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列國志 兵法 ⑬

상앙의 빛나는 개혁과 비참한 최후

‘사자 기질’로 진(秦) 강대국화 도,‘여우의 지혜’ 없어 몰락

  • 박동운 언론인

상앙의 빛나는 개혁과 비참한 최후

2/5
혜왕은 아무런 과오가 없는 상앙을 죽인다면 천하의 조소와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고 우려했던 모양이다.

한편 공숙좌는 국왕이 자기의 두 번째 진언에는 동의한 줄 믿고 있었다. 맡고 있는 직책과 국가 이익을 고려해 부득이 진언했지만, 다시금 생각하니 상앙이 자못 측은했다. 그는 인간적인 고민에 빠졌다가 급히 상앙을 불러 말했다.

“국왕께서 내가 죽으면 상국 후임자로 재상에 임명할 인재가 누구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대를 추천했으나, 전하의 안색을 보니 응낙하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상국 된 처지에서 국왕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고, 신하에 대한 배려는 다음으로 돌려야만 했다. 따라서 전하께서 상앙을 등용하지 않겠다면 국가 안보상 걱정되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전하께서는 응낙하셨다. 이제 그대는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대로 있다간 체포될 것이다.”

상앙이 대답했다.

“혜왕께서는 상국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을 임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발상이라면 상국님께서 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하신 두 번째 진언도 실행에 옮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침착하고도 용의주도하게 출국을 준비했다. 상앙은 이미 서쪽 강대국인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전국에 포고문을 내리고 현명한 인재를 찾아 등용하려는 포부를 밝힌 바 있음을 듣고 있었다. 효공은 선대인 목공(穆公)의 뜻을 이어받아 동쪽의 실지(失地)를 되찾고자 열망하던 영명한 군주였다. 상앙의 행선지는 당연히 진나라로 내정됐다. 그러나 무턱대고 거지꼴로 찾아가서 냉대 받기는 싫었다. 사전 연락과 거기에 상응한 소개장 등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공숙좌가 죽은 후 마침내 진나라로 들어간 상앙은 효공이 신임하는 측근의 실력자 경감(景監)을 연줄로 삼아 접견을 신청할 수 있었다.

효공이 직접 상앙을 만나 대화했다. 상앙은 효공의 당면 수요가 무엇인가를 간파했다. 그러고는 우원(迂遠)한 덕치론(德治論)이나 까마득한 제왕술(帝王術) 대신 현실 조건을 감안한 실지 회복과 부강대국론을 폈다. 효공은 기뻐하며 그를 중용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위(魏)나라에 빼앗긴 하서(河西) 지방의 회복 작전 구상이 마음에 들었다.

하서 지방은 20세기에 마오쩌둥(毛澤東)이 근거지로 삼은 옌안(延安)이 위치한 지방이다. 봉건관료식 덕치론자인 장제스(蔣介石)가 후쭝난(胡宗南) 장군에게 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우매한 정면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한, 바로 그 일대다.

개혁 구상과 찬반 논의

상앙이 진나라에 입국한 것은 기원전 361년의 일인데, 실정 파악에 이어 개혁 구상을 정식으로 제출한 것은 기원전 359년이라고 한다. 청사진 작성에 2년이 걸린 셈이다. 개혁 구상의 대강이 알려지자 찬반 논의가 치열했는데 당초엔 반대쪽이 다수였다.

하기야 동서고금을 통해 다수파의 ‘여론’에 힘입어 보람 있는 개혁을 성취한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영재는 언제나 극소수이게 마련이고, 나중에 그 성과를 즐길 사람은 국민 대다수다. 물론 부패하고 무능한 일부 당파의 이른바 ‘개혁’ 시도는 만화 같은 실패작에 그치고 만다.

국론이 분열되자 효공은 개혁안 채택 결정에 앞서 어전 회의를 소집하고 자유토론을 펴게 했다. 기득권층 귀족들이 반대파를 대표했는데, 종래의 법률·제도를 지켜야만 관리들이 사무에 익숙하고 백성이 생활에 안주하며, 국세(國勢)의 약화와 사회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상앙이 일어나서 일깨웠다.

“첫째, 지금 위군의 침범으로 하서의 실지가 수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면한 현실은 국세 약화를 예방하는 것보다도 국방의 강화를 요청합니다. 또 매일처럼 도처에서 소요와 항의, 충돌이 일어나니 혼란을 예방하기보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새 질서가 필요합니다.

둘째, 사물 현상은 부단한 변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 변화에 대응해 적응하려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개혁을 제때에 단행해야 합니다.

셋째,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지난날에 제정된 구법을 고수하다 멸망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상(商)나라 탕왕(湯王)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구법에 구애하지 않고 개혁을 단행해 부강대국을 이룩했습니다.”

상앙의 주장은 적잖은 찬동 세력을 확보했다. 특히 효공은 경험적인 역사 교훈 인용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개혁의 결정은 내려졌다. 판단력 다음으로는 의지력이 중요한 법이다.

상앙이 주도한 개혁은 두 차례의 법 개정을 포함해 21년간 계속됐는데, 그 효과가 지대했다. 진나라의 국력이 유례없이 증강됐고, 국민은 안거낙업(安居樂業)했다고 한다.

2/5
박동운 언론인
목록 닫기

상앙의 빛나는 개혁과 비참한 최후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