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호

문화 트렌드

집단주의의 고통 개인주의의 발견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자기계발서의 진화

  • 이문원 | 문화평론가

    입력2016-07-12 16: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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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력, 노오력, 더 나아가 노오오력을 해도 시원찮다는 세상에 맞서는 자기계발서들이 나타났다.
    •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 ‘본성이 답이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 제목만으로도 눈길을 확 끄는 이 책들을 보면 세태가 읽힌다.
    우리 출판 시장에서 자기계발서가 스테디 품목이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정확히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이전 30여 년 동안 당연시되던 고도성장에 제동이 걸리고 갑작스레 총체적 불황을 맞이한 충격이 방아쇠가 됐다.

    처음은 미국발(發) 자기계발서들이 밀고 나갔다. 2000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시작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아침형 인간’에서 2007년 ‘시크릿’까지 열풍이 이어졌다. 대부분 관념론적 차원의 자기계발, 즉 ‘내가 변해야 내 주변 상황이 변한다’는 논리를 폈다. 어떤 의미에선 ‘자기계발’이란 명제에 가장 잘 들어맞는 책들로 볼 수 있다.



    킬링과 힐링을 넘어

    이런 콘셉트의 인기가 시들해진 게 2008년경이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여파로 전 세계적 경제불황이 닥치면서 더더욱 그랬다. 하라는 대로 시간 쪼개가며 스펙도 쌓고, 없는 돈에 견문도 넓혀봤지만, 보상은 기대에 현저히 못 미쳤기 때문이다. 자기계발 해봤자 딱히 얻는 것도 없으니 그저 위로만 받고픈 심리가 생겨났다.

    그래서 이후 ‘힐링’ 서적이 등장했고, 열풍이 일었다. 2010년경부터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같은 베스트셀러가 쏟아졌다. 이 책들은 생존경쟁 속에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던 감성적 요소들이야말로 인생에서 진정 값진 자산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러다 이 열풍도 곧 잦아들었다. 이전 자기계발서와 마찬가지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힐링은 그저 일시적 진통제에 불과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게 힐링의 정반대편에 선 ‘킬링’ 서적이다. 위로에 목마른 젊은 세대의 나약함을 가차 없이 공격하며 실질적 대안을 찾으라는 책들이다. 좌파적 접근, 즉 구질구질하게 위로나 받을 생각 말고 뛰쳐나가 네 권리를 주장하라는 주문이 강신주의 ‘감정수업’이라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상식적 판단을 하라는 우파적 접근이 남정욱의 ‘차라리 죽지 그래’다.

    하지만 이 열풍도 금세 꺼졌다. 그보다 더 살갑고 더 솔깃하며 덜 고통스러운 ‘4세대’ 자기계발-처세술 콘셉트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중 한 권의 제목 하나만으로도 이 새로운 트렌드의 셀링 포인트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 ‘너무 애쓰지 말아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나는 왜 똑같은 생각만 할까’ 등도 이런 유형이다. 공통점은 명료하다. 첫째, 힐링에 이어 킬링 열풍도 꺼져가던 2015년경부터 우후죽순 등장한 책들이다. 둘째, 대부분 일본발(發) 책들이다. 셋째, 이제 노력도 의미를 못 찾겠고 위로도 필요 없으며 그렇다고 꾸지람 듣는 것도 싫으니 그저 하루하루 무리하지 않고 안분지족하며 살겠다는 내용이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를 보자. 일본 기업들의 고질인 잦은 야근과 야근수당 미지급 건을 중심으로 일본의 기업 문화를 돌아보는 이 책은, 불합리한 사내 규율을 납득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사회인으로서의 상식’이란 레토릭을 이렇게 공격한다.


    결국 ‘사회인으로서의 상식’이라는 말은 특정 회사나 업계 내에서 암묵적으로 정한 규칙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상식’이라고 주장하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 ‘사회인으로서의 상식’이 어떤 내용인지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고 듣자마자 사고를 정지한 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자기 권리를 지키면서 제대로 일하는 날이 오기는 아직 멀었다.




    의도된 트렌드?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목차 챕터만 넘겨 읽어봐도 알 수 있다. 그중 3장 ‘열심히 하지 않아야 더 잘 풀린다?’에 실린 ‘너무 열심히 하지 않는 비결’ 11개 항목이 책 전체의 메시지를 전한다.

    ①거절할 줄 알기 ②혼자 다 하지 않기 ③때로는 기꺼이 민폐를 ④남들에게도 나를 도울 권리를 ⑤가끔은 대충대충 ⑥맡길 때는 확실하게 ⑦기대에 부응하지 않기 ⑧콤플렉스 드러내기 ⑨‘나만의 규칙’ 깨보기 ⑩‘좋은 사람’ 그만두기 ⑪ 계획하지 않을 자유

    다른 책들도 맥락은 비슷비슷하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의 여성 에세이 버전이고, ‘나는 왜 똑같은 생각만 할까’는 이 계통에서 드문 미국 저자가 쓴 ‘무작정 노력은 하지 말되 창의력으로 승부 걸라’는 식의 조언서다.

    이 책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 새로운 콘셉트 트렌드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런 신종 트렌드를 ‘의도’했기에 비슷비슷한 책들이 일거에 튀어나오게 됐다는 논리가 더 적절한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의도된 트렌드라면 의문이 생긴다. 출판계건 어디건 이처럼 일목요연한 트렌드엔 그 명확한 발화점이 있게 마련이다. 이른바 ‘대박’ 히트작이다. 그런데 앞에서 본 책 가운데 이렇다 할 대박은 없다. 다들 어느 수준의 주목은 끌었지만, 일반적으로 출판 트렌드를 발화시키는 기준, 즉 판매부수 30만 권 이상의 책은 없다. 왜 그럴까. 제목이 너무 강렬해 신세대 신입사원용 ‘제멋대로 행동지침서’처럼 여겨지는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에서 결정적인 대목은 이것이다.  


    본래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모두와 똑같이’란 불가능하다. 일이 좋아서 매일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이 싫어서 최대한 편한 직장을 구해 매일 일찍 퇴근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저마다 다양한 생각이 존재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엔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당혹스러운 캐치프레이즈 아래로 이런 주문이 깔려 있다.


    너무 열심히 하는 이유는 ‘나는 가치가 없다’는 전제를 두었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는 내 안에 ‘이미 존재한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어디를 가도 자유로울 수 없다.’




    ‘미움받을 용기’가 발화점

    이제 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그냥 풋내기들의 정신 승리 서적이 아닌 것이다. 이들은 일목요연하게 ‘개인주의’의 가치를 얘기한다. 개인주의 확보의 선상에서 집단주의 풍토에 찌들어 효율은커녕 직원 개개인의 사고마저 뒤엉켜버린 일본 사회의 단면들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책들이 나오게 된 발화점도 짐작할 수 있다. 1년 반 전 출간돼 지금껏 100만 부 이상 팔린 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의 개인주의 설파 서적 ‘미움받을 용기’다.

    ‘미움받을 용기’는 기묘한 베스트셀러다.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아들러의 심리학을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 형식으로 풀어 해석한 책인데, 개인주의를 토대로 한 자유주의 사고까지 소개한다. 그 탓에 공동체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설정한 좌파 문화 진영으로부터 딱히 지원을 받지 못한(심지어 비판까지 받은) 책인데도 입소문으로 밀리언셀러가 된 케이스다. 즉, 근래 밀리언셀러의 기반으로 인식되는 소위 ‘미디어 셀러’가 아니라 실제로 대중의 반향을 통해 치고 올라간 간만의 ‘진정한 대중서적’이다.

    여기서부터 일본 저자 이름으로 등장한 유사 서적들이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부러지지 않는 마음’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등이라면, 조금 방향을 틀어 청년취업 및 사회적 자아 수립 상황으로 소재를 옮겨간 게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등인 셈이다.

    이들이 대개 일본발인 이유는 자명하다. 일본도 한국처럼 집단주의의 폐해를 지독히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사적 관계나 공적 역할 모두에 집단주의가 팽배해 있다. 반면 일본은 사적 관계에선 개인주의가 만연하지만 공적 역할에선 집단주의가 더없이 강조되기에 그 갭이 엄청나고 그만큼 갈등도 심화해 있다. 그러니 집단주의 폐해를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무차별적으로 겪고 있는 한국 대중에게 이 책들이 격렬하게 와 닿는다.

    이 대목은 개인주의 풍토가 개인은 물론 사회 전반에 만연한 미국 등지의 책들이 채워주기 힘든 지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국식 자기계발서는 이미 개인주의를 바탕에 둔 상태에서 생존 게임의 발상 전환을 꾀하는 식이 아니었던가.



    혐오와 거부를 넘어선 자리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 유의 ‘변종’ 개인주의 서적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딱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 집단주의 폐해에 대해 너무 과장된 묘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개인주의적 사고와 그 사고를 통해 구성된 체계만이 개인은 물론 체계의 효율성도 담보하리라는 주장은 다분히 교과서적이다. 집단주의의 악몽 속에서도 어떻게든 개인의 자존감을 방어해 개개인의 진화를 이루고 심리적 갈등을 최소화하자는 방법론은 심리상담에도 응용될 만큼 유효하다.

    문제는 이런 사고가 이른바 ‘달관론’으로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사회 구조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사회에 벽을 쌓고 달관해선 안 되며 적극적으로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식의, 개혁적 투쟁론 따위를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당위론 자체가 이미 전체주의적 사고에 가깝다. 다만 그런 달관론은 절대 뒤틀린 사회 안에서 개인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달관론이 개인의 ‘정신 승리’를 담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개인이 내적 수양만으로 정서적 밸런스를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책들이 집단주의와 집단주의 체제가 낳은 폐해에 대해 혐오와 거부, 두 극단만을 제시하지 않고 집단주의의 본질에 대해 탐구했다면 훨씬 균형 있고 실제적 효용을 낳는 자기계발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신세대의 제멋대로 처세술이란 오해도 덜었을 것이다.

    혐오와 거부는 쉽고 대중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한 뒤 그에 대응하는 형식으로서의 반발은 복잡하고 피곤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선 혐오와 거부를 넘어선 지점에서 비로소 진정한 처세와 자기계발이 시작된다.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나를 사회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 높은 생존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아무튼 지난 십수 년간 진행돼온 자기계발서 트렌드의 진화 모델이 ‘개인주의의 발견’으로 집약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근래 불거진, ‘여혐’ ‘남혐’ ‘맘충’ ‘개저씨’ 등으로 대변되는 집단 혐오 분위기와도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모두 궁극적으로는 대상화한 집단 일부의 미개한 습성, 그중에서도 개인주의 풍토에 반하는 타인 영역 침해에 대한 알레르기 반발을 담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자기계발서의 진행 방향이야말로 당대의 현실과 갈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흐름으로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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