬’에 대응해 모어가 내놓은 저작이 ‘유토피아’였다.

    ‘유토피아’는 픽션이다. 저자인 모어가 공무 여행을 간 플랑드르에서 친구의 소개로 만난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와 나눈 대화 형식을 띤다. 그 내용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제1부는 현실 사회를, 제2부는 이상사회를 다룬다. 모어는 제2부를 쓰고 난 다음 제1부를 덧붙였다.

    제1부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양모 가격의 상승으로 인해 지주는 농민을 농촌에서 도시로 추방했다. 그 결과 도시에는 부랑자·거지·도둑이 증가했고, 이들에 대한 엄벌주의가 강화됐다. 모어는 엄벌주의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이러한 사회현상 이면에 놓인 구조적 요인에 주목한다.

    다른 하나는 정의와 행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한 사유재산과 화폐의 폐지다.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화폐가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고 행복하게 통치할 수 없다는 히슬로다에우스의 말을 통해 모어는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다. ‘유토피아’를 널리 알리고 이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 모어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이 사유재산제도의 폐지였다.

    제2부는 유토피아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유토피아는 인공적인 섬이다. 폭이 200마일(약 322㎞), 길이가 500마일(약 805㎞)이고, 54개의 도시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는 언어, 관습, 제도, 법 등이 모두 동일하다. 정치는 공화제를 취하고, 경제는 농업 중심의 체제로 운영된다.

    흥미를 끄는 것은 유토피아에서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다. 모든 사람은 하루 6시간 일을 하고, 8시간 잠을 자고, 여가 시간에는 지적이고 종교적인 덕을 실천한다. 공동체 생활 또한 특별한 관심을 모은다. 유토피아에서는 사치가 금지돼 있지만 필요한 것은 모두 충족된다. 더하여 주택을 공유하고 함께 식사하는 등의 공동체 규율을 지키는 것이 요구된다. 국가 전체가 하나의 큰 가족처럼 운영되는 곳이 모어가 그리는 유토피아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이후 근대 사회사상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유재산제도 폐지는 모어를 사회주의의 원조로 평가받게 했다. 마르크스주의자 카를 카우츠키는 모어가 자본주의의 특성을 일찍이 주목하고 그 대안을 모색했다고 주장했다. 사유재산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한 균등한 재화의 분배가 이뤄질 수 없다는 히슬로다에우스의 말을 통해 모어는 생각의 일단을 전달한다.

    하지만 동시에 ‘유토피아’는 이에 대한 비판도 제시한다. 히슬로다에우스의 주장에 대해 모어는 유토피아 생활방식이 개인을 나태하게 만들고 개인의 자유를 앗아갈 수 있다고 반박한다.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사유재산제도 폐지와 화폐 없는 경제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모어는 지적한다. 그 까닭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토피아’를 우리말로 옮긴 역사학자 주경철은 두 주인공인 히슬로다에우스와 모어가 모두 ‘모어의 분신’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히슬로다에우스를 끌어들이고, 이 히슬로다에우스의 주장을 비판하는 데 모어 자신이 직접 나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각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 대안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남겨둔다고 주경철은 해석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모어의 ‘유토피아’ 이전에도 존재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황금시대나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철인정치는 모어의 ‘유토피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하여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후 이탈리아 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와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등 유토피아를 다룬 작품들에 풍부한 상상력과 통찰력을 제공했다. ‘유토피아’에 담긴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은 유토피아라는 미래의 존재가 불만의 현재를 비판하고 성찰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안겨준다는 데 있다.

    ‘레트로토피아’의 주요 내용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린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회학자는 아마도 바우만일 것이다. 젊은 시절 유럽에서 공부한 내게도 바우만은 매우 이채로운 지식인이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했다.

    첫째, 바우만은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유럽의 변방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라는 이력은 비서구 사회 출신인 내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비서유럽 출신이라는 바우만의 개인적 배경은 그로 하여금 서유럽 역사와 사회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바우만은 평생 지칠 줄 모르는 탐구 정신을 보였다. 일흔이 넘어서 바우만은 자신의 대표 이론인 ‘액체(liquid) 현대’ 이론을 발표했다. ‘액체 현대’를 필두로 ‘액체 사랑’ ‘액체 인생’ ‘액체 공포’ ‘액체 시간’ ‘액체 현대 세계로부터의 편지’ ‘액체 현대 세계의 문화’ ‘액체 감시’ ‘액체 현대 세계의 관리’ ‘액체 악마’ 등 ‘액체 시리즈’ 저작은 그를 세계적 사회학자로 부상시켰다.

    앞서 말했듯 바우만은 액체 현대 이론가다. 바우만의 메시지는 우리 시대가 ‘고정화된 현대’에서 ‘유동하는 현대’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액체 현대란 모든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힘’이 사회변동의 원동력이 된 시대를 말한다. 바우만은 이 힘이 체제를 ‘사회’로, 정치를 ‘생활정책’으로 바꾸고, 사회문제들을 ‘거시적 차원’에서 ‘미시적 차원’으로 끌어내렸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 바우만은 우리 시대가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하는 새로운 유형의 삶을 일반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지속성에 무관심해지고 즉시성이 지배하는, 그리하여 모든 것이 탈사회화하고 개인화하는 시대가 바로 액체 현대라는 게 바우만의 이론 틀이었다.

    이랬던 바우만이 유언장과 같은 책으로 남긴 것이 ‘레트로토피아’다. 이 저작에서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로부터 더 나아가 우리 시대의 핵심적 흐름을 ‘레트로토피아’에서 찾는다. 레트로토피아는 유토피아를 염두에 두고 주조한 말이다. 유토피아가 미래를 향한 비전이라면, 레트로토피아는 과거에 대한 향수다. 좋았던 과거, 다시 말해 안정성과 신뢰성을 품고 있던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그 시절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레트로토피아의 중핵을 이룬다.

    바우만은 21세기 현재 관찰할 수 있는 레트로토피아의 네 가지 경향을 제시한다. 공공질서 유지에서 홉스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의 회귀, 민족·인종·종교를 기반으로 한 부족주의로의 회귀, 신분이자 운명으로 개인을 구속하는 불평등으로의 회귀, 경쟁이 부재한 안전한 장소인 원초적 자궁으로의 회귀가 그것이다.

    ‘레트로토피아’의 매력은 21세기 우리 시대의 그늘을 직접적이고 분명한 언어로 비판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 공공성이 훼손된 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윤리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다. 경쟁은 거역할 수 없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한편 세계화되고 탈중심화되는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족·인종·종교 등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화해야 한다. 정체성 시대는 우리 시대를 지칭하는 언어로 등극한다.

    더하여 우리 시대는 불평등이 구조화된 시대다. 경제적 지위는 계급이 아니라 이제 신분이자 운명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대 상황은 개인에게 출구를 불허한다. 그 결과 아득하고 원초적인 기억을 품고 있는 자궁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부추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의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의 표정이라는 게 바우만의 통찰이다.

    이처럼 레트로토피아에는 불안, 절망, 공포, 분노의 심정이 뒤엉켜 있다. 이 복잡다단한 심정은 자기 세계의 일방적인 방어와 타자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해 바우만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설파한 ‘대화’를 역설한다. 대화는 만남이자 참여이고 협상이자 포용이다. 대화는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 의식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사이의 끊어진 회로를 복원하는 출발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대화를 위해 바우만이 강조하는 전제조건이다. 바우만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인용한다. “만약 우리 사회를 다시 판단하고 싶다면, 특히 청년들을 위해 품위 있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만족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혜택을 지향하는 새롭고 포괄적이며 공정한 경제 모델이 제시돼야 한다.”

    액체 현대 시리즈에 나타난 바우만의 세계 인식은 비관주의에 기울어 있다. 이 비관주의에 불만을 표명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자유와 불안, 쾌락과 분노, 애착과 공포가 공존하는 21세기 지구 사회의 풍경을 지켜볼 때 바우만의 회의주의적 분석은 현실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회의주의에 바탕을 두되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우만의 학문적 유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7월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에서 청년 구직자들이 취업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7월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에서 청년 구직자들이 취업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시대의 자화상, 불안사회

    500년 전에 발표됐음에도 ‘유토피아’가 여전히 읽히는 까닭은 뭘까. ‘유토피아’가 살아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는 까닭은 그 정치적 상상력에 있다. 불평등을 야기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인 사유재산제도의 그늘을 모어는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공유사회를 제안한다. 근대에서 사유재산제도의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한 이가 ‘자본론’의 카를 마르크스였다면, 마르크스 이전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장 자크 루소가 있었고, 루소 이전에 ‘유토피아’의 모어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모어는 사유재산제도의 명암을 선구적으로 통찰한 사상가다.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면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겠지만, 노력을 통한 이익의 확보가 보장되지 않으면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모어는 지적한다.

    사유재산제도에 대한 모어의 이러한 견해는 역사적 설득력을 가진다. 지난 20세기 역사는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한 자본주의와 이를 폐지한 사회주의의 대결로 진행됐다.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제도를 대신해 국가소유제도를 내세웠지만,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볼 수 있듯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 사유재산제도에 어느 정도 제한을 가할 수 있겠지만, 이를 완전히 폐지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

    문제는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할 수 없다고 해서 불평등을 그대로 놓아둘 순 없다는 점이다. 불평등은 21세기 현대사회에서 포퓰리즘, 기후위기와 함께 인류가 직면한 중대한 사회적 과제다. 이 불평등 문제가 서구사회에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화하면서부터였다.

    전후 서구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이 케인스주의 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변화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선도적으로 이끈 것은 금융자본이었다.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처럼 전 지구를 넘나들며 탐욕스럽게 이익을 챙겨온 금융자본은 ‘20대 80 사회’를 창출했고, 그 결과 불평등에 대한 대처는 어느 나라든 주요 정책목표가 됐다.

    이러한 불평등을 선구적으로 비판한 이는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다. 크루그먼은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두 번째 ‘금박 시대(Gilded Age)’라고 명명했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과 찰스 워너가 함께 쓴 소설 제목에서 따온 금박 시대란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곪아 있는 시기를 함의했다. 고도성장이라는 화려한 표층 아래 빈부격차라는 어두운 심층이 결합해 있던 시대가 금박 시대였다.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이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다면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아지고, 결국 소득분배가 악화된다는 게 피케티의 논리다. 피케티는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의 심화를 주목하고, 21세기 자본주의 미래를 우울하게 전망했다.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인구성장과 기술 진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저성장이 지속되고, 그 결과 자본의 소득 몫이 커지며 그 힘이 더욱 강력해지는 ‘세습 자본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게 피케티의 주장이다.

    금융위기 이후 불평등의 현실은 ‘레트로토피아’에서도 다뤄지고 있다. 바우만에 따르면, 상위 10퍼센트 미국인이 미국 부의 86퍼센트를, 하위 90퍼센트가 그 부의 14퍼센트를 차지한다. 지구 차원에서는 인류의 하위 절반인 39억 명이 세계 전체 부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데, 이는 지구상 가장 부유한 사람 85명이 갖고 있는 부와 동일하다.

    이러한 불평등한 현실이 과거로 회귀하려는 레트로토피아 경향의 하나라는 것이 바우만의 진단이다. 불평등의 구조화와 세습 자본주의의 경향은 이제 개인을 계급을 넘어선 신분에 고착시킨다. 그리하여 21세기의 모습은 20세기보다 19세기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선다.

    레트로토피아가 지배적인 사회는 유토피아가 부재하는, 다시 말해 만족이 아닌 불만, 희망이 아닌 불안이 지배적인 사회다. 바우만이 말하는 레트토피아의 네 가지 경향, 즉 만인 대 만인의 투쟁, 부족주의, 불평등, 자궁으로의 회귀는 우리 시대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그만큼 심화했음을 함의한다. ‘불안사회’는 지구적 차원에서 21세기 현대사회의 사회학적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25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해 10월 25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불안사회를 넘어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리 사회 현실을 관통하는 개념 역시 ‘불안’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불안은 거시적인 동시에 구체적인, 경제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거시적 불안의 대표적인 실체는 두 가지다. 인공지능(AI)과 플랫폼 비즈니스로 대변되는 과학기술 변동에 따른 전체 일자리의 감소와 일자리 안정성의 약화가 그 하나라면, 저출생 및 고령화의 진전에 따른 ‘늙어가는 대한민국’과 복지 부담의 증가가 다른 하나다. 이 거시적 불안은 우리 사회의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한다.

    한편 구체적인 불안의 대표적 현상 역시 두 가지다. 청년 세대의 경우 청년실업과 부동산 가격 폭등에서 비롯된 고용 및 주거 불안이 그 하나라면, 고령 세대의 경우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없게 하는 노후 빈곤의 불안이 다른 하나다. 이 구체적인 불안 역시 우리 사회의 미래 전망에 그늘을 드리운다.

    이러한 거시적이고 구체적인 불안은 먹고사는 경제 문제와 이와 연관된 불평등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은 자산 불평등에서 삶의 질 양극화까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일차적 과제임에도 금융위기 이후 보수 성향 정부든 진보 성향 정부든 주목할 만한 정책적 성과를 일궈내지 못했다.

    나는 모든 것을 경제적 요인으로 환원시키는 경제주의적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 문제, 특히 불평등을 해결할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 정치와 정부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정부의 최종 의사 결정이 갖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민 다수의 경제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경제적 불안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 불안으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사회적 불안은 취업·구조조정·자녀교육·부동산·노후생활 등에서 구체화되고, 그 결과 청년 세대에서 고령 세대에 이르는 모든 세대가 불안이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사회적 불안이 사회적 분노로 전이되고, 이 분노의 그늘에서 혐오와 적대의 감정이 서식하며 분출하는 게 우리 사회와 문화의 현주소다.

    문제는 역시 정치

    이러한 현실은 앞서 말한 ‘성공한 나라, 위기의 국민’을 돌아보게 한다. 삶의 수준은 과거보다 높아졌는데 다수의 국민이 행복하지 않은 이 현실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찍이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문제는 역시 경제”라는 명언을 남겼다. 불평등과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바우만도 지적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새롭고 포괄적이며 공정한 경제모델 구축, 그리고 과학기술 변동과 인구절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경제 및 사회 정책이다.

    ‘문제는 경제’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제·사회적 해법들을 제도화해야 하는 정치의 역량이다. 최근 우리 현실을 지켜보면, 정부는 물론 정당이 국민을 둘로 나누는 능력은 탁월해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 허약하다. 사안의 복잡성을 고려한 섬세한 리더십도,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결단의 리더십도 부재한 정치 사회를 지켜보면, ‘문제는 역시 정치’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 정치에 여전히 기대를 거는 데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안을 이대로 놓아둘 순 없다. ‘성공한 국가, 행복한 국민’이라는 희망의 유토피아를 포기할 순 없다. 정부와 정당의 일대 분발과 혁신을 요청하는 바다.


    김호기
    ● 1960년 경기 양주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저서 :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공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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