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36년 후 광주 우린 아직도 부끄럽다

‘26년’ ‘화려한 휴가’ ‘꽃잎’ ‘박하사탕’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입력2016-05-02 08: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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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의 이미지는 그때에 멈춰 있다. 1980년 5월 18일이라는 날짜에. 문제는 그것이 물리적으로 36년이나 지났다는 것인데, 우리는 애써 그 ‘바뀜’을 저 멀리 놓은 채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으려 한다.
    총선 정국에 광주에 간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까지는 아니어도 무리가 되는 건 분명한 일이다. 하필 우리가 간 것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이곳 민심을 훑고 지나간 다음 날이었다. ‘표밭 현장’ 따위의 제목으로 르포르타주를 쓰기에 딱 좋은 시기인 셈이다.

    그럼에도 광주에 도착한 지 채 10여 분도 안 돼, 기묘하게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생각났다. 전도연이 송강호를 처음 만나 나누는 대화. 남자의 차를 얻어 타자마자 여자가 묻는다.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 송강호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이런 식이다. “뭐…별다른 게 있겠어요? 그냥 뭐…다 한나라당이고….”

    그 대화대로라면 광주, 여기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뭐…다 국민의당이고….” 광주 민심에 격랑이 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았고 옳게 보이지도 않았다(이 글이 나간 것은 총선이 끝난 후일 것이다. 광주의 민심이 어떻게 표출됐을지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진실로, 도저히).

    버스를 타고 광주에 내려가면 일단 시내 한복판에 ‘어마무시하게’ 들어선 고속버스 터미널의 위용 때문에 깜짝 놀라게 된다. 여기 정말 많이 변했구나, 라는 생각 때문만이 아니다. 그렇게 광주가 변해가는 동안 이곳을 찾아보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이다. 너무 오랜만이라는 것인데, 그 무심함에 대한 죄책감과 함께 광주 하면 늘 ‘저개발의 기억’ 같은 것이 뇌에 잔상으로 있음을 깨닫는다.





    ‘저개발의 기억’

    예컨대 공수부대원으로 보이는 군인이 피 묻은 셔츠 차림 남자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려치는 순간을 찍은 흑백사진 한 장 같은 것. 금남로 한쪽 구석에 줄지어 엎드린 남자들을 군인 셋이서 무차별하게 폭행하는 장면들. 어린아이가 아빠인지 누군지의 영정을 든 사진. 트럭에 내팽개친, 얼굴이 짓이겨진 시체들. 그리고 무수한 장면….

    우리 머릿속 기억 저장고에 남은 광주의 이미지는 그때에 멈춰 있다. 1980년 5월 18일이라는 날짜에. 문제는 그것이 물리적으로 36년이나 지났다는 것이고, 그런 정도의 시간이면 강산이 바뀌어도 세 번 이상을 바뀌었을 텐데 우리는 애써 그 ‘바뀜’을 저 멀리 놓은 채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으려 한 측면이 적지 않다.

    이것도 어찌 보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후군의 일종일 수 있다. 우리에게 광주는 그때 그 모습에서 잘 나아가지 않은 상태인데, 어쩌면 나아가는 것 자체를 우리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흑백 속의 광주가 잊히지 않는 한 이곳은 아무리 외형이 변하고 발전한다 한들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지 모를 일이다. 광주는 그냥 저개발의 상태로, 1980년의 상태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터미널 안내 데스크에서 애써 서울 억양으로 얘기하려는 청년의 충고를 듣지 않고 택시를 탔다. 젊어서 무조건 예뻐 보이는 청년이 그랬다. “9번 버스 타시면 10분 안에 갑니다. 택시도 마찬가지지 말입니다.” ‘태양의 후예’ 대사를 듣는 것 같았다.

    택시 정차장은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줄을 길게 서지 않도록 세 군데 스폿(spot)이 나눠져 있었다. 포토그래퍼가 중얼거렸다. “다른 데서는 왜 이렇게 안 하는지 몰라.” 그러던 그가 택시를 타자마자 한 말은 이거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곳에 데려다 주세요.”

    금강산도 식후경이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금강산과 민주화의 성지(聖地)를 대하는 태도는 좀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포토그래퍼는 5·18을 전후해 태어난 세대일 것이다. 그에게 금남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장로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쉬어도 한참 쉰 세대인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내 기억 속의 광주는 위르겐 힌츠페터가 만들어준 것이다. 독일 제1공영방송의 일본 특파원이던 그는 그 참혹한 현장에서 미쳐 날뛰는 공수부대원들 몰래 사진을 찍어 광주 학살의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게 ‘유언비어’인 줄 알았다. 사람들의 머리통이 깨지고, 배가 터진 채 죽어갔으며, 시 근교에는 시체가 즐비했다는 얘기 등등이 다 헛소문인 줄 알았다. ‘모든 것은 북괴(北傀)가 퍼뜨린 소문’이라는 군부의 얘기를 믿고 싶었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살바도르’에서 프리랜서 사진기자 리처드 보일(제임스 우즈)이 그랬던 것처럼 힌츠페터는 그 대량 학살의 현장을 찍은 필름을 몸속에 숨겨 갖고 나와 세상 밖으로 전파했다. 나는 힌츠페터를 잘 몰랐다. 그런 일을 한 사진기자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름도, 존재에 대해서도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다. 힌츠페터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미안하게도, 최근의 일인데 이 사람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다.



    힌츠페터와 ‘택시 운전사’

    어느 날 후배가 찾아와 말했다. “그 시나리오 얘기 들었어요? 송강호가 캐스팅됐다던데.” 시나리오 얘기는 늘 구미가 당긴다. “뭔데, 뭔데?” 이제는 안 그래도 되는데 후배는 목소리를 낮춘다. 많은 사람이 아직 그런다.

    “광주…때 말예요. 시 외곽에서 택시 기사가 한갓지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외국인이 와서 광주 시내로 들어가자고 한 거예요. 그(광주) 안에서 사달이 났는지 뭔 일이 났는지 잘 모르는 데다 워낙 영업을 못했던 터라 이 바보 같은 기사가 ‘저요, 저요’ 하면서 이 외국인을 태운 거죠. 다른 기사들은 손사래를 치는데. 그러고는 둘 다 시내로 들어가 역사적인 일을 하게 된다는 건데, 택시 기사가 송강호, 외국인 기자 역은 아직 캐스팅을 못했지만 할리우드 A급 배우로 할 거래요. 역사의 주인공은 기자지만 이 영화에서는 ‘기사’에 포커스를 맞춘대요.”

    암 그래야지. 그래야 영화지. 무명의 영웅들에 초점을 맞추는 게 영화지. 둘이서 신이 나서 “와아…그 외국인 기자는 브래드 피트 같은 배우가 하면 좋겠다”며 떠든 기억이 난다. 지금 이 영화가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할리우드 배우가 캐스팅됐는지 진짜로 송강호가 하기로 했는지(그가 하면 딱일 것 같다) 알려진 바는 없다. 제목은 뽑혀 있다. ‘택시 운전사’라고.

    그 영화 만들어지면 재미있을 것 같다…라기보다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우리 모두가 진 마음의 빚을 갚는 일이 될 것이다. 힌츠페터뿐 아니라 광주 사람들 모두에게, 아니 그 광기의 1980년대를 겪은 모든 이를 위로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때로 역사의 원혼을 씻겨준다. 영화는 일종의 씻김굿이 된다.

    5월이 된 만큼 광주에서도 특별한 행사들이 열린다. 5·18 민주화운동 36주년을 맞아 열리는 ‘오월 시네마 토크’가 그것인데 4월 23일부터 5월 14일까지 매주 토요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3관에서 ‘26년’을 시작으로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꽃잎’ 4편이 상영된다. 영화가 만들어진 순서는 꽃잎(1996) → 박하사탕(1999) → 화려한 휴가(2007) → 26년(2012) 순이지만 상영 순서는 뒤섞어놨다.



    ‘꽃잎’ 이정현이 에둘러 온 길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최신작인 ‘26년’이 맨 앞이고 장선우의 영화가 맨 뒤인 것이 낫다. 장선우의 영화는 만들어진 때가 아직 이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완전히 여물지 못한 때라 광주의 그 ‘물리적 충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다소 우회했다. 그 ‘전쟁’의 기록은 ‘박하사탕’ 후반부와 ‘화려한 휴가’가 잘 기록했다.

    ‘꽃잎’은 5·18을 둘러싼 원한과 트라우마에 대해 짙은 심리적 음영을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오히려 지금 이 시기에 곰곰이 반추하게 되는 작품이다. 장선우 영화가 늘 그렇지만 ‘꽃잎’도 빨리 나온 영화였다. 다소 앞선 영화였다는 얘기다.

    이런 생각은 이 작품에서 결국 정신이상에 걸리는 소녀 역을 맡은 배우 이정현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꽃잎’ 이후 테크노 리듬이 가득한 히트곡을 양산하며 완전히 펑크한 분위기의 가수로 활동하다 최근 영화로 다시 돌아왔는데 ‘명량’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두각을 나타내며 지난 1, 2년 동안 각종 영화상에서 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그녀가 여기까지 에둘러, 에둘러 온 것은 이상하게도 데뷔작인 ‘꽃잎’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정현은 너무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큰 부담의 ‘역사물’에 출연한 것이다.

    영화 속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는 5·18의 심장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후에 요란한 분장과 복장, 그리고 기이한 몸짓의 가수가 된 것은 그런 ‘영화적’ 상처에서 벗어나려 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역사를 다룬 영화는 종종 배우에게도 큰 부담을 준다. 5·18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그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설의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널 보니 쪽팔려서 못살겠다”

     아마도 할리우드 같으면 5·18의 얘기는 지난 36년 동안 수도 없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껏 만든 건 단 4편에 불과하다. 아직도 일부 사람들이 5·18은 ‘북한과 결탁해 김대중이 선동한 내란음모’ ‘북한 공작설에 따라 조작’이라고 믿는 와중에 이 얘기를 다루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 위험한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제주 4·3사건 얘기도 아직 제대로 극영화로 만들어진 게 없다. 오멸 감독의 ‘지슬’ 정도가 있지만 그것 역시 엄밀하게 얘기하면 ‘정면’의 영화가 아니라 ‘측면’의 영화에 속한다.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만 해도 이상우 감독의 ‘작은 연못’ 정도의, 저예산 영화 한 편에 불과하다. 모두 아직 완전한 해법과 해답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툭하면 좌우 진영의 이념으로 갈라놓는 사회에서 영화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다.

    이런 영화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역사 교육이 된다. 그런데 영화가 만들어지면 어김없이 이념 논쟁에 휩싸인다. 그런 논쟁에 휩싸이면 자칫 영화는 큰 수렁에 빠진다. 영화에 큰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현대사를 다룬 영화를 꺼리는 이유다. 오죽하면 ‘변호인’을 두고 한편에서는 ‘빨갱이’ 영화라는 비난이 쏟아졌겠는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여전히 좁디좁은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26년’은 영화적으로는 설정이 기막히게 뛰어난 작품이다. 영화 어느 곳에서도 특정인을 지칭하진 않았지만 보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게 누구인지를 안다. 영화는 광주 학살의 최종 책임자인데도 여전히 버젓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옛 권력자를 처단하려고 3인의 킬러가 모인다는 얘기가 기둥 줄거리다.

    3명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여자주인공인데 한혜진이 맡았다. 영화 속 그녀는 전직 사격선수 출신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그녀가 학살자의 이마에 총탄을 백발백중 꽂을 수 있도록 백업한다. 한 사람은 광주 조직폭력배 수호파의 중간 보스(진구), 또 한 사람은 서대문서 소속 교통경찰(임슬옹)이다. 셋은 보안업체 사장(이경영)과 그의 비서(배수빈)에 의해 모여, 훈련을 거쳐 실전에 들어간다.

    그러나 아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며 옳은 일을 행하려는 자, 늘 장애가 많은 법이다. ‘26년’은 1980년 이후 26년이 지난 2006년이 배경이지만 실제로 영화가 공개된 것은 2012년이 되고 나서다. 그만큼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그나마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일반 관객들로부터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자꾸 분루(憤淚)를 삼키게 만든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사는 게 억울하기 때문이다. 칠레 피노체트 군부정권이 희희낙락 살아간 것을 비웃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똑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영화가 자꾸 확인시켜 준다.

    영화 속 광주 조폭 두목(안석환)은 서울로 ‘큰일’을 하러 가겠다며 떠난 자신을 면회 온 중간 보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널 보니까 내가 살아온 게,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게 쪽팔려서 못살겠다.” 깡패가 진심을 말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에서 사람들이 많이 운다. 마치 우리의 고백을 대신해주는 것 같아서다. 철창 안 두목은 우리이고 철창 밖 중간 보스는 광주의 원령들이다.



    “여즉 안 변했는디요”

    ‘오월 시네마 토크’가 열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섰다. 36년이 지난 지금 그 전당, 아니 그 도청을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여기로 올 때 택시 기사가 그랬다. “아무것도 안 변했는디요. 여기는 여즉 다 똑같으요.” 그래서 물었다. “5·18 때도 여기 계셨나요?” 기사가 운전 중에 흘깃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런 걸 물어쌌냐’고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답은 하지 않고 기사가 말했다. “도청 자리가 쭤어기여.” 전라도 말은 잘 들어야 한다. ‘쭤어기’는 바로 요 앞이라는 얘기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아서일까. 기사는 도청을 비교적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내려주고 갔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사진을 찍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관광 온 사람처럼 사진을 찍어대는 것도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월 시네마 토크’를 기획한 광주트라우마센터의 강용주 이사장은 도청 ‘전투’에서 최후까지 남은 고등학생으로 당시 공안과에서 일찌감치 점찍어둔 인물이다. 그가 전남대 의대를 다니던 시절, ‘해외’에 나간 경험이 없는데도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으로 엮여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산 것은 그가 ‘도청’ 출신이라는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으로 얘기하면 전향서 한 장 쓰고 나오면 다 무마될 것을, 그가 그러지 않았던 것도 결국 그 스스로가 자신이 ‘도청’ 출신이었음을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자존심을 걸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류승완의 영화 ‘베테랑’의 대사처럼 우리는 그래도 “가오(일본어로 ‘얼굴’이란 뜻으로, 하찮은 일에 나서서 주도권을 잡는 사람의 행태를 표현하는 비속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강 이사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특사로 풀려났으며 이후 전남대 의대에 복학해 의사가 됐다. 그의 전문 분야가 ‘통증 클리닉’인 것도 다 사연이 있는 셈이다.

    그가 운영하는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심리적, 정신적 치료를 돕는 기관이다. 그는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공수부대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과 열여덟, 열아홉 살이었을 그의 마음속에 어떤 공포와 어떤 울분이 영원히 자리하게 됐을까. 그 누가 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겨놓은 걸까. 구 도청을 바라보며, 금남로 한가운데에 서 있자니 도저히 ‘쪽팔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포토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아, 밥 안 먹어요?!” 그래 먹자. 먹고살자. 살아서 다시 밥을 잘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 그래서 스물다섯 살이 된 내 딸이 이 따위 기억 속에 허우적대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자. 아 근데 진짜 배가 고파왔다.



    ‘감상은 역사의 敵’  

    충장로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인걸(人傑)은 간 데 없지만 산천도 의구(依舊)하지 않은 이 이상한 느낌이 뭔지 잠깐 생각했다. 서울 명동 거리 같은 곳, 부산 남포동 거리 같은 곳. 이상한 기시감(旣視感)이 찾아들며 정치가 실종되고 역사가 실종된 기분이 들었다.

    골목길을 누비며 전라도 음식을 제대로 먹자고 한 게 화근이 됐다. 충장로 거리는 프랜차이즈 음식점들로 가득 차 1시간 가까이를 헤맸다. 심지어 광주 지역구에 나가 있는 총선 후보에게 전화까지 했다.

    “여기 충장로 주변인데 맛집 좀 소개해줄래?” 유세를 다니느라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서 허스키 록 가수 로드 스튜어트가 된 그 후보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아따 형님, 지금 이 판국에 징하네요, 진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 배지 다는 건 떼어놓은 당상일 것 같다”고 하자 그의 대답이 차가웠다. “끊소, 형님.” 그래도 그는 의리가 있어서 내게 문자로 맛집 두 개와 약도를 보내왔다.

    그러나 결국 거기는 가지 못했다. 거리도 멀거니와 시간이 너무 늦어 이미 문을 닫았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는 이제 며칠 후면 국회의원이 돼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4년은 못 보고 살게 될 텐데 참 좋은 일이면서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부디 오래된 광주의 아픔, 그 정서를 올바르게 이끌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이기적인 지역주의에 머물지 않는, 진실로 전국 정당과 그에 준하는 정치를 해주기를 속으로 빌었다.

    골목길에서 족히 50년은 돼 보이는 광주극장을 만난 것은 이상한 행운이었다. 요즘 들어 이런 극장이 자꾸 내 마음으로 걸어 들어온다. 멀티플렉스만 횡행하는 지금 같은 시대에 다 쓰러져가는 극장이 가쁜 숨이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극장 간판을 아직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니! 어린 시절 가끔 가본 천막극장과 가설극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포토그래퍼도 연신 사진을 찍는다. 옛것은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렇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추억할 거리는 남아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간신히 밥집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전라도식이 아니라 제주도식 돼지고기 집이다. 여하튼 맛있다. 여기는 전라도잉께. 오물오물 삼겹살을 먹으며 그가 묻는다. “도청 봤으니 된 거 아녜요?” “전남대 한번 가보자. 광주공원이라는 곳도 가보고. 망월동 국립묘지는 못 가겠네. 최초 발포지라는 곳도 있어.”

    그가 다시 오물거리며 물었다. “그거…다 쓸 거예요?” 상추쌈을 잔뜩 만들어서 입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어디 쓸 수 있겠어? 이건 아직… 쓸 수 없는 얘기 같아. 내가 과연 뭘 쓸 수 있겠어? 그럴 자격이나 있겠어 어디? 그냥 온 거야. 그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냥 와본 거야. 그러니 왔다는 얘기도 하지 말자. 그냥 조용히 보고 가자….

    갑자기 소주 한잔이 확 당겼다. 아, 그러나,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감상은 역사의 적이니까. 냉철하고 무미건조하게 광주를 보고 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밥집 바깥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총선이 어찌 되려나. 안철수가 정말 이기려나. 언젠가 이 분위기를 영화에 담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밤이 깊어갔다. 세상의 밤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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