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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칩 미술가 순례 ⑩

박현기

동양 정신과 서양 테크놀로지 결합 ‘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 완성

  • 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박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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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실험과 시도

일제 강점기에 일자리를 구해 일본 오사카로 떠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박현기는 광복되기 직전인 세 살 때 부모와 함께 귀국, 경북 달성에서 자랐다. 그림과 건축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던 그는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기계설계를 전공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졸업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3학년을 마치고 건축과로 전과한다. 그리고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로 낙향해 인테리어업에 뛰어든다. 이런 선택은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작업할 수 있는 안정적 여건이 되어주었다. 그는 고가의 비디오, 필름 영상 등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재정적 여유는 개인의 작업뿐 아니라 대구 현대미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강소와 이명미, 그리고 박현기의 재정적 희생과 현대미술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의 단서가 된 대구현대미술제를 낳는 동인이 되었다.

그는 미국과 일본 잡지를 통해 새로운 미술 동향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잡지엔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그리고 아상블라주(assemblage) 같은 새로운 전후(戰後)미술이, 일본잡지에는 ‘구체(具體·구체미술협회)’와 ‘모노하(物派)’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박현기는 일찍이 미술의 근본적인 문제에 회의를 가졌다. 자연이나 존재의 본질에 관심을 두었던 당시의 작가들처럼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미술은 시각적 장치를 통해 본질을 왜곡하고 진실을 호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많은 실험과 시도들을 통해 미술의 본질, 자연의 본질, 공간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그는 오브제를 가식적인 요소들이 제거된 순수한 정신세계로 다가가는 데 필요한 도구처럼 인식했고 내용적으로는 한국적이고 근원적인 정신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 시기 그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쌓아올리고 서로 닿은 부분에 먹물이나 안료가 침투해서 일체를 이루는 과정, 또는 물을 머금은 두루마리 휴지들이 뭉치고 무너지는 모습의 ‘몰시리즈’(1974~1975)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 사물의 변화를 보여준다.

박현기

1981년 발표한 ‘도심을 가로지르다’의 한 장면.

오브제 사용 이전에 그는 ‘74-Q’(1974)와 ‘♀+♂=0’(1974)의 평면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일루전의 허구에 대한 관심은 캔버스에 건축용 흙손을 대고 그 주변에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려 형태를 남긴 다음 실제 흙손 손잡이를 앞에 배치해서 진짜와 가짜를 교차시킨다.

그는 흰색의 횟가루를 가지고 강변의 포플러 나무의 그림자를 만드는 행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횟가루 나무 그림자는 그림자를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당시 동년배 작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동양적 내세관 또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탐구였다.

동양적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민화와 석물, 목기와 민예품의 수집과 감상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 분야에 대한 안목과 지식이 전문가 수준이어서 인근의 골동품상들이 작품의 진위나 가치를 물어오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였다. 간혹 고향에 들르는 이우환과도 민화와 골동을 화제로 교유하면서 미학적 공감대를 형성해나갔다.

대체된 이미지 또는 오브제로서 사물이나 그림자는 이상적인 세계와 현상적인 세계의 구분을 명백하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의 세계는 영화의 필름과 같고, 현상계는 비춰지는 영상과 같다. 여기서 박현기는 눈앞에 보이는 현세보다는 이데아의 세계, 무념무상의 초월적 세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것이야말로 진실이고 본질이라고 믿었다. 그가 동경하는 세계는 허구와 상상의 세계가 아닌, 어떤 장치나 전제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순수하고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였다.

환영과 실재

그는 1977년 사진관 암실의 현상용 트레이에 담긴 물을 찍은 비디오 작품을 처음 제작한다. 이 작품은 조명이 비치는 트레이에 담긴 물을 휘저어 물결을 만든 다음 천천히 원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해 보여준다. 그의 비디오는 반복을 통해 동양적 윤회사상을 표상하는 한편, 그 모습이 방영되는 TV가 다시 그 앞의 물동이에 어느 것이 본래의 이미지인지를 묻는다.

1978년엔 일본에서 일본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 야마구치 가쓰히로(山口勝弘)를 만난다. 그 인연으로 JVC로부터 기술적인 도움을 얻어 ‘ TV 어항’을 완성한다. TV 모니터의 외관이 어항이 되어 주사선을 통해 이미지가 재현되는 TV 속 물고기가 어항 속에서 유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면서 가상의 TV 속 이미지가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이처럼 환영과 실재의 차이를 거의 완벽하게 메워준다.

이런 착시행위를 고안해서 실재와 부재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작업은 ‘돌탑’(1978)과 그의 대표작이라 할 ‘돌탑 비디오(Video-inclining)’로 이어진다. 여기서 그는 투명한 인공 돌 대신에 모니터에 돌의 모습이 방영되는 TV를 돌 사이에 끼워놓는다. TV에 보이는 가상의 돌들이 진짜 탑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영상과 실재가 교묘하게 조합되어 일체를 이루는 작업은 1979년 서울갤러리 개인전과 앙데팡당전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호평을 얻어 1980년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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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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