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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창백하고 처절하게 가을이 묻어나는 노래

김정호 ‘하얀나비’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창백하고 처절하게 가을이 묻어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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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병인 폐결핵으로 핼쑥하고 창백한 표정에 애조 띤 목소리로 시처럼 맑은 가사를 때론 읊조리듯, 때론 절규하듯 부르던 이 비운의 포크 가수를 우리는 오늘 문득 그리워한다. 그가 숙명처럼 지닌 어린 날의 상처가 처절하게 안타깝고, 너무 오랫동안 그를 잊고 살아온 미안함 때문이다. 그가 간 지 꼭 30년, 김정호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창백하고 처절하게 가을이 묻어나는 노래
아득한 청춘 시절, 한때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현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장)을 꽤 알고 지냈다. 그도 젊고 나는 그보다 훨씬 젊을 때다. 1990년대 초반 나는 유학을 앞둔 일간지 경제부 기자였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당시 ‘모피아’로 유명한 재무부의 잘나가는 사무관이었다. 그와 나는 가끔 만나 소주도 마시고 카페도 들락거리며 그 시대의 고민을 얘기하곤 했다. 마산 진동 포구 이름을 따온, 강남에 있는 어느 ‘세꼬시’집이 단골식당이었고 이어 노래방과 단골 카페를 순례하는 새처럼 2차, 3차로 찾곤 했다.

그는 여러모로 내공이 뛰어난 사람이다. 정치인, 경제관료로서의 능력과 업적은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또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인간적인 면에서 겸손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야구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가졌다. 하기야 그는 야구 명문 마산중을 거쳐 부산고를 졸업했다. 그의 야구 사랑은 굉장하다. 술자리가 달아오르면 학창 시절 부산고 야구선수 중 자기한테 ‘줄빠따’ 맞고 엉덩이 안 터진 선수는 한 명도 없다고 자랑했다. 그때쯤이면 은근한 마초이즘까지 드러낸다. 공도 잘 찬다. 경제관료들이 연중 가장 설레며 기다렸다는 저 유명한, 아니 유명했던 경제기획원 vs 재무부 축구시합에도 단골로 뛰곤 했다.

삶처럼 어둡고 음울한 색깔

스포츠광답게 호기롭고 밝은 표정의 그가 노래를 부를 때는 유달리 청승맞고 슬픈 노래를 즐겨 불렀다. 더구나 그가 부르는 노래의 대부분은 김정호의 손에서 나왔다.

“고요한 밤하늘에 작은 구름 하나가/ 바람결에 흐르다 머무는 그곳에는/ 길 잃은 새 한마리 집을 찾는다…”



조그만 카페에서 맨주먹으로 마이크 잡는 시늉을 하며 그가 부르는 첫 번째 노래는 어니언스가 불러 유명해진 ‘작은 새’(1974). 바로 김정호가 만든 노래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끝낼 때쯤이면 술집 안은 한순간 적요해지고, 잠시 뒤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성(美聲)도 아닌 그가 청승맞은 노래를 유달리 잘 부르고 사람들이 이에 호응한 까닭이 솔직히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 박수 속에는 요절한 가수 김정호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섞여 있지 않을까 나름 분석해보곤 했다.

김 · 정 · 호! 대한민국의 중년치고 이 가수의 노래를 듣고 가슴 먹먹해지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될까. 흑백TV 시절, 그가 눈을 감고 전선을 몇 번 감아 움켜쥔 마이크를 입에 댄 채 비감 어린 표정으로 노래를 부를 때면 시간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김정호의 노래는 그의 신산한 삶이 그랬듯이 대부분 어둡고 음울한 색깔을 담고 있다.

“어둔 밤 구름 위에 저 달이 뜨면/ 괜시리 날 찾아와 울리고 가네/ 그 누가 만들었나 저 별과 달을/ 고요한 밤이 되면 살며시 찾아와/ 님 그리워 하는 맘 알아나 주는 듯이…”

그가 1985년 작사 · 작곡한 ‘저 별과 달을’이다. 40대 중반 이후 세대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술에 취해 한 번쯤 불러봤을 노래다. 한국판 조르주 무스타키로 평가받는 이른바 ‘음유시인’ 김정호의 본명은 조용호다. 1952년 3월에 태어나 1985년 11월 서른셋, 가수로서는 절정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투병하다 마산결핵요양소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그는 애잔한 노랫말과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1970년대를 풍미한 포크계의 ‘레전드’다. 1973년 ‘이름 모를 소녀’를 발표하면서 단박에 대중가요계의 샛별로 떠올랐고, 요절할 때까지 ‘작은 새’ ‘저 별과 달을’ ‘하얀나비’ ‘날이 갈수록’ 등 서정성 짙은 불멸의 곡들을 남겼다. 특히 ‘사월과 오월’ 멤버로 데뷔했다가 1973년 솔로로 나서면서 발표한 ‘이름 모를 소녀’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의 386 또는 7080세대에게 인기를 누린 보컬 어니언스(임창제 · 이수영 듀엣)의 ‘편지’ 등 공전의 히트곡들도 김정호의 오선지에서 탄생했다. 투에이스(금과 은)가 불러 히트한 ‘빗속을 둘이서’도 그가 빚은 노래다.

창백하고 처절하게 가을이 묻어나는 노래

김정호가 결핵 치료를 위해 입원한 국립마산병원. 임화 등 수많은 예술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국적 情恨과 남도 판소리風

그의 비장미 넘치는 노래 세계는 한국의 전통적 정한(情恨)을 품었고, 지역적으로는 남도와 깊은 연을 맺고 있다. 내력을 더듬어가면 서편제의 한 계보가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유전의 법통을 이어받은 담양 출신 명창 이날치의 소리는 능주의 김채만에게, 김채만의 소리는 박동실에게 이어진다. 현대 판소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박동실이 바로 김정호의 외할아버지다. 박동실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에 능통했으며, 오늘날의 오페라단 격인 창극단을 처음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박동실은 6 · 25전쟁 때 북한으로 갔다. 이로 인해 김정호의 외가는 풍비박산의 고통을 겪었다. 그의 어머니는 외조부 박동실이 두고 간 모든 것을 저주하며 불태우고 행여 아들 김정호가 알까봐 노심초사했다고 전한다. 그녀의 삶 또한 신산하기 그지없다. 당시 호남지역 경찰 고위간부의 ‘제2 부인’으로 있으면서 김정호를 낳았고, 이후 친정인 담양으로 돌아와 평생을 살았다.

이 과정에서 김정호가 서자로서 겪은 고통과 상처가 그의 노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된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핼쑥하고 창백해진 표정에 애조 띤 목소리로 시처럼 맑은 가사를 때론 읊조리듯, 때론 절규하듯 부르던 이 비운의 포크 가수를 우리가 오늘 문득 그리워하는 것은 그의 숙명 같은 어린 날의 상처가 안타깝기 때문은 아닐까. 그가 원래의 성(姓) 조씨를 버리고 엉뚱하게 김씨를 성씨로 택한 것도 이런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우울한 유년의 상처가 이상향을 갈구하는 노래를 낳았다고 유추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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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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