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패업 이룬 楚 장왕, 내실 다진 秦 목공의 공통점

통치자의 눈과 귀로 직접 겪은 인재, 적재적소 중용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5-05-26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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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랑캐’라 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중원 제패를 꾀한 초나라 장왕은 결국 패업(覇業)을 달성했다. 일개 제후국 군주에 불과하던 진나라의 목공은 중원 한족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국력 배양을 이뤄냈다.
    • 그 비결은 손숙오와 백리해라는 유능한 인물의 등용에 있었다.
    패업 이룬 楚 장왕, 내실 다진 秦 목공의 공통점
    덩치는 큰데 따돌림을 당한다면? 참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 이유가 ‘남쪽의 야만국’이라고 하니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서둘러 문명 개화와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거꾸로 오만한 중원의 제후국들을 정복하고자 분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춘추시대 초(楚)나라 이야기다. 초나라는 장왕(莊王) 때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권국으로 등장했다.

    중원을 노린 이질적 세력

    원래 초나라는 장강(長江) 중류의 비옥하고 광대한 평원(오늘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에 자리잡은 나라였다. 그러나 중원(中原)의 한(漢)족과는 민족이 달랐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풍속과 습관이 전혀 달랐으며, 정치와 제도도 동떨어져 있었다. 한족은 그들을 ‘남만(南蠻·남쪽의 야만인)’으로 불렀다.

    종족 구성도 다양했는데, 알려진 것만도 60여 개에 달한다. 하기야 중원의 한족도 생리적으로는 혼혈민족이고, 문화적으로는 복합국가다. 그래서 한족의 종합적인 확대판이라 할 현대의 중화민족은 외국인을 볼 때 생리적 특징은 거의 문제삼지 않고, 다만 문화를 중시한다.



    그런데 황하 유역의 중원과 장강 유역의 초나라 사이에는 인적 왕래와 문화 교류를 가로막을 만한 자연적 장애가 별로 없었다. 날을 이어 해를 거듭하며 동화작용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문명의 흐름은 도로나 하천을 따라 선진에서 후진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초나라는 남방에 위치하면서도 중원과 교통하는 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또 역대 군주들이 국력 증강을 위한 문화교류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그중 웅거(熊渠)는 군주로 등극한 뒤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초나라는 중국과 민족을 달리한다. 그들의 칭호와 제도에 구애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왕(王)이라 호칭한다.”

    당시만 해도 중원에서 주(周) 왕실만이 왕의 칭호를 썼고, 제후국의 군주들은 ‘공(公)’ 칭호에 만족해야 했다. 웅거의 왕(王) 호칭은 매우 이례적이었으나 국내용에 그쳤다.

    그후 초의 무왕(武王)이 공언했다.

    “지금 중원의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켜 서로 침략하고 학살하고 있다. 우리 초나라는 지금은 소외당하고 있으나 나름의 군대를 가졌다. 그 힘으로 중국의 정치에 참가하련다.”

    그러고는 국왕의 칭호를 대외적으로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약소국들은 초나라의 무력을 두려워해 대체로 고분고분했다.

    한편 수도를 이전한 이후 주 왕실은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장왕의 ‘소리 없는 3년’

    초의 장왕이 즉위한 것은 기원전 613년의 일이다. 집권 후 3년간 아무런 정치적 호령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같이 연회를 마련하고는 음악 반주 속에서 만취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포고했는데, ‘감히 임금의 행태를 고치도록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용서 없이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공동체인 나라 꼴이 빗나가는 것을 보다못해, 죽음까지 각오하고 간언하는 동족 신하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오거(伍擧)가 궁중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수수께끼를 말씀 드리고자 참내(參內)했습니다. 새가 언덕 위에 앉아 3년이나 날지도 않고 소리내지도 않습니다. 모두 궁금해하는데 무슨 새일까요?”

    장왕이 대답했다.

    “그 새는 한번 날아오르면 하늘 높이에 이를 것이다. 한번 소리내면 뭇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니 오거는 그만 물러가라.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다.”

    그후 수개월이 지났으나 장왕의 음락(飮樂)은 더욱 기승을 부릴 뿐 고쳐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소종(蘇從)이 참내하여 간언했다.

    장왕 : “그대는 포고를 모르는가?”

    소종 : “제 일신을 희생해서라도 전하의 현명을 깨우칠 수만 있다면 본망(本望)입니다.”

    이때부터 장왕은 음락을 딱 끊고 주위의 간언을 경청하며 나라를 다스렸다. 오거와 소종에게 정치의 실무를 맡기고, 다른 한편 음락과 방종을 부추기며 아부하던 수백명의 간신을 처단했다. 국민은 크게 기뻐했다.

    장왕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그는 집권 직후엔 결코 일을 서둘러 벌이지 않았다. 더구나 새로운 구상으로 개혁에 착수하는 마당에 낡은 중진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등 구정권의 인적 구성을 답습하지 않았다. 새로 등용할 인재들을 식별하려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인재들을 자기의 눈과 귀로 직접 고험(考驗)했다.

    고급 인재의 등용을 중앙정보부나 인사위원회 등을 통한 천거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그렇게 천거된 인재들은 지기지은(知己之恩·자기를 알아준 은혜)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동의하지 않는 사업이나 원치 않은 부서에 인재를 배치하는 짓은 후일 파멸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고려 왕조 말엽에 우왕과 최영이 오판하여 자신들과는 정세 판단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성계를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 대표적인 예다.

    개혁 지향과 인재 갈망

    내치와 외교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국내 개혁이 성공하려면 외교적 안정이 필수적이다. 다른 한편 국제무대에 진출하려면 국내 정치의 내실화와 국력 배양이 선행돼야 한다.

    현대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이 미묘한 상호의존 관계를 슬기롭게 파악하고 그에 훌륭히 적응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을 통한 현대화 작업에 성공했다. 미국 및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신의를 정립하고, 그것을 당면한 국가 이익에 일치시켰다. 다른 한편 구소련이나 베트남과 빚어진 일시적인 불편한 관계는 감내했다.

    춘추시대에는 초나라 장왕이 그와 같은 탁월한 본보기를 남겼다. 장왕의 목적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자(覇者)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때 라이벌은 진(晉)이었다.

    한편 서쪽의 강국 진(秦)의 불신 대상은 진(晉)이지 초가 아니었다. 자연스레 남쪽의 초나라와 서쪽의 진(秦)나라가 사실상의 연맹관계를 이룰 수 있었는데, 그 실현을 위해 장왕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맞서 중원의 진(晉)은 고립을 피하고자 동쪽의 강국 제(齊)나라와 합작을 꾀했다. 그후 진(晉)은 동남방의 신흥 강국인 오(吳)나라에 접근한다.

    이 무렵 장왕은 외교적 안정에 힘입어 국내 정치의 개혁에 주력했는데, 문제는 인재 등용이었다. 하루는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장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측근들이 까닭을 묻자 장왕이 말했다.

    “예로부터 어진 선비를 스승으로 맞으면 훌륭한 왕이 되고, 똑똑한 사람을 벗삼으면 처세에 걱정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해 들어보면 여러분의 능력이 나보다도 못한 수준이니, 어찌 나라의 흥망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때마침 솔깃한 소식이 전해졌다. 기사(期思)라는 변두리 고장에 지혜로운 선비가 피난 와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름이 손숙오(孫叔敖)인데, 그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설득, 동원하여 대규모의 관개·수리 공사를 해서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는 것이다.

    장왕은 지체 없이 그를 초청하여 대화하고는 곧바로 영윤(令尹)이라는 최고 관직에 임명, 국정을 맡게 했다. 영윤은 초나라 관직의 특별한 호칭으로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손숙오의 국정 개혁

    손숙오가 펼친 행정지도 특징은 아무리 좋은 사업일지라도 서둘러 벌이지 않고, 사업의 필요성을 납득시키고 협력자를 모으기 위해 교육과 홍보를 선행했다는 점이다. 화합정치, 상하일치의 요체다. 쓸데없는 금지와 규제를 없애고, 모든 일이 막힘없이 진행되게끔 풀어주고 완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인민이 저마다 스스로 적극성을 발휘하며 안거낙업(安居樂業)했던 것이다.

    수공업과 상업에 걸쳐 ‘사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평판이 생겨나며 초나라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공무원은 청렴했고, 기강이 바로 섰으며, 도둑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史記, 循吏列傳)

    손숙오는 정치가이자 기술자였고 경제인이었다. 나아가 군사적 감각이 탁월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오늘날 어떤 정치인이 “정치가 전공이라 군사도 모르고 경제도 모른다”고 공언했는데, 이는 태만한 자의 무책임한 발언일 뿐이다.

    손숙오의 군제(軍制) 개혁에서는 군기의 확립, 점호의 제도화 외에 행군과 작전에 걸친 편제의 개선이 돋보였다. 특히 군주 직속의 전차부대를 두개의 광(廣)으로 나누어 각기 전차 30량씩 배치했다. 량마다 갑사를 뒀음은 물론이고 별도로 보졸 100명을 붙였다. 보졸은 또 두 개의 편(編)으로 구분했는데, 한 개의 편에 50명씩 배당했다. 이는 중원 제후국들의 병제에서 전차 1승(乘)당 75명인 것에 비해 25명이 많은 것이다. 요컨대 구분대 단위로 수적인 우세를 형성했다. 군사 심리에 미치는 영향력도 한결 강했다.

    무릇 전투 단위, 특히 본격적 전략 단위의 병력은 기동의 민활성을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양적으로 많은 편이 유리하다. 예컨대 중일전쟁(1937~45) 당시 일본군의 사단병력 표준은 1만2000명이었다. 반면 중국군의 사단병력은 1만명이었다.

    중·일 양군의 사단병력이 마주칠 때 일본군 사단장은 싸움의 주도권 장악부터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사단장은 주도권 장악은커녕 상부 단위에 의존해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패의 귀추는 보나마나 했다. 이 점에서도 손숙오의 군사적 감각은 장제스(蔣介石)보다 우수했다고 하겠다.

    손숙오는 유난히 ‘정책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강조했다. 정책이 조석으로 변한다든지 집권자가 ‘말 바꾸기’를 일삼으면 ‘시장 혼란’과 ‘민심 불안’이 초래된다는 것이었다. 손숙오의 내실화를 통한 국정개혁은 마침내 초나라를 부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구호뿐인 ‘강성대국’과는 판이했다.

    이제 초나라 장왕도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중원의 정치에 개입할 참이었다. 그런데 종전의 패자(覇者)들은 예외 없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삼고 등장했다. 즉 주(周) 왕실을 모시고 받들면서 문화가 다른 오랑캐들의 침략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초나라도 그 명분론을 따를 것인가. 아니었다.

    우선 역사의식이 달랐다. 초나라가 오랜 세월을 두고 중원의 제후국들에 의해 ‘오랑캐’로 간주되어 왔으니 반항 심리가 없을 수 없다. 다음으로 초나라의 강대국화는 결코 주 왕실의 작위 수여나 가문의 여택(餘澤) 혹은 비호 때문이 아니었으며, 오직 자수성가의 개혁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장왕은 최소한 주 왕실과 대등한 관계를 원했다. 한편 주 왕실도 힘의 논리상 초나라 군주의 ‘왕’ 칭호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장왕이 ‘질서 안정’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중원으로 출병, 동주의 수도인 낙양 남쪽의 낙수 강기슭에 도달했다. 내친 김에 주 왕실에 대해 위세를 과시하고자 열병식을 거행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깜짝 놀란 주 왕실은 대부(大夫)인 고위 관료 왕손만(王孫滿)을 특사로 파견해 초의 장왕을 위문케 했다. 장왕은 왕손만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 왕실의 보물로 정(鼎)이 있다는데 그 크기와 무게를 알려주시오.”

    일반적으로 ‘정’이란 고대 중국의 세발솥을 말한다. 여기에서 세발솥은 예로부터 주 왕실에 전승하는 통치 권력의 상징인 국보를 지칭한다. 장왕이 그 크기와 무게를 물은 것은 기성 통치권력의 실체를 경시하며 천자의 권위를 빼앗기 위한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왕손만이 대답했다.

    “정이라고 하는 국보의 참 무게는 도덕적 권위와 천명(天命)에 있는 것이지, 물품 자체의 중량이 아닙니다. 비록 주 왕조의 덕행은 쇠퇴했다 해도 아직 천명이 뒤바뀔 정도는 아닙니다.”

    왕손만의 외교적 수사는 당시의 보편적 윤리가치인 ‘덕(德)’과 ‘천(天)’에 입각한 걸작이었다.(春秋左氏傳, 宣公 3년, 史記, 楚世家)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혁명의 성공은 무력과 경제적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의 지지와 객관적 정세의 유리한 배합을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장왕은 그 말을 듣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당시의 국제여론과 역학관계를 고루 감안해 철군령을 내리고 귀국했다. 그렇다고 패권자가 되려는 꿈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요즘도 ‘정립(鼎立)’이란 단어가 쓰인다. 세발솥마냥 세 세력이 맞선다는 뜻이다(일례로 ‘삼국 정립’). ‘정담(鼎談)’이라고도 한다. 세 사람이 둘러앉아 진행하는 좌담을 가리킨다. 셋이 하나 되면 다양성이 보장되면서도 높은 단계의 화합이 기대된다고 한다.

    춘추시대 중기 이후, 북방의 황하 유역에는 진(晉)을 중심으로 한 사실상의 중원 연맹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 장강 중류에는 초(楚)를 맹주로 하는 남만(南蠻) 연맹이 형성되어 양극 대립 시대를 맞고 있었다. 그 남북 세력의 교차지대에는 약소국인 송(宋)·정(鄭)·진(陳)·채(蔡)가 중간지대를 형성했다.

    이 약소국 중에서 주제 넘게 남북간의 이른바 ‘조정자 역할’이니 ‘평화의 중재자’ 등을 자처하는 송(宋)나라가 있어 한때나마 주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비웃음이나 받을 뿐이었다. 어쩌다 일시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에 성공한 사례가 발견되기도 하나, 그것은 그 시점에 강대국들이 소강상태를 원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리고 송나라의 대부가 국제적 지명도와 개인적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외교적 조정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鄭)나라를 포함한 대다수 약소국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진이건 초건 강대국들은 덕을 쌓는대신 무력으로 싸우고 있다. 그러니 먼저 위협해오는 편에 복종할 뿐이다. 진과 초는 신의가 없으니 우리도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春秋左氏傳, 宣公 11년)

    그래서 정나라는 초의 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가까운 진릉에 와서 패권자의 권위를 내비치며 회맹(會盟)을 소집하자 진(陳)과 함께 참가해 복종했다. 그러나 초군이 귀국하자 다시 진(晉)나라에 붙어버렸다.

    분개한 장왕은 정나라의 국도를 포위하여 3개월간 맹공을 퍼부었다(기원전 597년). 정나라는 진(晉)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오지 않아 결국 항복했다. 그 직후에 도착한 진군은 정나라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작전회의가 열렸다. 당시의 진나라 야전군 편제는 문공(文公)의 유제를 답습하고 있었다. 즉 상·중·하의 3군으로 구분하되, 중군의 주장(主將)이 3군의 총사령관을 겸했다. 3군 모두 주장 아래 부장(副將)을 두었고, 별도로 각 군에 대부(大夫)·사마(司馬)·법관을 두었다. 이러한 편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도 문공(文公)처럼 권위 있는 영도자가 총사령관 겸 중군 주장을 직접 맡아본다면 통제에 지장이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중구난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패전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아닌게아니라 총사령관인 순임부(荀林父)는 지원 대상인 정나라가 초군에 항복했으니 도와줄 것도 없게 된 만큼 회군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군의 부장이 즉각 반대하며 나섰다. “조국 진나라는 천하의 패권국인데 지금 철군한다면 그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어리석게 ‘결사반대’를 외쳤다.

    하군의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화평론과 주전론이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협동작전의 역할 분배조차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주전파가 감정적인 작전에 돌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필의 싸움이 남긴 교훈

    다른 한편 초 장공은 일사불란하게 전투준비를 갖춘 대군을 이끌고 진군을 공격했다. 진군의 중군과 하군이 붕괴와 패퇴를 일시에 겪으면서 북쪽으로 도망가고자 황하 기슭에 몰려들었다. 병사들이 다급하게 배에 타는 과정의 혼란과 자중지란으로 손해가 대단했다. 이 전역(轉役)은 지명에 따라 ‘필의 싸움(필之戰)’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진군은 패퇴했을망정 전멸하지는 않았다. 사태 진행을 관망하면서 고스란히 살아남은 부대도 적지 않았다.

    그후 장왕은 대군을 이끌고 송(宋)나라로 쳐들어가 9개월 만에 송나라의 항복을 받아냈다. 송나라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중재자적 역할’을 운위했기 때문인데, 손을 들자 초 진영에 다시 편입시켰다. 약소국이 ‘중재자 역할’을 자임할 때 주의할 선례를 남긴 셈이다.

    초 장공이 병사한 후 2년이 지난 기원전 589년, 초나라 주최로 촉나라 땅에서 회맹이 소집됐다. 모두 12개국이 참가했는데, 약소국뿐만 아니라 강대세력인 진(秦)과 제(齊)도 출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마침내 초 장왕의 중원 제패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물론 초나라와 진(晉)나라의 반목과 쟁패전은 그후에도 계속됐다. 기원전 546년에 이르러 비로소 초·진(楚晉) 양국간에 효과적인 정전협정 이 체결되어 세력권을 양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단시되던 남만(南蠻) 세력의 중원 진출은 성공했다. 여기서 중원 중화문명의 포용과 확장 능력을 엿볼 수 있다. 패배하더라도 포용, 동화, 확장하는 보편주의 에너지를 평가하게 된다.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진(秦)나라는 중원의 서쪽에 있는 일개 제후국에 불과했다. 비록 동방으로 진출하여 패권국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없지는 않았으나 번번이 제지당하고 말았다. 다만 그 좌절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서쪽으로 눈길을 돌려 뒷날의 근심을 없앴고, 나아가 근거지를 강화하고 확대하는 내실화 작업에 성공했다.

    이 내실화 작업의 선두 기수가 현명한 군주 목공(穆公)이다. 목공의 노력에 바탕을 두고 전국시대 말엽에 이르러 진시황(秦始皇)에 의한 천하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원래 진국의 통치계층과 핵심인구는 중원의 한(漢)족 계통이지만, 국민의 약 반수는 이민족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기(史記)는 ‘진국으로 말하면 융(戎)과 적(狄) 등 이민족의 풍속을 혼합해 가져서 매우 난폭했으며, 인의와 도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썼다.(之國年表) 즉 중원의 한족에 의해 이단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는 것도 결국은 실력을 배양하기 나름이고, 또 문화적 동화 노력에 좌우될 것이었다.

    진나라 목공의 통치술에서 우선 평가할 것은 인재 중시인데, 이는 진나라의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특히 외국 출신 인재를 대담하게 등용한 점이 돋보였다. 백리해(百里奚)의 중용에서 보는 바와 같다.

    본시 백리해는 중원의 약소국 우(虞)나라에서 대부(大夫)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조건이 나빠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나라가 멸망하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해 진(晉)나라에 끌려갔다가 초나라로 도망쳤다. 초나라에서도 다시 잡혀 남녘 바닷가에서 말을 키우는 늙은 목동 신세로 사역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고가 있어 목공한테 온 공손지(公孫枝)라는 우나라 출신 명사가, 백리해에 대해 ‘불우하지만 특출한 인재’라고 찬양했다. 이에 목공이 수소문 끝에 백리해를 찾아내고는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그를 모셔왔다. 당시 백리해는 칠십을 넘은 고령자였으나 목공은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대번에 중용했다.

    백리해의 참모 역할에 힘입어 진나라 목공이 달성한 통치의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周) 왕실이 이른바 수도 이전이니 동천(東遷)이니 하면서 버리고 떠난 관내의 잔류민(소위 주여민, 周餘民)으로 하여금 완전한 진인(秦人) 의식을 갖게 하여 핵심 세력으로 삼았다.▲철제 영농기구의 보급과 관개시설을 확충해 농업생산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융인(戎人) 거주지역으로 근거지를 확대하고, 민족평등 정책과 새로운 인재등용으로 효과적인 동화정책에 성공했다.▲농경지 개척을 군사둔전(軍事屯田)과 결합해 상재전장(常在戰場) 태세를 강화했다.▲토지 소유는 군주가 직접 관할하고 관리를 각지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즉 분봉제(分封制)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의 통제력을 강화했다.▲군사적 공훈을 감안한 관리 임명과 ‘신상필벌(信賞必罰)’의 보급으로, 정치 불신을 일소하고 군의 사기를 드높였다.▲외국 출신 고관의 수효를 본국 출신보다 많게 했고, 또 이 사실을 천하에 홍보했다.



    요컨대 진(秦) 목공은 당면한 중원 제패보다, 먼 앞날의 통일천하를 바라보고 국력을 기르는 데 주력했다. 그러자면 유치하고 부질없는 허영심을 버리고, 국정의 내실화 작업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 하기야 목공의 노력은 그의 사후에 일시 흩어지기도 했으나, 뿌리내린 정치제도와 전통적 작풍은 전국시대 중엽 이후에 다시 진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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