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대전은요?” “빗나갔군” 없었다… 이재명 위기·메시지 관리능력 한계 드러내

[윤태곤의 총선 읽기] ‘테러 피해자→정치적 수혜자’ 과거 사례와 달라

  • 윤태곤 의제와 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입력2024-01-11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박근혜, 커터칼 피습 때 의연한 대처로 선거의 여왕 등극

    • 레이건, 수술실에서 의료진에게 “여러분 모두 공화당원이어야 할 텐데요” 긴장 누그러뜨려

    • 서울대병원 이송 전후 메시지 매끄럽지 못해 특권 논란 일어나

    • 정청래 “잘하는 곳에서 해야 한다” 발언… 의사 반발 불붙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10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10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고 있다. [뉴시스]

    2024년 새해 벽두, 총선을 100일 앞둔 날 원내 제1야당 대표의 정치적 반대자에 의한 피습은 엄청난 사건이다. 만약 계획적 테러로 밝혀진다면 이번 총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직전 대선의 여당 후보였고 현재 제1야당 대표에 대한 ‘정치과몰입러’의 테러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 사안이다. 백주대낮에 지지자를 자처하며 이 대표 바로 앞까지 다가간 인물이 흉기로 목을 공격하는 장면이 현장 동영상 등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됐다.

    범행 직후 온갖 억측과 음모론이 불거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테러를 저지른 사람의 당적·성향에 대한 미확인 보도가 쏟아졌고, 범행 도구에 대한 억측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정치·사회 분위기에 비하면 억측과 음모론의 강도는 약했다.

    이유는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일단 보수와 진보, 여와 야를 막론하고 이번 범행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진단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직후, 범인의 신변 사항이 드러나기 전부터 적대와 혐오의 정치 행태, 분노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번 테러의 토양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직접 정치참여’로 포장된 정치 과몰입 강성 지지자들의 난행이 낯선 일이 아니었고, 정치권이 이를 제어하기는커녕 조장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가 나올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적대와 혐오가 테러의 토양

    거대 양당 지도부도 이런 흐름에 힘을 실었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사건 발생 직후 “의원님들께서는 동요하지 마시고 대표님의 쾌유를 비는 발언 이외에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나 범인에 대한 언급은 자제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린다”고 강조했다.

    홍 원내대표는 사건 발생 이틀 후에도 “(피의자의) 당적 여부가 사건의 본질은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그는 “정치적 테러도 자기들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라면서 “예를 들면 일부 부적절한 극단적 보수 유튜버들은 범죄자가 민주당 당원이라면 마치 민주당의 자작극, 이 대표 측이 일부러 일을 꾸몄다고 몰아가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또 반대로 우리 쪽 극단적인 분들은 이게 마치 국민의힘의 사주를 받아서 우리 당에 위장 가입 해서 테러를 계획한, 마치 대단한 배후가 있다는 선입관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김어준 씨 등 민주당 장외 스피커나 강성 지지층의 음모론이 힘을 잃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대전시당 행사장에서 사건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사회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생긴 것이고, 이재명 대표의 빠른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일성을 내놓았다.

    국민의힘 적극 지지층이 모인 행사장에서 일부 참석자들이 “쇼입니다”라고 외치자 한 위원장은 손을 들어 제지하며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빠른 회복을 기원하고 엄정한 사실 확인과 처벌을 우리 모두 요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 마치 제가 피습 당했을 때처럼 생각해 주는 것이 국민의힘이라는 수준 높은 정당이 동료 시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두 리더의 이 같은 단속이 없었다면 예측 가능한 그림이 펼쳐졌을 것이다. 양 진영의 강성 지지층이 온갖 음모론을 제기하고, 유튜브가 이를 증폭시키고, 기성 언론이 ‘중계’하면서 갈등상이 심각해졌을 것이다. 공천에 목을 매고 있어 지지층의 주목에 목마른 총선 출마 희망자들도 가세하고 양 진영에서 합리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수박’내지 ‘배신자’로 공격받았을 것이다.

    혁신 드라이브를 걸어야 하는 국민의힘 쪽은 한발 더 나아갔다. 한 위원장은 “증오를 유발하는 방식의 발언이나 정치는 대한민국 시민 수준에 맞지 않는다. 우리 정치가 동료 시민 수준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 비대위에선 “증오 정치를 조장하는 언어나 막말을 사용한 후보에 대한 페널티를 공천 과정에 반영하도록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민주당 지도부에서도 “증오 정치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극단적 발언을 하는 자는 공천에서 배제하는 등 관련 공천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정치권에서, 특히 거대 양당에서 동시에 나온 자성과 다짐이 구두선에 그치고 다시 격렬한 이전투구로 돌아서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이번엔 워낙 큰 사건이 양당 공관위가 출범한 시점에 발생했기 때문에 최소한 총선 공천 때까지는 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피습 이후 ‘선거 여왕’ 된 박근혜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 칼 테러를 당했다. [동아DB]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 칼 테러를 당했다. [동아DB]

    “불행한 사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건 앞에서 정치적 계산과 당리당략을 내세울 일이 아니다”라고 여야에서 한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지만, 유력 정치인에 대한 공격은 정치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정치적 사건은 정치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영향은 계산되고 예측될 수 있다.
    통상적으로는 테러 피해자가 정치적 수혜자가 된다. 지지자들은 당연히 결집한다. 중간층 유권자들의 동정심, 투사 심리도 고양되게 마련이다. 반대자들은 위축되고 어설픈 반격을 펼칠 경우 역풍을 맞기 일쑤다. 이를 통해 피해자에게는 서사가 만들어지고 오라(aura)가 씌워지는 게 일반적이다.

    2006년 지방선거 때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피습 사건이 그랬다. 필자는 당시 한 매체의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그래서 당시 상황과 전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방선거를 불과 11일 앞둔 5월 20일 오후 7시 15분, 어스름이 깔리려고 하던 시점에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지원 유세에 참가 중이던 박근혜를 지모 씨(당시 50세)가 공격해 커터 칼로 얼굴을 그은 것. 박 대표는 길이 11㎝, 깊이 1~3㎝의 외상을 입었지만 자기 손으로 상처를 누르고 제 발로 걸어 차를 타고 인근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동해 봉합수술을 받았다. 범인은 아수라장이 된 유세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뒤 칼을 버리고 달아나려 했으나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중요한 시기에 여성 정치 리더가 얼굴에 칼을 맞은 사건에 대해 온 국민은 경악했다. 광복절 행사장에서 조총련 성향 재일교포의 권총 사격으로 목숨을 잃은 모친의 비극이 소환됐다. 범인이 그 전해에도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폭행했다가 선처를 받은 전력도 드러났다. 애초에 열세에 처했던 당시 여당 열린우리당은 선거에서 손을 놓다시피 했다. 낡은 수첩을 뒤져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당시 열린우리당 사무총장 송영길의 토로, “당 이름이 적힌 옷을 입고 나가면 쌍욕이 쏟아져서 옷도 못 입고 다닌다”는 한 후보의 하소연이 적혀 있다.

    수술 이후 박근혜가 처음으로 한 말이 “대전은요?”라는 비서실장 유정복의 전언이 나온 이후 대전 선거도 사실상 끝났다. 10·26 당시 부친의 피격 사실을 전해 들은 박근혜가 “전방은요?”라고 말했다는 과거사도 다시 소환됐다. 보수층의 결집으로 한나라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반면 열린우리당은 전북 단 한 곳만 승리하는 유례없는 참패를 기록했다. 박근혜는 의연한 면모를 갖춘 선당후사의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고,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미국에도 있다.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이다.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두 달 만인 1981년 3월 30일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미국 노동단체연합(AFL-CIO) 대표들과 오찬을 한 후 호텔 밖으로 나오다가 스물다섯 살 청년 존 힝클리 주니어의 권총 사격에 피습됐다. 난사된 여섯 발의 총알 중 마지막 발이 레이건의 폐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서 2.5㎝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레이건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아내 낸시 레이건과 주위 사람들에게 “무릎을 굽히는 걸 깜빡했지 뭐야(I forgot to duck)”라는 농담을 연방 날렸고 수술을 시작하기 직전엔 자신을 둘러싼 의료진에게 “여러분 모두 공화당원이어야 할 텐데요”라고 말해 긴장을 늦춰줬다. 수술이 끝난 후 마취에서 깨어나선 “도대체 그 친구(저격범)는 뭐가 불만이었는지 여기 아는 사람 있나요?”라고 다시 여유를 부렸다.

    이런 모습은 미국인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됐고 대통령의 지지율은 사건 직전 59%에서 직후 72%로 치솟았다. 레이건의 보수적 경제 및 국제 정책에 불만이 가득하던 진보 진영에서는 저격범이 정신이상자인 데다가 보수층 유력 가문의 일원이라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정도다. 사건 두 달 후, 독일 베를린에서 연설하던 도중 풍선이 터져 총소리와 흡사한 느낌을 주자 레이건은 웃으며 “빗나갔군(Missed me)”이라는 조크를 던지고 연설을 이어갔다.

    이후 레이건은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great communicator)’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재선에 여유 있게 성공했다. 레이건 행정부 부통령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하는 데도 레이건의 후광효과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총기 피습 후 여유 있는 대처로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 별칭 생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Gettyimage]

    총기 피습 후 여유 있는 대처로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 별칭 생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Gettyimage]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 별칭 얻은 레이건

    이재명 대표 피습 직후, 정치권 관계자들은 다들 말을 아꼈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피습으로 이 대표가 정치적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점쳤다. 먼저 주 2, 3회씩 잡혀 있는 재판이 자연스럽게 순연되고, 특히 총선 전 선고 가능성이 있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도 재판이 밀리게 된 것. 무엇보다 박근혜와 레이건처럼 테러 피해자인 이 대표에 대한 국민 여론이 우호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 봤다.

    이후 상황은 애매하게 흘러갔다. 피습 당일 민주당 친명계 중진 안민석 의원이 방송에 출연해 이낙연 전 대표를 겨냥해 “계속 병석에 있는, 수술하고 있는 이재명 대표를 공격할 수 있겠느냐”면서 “이제 오늘로 이낙연 신당의 바람은 잦아들 수밖에 없고 이제 멈출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예측인지 희망인지 모를 너무 조급한 이 발언은 정치권의 빈축을 샀고 그래서 오히려 이 전 대표의 짐을 가볍게 했다. 이 전 대표는 1월 1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했다.

    게다가 이 대표가 애초 후송됐던 부산대 병원에서 헬기로 서울대병원으로 이동해 응급 수술을 받는 전후 과정에서 조치와 메시지가 매끄럽지 못해 때 아닌 특권 논쟁이 벌어진 게 결정타였다. 친명 중진 정청래 최고위원은 “목은 민감한 부분이라 후유증을 고려해야 한다. (수술을) 잘하는 곳에서 해야 한다”고 발언해 불을 지폈다. 부산의사회에서 “지역의료계를 무시하고 의료전달체계를 짓밟았다”는 항의성 성명을 냈을 때만 해도 민주당 안팎에선 맞대응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경남·서울·경기·광주·전북 의사회까지 가세하자 속수무책이 돼버렸다. 이로 인해 민주당의 위기관리, 메시지 관리 능력이 오히려 도마 위에 올랐다. 또한 이 대표가 직접 육성을 내놓진 못하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관계자를 통한 전언 형태일지라도 일주일이 넘는 기간 아무 메시지를 내지 않은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2006년 당시 그 유명한 “대전은요?” 발언도 유정복 당시 당대표 비서실장이 언론에 대신 전달한 메시지였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민심은 식었고 이 대표의 첫 메시지, 후속 행보에 대한 부담만 높아졌다. 이재명 대표는 1월 10일 퇴원해 서울대병원을 나서면서 “국민 여러분이 살려준 목숨이라 생각한다”며 “남은 생도 오로지 국민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이 사태를 기조 전환의 모멘텀으로 삼는 모습을 보였다. 비대위원장 취임사에서 “중대범죄가 법에 따라 처벌받는 걸 막는 게 지상목표인 다수당” “운동권 특권 세력과 개딸전체주의 결탁” 등 강경한 발언으로 야당을 몰아붙이던 한동훈 위원장은 사건 당일 격차 해소라는 키워드를 꺼냈고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선 “지금 이 나라에 꼭 필요한 화합과 공감의 경험을 그때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모든 국민과 함께 해내셨다”고 말하는 등 중도화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다.

    총선은 아직 한참 남았고, 이 대표 피습 사태도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예상 밖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정치는 정말 살아 움직이는 생물인가 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