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세운 이용익과 한양대 세운 김연준은 동향 ● 일본인 교사에 强 대 强으로 맞선 소년, 그러나 대가는 혹독했다 ● 호방했던 延專 시절 국내 최초로 바리톤 발표회 열다 ● 巨富 아버지 지원으로 시작한 육영사업 ● 1960년 한양대생 성동경찰서 난입사건 진상 ● 학생들이 주도한 인민재판에 끌려갔다 빠져나온 총장 ● 고비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들… 김연준 人福의 비밀은? ● 박정희와 담판해 의대 설립 ● 대한일보 수재의연금 횡령사건과 윤필용 사건 진실 ● “남의 사람 빼오지 않고, 내 사람은 절대 뺏기지 않는다” ● 박정희 대통령이 준 화해의 선물, 한양대 안산캠퍼스 ● 가곡 ‘청산에 살리라’와 ‘悲歌’짓게 된 이유 ● 60대 이후 3800여 곡, 작곡집 16권 펴내다 |
한양대 의과대학 학장을 지낸 정풍만 교수(丁豊滿·63, 소아외과)는 5·16이 일어난 1961년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해 1967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수석 졸업했다. 그는 의사 국가고시에서도 전국 1등을 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그는 육영수 여사를 본 적이 있다. 육 여사의 조카와 동아리를 함께한 인연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육 여사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육 여사는 해마다 수석 졸업자들을 불러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의과대를 수석 졸업한 정 교수도 청와대를 방문했다. 청와대 안주인인 육 여사는 조카의 친구인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육 여사는 성품이 매우 자상했다. 육 여사가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당시 만 50세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들어왔다. 졸업식 때 보고 두 번째 대면이었는데, 그는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만 24세이던 나는 정말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연회장에 들어서는 박 대통령을 보자 와락 겁이 났다. 마른 대춧빛 혈색의 키 작은 사람이 들어서는데, 한마디로 긴장 덩어리였다. ‘저 정도 인물이니까 목숨 걸고 쿠데타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나를 위압하는 사람을 처음 본 때였다.”
그가 의과대를 졸업한 이듬해(1968) 한양대가 경희대(1967)에 이어 의예과를 신설했다. 이로써 서울에서는 가톨릭의대와 서울대 연세대 우석대(고려대 의대의 전신) 경희대 한양대 의대가 경쟁하는 체제가 형성됐다. 서울대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정 교수는 육 여사가 별세한 1974년까지 군 복무를 대신해 충북도 의료원 과장을 지냈다.
그 무렵 의과대학을 키우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만 60세의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가 그를 불렀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당시 김연준씨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정 교수는 한양대 의대로 옮길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나 ‘한 번 만나보자’는 생각에 찾아갔다. 그런데 김 설립자를 보는 순간 그는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처럼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과 김연준 설립자는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사람을 제압했다. 김 설립자가 ‘훌륭해. 근무해’ 하는 한마디에 나는 그대로 한양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해방 공간인 1945년과 1948년 사이 이 땅에는 많은 사립대학이 생겨났다. 그 대학들은 최근 줄줄이 개교 60년을 맞거나 앞두고 있다. 한양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1일 김연준이 설립한 ‘동아(東亞)공과학원’을 뿌리로 하므로, 이들 대학보다 6~9년 앞선 역사를 갖고 있다.
김연준과 조영식
1938년 연희전문 4학년인 김연준의 독창회를 알리는 기사와 팸플릿.
고려대는 일제 강점기로 들어가던 시절 이용익 선생이 만들고 김성수 선생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어받아 발전했다. 연세대는 신문화와 함께 독립의 기운을 뿌려준 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성장 속도가 빨랐다. 이화여대는 기독교, 성균관대는 유학, 서강대는 예수회라는 후광을 업고 명문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한양대는 김연준(金連俊·93) 개인을 배경으로 상위권 학교가 되었다.
광복 후 이 땅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사업가를 꼽으라면 대부분 삼성의 이병철과 현대의 정주영 회장을 꼽을 것이다. 정주영과 이병철은 선(善)하기만 사람도, 무결(無缺)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실패와 좌절에 부딪혔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당대에 세계적인 기업을 이루고 후손에게 이어주었다.
‘윤리’라는 한 가지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사학 경영자를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한양대 설립자인 김연준과 경희대를 이끌어온 조영식(趙永植·86)을 꼽는다. 두 사람은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학교를 발전시켰다.
안팎으로 발휘된 카리스마
혹자는 “교수세계만큼 말 많고 탈 많은 곳도 없다”고 한다. 교수 통솔은 내부 경쟁, 다른 대학과 다투는 것은 외부 경쟁인데 적잖은 대학 경영자가 내부 경쟁을 감당하지 못해 외부 경쟁에서 뒤처지고 때로는 학교를 잃기도 했다.
그러나 김연준은 달랐다. 그는 끝까지 내부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권위를 유지하고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양대의 외부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현재 고령인 관계로 한양대병원에 입원해 지내는 그는 1999년 ‘사랑의 실천’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낸 바 있다. 이 자서전과 수십년 그를 보좌해온 측근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연준 리더십을 추적해본다.
김연준은 ‘관북(關北)’으로 불리는 함경북도 출신이다. 관북은 조선 세조 때인 1467년 일어난 ‘이시애(李施愛·?~ 1467)의 난’으로 인해 조선조 내내 불온한 땅으로 여겨졌다.
김연준의 부친인 김병완(金柄玩)은 두만강 건너에 있는 남양에서 활동한 거상(巨商)이었고 부인인 김성녀(金姓女)와 함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김연준은 3남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김연준의 본관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같은 ‘전주김씨’다.
김연준은 큰형과는 열 살, 작은형과는 일곱 살 차이가 난다. 두 형은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만 나왔으나 ‘시절이 바뀐’ 탓에 연준은 아버지가 세운 명천교회 유치원을 거쳐 전문학교까지 다니는 행운을 누렸다.
윤필용과 이후락, 그리고 김연준
당시 수경사 배구단은 1973년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대학생 대회였으므로 구 감독이 선수들을 한양대에 입학시켜달라고 부탁했고 김 총장은 8명을 한양대 체육과에 입학시켜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윤 사령관이 저녁을 냈는데 이러한 두 사람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72년 10월유신을 단행한 박 정권은 정부가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유정회’ 제도를 도입했다. 1973년 초 박정희 정부는 유정회 의원 명부를 확정했는데 이 명단을 본 윤 사령관은 그가 정상배로 본 사람이 많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박 대통령을 찾아가 “유정회 명단에 문제가 있다”고 직언하자, 박 대통령은 “임자가 무엇을 안다고 정치 얘기를 해. 임자 맡은 일이나 잘해”라고 면박을 주었다.
기분이 상한 윤 사령관은 수경사 참모장과 함께 이후락 정보부장, 김시진(金詩珍) 민정수석, 청와대 대변인과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S(작고)씨와 술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윤 사령관은 이후락 부장을 향해 “각하가 망령이 난 게 아닌가. 형님이 각하를 쉬게 하고 다음…”이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이 부장이 놀라 그의 입을 막으면서 술자리가 깨졌다.
이때부터 S씨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며칠 후 박 대통령, 박종규 경호실장과 골프를 치게 된 S씨는 이어진 술자리에서 “각하, 주변을 조심해야겠습니다”라고 했으나 박 대통령이 “술맛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말아”라고 하는 바람에 입을 닫았다. 그런데 다음날 박종규 실장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자, S씨는 윤 사령관이 술자리에서 한 말을 털어놓았다.
박 실장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즉각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불러 조사케 했다. 3월7일 윤 사령관을 연행한 보안사는 26일 윤 사령관을 구속하고 이어 윤사령관을 따르던 군내 인사들도 구속함으로써 윤필용 사건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때 윤 사령관을 싫어한 정보부의 모 인사가 김 총장도 윤 사령관과 가깝다는 정보를 흘렸다.
그러자 바로 김 총장 주변에 대한 수사가 시작돼 대한일보의 수재의연금 사건으로 그를 걸었다. 대한일보는 적자를 보는 신문사였다. 신문사는 지면을 통해 접수된 수재의연금의 규모를 밝히기 때문에 떼어먹을 수 없다. 대한일보는 회사 자금이 달려 나중에 집어넣을 요량으로 일부를 변통했다. 이것이 윤필용 사건을 둘러싼 권력 실세들의 싸움에 빌미가 되었다. 대한일보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라는 간단한 경구를 무시했기에 폐간과 더불어 사주가 체포되는 사태를 맞은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관북(함경도)은 믿을 수 없다”는 편견이 있었다. 김 총장 구속에는 이러한 편견도 작용했다. 남편이 구속되자 당황한 부인 백 여사는 함경도 출신인 정일권 국회의장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백 여사는 정 의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메모를 남겼는데 정 의장은 측근들에게 “왜 그런 메모를 받았느냐”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이 일로 김 총장과 정 의장은 계면쩍은 사이가 되고 말았다.
‘아홉수’라고 하는 만 59세 때 그는 한양대 총장을 이해남(李海南) 교수에게 넘기고 구속됐다가 두 달 뒤인 1973년 7월13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수재의연금은 횡령할 수 없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해 2심과 3심(1974년 5월14일)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사회생을 한 것이다. 이때의 심정을 김연준 선생은 자서전에 “한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 화도 되고 복도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묘사해놓았다.
무죄 선고로 기사회생
무죄가 확정되자 여러 곳에서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 가장 인상적인 사과는 김재규(金載圭) 중정 차장이 한 것이었다. 김 차장은 “정보부에서 조정을 했다. 사실 폐간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이 묘하게 됐다”며 사과했고, 폐간계를 받은 문공부도 유감의 뜻을 전해왔다. 이들은 ‘공무원들은 윗사람 의사를 과잉 해석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 같다’며 슬쩍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에도 김연준씨는 한양대 발전에 매진했다. 서두에 나온 서울대 의과대 수석졸업자 정풍만 박사를 채용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이순(耳順)을 넘긴 1975년 8월, 김연준씨는 다시 한양대 총장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한양대는 외적 성장을 멈췄다. 문교부가 일절 학생 증원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학교 문제에 집중했으나 이전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과거에는 한양대를 키우기 위해 권력자를 만나는 일에 비중을 두었다면 이때부터는 음악에 천착했다.
그가 음악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의과대를 설립한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는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흥을 5선지에 옮겼는데 처음에는 남의 가락을 모방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던 1971년 어느 날 ‘이것은 내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창작이다. 모방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어 ‘비목’ 작곡가로 유명한 한양대 음악과의 장일남(張一男) 교수에게 그간 작곡한 것을 보여주었다.
장 교수는 김 총장 작품 가운데 신동춘 시에 곡을 붙인 ‘비가(悲歌)’를 뽑아 학생들을 시켜 연주케 했다. 학생이 연주하는 자신의 곡을 들으면서 김 총장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후 장 교수의 격려로 순식간에 100여 곡을 지어 1971년 9월 ‘100곡집’을 출간했다. 당시 한국에서 100곡을 작곡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1972년 10월 그는 제1회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1938년 바리톤 독창회 후 34년 만에 여는 발표회였다. 이 발표회를 통해 그는 정유공장 사업을 빼앗긴 회한을 달랠 수 있었다. 김연준씨의 곡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서정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아무리 경쾌한 곡을 지으려 해도 내 바탕에 우수가 깔려 있어서인지 어려웠다. 나는 작곡을 통해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까,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영위해야 한다는 것을 전달하려 했다”고 적어놓았다.
대한일보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도 그는 음악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로는 홍수처럼 작품을 쏟아내, 1974년 그의 작품 수는 600곡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온 대표작이 바로 작사 작곡을 한 ‘청산에 살리라’다. 음악과 함께 그의 신심도 깊어졌다. 그는 1980년대 미국에서 열린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 축하 기도회 때 불려졌던 ‘나의 십자가’와 국내 교회에서도 많이 부르는 ‘부드러운 주님의 손길’ 같은 성가곡을 지었다.
음악으로 돌아간 60대
그가 음악에 깊이 빠져들던 1977년 연세대와 고려대가 동시에 공과대학을 만들었다. 이로써 연고대 공과대가 세냐 한양대 공대가 세냐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 비교는 1985년 한양대가 전기(前期)로 돌아서면서 더욱 치열해졌다. 결과는 한양공대의 열세였다. 먼저 연세대 공대가 한양공대의 입학점수를 초월하고, 이어 고려대 공대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양대는 법학과를 육성해 고려대 법대를 추격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한양대 상경대도 연세대 경영대를 앞지르지 못했다.
한때 한양대 의대는 연세대 의대를 앞지르는 듯했으나 힘이 달렸고 고려대 의대로부터는 맹추격을 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양대는 연고대 다음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양대는 성균관대, 이화여대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김 총장의 소원은 모교인 연세대와 장인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고려대를 따라잡는 것이었으나 이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한양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는 차지철 경호실장을 통해 그를 불렀다. 오랜만에 이뤄진 만남이었다. 불편할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두 거두(巨頭)는 내색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신문사야 또 할 수 있는 것이니 공과대학을 크게 해서 국가산업 발전에 이바지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이미 오원(吳垣) 청와대 과학기술담당 보좌관은 그에게 “중동 건설경기로 많은 기술자가 빠져나가 오히려 국내 기술자가 부족한 상태다. 정부는 반월 신공업 도시에 공과대를 세웠으면 하는데 박 대통령께서는 한양대 총장에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신다”는 연락을 한 적이 있다. 이에 김 총장은 “황금을 한 트럭 준다고 해도 박 대통령이 있는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튕겼다.
그러자 오 보좌관은 “다른 학교에서 학교를 짓겠다고 요구하지만 박 대통령의 뜻은 한양대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23만평을 학교부지로 책정했는데 더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개인 감정을 쉽게 넘어설 수 있는 인물이 박정희라면 김 총장은 한양대 발전을 위해서는 상당한 것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김 총장은 박 대통령이 화해하자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개교 40주년을 맞은 1979년 5월17일, 한양대는 42만평의 부지에 반월분교 기공식을 열었다. 반월캠퍼스는 1980년 3월 개교했는데, 캠퍼스 공사가 한창이던 1979년 10월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을 맞아 서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강력했던 18년간의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어찌 보면 김 총장은 한양대의 이승만이고 한양대의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무섭지만 다감한 남자였다면, 김연준은 감수성 있는 남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라진 것은 김연준 총장 시대도 끝나감을 의미했다. 새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그보다 17세 젊었다. 1980년 말 그는 이병희(李炳熙) 교수에게 총장직을 넘기고 이사장으로 물러앉았다.
그 후 한양대 총장은 한상준(韓相準) 이해성(李海成) 교수를 거쳐 1993년 2월 그의 아들인 김종량(金鍾亮·57) 교수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양대의 절대 정점은 여전히 김 이사장이다. 반월 캠퍼스 건설을 마지막으로 한양대는 외적 성장을 멈추고 내실 다지기에 들어갔는데 ‘건설기의 리더’인 김 이사장은 ‘관리의 리더십’도 보여주었다.
1980년대부터 한국의 윤리수준은 무서울 정도로 높아졌다. 관행이던 게 줄줄이 위법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시대 변화를 학교는 뒤늦게 따라간다는 점이다. 김포외고의 입학시험 유출사태에서처럼 교직원의 구태의연한 작태는 학교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다. 사학 경영자는 명예를 누릴 것이 아니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교직원과 교수를 관리해야 한다.
김 이사장은 서울대 출신과 유학생 출신 박사를 우선적으로 한양대 교수로 스카우트했다. 이러한 엘리트를 향해서는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능한 사람은 우쭐할 수 있는데 우쭐한 것이 지나치면 권력을 만들고 비리를 저지른다. 교직원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만들 수 있다. 편입학 부정과 같은 초대형 사건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한양대에 ‘칩거’한 김 이사장은 학교 직원이 아닌 김종권씨 등을 통해 학교를 철저히 감찰했다.
조직은 가속기와 제동기가 잘 가동해야 제대로 발전한다. 관리형 리더로 변신한 그가 엑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적절히 밟았다 놨다 했기 때문에 한양대라는 자동차는 사고를 내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포스트 김연준의 향방은?
김연준 이사장은 사람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서 자신이 키운 사람은 절대로 뺏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른 대학으로 가려는 교수가 있으면 몇 시간이고 붙잡아놓고 설득해 주저앉히곤 했다. 대신 다른 대학의 사람은 끌고 오지 않으려 했다. IMF 경제위기 때 구조조정을 하자는 건의를 하면 “이럴 때 내보내면, 그들은 어떻게 살라고?”하며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에도 한계가 있었다. 창업과 발전기에는 위대한 원맨 리더십이 주효하나 관리기에는 시스템을 갖춘 리더십이 필요하다. 한양대는 김연준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서 시스템을 갖춘 관리체제가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한양대에 오랫동안 봉직해온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김연준 이사장을 모시고 학교를 발전시킬 때 삼성그룹을 보니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조직을 이끌고 있더라. 그것이 부러워 ‘우리도 저렇게 하자’고 했는데, 한양대는 김연준 체제에 익숙해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또한 내 분야에서는 김 이사장과 같은 방법으로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을 알고, 이것은 세대가 교체돼야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한양대는 연고대처럼 시스템이 이끄는 대학으로 발전해야 한다.”
김연준 이사장은 한양증권, 한양개발, 백남관광, 해운대개발주식회사 등 여러 기업체를 이끈 사업가이기도 하다. 말년에 그는 그가 키워온 기업체 주식의 대부분을 한양재단에 내놓았다. 김연준은 한양대와 하나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한 세기에 걸친 인생을 살면서 김연준 선생은 숱한 난관과 실수 속에서도 두 개의 과녁을 정확히 뚫어냈다. 대학이라는 과녁과 음악이라는 과녁을 명중시킨 것이다. 한 개의 과녁도 제대로 맞추기 어려운 것이 인생인데…. 아들인 김종량 총장은 몇 개의 과녁을 맞힐 것인가. ‘포스트 김연준’의 한양대 향방이 궁금하다.
1939년 김연준이 경성(서울) 경운동의 천도교기념관에 세운 동아공과학교(학원).
이용익은 고향에서 주자학을 공부하다 20세쯤 떨치고 나와 보부상과 물장수 그리고 금광을 개발해 일약 부자가 됐다. 보부상을 한 덕분인지 그는 걸음이 매우 빨랐다. 그가 만 28세이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민비)를 재빨리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빠른 걸음을 이용해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과의 연락을 도맡았다.
명성황후 세력이 복권되자, 민영익은 그에게 정부 공사(工事)를 감독하는 ‘감역(監役)관’ 자리를 주었다. 미관말직이었지만 이용익은 이를 시발로 함경도의 단천-북청-영흥 부사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경(內藏院卿)과 국가 재산을 관리하는 탁지부(度支部)대신에 올랐다.
음악과 육영에 관심 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반골의 땅’에서 태어나 보따리장수에서 기획예산처 장관까지 수직상승한 ‘풍운아’ 이용익 스토리는 명천의 화젯거리였다. 이용익 이야기는 어린 김연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마침 이용익의 증손자는 김연준의 아버지 밑에서 서기를 했다. 김연준은 그를 통해 이용익과 보성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 함경북도의 중심지는 청진이지만 100년 전에는 경성(鏡城)이었다(함경도는 함흥과 경성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도명이다). 청진은 경성부에 속한 작은 어촌이었는데, 1908년 항구가 생기면서 급격히 발전해 ‘북한 제3의 도시’가 되었다.
1922년 일제는 경성에 함북 유일의 공립 인문계 중등교육기관인 경성고등보통학교(경성고보)를 세웠다(이 학교는 경기고의 전신인 京城고보와 한자가 다르다). 김연준은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으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가. 1929년 명천군 우북보통학교를 18등으로 졸업한 김연준은 명천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경성고보에 합격했다.
김연준은 ‘한양대 설립자’외에 ‘기독교인’과 ‘작곡가’라는 트레이드마크도 갖고 있다. 김연준은 엄정행 조수미씨 등이 불러 유명한 ‘청산에 살리라’를 비롯해 3800여 곡의 가곡을 지었다. 기독교와 작곡은 그의 부모가 물려준 재산만큼이나 그의 카리스마를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변성기가 시작된 경성고보 시절 연준은 수업시간을 빼곤 종일 바이올린을 연습했다. 2학년 때 8명의 동기생과 바이올린부를 만들고 3학년 2학기에는 바이올린부의 리더가 되면서 음악 일반으로 관심을 확대했다.
4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인 1932년 3월, 김성수(金性洙)가 보성전문을 인수했다. 이 보도를 접한 김연준은 김성수를 위대한 인물로 보고 ‘김성수처럼 학교를 만들어야겠다’는 뜻을 품는다.
경성고보 교사 중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친인 김용하(金容河) 선생이 있었다. 경성제대 철학과를 나온 김 선생은 조선어와 한문을 열성적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연준에게 더 큰 자극을 준 이는 교무주임인 모리(森淺吉) 선생이었다. 모리 주임은 독학으로 초중등 과정을 마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그는 “엿새 동안 중국 고전을 쉬지 않고 외울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지독한 면이 있는데, 말끝마다 ‘야마토 정신(大和魂)’을 강조했다.
성격도 불같아서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들도 그를 어려워했다. 이러한 모리 주임은 “일본이 세계 5대 강국이 된 것은 메이지 대제(明治大帝)가 서양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싫어하지만 대단해 보이는 모리 주임이 과학을 강조하니 학생들도 자연 과학과 공학에 호기심을 가졌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당시 열강은 전투기와 잠수함, 항공모함 제작에 열중했다. 자연히 과학과 공학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 초상화 앞에 선 김종권 남양주한양병원장. 김 원장은 김연준 설립자의 암행어사 역할을 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 한 명씩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고 있는데 대열 중간에 있던 연준이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 학생 전체를 도둑놈으로 취급하지 말아주시오. 붕대는 모두 내가 가져갔소”라고 소리쳤다. 연준이 모리 선생에게 정면 도전장을 날린 것이다. ‘강(强) 대(對) 강.’
구령대에 버티고 선 모리 주임은 짧은 시간 연준을 노려보다 “좋다!” 하며 검사를 중단시켰다. 그 일로 김연준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당시의 무기정학은 ‘기한이 없는 것’이기에 퇴학과도 같았다. 먼저 도전장을 날리긴 했지만 그래도 학생인데…. 연준은 예상치 못한 카운터펀치에 당황했다.
음악에 빠져 보낸 延專 시절
이 위기는 그해 12월23일 일본 왕실에서 지금 일본 왕인 아키히토(明仁)가 태어남으로써 반전될 기미를 보였다. 사회적으로 특사 같은 것이 행해지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해가 바뀌자 모리 선생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 틈을 이용해 경성고보 교의(校醫·양호교사)이던 집안 아저씨 김병우 선생 등의 노력으로 연준에 대한 무기정학이 풀렸다.
그러나 학교는 연준에게 ‘5학년을 다시 다녀라’는 결정을 내렸다. 1년을 꿇게 된 것이다. 연준은 1934년 4월 5학년으로 재입학해 8회생이 아닌 9회생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적잖은 변화를 주었다. 모리 선생의 자극으로 공학을 가르치는 육영사업을 생각하던 그는 음악과 기독교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러나 국내에는 음악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다. 유학을 가야 배울 수 있기에 그는 서양 문화를 많이 접할 수 있고 현제명(玄濟明·1902~1960) 선생이 있는 연희전문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1935년 경성고보에서는 7명이 연희전문에 도전했으나 ‘운 좋은’ 김연준만 합격했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정인보(鄭寅普), 최현배(崔鉉培), 백낙준(白樂濬) 같은 쟁쟁한 선생들이 있었다.
현제명 선생은 영어과 교수였지만 음악부도 이끌었다. 음악부에 가입한 그는 성악으로 음악세계를 넓혔다. 연준은 작지만 당당한 체구와 좋은 목청를 갖고 있다. 성악가로 대성할 만한 자질을 갖춘 것이다. 현 선생은 그에게 “바리톤 목소리가 나온다”며 세계적인 가수가 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마땅히 성악을 배울 곳이 없어 그는 명동의 ‘돌체다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발성법을 익혔다. 자장면 한 그릇 값이 5전 할 때 하루 25전을 돌체다방에 갖다 바쳤으니, 수업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다방에서 보낸 셈이다. 틈날 때마다 성동교회에 가서 귀로 들은 발성을 연습해보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아버지 덕에 그는 호방한 생활을 즐겼다. 친구들과 카페를 전전하며 술을 마셨고, 때론 동무들의 술값도 대신 내줬다. 이 시절 그의 목표는 오로지 음악이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해야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육영사업에 대한 미련이 이따금 그를 건드렸다.
연전 시절 뜻이 맞는 친구 가운데 주영하(朱永夏·95)가 있었다. 주영하는 함남 단천 출신으로, 그와는 동향(同鄕)이었다. 육영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주영하는 졸업 이듬해인 1940년 경성인문학원을 세웠다. 이 학원이 수도여사대를 거쳐 지금의 세종대학교가 되었다.
아버지 지원으로 工科학원 개원
1973년의 김연준-백경순 한양대 총장 부부. 범띠 띠동갑인 두 사람은 한양대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1930년대 경성(京城)에서 세종문화회관 구실을 한 것은 소공동에 있는 ‘장곡천(長谷川)공회당’이었다. 연전 졸업반이던 1938년 6월4일 연준은 이 공회당에서 국내 최초로 바리톤 독창회를 열었다. 그해 여름 함북도는 큰 수해를 입었는데, 연준은 9월10일 함북 성진에서 수재민 구호 독창회를 열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도모해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1937년 노구교사건을 유도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9년에는 중일전쟁 규모를 키웠으나 병력이 부족해 중국 전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이에 미국과 영국 등이 견제에 나서자, 일본은 군국주의의 깃발을 올리고 독일 이탈리아와 손잡는 쪽을 택한다.
한때 일본의 우방국이었던 미국이 일본의 가상적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탓에 연준은 미국 유학을 추진할 수 없었다. 추진이 어렵게 되자 연준은 ‘2안’인 육영사업으로 돌아섰다.
아들에게는 ‘믿어주는 아버지’만큼 든든한 배경이 없을 것이다. 연전 시절 한 달 하숙비는 3원이었다. 아버지가 넉넉하게 돈을 보내줬기에 졸업 무렵 연준은 300원을 모을 수 있었다. 육영사업을 계획한 그는 아버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아버지는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3000원을 대주었다.
당시 1000석을 생산하는 농지를 사는 데 800원, 가회동의 큰 집을 사는 데 2500원이 들었으니, 3000원은 지금 돈으로 20억~30억원쯤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그는 이 돈으로 공과학원 설립을 추진했다.
1939년 7월1일 그는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서 4개 과, 630여 명의 학생으로 2년제 중등과정인 동아공과학원을 개원하였다. 이 시기 그는 공업과 함께 농업도 발전시키자는 ‘쌍생(雙生)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농업학교를 해볼 생각으로 아버지로부터 6만5000원을 받아 퇴계원에 10만평의 땅을 매입했다.
거부인 아버지의 지원이 있었지만 세상은 약관 25세의 청년이 무리없이 헤쳐 나갈 정도로 만만하진 않았다. 1940년 창씨개명을 단행해 더욱 긴장도를 높인 일제는 이듬해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청년들은 전쟁터로 끌려 나가야 하는 시기를 맞은 것이다. 원활한 청년 동원을 위해 일제는 학교와 학원 수업에 제한을 가했다.
폭풍우가 몰아칠 현실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19사단 소속의 소령을 찾아갔다. 조선 여인과 결혼한 그에 대해서는 ‘입김이 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김연준이 학원 경영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소령은 일본에 있는 하무로(葉室直躬) 백작을 소개해주었다.
일본인 도움을 받다
하무로 백작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명예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백작의 도움으로 김연준은 사업을 확대했다. 1942년 4월18일 전문학교 수준의 공학을 가르치자는 취지로 야간 과정인 ‘동아고등(高等)공과학원’을 연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더욱 암울해져갔다. 총독부는 청년 동원을 원활히 하기 위해 거듭해서 수업 단축령을 내렸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이미 군대를 갔다온 30, 40대의 예비역 장교들이 대거 징집돼 전쟁터로 나가고 있었다.
1944년 김연준은 만 30세였으니 그도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군에 갔다 온 적이 없어 예비역으로 동원되지 않으면 근로봉사대로 끌려갈 수 있었다. 일제는 학원과 학교에 거듭 수업 단축령을 내렸다. 암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김연준은 첫 졸업식이 열린 1944년 3월15일 동아고등공과학원의 문을 닫고 6개월 후인 9월15일엔 동아공과학원도 폐쇄하였다.
이 시기 그의 부모는 경성으로 올라와 큰형 내외와 함께 살았다. 큰형 댁에 신세를 지는 것이 불편해 그는 아버지가 경기도 평택에 사놓은 집에서 산책과 독서로 ‘시대의 광풍’을 피했다. 김연준 선생은 이 시기의 자신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폐인(廢人)’으로 묘사한 바 있다. 광복이 올 때까지 14개월은 사실상의 ‘연금’이었고 훗날 그가 수감된 때와 더불어 가장 외로운 시기였다.
긴 어둠 끝에 빛이 돌아왔다. 광복(光復)을 맞은 것이다. 해방된 조국은 일제말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기에 그는 쉽게 학원을 세울 수 있었다. 1945년 10월초 서대문의 피어슨기념성공학교 건물을 야간에만 빌리는 조건으로 토목과와 건축과로 구성된 ‘건국(建國)기술학교’를 열었다. 4년제인 중등부와 2년제인 전문부로 구성된 학원이었다.
1946년 초에는 아버지로부터 지원받은 300원으로 이원철(李源喆)씨가 운영하던 소화(昭和)공과학원을 인수해 그해 5월 재단법인 ‘한양학원’을 만들었다. 드디어 ‘한양(漢陽)’이란 이름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소화공과학원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1924년 일본인이 조선에 세운 것인데, 광복 후 이원철씨에게 넘어갔다. 그는 소화공과학원과 건국기술학교 중등부를 통합해 ‘한양공업학교’를 세웠다. 중등과정인 한양공업학교는 주간으로, 전문과정인 건국기술학교는 야간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학원 경영은 여의치 않았다. 학생이 모이지 않아 그는 입학시험을 심사로 대체했다. 자신의 힘이 달릴 때 타인의 조력을 받아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소 대인관계가 원활치 못하면 인복(人福)을 누릴 수 없다. 그는 김성수 선생과 절친했고 동아일보 사장과 편집국장을 지낸 백관수(白寬洙·1889~월북) 선생과 조병옥(趙炳玉) 선생을 학원 이사로 모셨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하자 보성과 연희도 고려대와 연희대로 승격했다. 전문학교란 타이틀만 쓰던 사학들도 대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47년 12월 그는 건국기술전문학교를 ‘한양야간공업대학관’으로 개칭했는데, ‘대학관’은 대학 수준의 교육을 하는 학원을 의미한다. 그도 ‘대학’에 바짝 다가선 것이다.
백관수 선생과의 인연
백관수 선생은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준 사람이다. 장녀를 그의 배필로 허락했기 때문이다. 학원이 안정기에 들어서자 그의 부모는 결혼을 종용했다. 그 또한 음악에 대한 꿈을 접은 지 오래인지라 결혼을 하기로 했다. 당시 점잖은 집안에서는 자유연애를 하지 않았다. 괜찮은 중매자가 나서서 양쪽 집안을 연결해줬다. 혼담은 한민당 창당 발기인으로 이승만 박사의 비서를 지낸 김연준씨의 친구인 송필만(宋必滿)씨가 맡았다.
백관수 선생은 김연준의 그릇을 알기에 혼담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김연준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33세이고 백 선생의 딸은 범띠로 12세 연하의 ‘띠 동갑’이었으니, 백 선생 집안에서는 김씨가 재혼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이 의심은 양쪽 집안을 잘 아는 백남용(白南鏞) 목사가 풀어주었다.
1947년 5월20일 그는 성균관 명륜당에서 미모의 백경순(白京順·81) 여사와 혼인식을 올렸다. 백 여사는 나이 많은 신랑과 결혼하던 때의 심정과 반려자로서 바라본 김연준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친정아버지가 총장 선생(김연준)을 좋아하셨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설득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살면서는 우리와는 사주팔자가 다른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따라 다니기 바빴다.”
그는 대학관을 대학으로 승격하는 운동을 추진했다.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4월13일 한양공대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한 것. 조병옥·백관수 선생이 당시 오천석(吳天錫) 문교장관에게 충분히 설명했기에 문교부는 1948년 7월1일 한양재단과 한양공대 설립을 인가했다.
당시 공과대학은 서울대를 제외하고는 어느 대학에도 없었다. 고려대와 연희대는 아직 공과대를 설치하지 못했다. 한양공대는 국내 최초의 사립 공과대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범했다. 한양공대를 출범시킬 때 큰 자산이 돼준 것이 퇴계원 땅이었다. 그는 농공병진(農工竝進)의 쌍생(雙生)혁명을 추구할 생각으로 이 땅을 매입했지만 끝내 농업학교는 세우지 못했다. 대신 이 땅을 한양재단 자산으로 넣었다.
토지개혁에서 살아남은 퇴계원 땅
이 땅도 한 차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1946년 3월 북한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은 토지개혁법을 제정해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농업이 주산업이던 시절 북쪽에서 지주의 땅을 빼앗아 소작인에게 나눠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자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지주 출신이 정치권에 진입한 경우가 많아 지지부진하다가, 6·25전쟁 한 달 전인 1950년 5월 비로소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김연준 학장으로서는 큰 재산을 잃을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 위기도 인복으로 극복했다.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퇴계원 인근에 살던 농민들이 이 땅을 분배받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때 농장을 관리하던 김 장로라는 사람이 “이 땅은 한양공대 재단 것이고 김연준이 자기 아버지 돈으로 농촌 부흥을 위해 산 땅이니 함부로 나눠 갖지 맙시다”라고 설득했다.
김 장로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설교를 아주 잘해서 큰 신망을 얻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김 학장의 취지를 전파하자 땅 욕심에 ‘작대기’를 들고 일어섰던 순박한 농민들이 되돌아갔다. 덕분에 이 땅은 토지개혁의 대상에서 제외돼 한양공대가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김연준 학장은 이 땅 외에도 토목회사인 한양공업과 무역회사인 삼성무역 등 그가 운영해온 몇몇 회사의 주식을 재단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위기도 있었다. ‘국대안 파동’을 겪으면서 1946년 8월22일 서울대가 출범하자 좌익의 선동에 휩쓸린 전국의 학생들이 12월9일부터 국립대 출범에 반대하는 동맹휴업(맹휴)에 들어갔다. 맹휴의 여파는 건국기술학교에도 몰아쳐, 학생들은 교장 배척 운동을 펼쳤다. 1947년 한양공대를 세운 다음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갓 결혼한 그는 학교 구내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좌익 학생들은 이 집으로 몇 차례 사제폭탄을 던졌다.
그러던 어느 날 좌익계 학생들이 총을 들고 김연준을 해치러 왔는데 다행히 그와 아내는 집에 없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신당동 동회로 몰려가 동회장을 쏘아 죽이고 도주하다 붙잡혔다. 좌익은 지주 출신에 대해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갖고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1950년 6월25일 일어난 전쟁도 절체절명의 위기였으나 그는 뜻밖의 ‘인복(人福)’으로 잘 넘겼다. 다급한 전황에 대전으로 피신해 있던 그를 최용찬(崔龍贊) 서무과장이 찾아온 것이다. 최 과장은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은행에서 3만원을 찾아 직원들에게 먹고 살라고 나눠주고 나머지를 갖고 왔다”며 돈을 내밀었다.
혼란한 시기 또 한 명의 은인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김연준 학장은 부산 완월동 공동묘지를 밀어내고 가교사를 지어 한양공대 강의를 재개했다. 그러나 장인 백관수 선생은 제때에 피난하지 못해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전쟁은 그에게 고통과 희망을 함께 주었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왔으나 한양공대 교사는 캐나다군이 병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양대는 배문고 교사를 빌려 강의를 시작했는데, 이때 한양공대 토목과 1회생으로 서울시 건설국에 근무하고 있던 고준영(高準英)씨가 행당동 일대를 새로운 교지로 삼아보라고 제안했다. 그곳은 ‘행당산’이란 법정명 대신 ‘왕십리 돌산’으로 불리던 33만여m2(10만평)의 부지였다.
일제 강점기 때 그곳은 ‘무학(舞鶴)공원’으로 지정돼 있었다. 광복과 함께 국유지가 됐으나 법적으로는 여전히 공원부지였다. 그는 정부로부터 이 땅을 불하받아 새 교사를 지었다. 1954년 4월24일 이승만 대통령의 발의와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으로 인천에서,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를 딴 두 번째 사립 공대 ‘인하공대’가 개교했다.
연희대는 1950년 이공대학 안에 화공과와 전기공학과를 만들어 엔지니어를 양성하고 있었다. 공학 교육기관이 하나둘씩 늘어난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기술자를 배출한 곳은 한양공대였다. 그러나 다른 대학들도 속속 공대 설립을 추진했으므로 한양공대의 위상은 흔들릴 수 있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단과대보다는 종합대를 선호했다.
왕십리 돌산에 정착
김 학장은 이를 수용해 종합대를 지향했다. 1957년 10월 문리과대와 상경대, 정경대를 설립해 한양공대를 종합대학으로 만들겠다는 방침을 굳힌 것이다. 그러자 만만치 않은 내부 반발이 일었다. 동문과 교수들은 “서울대는 차치하고 선발대학인 연고대, 인문대학으로 출발한 성균관대의 인문계통을 추월할 수 있겠느냐”며 “한양공대는 한국의 MIT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그는 “MIT에도 음악과가 있다. 공대만으로는 다양한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고 설득해, 2년 후인 1959년 2월26일 종합대 승인을 취득했다. 1959년 3월21일 만 45세이던 그는 한양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달라진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반대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종합대 출범을 반겼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어왔다. 무분별한 종합대 승격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정부가 ‘(종합대) 설치 기준’을 강화한 것. 한양대로서 가장 시급한 것은 인문사회계열 도서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는 아이디어를 냈다. 청계천 헌책방들을 뒤져 몇 트럭분의 책을 확보했다.
학교는 새 교사(校舍)를 짓느라고 공사판이 됐다. 이러한 때 그도 인연을 맺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4·19혁명이 일어났다. 4·19혁명 때 한양대에서는 학생 1명이 사망하고, 1명은 크게 다쳤다. 이승만 정권이 퇴진하자 학생들은 곧바로 학내 문제로 방향을 돌렸다. “독재정권 물러나라”는 구호를 “총장 물러나라”로 바꾼 것이다.
한양대생 성동경찰서 난입사건
이 구호는 한양대보다 한양공고에서 더 크게 터져 나왔다. 그는 시위의 배경에 교원노조가 있음을 알았다. 김 총장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인연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한양공고에는 원산 출신인 강모 영어 교사가 있다. 강 교사는 서울대 상대 2학년 때 좌익운동을 하다 퇴학당했는데, 김 총장 큰조카와 친구인지라, 큰조카의 추천으로 공고 교사로 채용됐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강 교사가 직원들을 선동해 시위를 일으켰다. 한양공고에는 교원노조 간부가 많이 있었다. 강씨는 전국교원노조 부위원장이고, 김모 교사는 서울시위원장, 이모 교사는 총무국장인 사실이 밝혀졌다. 교원노조는 처음에는 봉급이 적다는 이유로 백지 연판장을 돌렸는데 김 총장 앞으로 온 연판장에는 ‘학교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연판장에 서명한 교사들은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으로 인한 위기는 사람으로 풀어야 한다. 그는 서명한 교사 가운데 그래도 협조적일 것 같은 백세균(白世均) 교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백 교사는 “일단 봉급 인상을 약속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각 선생 집을 방문해 “학교에 나와 강의를 해달라”고 했으나 이들은 선뜻 나오려 하지 않았다. 어렵게 학교에 나와도 학생들이 그 선생을 쫓아냈다.
교사 문제보다 더욱 풀기 어려운 것이 고등학생들의 결기(決起)였다. 한양공고의 위기는 1961년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세력이 교원노조 핵심자를 구속함으로써 진정됐다. 한양대에서도 만만찮은 사단이 일어났다. 거듭된 시설 공사를 해온 한양대는 1960년 가을 시설비 추가 징수 고지서를 발부했는데, 이에 학생들이 반발한 것이다. 학생들은 오히려 등록금 인하를 요구했다. 이에 김 총장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학교를 폐쇄하고 공장을 하겠다”고 맞섰다. 그러나 총장의 뱃심보다는 젊은이들의 혈기가 더 왕성했다.
견디다 못한 학교측은 경찰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총장실에 서울지검장, 경찰국장, 서울시경국장, 성동경찰서장이 모여 방법을 논의하는데 분기탱천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직원들이 학생들을 막는 사이 이들은 성동경찰서로 옮겨갔는데 이것을 안 학생들이 성동경찰서로 쫓아왔다. 학생들은 순식간에 성동경찰서를 접수했다. 그러자 다 도망하고 김연준 총장과 이봉모(李奉模) 학생과장만 남아 학생들에게 포위됐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을 포위한 학생 가운데 누군가가 8각 성냥통을 던졌다. 그러자 긴장을 이기지 못한 이 과장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다리를 크게 다쳤고, 김 총장은 학생들에게 붙잡혀 학교로 끌려가게 되었다. 지금의 노천극장 근처로 총장을 끌고 온 학생들은 인민재판 식으로 김 총장을 의자에 앉혀놓고 ‘총장사퇴’ ‘어용교수 축출’ ‘등록금 인하’ 등 10여 가지를 요구했다.
김 총장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것은 들어주겠다”며 확답을 하지 않고 버티며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학교를 폐쇄하고 공장을 하겠다”고 받아쳤다. 김 총장이 뿜어내는 기가 워낙 셌기 때문인지 학생들은 폭행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노천극장으로 끌려올 때의 승강이로 그는 팔을 다쳤다. 날이 어두워지자 추위가 몰려왔다. 학생들은 밤을 새우기로 작정한 듯 책상을 부숴 불을 피웠다.
김 총장은 바로 역공을 가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책상을 부숴 불을 때느냐”고 야단을 친 것이다.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던 학생들이 책상을 부숴 불을 피운 것은 논리에 맞지 않으므로 기세등등하던 학생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그도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것이 한양대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1960년 10월8일의 성동경찰서 난입 사건이다.
이 사건 때문에 한양대에서는 여러 명의 학생이 퇴학 처분을 당했다. 이때 김총장을 둘러쌌던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지금 그의 최측근인 김종권(金鍾權) 남양주한양병원장이다. 당시 2학년이던 김씨는 학생들이 김 총장과 직원을 폭행하려고 할 때 ‘폭력은 안 된다’고 막아섰다. 그 얼굴을 기억한 교직원이 사건이 끝난 후 그를 총장에게 인사시켰다. 당시 김씨는 민족통일문제연구소(민통련)라는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김종권씨를 만난 김 총장은 “민통련은 공산당 앞잡이가 될 수 있으니 만들지 말라.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 내 장인이 김성수 선생과 절친했던 백관수 선생 아니냐. 1948년 내가 한양공대를 세울 때, 김 선생은 ‘그러지 말고 고려대에 들어와 공대를 만들고 학장을 해라’고 했다. 이에 나는 ‘한양공대를 고려대보다 더 크게 키우겠다’며 거절했다. 내가 종합대를 만든 것은 고려대보다 나은 학교를 만들겠다는 것이니 절대 민통련을 만들지 말라”라며 무려 7시간을 설득했다고 한다.
성동경찰서 난입 사건을 통해 김 총장은 호된 시련을 겪었지만 2선으로 후퇴하지 않았다. 그는 혈기왕성한 46세의 리더였다. 그러나 화불단행(禍不單行), 새로운 시련이 닥쳐왔다. 5·16세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교원노조를 제압하는 한편으로 사학재단을 향해서도 칼끝을 겨눈 것이다.
한쪽에선 건설, 한쪽에서는 투쟁
당시 대부분의 사립대학에서는 ‘정원외 입학’이 자행되고 있었다. 입학 정원은 30명인데 40, 50명 심지어는 세 배까지 입학시키는 과(科)가 허다했다. 어수선한 시절이라 학생들도 누가 정원외로 입학했는지 몰랐고, 정원외로 입학한 학생이 ROTC 장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학교 측은 정원외로 입학한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학교 시설을 확충했다. 그러나 부정축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므로 사학 재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다.
사회정화를 내세운 5·16세력은 정원외 입학과 경리부정, 사립대 경영자의 정치관여 등을 이유로 들어 ‘총장과 이사장 분리’를 지시하고 기존 사립대 총·학장들은 퇴임할 것을 요구했다. 김연준씨도 총장에서 물러나게 됐다. 5·16군부세력은 부정축재를 한 혐의가 있다며 그를 소환했다. 자칫 잘못하면 학교가 날아갈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김연준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음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다. 역시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개인적인 위기는 모면했지만 학교의 위기는 계속됐다. 서울시가 ‘한양대 건물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공원지구에 지은 무허가 건물이니 철거하라’는 통지서를 보내온 것이다.
소유권은 한양대에 있지만 지목(地目)이 공원용지인 것이 문제였다. ‘법(法)대로’ 한다면 서울시의 지시는 옳다. 그러나 세상에는 ‘관례’라는 것이 있다. 지난 10년간 한양대가 교사를 지을 때 서울시는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갑론을박 끝에 서울시가 ‘공원지구를 해제해 한양대가 계속해서 인재를 키우게 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낫다’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
서울시가 이러한 시비를 걸어온 데는 인근 주민들의 민원도 한몫했다. 한양대가 소유한 산에는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들어와 사는 사람이 많았다. ‘젊은 총장’은 종합대학을 건설하기 위해 이들을 밀어냈는데, 이에 주민들이 반발해 총장 관사에 난입했다.
학생과 총장, 총장과 정권, 학교와 정부, 학교와 주민 사이로 돌아가며 사단이 일어났으니 한마디로 한양대는 북새통이었다. 이 난리를 치르면서도 그는 종합대학을 위한 학교 건설의 ‘키’를 놓치지 않았다. 학교 공사는 1961년 11월쯤 완료됐는데 이 시기에 정부가 기존 총장의 퇴임을 요구한 것이다. 문교부의 사학 정비는 계속됐으므로 8개월 뒤인 1962년 2월27일 그는 재단 이사장직도 내놓게 됐다.
그는 이사장 자리에 부인을 앉혔다. 그리고 문교부가 총장 퇴임을 요구할 때 지적한 사항에 대해 석명(釋明)하고, 1963년 2월19일 다시 총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13일 5·16혁명의 주역인 박정희 장군이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정희 정부는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 대학의 확충은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사학 경영자로서는 몸을 낮춰야 하는 시기이건만 그는 한양대의 몸집 불리기를 계속했다.
이를 위해 김 총장은 담판을 준비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은 그보다 11세 많은 이종우(李鍾雨)씨였다. 이 장관을 찾아간 그는 “한양대가 다른 대학에 비해 뒤진 것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만 야박하게 구는 것입니까” 하며 정원을 늘려주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함께 간 한양대 사무장이 그를 말리면서 밖으로 나가게 했다.
이 장관과 독대하게 된 사무장은 한술 더 떴다. “학생들이 실망해 데모를 하려고 한다”며 협박에 가까운 소리를 하자, 이 장관은 차관과 기획관리실장, 대학교육국장, 관리국장을 불러 연석회의를 하고 한양대가 요청한 정원 증가를 승인해주었다. 이때만 해도 담판과 대마불사(大馬不死)론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김 총장은 한양대를 키우려면 의과대가 있는 종합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한국의 의사 수는 인구 1만명당 4명에 불과했다. 그는 지난 20년이 공학이 대학을 이끈 시절이었다면 다음 20년은 의학이 이끌 시기라고 보았다. 그가 의대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한양대 주인’을 자처하던 공과대 교수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한국의 MIT를 포기하란 말이냐’며 반대했다.
서울대와 연세대에서는 의과대 입학점수가 공과대보다 높았으므로 반대 목소리는 종합대를 지향할 때보다 확실히 강력했다. 이에 김 총장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봐라. 병원을 운영하면 학교로 이익이 돌아온다. 공과 다음에는 의과이고, 의학도 과학이다. 내가 의과대를 만들려고 준비해놓은 돈이 있으니 그것으로 한다”고 설득했다.
박정희와의 담판으로 의대 설립
공과대 측이 김 총장의 설득에 밀렸다. 그러자 “의대를 만들되 부속병원은 규모를 300병상(病床)으로 하라”고 요구했다. 김 총장은 “병원은 크게 지어야 한다. 세브란스가 500병상인데 이보다 큰 한국 제일의 1000병상짜리를 만들어야 한다. 의대와 병원을 만드는 것은 공대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거듭 설득했다. 김 총장은 내부를 평정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을 설득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문교부는 1967년 경희대에 의대 개설을 허가해주었으니 바로 다음해 한양대에는 인가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걱정이 된 김 총장은 담판을 짓기 위해 문홍주(文鴻柱) 문교부 장관을 찾았으나 예상대로 문 장관은 “한양대에 사범대 인가를 해준 것도 모략이라고 떠드는 사람이 많은데, 의과대까지 허가하면 모함하는 소리가 많이 들어올 것 같다”며 난색을 표했다.
장관 선에서는 인가가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을 때 백영기 교수가 “직접 청와대와 담판해보라”고 제의했다. 지금은 어림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사학 총수는 대통령과 면담할 수 있었다. 5·16 초기 당한 기억이 있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통령 면담을 추진했다. 김 총장보다 세살 젊은 박 대통령은 김 총장의 요청을 선선히 받아주었다. 의과대를 설치해도 좋다는 내인가를 받아낸 것이다.
두 카리스마의 만남에서 궁금한 것은 정치 자금이 오갔느냐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고인이 됐고, 김연준 선생은 거동이 불가능하므로 이에 대해 확실히 답해줄 사람은 없다. 1967년 말 김 총장은 학수고대하던 의과대 인가서를 받았다. 고려대에도 의대가 없던 시절이었다(고려대는 1971년 우석대를 합병함으로써 의대를 개설했다). 한양대는 매머드 종합대학으로 발전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후 몇 년간 한양대와 김 총장은 호시절을 구가했다. 학교에서는 신축 교사를 짓는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도처에 정원수가 심어졌다. 김 총장은 건물 배치와 나무 심는 일에 일일이 참여했다. 이 무렵인 1970년 4월 그는 교육 부문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사람이 커지면 그림자도 커진다. 영광의 이면에는 처절한 패배를 초래할 ‘벼랑’이 숨어 있다. 벼랑은 학교밖에서 ‘벼락’같이 나타났다. 김 총장은 사업 수완이 있는지라 혈기왕성하던 40대 중반 중요한 사업 하나를 인수했다.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언론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대한일보 수재의연금 횡령사건
4·19혁명 직후인 1960년 9월 그는 현제명 선생의 중재로 홍찬(洪燦)씨가 운영하다 위기에 처한 평화신문을 인수했다. 1961년 2월1일 이 신문의 제호를 ‘대한일보’로 바꾸고 사시(社是)는 한양대 교훈과 같은 ‘사랑의 실천’으로 정했다. 대한일보는 동아·조선에는 비할 수 없었으나 중간급 중앙지로서 위상을 굳혀 나갔다.
1973년 5월 서울지검은 대한일보가 이전 해 거둔 수재의연금을 횡령했다며 자진 폐간케 하고 사장인 김연준씨를 구속했다. 언론사 사주와 대학 경영자 자리에 있던 김연준씨는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이 됐다. 그러나 운 좋은 김 총장은 이번에도 용케 빠져나왔다. 구속 두 달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2심과 3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사건은 김 총장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 이전의 김연준은 ‘대학 총장’이고 이후의 김연준은 ‘작곡가’로 달라진다. 왜 대한일보는 수재의연금을 떼어먹은 것일까. 그 자초지종을 김 총장 처지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시작’을 박정희 정부 시절 최대의 모반 사건으로 꼽히는 윤필용(尹泌鏞) 사건에서 찾는다. 윤필용 사건은 박정희 정권 후기의 군부 인맥지도를 바꾸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김 총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김종권씨는 “두 분은 정서적으로 맞지 않았다”고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농부의 아들인 정주영 현대 회장과는 잘 통했으나 부잣집 아들인 이병철 삼성 회장과는 늘 긴장관계였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거부의 아들인 김 총장은 박 대통령과 정서적으로 통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1970년대 김 총장은 해운공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 정유 회사라곤 석유공사(지금의 SK에너지) 1개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박 대통령이 김 총장에게 해운공사를 운영하니 정유공장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방해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 김 총장과 이 부장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한편 김 총장은 군부 실세인 수도경비사 사령관 윤필용 소장과도 가깝게 지냈다. 당시 구연묵(具然默) 감독이 이끄는 수경사 배구팀은 국내 최강이었는데, 구 감독과 한양대 체육과의 이돈수(李敦秀) 교수가 가까웠다. 두 사람의 중재로 1971년 10월 김 총장은 윤필용 사령관을 만났다. 그후 구 감독이 수경사 배구팀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에, 김 총장은 이봉모 비서실장을 대동하고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만나 300만원을 제공했다고 한다(1972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