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너무 고민하지 말자, 어차피 다 살아가게 될지니

[황승경의 Into the Arte]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2-12-1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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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갓난아기 때를 벗자마자 ‘정답’을 배운다. 이 사람은 ‘엄마’고, 저것은 ‘ㄱ(기역)’이며, 그것은 ‘사과’라는 식으로. 주관식보다는 객관식이 더 편하다. ‘정오표’로 생각을 갈음하는 게 익숙하다. ‘맞지 않으면 틀리다’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는다. 틀린 삶을 살지 않으려 발버둥치다 힘이 다 빠져서야 알게 된다. 애당초 삶에 정답은 없었다는 것을.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랭은 100세 나이가 무색할 만큼 능동적이고 진취적이다. [㈜영화사 빅]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랭은 100세 나이가 무색할 만큼 능동적이고 진취적이다. [㈜영화사 빅]

    다사다단한 2022년이 지나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계속되던 늦더위가 무색할 만큼 영하권 체감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날이 추워지면 우울하고 무기력해진다. 만사 귀찮아 마냥 누워 있고 싶지만 문 밖으로 나와 잠시 걸어보자. 떨어진 낙엽으로 형형색색 물든 가로수 길에 서면 만감이 교차한다. 밟을수록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느껴진다. 머릿속에 화려했던 낙엽의 봄날과 여름이 그려진다.

    화사한 봄날, 푸른 녹음, 단풍 만발한 가을, 그리고 설레는 겨울. 반복되는 사계절이 흡사 우리네 인생 같다. 인간은 좋은 학교, 남부럽지 않은 직장, 번듯한 집, 폼 나는 차 등 각자의 정답을 정한다. 정답에 다다르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산다. 하지만 세상엔 무수한 ‘해답’만 존재할 뿐. 애당초 ‘정답’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무하게 느낄 필요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끙끙 앓는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으니까. 유쾌한 영화 한 편 보며 쓸쓸함을 떨쳐버리자. 그러다 보면 불현듯 또 다른 나만의 해답이 떠오를 수도 있을 테니.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포스터. [㈜영화사 빅]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포스터. [㈜영화사 빅]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2014년 개봉된 스웨덴 영화다.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은 베스트셀러다. 41개 나라에서 번역되고 800만 부 이상 팔렸다. 영화도 45개국에서 개봉돼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한국에선 관객 24만 명을 모았다. 흥행에서 대박을 거둔 건 아니지만 작품성만큼은 인정받았다. 대개 ‘스웨덴 영화계’라고 하면 불세출 여배우로 손꼽히는 잉그리드 버그먼과 그레타 가르보만 떠올린다. 본디 스웨덴은 ‘영화의 나라’다. 무성영화 시대부터 황금기를 걸었다. 특히 1930년대엔 참신한 인물과 시나리오, 감독을 찾던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감독 펠릭스 헤른그렌(55)은 스웨덴인으로 희극배우 출신이다. 스웨덴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웨덴 영화는 암울하고 냉소적인 인간 심리를 집중 묘사하는 풍조를 띠었는데, 유쾌한 소설이 딱딱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변질될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영화가 개봉하자 이러한 우려는 말끔히 사라졌다. 헤른그렌 감독은 스웨덴의 전통적 영화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희극배우 출신답게 원작의 유쾌함을 몇 배로 키워냈다. 주연을 맡은 관록의 스웨덴 희극배우 로베르트 구스타프손(58)의 연기도 압권이다. 20대부터 100세까지 일관성 있게 인물을 소화해 냈다. 구스타프손은 좌충우돌 상황에도 시종일관 대수롭지 않은 듯 무덤덤함 표정을 짓는다. 이점이 관객에게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며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킨다. 영화는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삶에 대한 통찰을 얻는 건 덤이다.



    과거·현재 오가는 예측불허 모험담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의 주인공은 100세 노인 알랭이다. 1905년 스웨덴 플렌시(市) 인근의 시골 마을 윅스홀트에서 태어났다. 알랭은 젊은 사람에 비해 행동만 느릴 뿐 정신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느 날, 야생 여우가 알랭의 유일한 친구 반려묘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알랭은 야생 여우를 산 채로 폭파해 보복하고, 복지국은 그가 치매에 걸렸다고 판단한다.

    알랭은 복지국 산하 요양원에서 관리받는다. 평생 자유롭게 전 세계를 떠돌며 살아온 그로선 답답할 노릇. 요양원 창문이 높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탈출을 꾀한다. 생일을 맞이한 날 창문을 넘어 계획을 실행한다.

    영화는 알랭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예측불허 모험담을 담는다. 알랭이 어릴 적 그의 부친은 가정을 돌볼 생각도 않고 어린이날 광장에서 콘돔을 홍보하다가 신성모독죄로 체포된다. 표현의 자유를 찾아 러시아로 가더니 러시아군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살림을 꾸리기 위해 홀로 동분서주하던 알랭의 모친은 기침을 달고 살다가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세상은 어차피 살아가게 돼 있으니 너무 고민하지 말라”는 모친의 유언이 알랭의 인생관이 됐다. 남겨진 어린 알랭은 위험하게도 ‘폭탄’에 심취한다. 그것도 폭죽 수준이 아닌, 다이너마이트급 폭발력을 가진 폭탄. 알랭의 계속되는 폭탄실험으로 결국 희생자가 발생하고, 알랭은 정신병원에 입소하게 된다.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

    알랭은 역사 속 굵직굵직한 사건에 ‘우연히’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영화사 빅]

    알랭은 역사 속 굵직굵직한 사건에 ‘우연히’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영화사 빅]

    정신병원에서 정관수술을 받지만 알랭은 오히려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됐다고 위안한다. 수술 부위가 아파 쉬려고 들어간 무기 공장에서 반(反)파시스트 에스트반을 만났기 때문이다. 알랭은 그를 따라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전한다. “공화국 깃발을 드높이고 혁명을 완수하자”던 에스트반은 첫 총알에 허무하게 죽지만 별다른 소명 의식 없이 그저 ‘친구 따라 강남 간’ 알랭은 폭탄 제조 능력으로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그에게 전쟁은 그저 즐거운 놀이였다.

    전쟁 과정에서 알랭은 우연히 적군 수장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1982~1975)의 목숨을 구한다. 프랑코가 선물로 준 총으로 미국행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향한다. 이때부터 알랭은 20세기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해 세상의 변혁에 일조하게 된다.

    알랭은 미국의 한 과학연구소에서 일한다. 연구소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를 총지휘했는데, 플루토늄 배합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옆에서 커피를 나르던 알랭이 우연히 그에게 결정적 힌트를 주게 되고, 핵실험은 성공을 거둔다.

    해리 트루먼(1884~1972) 당시 부통령은 무척 고무돼 “지구에 평화를 정착시킨 영웅”이라며 알랭을 치켜세운다.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애가 탄다. 물불 안 가리고 미국의 기술을 빼내려 한다. 알랭은 그를 저명한 물리학자로 오해한 KGB에 의해 소련으로 납치된다. 당시 소련의 원자력연구소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으로 오인돼 납치된 그의 동생 허버트 아인슈타인도 있었다. 전날 과음으로 술이 덜 깬 알랭은 스탈린 앞에서 농담을 서슴지 않다가 노동수용소로 쫓겨난다.

    그동안 주어진 여건에 크게 불만이 없던 알랭에게도 노동수용소 생활은 견디기 어려웠다. 허버트를 만난 알랭은 그와 함께 탈출을 모의한다. 탈출은 ‘엉겁결’에 이뤄진다. 어느 날 알랭은 허버트가 세탁실에서 몰래 가져온 수류탄을 보자 놀란 마음에 급히 던져버린다. 수류탄은 무기를 싣고 있던 트럭에 떨어지고, 삽시간에 수용소는 불바다가 된다. 혼란을 틈타 알랭과 허버트는 수용소를 유유히 탈출한다.

    알랭의 우여곡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서슬 퍼런 냉전시대에 이중간첩이 된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동서를 오간다. 그의 정보 하나하나에 세상은 요동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2022)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알랭이 수집한 도널드 레이건(1911~2004) 대통령의 사적 대화 내용을 혼동해 오판하고, 이로 인해 1393㎞에 달하는 ‘철의 장막’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소중한 건 일단 누려라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기발한 발상과 설정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영화사 빅]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기발한 발상과 설정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영화사 빅]

    원작을 탐구하면 영화의 기발한 설정이 이해된다. 원작은 작가 요나스 요나손(61)의 데뷔작이다. 2009년 작품. 이후 요나손은 후속작 ‘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을 비롯해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등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그는 언론인 출신으로 15년 기자 생활을 거쳐 미디어 회사를 창업해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모든 업무를 멈추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요양을 가야 했다. 스위스의 루가노 호수 근교로 이주한 그는 모처럼 많은 생각에 잠겨 마음껏 공상에 빠질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맞닿은 루가노 지역은 ‘스위스 안 작은 이탈리아’라고 불릴 정도로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스위스 지역은 백포도주를 생산하지만 특히 이곳은 메를로 델 티치노(Melot del Ticino)라는 적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하다. 날씨 덕분인지 주민 성향도 스위스보다는 이탈리아에 가까울 정도로 포실하고 다정하다. 스산한 스웨덴의 기후와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강렬한 햇살과 호숫가의 운치가 요나손의 필력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빡빡한 사회규범에 억압됐던 응어리가 터진 걸까. 그의 기발한 발상은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는 알랭의 엽기적 일탈행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 셈이다.

    소설에서 알랭은 영화보다 더 종횡무진한다. 영화엔 생략됐지만 원작에선 알랭이 평양에 들러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만나 총살당할 위기에 처해졌다가 마오쩌둥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는 일화도 등장한다. 황당무계하게 짜 맞춘 티가 다분하지만 관객에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치 않다. 한껏 폭소하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는 산산조각 날아간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파란만장한 과거를 보냈기 때문일까. 요양원을 탈출한 2005년의 100세 알랭이 겪는 죽을 고비는 심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알랭에겐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다. 어떤 문제에 맞닥뜨려도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알랭은 혼잣말로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리고 보라”고 중얼거린다. 쉬운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어려운 것을 쉽게 생각하면 오히려 해답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조언 아닐까.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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