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보이지 않는 손은 ‘돈의 손’ 아닌 ‘신의 손’

정운찬 前 총리와 다시 읽는 ‘국부론’

  • 정운찬 | 前 국무총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입력2016-05-04 14: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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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덤 스미스는 무조건적 자유방임을 주장한 적이 없다. 개개인의 ‘도덕적 능력’에 바탕을 둔, 정의법칙이 살아 있는 사회체제 안의 자리심(自利心)을 옹호했다. 꼭 240년 전 출간된 ‘국부론’에서 스미스가 꿈꾼 ‘보이지 않는 손’을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구현하지 못했다.
    고전(古典)이란 ‘모두가 좋다고는 하면서도 아무도 읽지 않는 것’이라고들 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Nation)’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실제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 경제학자 중에서도 10%가 안 될 것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국부론을 처음 접했다. 가정교사 월급을 받은 날, 청계천 헌책방에서 국부론을 샀다. 축약한 문고판 영문 서적(Modern Library Edition)이었다. 핀 만드는 공장을 예로 들며 분업의 이점을 설명한 내용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사회 전체의 이익과 일치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 같은 이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은 1776년에 나왔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해다. 또한 조선이 국립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운 역사적인 해다.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띄엄띄엄 읽었지만, 교과서에 실린 고전을 부분적으로나마 내 힘으로 해독한다는 것은 억누르기 힘든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부론을 가르쳐주거나 읽으라고 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 경제학계에는 영미 경제학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현실과 견주어 이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일단의 경제학 교수들이 조순 선생님을 모시고 경제사상연구회를 결성해 경제학 고전을 읽고 토론했다. 그 결과물로 ‘아담 스미스 연구’(민음사, 1989)를 비롯해 ‘J. S. 밀 연구’, ‘슘페터 연구’ 등을 냈다. 이 글은 그 가운데 ‘아담 스미스 연구’에 담긴 내용을 자유로이 원용하며 쓴 것임을 밝혀둔다.

    가까이에서만 보던 것을 한발 물러서서 보면 그동안 보지 못하던 전체적 윤곽을 비로소 보게 되고, 또한 근시안적 시각으로 인해 발생한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파악하기 전에 사람들은 지구에서 본 것만을 바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천동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코페르니쿠스의 시도는 모든 이의 우주관을 180도 바꿔놓았다.



    중상주의 시대 사회철학자

    보이지 않는 손만 부각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또한 나무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나무만 보다가 애덤 스미스의 철학이라는 숲을 보게 될 때, 보이지 않는 손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국부론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국부론을 집필할 때 스미스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그 철학적 배경은 무엇인지, 그가 가정한 전제들이 현대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 그의 다른 저서들과 함께 놓고 볼 때 국부론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지는 않는지 고민해야 한다. 스미스 사상의 핵심이 곧 보이지 않는 손이고, 보이지 않는 손이란 곧 자유방임이라고 귀결하는 우리의 사고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국부론 출간 240년을 맞는 올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나무는 숲의 어떤 부분인지 알아봄으로써 국부론을 이해하는 시야를 넓혀보자.

    애덤 스미스의 철학은 그가 글래스고 대학 윤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2년간 강의한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강의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윤리학(Ethics), 법학(Jurisprudence),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으로 나뉜다. 많은 이가 경제학자 또는 고전경제학자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는 스미스는 사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연구한 사회철학자였다. 그가 경제학에서 매우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경제학 이론을 잘 이해하려면 그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과 경제학 이외의 부분을 알아야 한다.

    스미스가 활동한 18세기 영국은 중상주의 시대였다. 이미 17세기에 시민혁명이 성공해 의회정치가 시작됐고, 신흥 경제세력으로 중소 상공업자들이 떠올랐다. 중상주의는 국가가 부유해지려면 금은(金銀)의 축적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봉건사회의 신분이 개인을 구속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나 점차 신분과 직분에 근거한 사회 질서에 균열이 생기면서 개인의 중요성이 대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당시의 시대적 화두는, 신분과 직분에서 해방된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형성할 때 과연 그 사회에서 질서, 평화,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스미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구가 신의 섭리나 국가의 중재 없이도 건전한 사회 질서와 양립할 수 있다고 봤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의 중상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진보적인 것으로, 민주적인 사회 개혁의 이념이었다.


    인간에게 내재한 ‘신의 손’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각 경제주체가 자리심(自利心)에 의해 경제생활을 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돼 사회의 부를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어떤 것이 이익이 되는지 가장 잘 알며, 스스로의 이익만을 위해 행위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전체의 이익이 증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인류 행복 증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신과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힘이 닿는 한도까지 신의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의 원래 의도와 관련이 없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손일까. 다름 아닌 신(deity)의 손이다. 신의 손에 따라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이루게 된다. 경제원론에서는 그것을 효용의 극대화, 이윤의 극대화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스미스가 애초에 말한 것은 인류의 최대 행복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인류 전체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은 인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의 계획(Plan of Providence)이다. 신의 손은 인간이 지닌 도덕적 능력(faculty)을 통해 인간을 움직인다.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사회적 후생이 최대화한다. 사회의 행복을 극대화하려면 처벌받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법률만 지키는 것을 넘어 도덕법칙을 따라야 한다. 뉴턴의 비유를 빌리자면, 신의 섭리란 시계 장인이 만든 우주라는 시계다. 신이 우주라는 시계를 작동할 때 그 속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을 인도하는 원리. 그것이 바로 스미스가 말한, 인간에게 내재한 도덕적 능력, 보이지 않는 손이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이 무한히 허용되는 사회를 추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발휘돼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정의가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구상했다. 그리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법적 강제를 구비하고, 개인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경제 발전을 중시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훈이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무너져가는 ‘정의 기둥’

    먼저 우리 사회에 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것은 스미스가 말한 대로 자유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형식적으로는 법률이 존재한다. 그런데 법률은 스미스가 바라던 대로 정의법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제대로 규율하고 있는가.

    ‘독점거래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있지만, 도덕법칙은커녕 정의법칙을 지켜야 하는 공정거래마저 우리 사회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 경제적 강자와 약자,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거래에서 서면 대신 구두계약이 이뤄지고, 결제는 현금 대신 어음으로 이뤄지는 게 일상다반사다. 또한 오늘의 법률은 대기업이 부정하게 탈취한 중·소기업의 기술을 중·소기업에 되돌려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경제적 강자와 약자 간의 힘의 양극화가 한 사회의 기둥으로 언급된 정의법칙을 갉아먹고 있는 셈이다.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자리심의 발로가 결과적으로 공익을 가져오려면 사회 제도가 분권적이고 경쟁적이어야 하며, 민주적인 사회 질서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독점이 경제를 지배하거나 권위주의적 정부가 정치를 지배하는 경우에는 각자의 자리심 발휘가 오히려 사회를 왜곡시킨다고 봤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경제는 독점적 지위에 있는 경제적 강자 몇몇이 군림하는 모양새다. 정의법칙이 무너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이기심의 무분별한 발휘가 아니라 정의법칙이 지켜지도록 제도와 정책을 정비해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동반성장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무너져가는 정의법칙을 다시 세우고, 나아가 도덕법칙의 준수를 향해 나아가는, 그럼으로써 사회의 행복이 극대화하는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다. 동반성장은 경제적 강자와 약자가 보다 균형적으로 함께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주자는 것이 아니다.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정의법칙과 도덕법칙이 지켜지도록 해서 성장의 열매가 경제주체 모두에게 공정하게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다.



    참된 자본주의 위한 처방전

    동반성장을 반(反)자본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비판은 스미스의 국부론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스미스는 그 누구보다 도덕성을 강조했다. 도덕과 정의가 무너진 사회는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균형적인 성장을 통해 경제주체 간 정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동반성장의 철학은, 우리 사회를 스미스가 그린 참된 자본주의의 모습에 가깝게 만드는 처방전이라 할 수 있다.

    스미스가 말한 정의법칙과 도덕법칙이 살아 있는 사회에선 보이지 않는 손에 경제를 맡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 사회의 정의법칙은 보이지 않는 손이 의도된 대로 작동될 만큼 확고하지가 않다. ‘함께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목표로 하는 동반성장을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고, 개개인이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사회, 애덤 스미스가 240년 전 꿈꾸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인도하는 사회가 하루빨리 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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