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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18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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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매우 아름다운 음성을 갖고 있었다.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챈 마티아스는 음악교육을 위해 어린 하이든을 하인부르크에서 교사로 재직하는 먼 친척 집으로 보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아버지처럼 장남인 아들을 대작곡가로 키우기 위한 게 아니었다. 아들이 가업인 수레바퀴를 만지는 일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성직자가 되게 하려는 방편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하이든은 빈소년합창단의 전신인 슈테판성당 부속합창단 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성실하고 인간적인

하이든은 소프라노의 고음역을 노래하며 흡사 천사의 음성 같은 음색을 오랫동안 유지하도록 카스트라토(거세한 남성 고음역 가수)가 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가수가 아니라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며 반대했다. 하마터면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도 달라질 뻔했다. 하이든은 18세까지 소프라노 음역의 독창자였지만 변성기를 맞으면서 합창단 학교를 본의 아니게 졸업하게 된다. 그는 소문난 장난꾸러기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말썽의 주범이었지만, 10년 동안 슈테판성당합창단 학교에서 받은 철저하고 체계적인 음악교육은 하이든 음악세계의 밑거름이 됐다.

하이든은 부모가 원하는 성직자의 안정된 삶보다는 음악가라는 이상적인 삶을 택했다. 처음 10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말쑥하고 정갈한 합창단 시절과는 딴판으로 굶주리고 피폐한 삶이 이어졌다. 그를 구원한 것은 성실하고 친근한 성격으로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였다.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 특히 잘나가는 예술가일수록 우쭐하게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비사교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자신을 낮추며 융합하는 친화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하이든은 한결같은 성격이라 그의 주변에는 늘 예술가들이 북적이고 서로 도우며 살았다. 덕분에 하이든은 지인들의 소개로 궁정시인이자 당대 최고의 대본작가였던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와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또 영화 ‘파리넬리’에서 파리넬리인 카를로 브로스키(1705~1782)의 악독한 스승으로 나오는 성악교사이자 작곡가 니콜라 포르포라(1686~1768)의 음악 교습 반주자로 일하며 고정 수입을 얻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포르포라로부터 작곡을 위한 음악적 화성과 대위의 기본 개념을 배우고 작곡 감각을 익힌 덕분에 작품성이 일취월장했다.



1758년 하이든은 귀족인 모르친 가문의 음악감독이 됐으며 1761년에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헝가리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최고 유력 가문인 에스텔하지의 수장 파울 안톤 공작의 보조예술감독으로 고용됐다. ‘보조’라 해도 실질적인 예술감독(카펠마이스터)의 업무와 권한을 가졌다.

살리에리와의 우정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하이든의 오페라 ‘사랑의 승리’.

요즘은 클래식 음악가가 주인공인 영화 중에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영화 때문에 대중에게 잘못 각인된 비운의 캐릭터들도 생겨났다. 영화 ‘파리넬리’에서 돈만 아는 표독스러운 성악교사로 나오는 포르포라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재능을 질투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야비한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실제의 포르포라는 행실이 너무나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괴팍하고 안하무인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그리 유난스럽지는 않았다. 또한 하이든에게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즉 예술적 역량과 경제적 빈곤을 해결해준 소중한 스승이었다.

살리에리는 더 억울한 사람이다.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이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 야비한 인물로 설정한 허구가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사실 당시 살리에리가 시기했을 만한 사람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곤궁했던 모차르트가 아니라 어쩌면 고상하게 인정받던 하이든이었을지도 모른다. 36년간 궁정작곡가로 합스부르크왕가에서 봉직한 살리에리는 자신처럼 30년 넘게 한 집안에 고용됐음에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마음껏 창작하며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하이든이 훨씬 더 부럽지 않았을까. 물론 하이든과 살리에리는 서로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고, 자신들이 창작한 곡들의 연주를 지휘하며 빈 음악계를 융성하게 했다.

살리에리를 비롯한 당시의 작곡가들은 권력자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암투와 음모에서 살아남아 고용주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 작곡해야 했다. 제약이 심해 다른 외부활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다고 작곡가가 대중적인 기반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시점에 자신의 음악적 자존감만 생각해 안정된 자리를 섣불리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다. 상당한 대중성을 가진 ‘음악의 어머니’ 헨델조차 음악적 기반이 비교적 탄탄한 영국으로 진출했으나 직접 제작에 손을 대다가 빚에 쪼들리며 비참한 말로를 보냈다. 음악인 고용주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에 입각한 공공적 예술 후원보다는 자신의 권위와 사상을 외부에 전파하려고 음악을 지원했다.

하이든은 에스텔하지 가문이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빈의 남동쪽 85km지점에 세운 호화로운 여름별장에서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 이 별장에는 방이 126칸에 공연극장도 2개나 있었다. 그런 공간에서 하이든은 최고의 악기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풍족한 재원으로 레퍼토리를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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