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천번 바라보고 나서야 불국사의 모습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낮밤 없이 따라 쓰기를 수백번, 겨우 추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롯이 그의 깊이를 통과한 정신에서만 살아 있는 예술이 나온다. 시퍼렇게 산 정신이 아니라면 ‘예술’ 아닌 ‘사기’에 불과하다. 10년 넘게 불국사를 그려온 화가 박대성의 삶은 ‘진정한 예술은 창녀처럼 치장할 필요가 없다’는 톨스토이의 엄정한 예술론을 닮았다.
박대성(朴大成·63)은 경주를 그리는 화가다. 경주 남산과 불상과 탑과 소나무와 대나무와 황룡사와 분황사와 포석정을 그리지만 더 열심히 화폭에 담는 것은 단연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그의 불국사 그림은 그림이 닿을 수 있는 경지를 아연 뛰어넘는다. 1500년 전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었다면 1500년 후 박대성은 불국사를 그렸다. 하고많은 이름 중에 하필 대성인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불국사가 왜 토함산 아래에 놓였는지 왜 거기서 1000년을 버티는지에 관해 우리는 아는 바 없다. 감격할 줄도 모른다. 박대성은 수묵으로 실경산수를 그리는 화가였다. 다들 현대로, 채색으로 몰려가버릴 때 외롭고 굳세게 동양화의 전통을 지키면서 수묵작업을 고집해왔다.
“다들 현대미술을 얘기해서 그게 뭔지 알고 싶었어요. 현대미술이 뭐냐고 물어도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것의 본고장이 뉴욕이란 말을 듣고 거길 갔지. 소호에 방을 얻어놓고 1년을 살았어요. 현대미술의 요체가 뭔지 알고 싶었거든요.”
뉴욕에서 별의별 그림들을 구경했다. 센트럴파크와 다운타운과 롱아일랜드를 수묵으로 그리며 돌아다니던 어느 날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미술이다. 현대미술 최고의 도구는 필묵이다!’”
경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게 최첨단의 현대는 다름 아닌 불국사다!’ 싶었다. 그날로 보따리를 쌌다. 경주가 그렇게 박대성을 불러들였다. 1994년이었다.
“성질이 좀 급해요. 생각대로 행동을 못하면 좀이 쑤셔 못 견뎌. 김포에 도착하자말자 경주로 달려왔더니 해가 뉘엿뉘엿 지더라고. 불국사 마당에 들어서는데 온몸에 쫘악 전율이 오데요!”
다짜고짜 주지 만나기를 청했다. 주지는 외출 중이고 부주지 성천 스님만 계시다고 했다. 성천 스님께 사정을 말하고 1년만 불국사 방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대중회의에 부쳐봐야 안다고 하시데요. 기다렸지. 얼마 후 ‘통과됐습니다’란 답이 왔어. 그날 밤이 보름이었나 봐. 달이 휘영청 밝은데 범영루 앞에 섰지. 아테네에서도 베니스에서도 백두산 천지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동이 몸을 훑고 지나가더라고.”
막상 불국사를 그리려고 붓을 잡았을 때 그는 절망한다.
“내공이 부족해. 내 실력이 못 미치더라고. 단전에 기운이 달려 마음먹은 대로 불국사를 그려낼 수가 없었어요.”
불국사와 通하다
오랜 친구 이문열 작가와 함께 한 박 화백.
날마다 불국사를 바라봤다. 지극정성으로 불국사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차츰 불국사가 손에 잡혀오기 시작했다. 주변이 점점 명료해졌다.
“불국사는 가로 길이가 긴 가람이거든. 정면에서 보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초점을 잡을 수가 없어 미터수를 재서 초점을 셋으로 나눴지.”
오래 보고 있자니 신라의 천재 건축가 김대성이 어떤 마음으로 불국사를 지었는지 훤히 보였다. 불국사에 관한 한 이제 박대성만큼 할 말이 많은 사람은 흔치 않다. 교감의 정도가 얼마 만큼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대낮에도 보고 한밤에도 보고 달빛 아래서도 보고 온갖 불국사를 다 봤는데 눈 내린 불국사를 보지 못했어. 경주에 7년 동안 눈이 안 왔다는 겁니다. 눈 덮인 불국사를 한번 보기는 봐야겠는데…어느 날 한밤중 줄기차게 눈이 내려 쌓이데요. 불국사가 흰눈으로 수북하게 덮이는 것을 뚫어지게 지켜봤어. 그리고 한 20분 후에 거짓말같이 싹 녹아버리데. 뭔가 날 돕기는 돕는구나 싶더라고.”
나는 이번 경주길에 가로 10m, 높이 2.5m, 그의 화실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2000호짜리 불국사 그림 앞에서 하룻밤을 새웠다. 실제와 똑같은 천년송 10여 그루 사이로 실제와 똑같은 기왓장과 누대와 석축과 난간을 가진 불국사가 마주 보며 길게 누워 있었다. 크기가 거대하다고 그림이 사람을 압도하는 건 아니니라. 건축이 아니라 회화가, 건축물만한 공간감과 신비와 무게와 울림을 지닐 수 있다는 실감을 전에는 한 적 없다.
소산의 불국사는 이미 평면 위의 불국사가 아니었다. 마주 선 사람을 그 안으로 빨아들이는 불국사였고, 공간을 뚫고나와 이쪽의 가슴 속으로 확장하는 불국사였다.
소산(小山)은 대성(大成)이란 이름을 눅이라고 친척어른이 붙여준 그의 아호다. 소산말고 소평(小平)이란 호도 같이 쓴다.
토함산에 똬리 튼 용
나는 소산을 서너 번 만났다. 경주에 세 번 갔고 KTX로 대구까지 동행한 적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간결하고 강렬해서 마음속으로 어록을 만들어볼 정도였다. 그러나 불국사 그림 앞에서 나는, 화가라면 솔거밖에 없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 자신이 그린 소나무 그림에 새가 날아와 부딪혀 떨어지는 화가를 어릴 적부터 동경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솔거-신라-경주-김대성-불국사-박대성’이 내 머릿속에서 한 끈에 주르륵 꿰어지는 건 일종의 감격이었다.
“불국사를 지을 때 김대성 그 어른이 염두에 둔 건 용이라는 걸 알았어요. 보라고! 북과 운판이 놓인 종각은 용의 머리거든. 머리를 동해 쪽을 향해 두고 있지. 석축의 돌을 봐요. 머리 쪽은 자그맣다가 몸통 쪽에 오면 커졌다가 꼬리 쪽에 가면 다시 작아지지. 그건 용의 비늘이거든. 청운교, 백운교는 앞발이고 연화 칠보교는 뒷발이지. 서쪽으로 꼬리 부분을 가서 보면 더욱 절묘해. 길게 드러누운 것도 딱 용의 형상이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더욱 확실한 것이 긴 회랑을 이루며 똬리를 틀고 있잖아. 용의 현실 동물은 뱀이라고. 그리고 정가운데 머리를 치켜든 부분에 대웅전 부처님이 딱 앉아 계시는 거지.”
박 화가는 ‘불편당(不便堂)’에서 생활한다. 몸을 불편케 내돌려 정신을 가다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월 보름날 불국사에 한번 와봐. 대웅전 앞에 서면 정확하게 다보탑과 석가탑 사이에서 달이 뜬다고. 심장이 떨려서 그 광경은 5분을 채 못 봐. 동해에 해가 뜨면 맨 먼저 석굴암 대불의 미간을 비추거든. 그 어른은 일월(日月)을 운용하는 아키텍트(architect)였어. 이 큰 가람에 하수도라곤 범영루 곁에 딱 한 개뿐인데 하수가 쏟아질 땐 양쪽으로 쌍무지개가 떠. 세상 천지에 하수도로 무지개를 만드는 건축가가 또 어디 있어? 1000년 동안 하수도 한번 막히지 않았다고. 가우디가 신이라고? 아니 김대성과 비교해 누가 더 신이야?”
‘불편당’과 톨스토이
그는 부산으로 대구로 서울로 팔당으로 대만으로 뉴욕으로 여기저기 삶터를 옮기다가 불국사의 손짓을 느낀 후 경주 남산 아래 터를 잡았다. 살림집으로 쓰는 헌 농가의 일각대문 앞에는 ‘불편당(不便堂)’이란 당호가 붙어 있다. 불편당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신체조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어려서 팔 하나를 잃었다. 화가에게 팔이 하나 없다는 것을 애써 부각하는 언론의 선정성에 그는 이제 진력났다. 나까지 그걸 자꾸 들추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의 박대성을 만드는 데 한 팔이 없다는 그 ‘불편’은 커다란 몫을 담당한 게 틀림없다.
“내가 남을 쫓아다니면 몸이 이러니 천덕꾸러기가 돼버릴 거 아냐.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 십상이라는 걸 일찍 깨달았어요. 나는 성공의 개념을, 혼자서 족해도 남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는 걸로 진작에 잡아놨거든…‘불구’라는 게 늘 강박이었어. 남들은 둘을 해놓고 쉬는데 나는 열을 내놓고도 쉴 수가 없었어. 만족할 줄 모르고 자신을 혹독하게 몰고 나간 건 한 팔이 없었기 때문이지…제일 큰 스승이 없어진 한 팔이었어.”
당호를 굳이 불편당으로 지은 건 뜻이 깊다. 화장실도 멀고 천장도 낮아 불편한 집이란 게 먼저긴 하지만, 몸을 불편하게 내돌리지 않으면 정신을 시퍼렇게 벼를 수 없다는 의미가 훨씬 크다. 그 이름엔 화가 박대성의 예술관이 녹아 있다. ‘몸을 엄혹하게 단련하지 않으면 정신이 안일에 젖게 된다. 스스로 자신을 끊임없이 유배하고 학대해 불편을 추구하겠다’는 각오를 집 이름에 딱 담아 붙여놓은 것이다.
그는 매일 톨스토이를 읽는다. 봄날에 갔을 때도 겨울날에 갔을 때도 머리맡엔 반쯤 뜯어진 톨스토이가 뒹굴고 있었다. 더구나 확대 복사한 책이었다.
“안경 안 쓰고 읽으려고 일부러 확대 했어. 두꺼워서 누워선 읽을 수가 없어 책을 몇 권으로 뜯어서 나눴지.”
내게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준다.
“예술로 생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선택한 가장 나쁘고 가장 해로운 방법 중의 하나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지보다 훨씬 고상하여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귀찮은 거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현대 예술은 창녀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참으로 미세한 부분까지 꼭 들어맞는다. 예술은 창녀와 마찬가지로 항상 화장을 하고 언제든지 매매할 수 있으며 창녀처럼 사람을 유혹하고 파멸시키며 언제든지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창작행위를 하느니 차라리 구걸하는 편이 낫다는 톨스토이의 저 엄정한 예술론이 현재도 유효하고 공감을 얻을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박대성은 톨스토이에게 깊이 공감한다. 언젠가 톨스토이처럼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훌훌 떠나는 게 온당한 길이라 여긴다. 그는 그림으로 절대에 이르고자 한다. 눈뜨면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삶이 승려나 신부의 길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믿는다. 딱히 예술 엄숙주의자여서라기보다 진지하게 한 가지에 매달리는 세월이 쌓여가면 인간의 길은 결국은 구도에 이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장모님의 기도
그는 가족을 서울에 두고 경주에 홀로 산다. 부인 정미연도 화가고 두 딸 정련과 아련도 미술 관련 일을 한다. 딸들은 의도적으로 유년기는 시골에서, 청년기는 큰물인 미국에서 키웠다. 머잖아 네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전시회를 기획 중이다. 아내와는 각자 자기 그림에 몰입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며 독립적으로 생활할 것을 결의했다. 내가 가던 날은 마침 부인 정미연이 경주에 내려온 날이었다. 소설가 이문열 선생 내외도 불편당에 들렀다. 그는 아내더러 “이 사람은 천부적으로 감각이 빼어난 작가예요. 난 이 사람을 한 사람의 화가로 생각하지 한 번도 내 수발이나 들어주는 마누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라고 했다.
예술가에게 홀로라는 건 필수다. 그림은 결국 홀로 하는 작업이고 자신과의 싸움이 관건이란 것을 잘 알기에 서로의 생활을 존중한다. 나는 이번에 박대성의 아내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을 예술가로서 존경하고 지지하는 아내를 보는 것은 아름다웠다. 둘의 혼인은 쉽지 않았다. 열 살이나 나이차가 났고 신체조건이 특별했으므로. 오라버니들은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딱 한마디만 물으셨다.
“니가 그 사람을 감싸안을 자신이 있느냐.”
정미연은 남편에게 혼인 조건 세 가지를 내걸었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 것, 평생 그림을 그리게 해줄 것, 자식을 낳지 않을 것.
세 번째 조건은 첫아이 정련이가 들어서면서 저절로 깨졌고 나머지 둘은 확실하게 지켜졌다. 그 어머니는 박 서방이 세계적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천주님께 기도했다. 이제와 짚어보면 그 기도는 마침내 이뤄진 것 같다. 두어 해 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세안 뮤지엄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를 찾느라 고심 중이었다.
“큐레이터 백금자씨가 평론가와 애호가 30여 명을 이끌고 한국에 왔어요. 물망에 오른 작가들의 작업실을 찾아다니며 작품도 보고 작업하는 모습도 보는데 경주 우리 영감한테 찾아온 겁니다. 그들이 불국사, 법열, 현율 같은 그림을 보더니 일제히 기립 박수를 하더군요. 긴장감에 숨이 막히고 가장 앞서가는 현재 추상이라고 감탄했어요.”
1949년 어느 여름밤
예정에 없이 한꺼번에 대작을 네 점이나 사갔다.
“지난해 미국에 들른 김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그림을 보고 왔어요. 거대한 벽면마다 영감 그림이 단 한 점씩 걸려 있는데…그 스케일과 디테일에 눈물이 흐르데요. 정작 본인은 덤덤해 보였지만 나로서는 그간의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그의 어린 날 체험을 짚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박대성 도록에 실린, 오랜 친구 이문열의 글로 그의 유년을 잠깐 짚어보기로 한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이던 1949년 여름의 어느 끔찍한 밤이다. 설익은 이념의 선동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와 잠자던 어린아이의 부모를 살해하고 다섯 살 어린아이에게까지 낫을 휘둘렀다. 낫에 찍혀 왼손을 잃고 아픔과 공포에 질려 밤길을 달리던 그 어린아이는 고향 개울가에 처박혀 빈사의 상태로 밤을 지새운 뒤에 친지에 의해 다음날 구조된다. 가해자는 고향 부근의 빨치산 야산대였고 양친이 처형된 죄목은 반동지주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겨우 다섯 살 때의 일이라 많은 것이 후문으로 결합된 기억일 테지만 그날 밤 그 아이가 경험했던 충격과 경악, 그 소스라침과 까무러침은 어린 영혼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그 뒤 고아로서 그것도 중요한 신체적 결손을 지닌 채 예술가로서의 삶을 결의할 때 그 흔적들은 어떤 작용을 했을까. 그때부터 소평 화백의 그림에서 그 밤이 남긴 흔적을 훔쳐보는 일이 버릇이 되었다….”
아내 정미연도 화가이고 두 딸도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한다. 이들 부부는 홀로됨이 필수인 작품 작업을 위해 독립적으로 생활한다.
“집 근처가 공암인데 다들 ‘제2금강산’이라고 불렀어요. 사람이 태어난 땅이란 건 굉장히 중요해, 지수화풍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 핵이거든. 고향이 어디냐를 따지는 것도 무슨 정치적으로 편 가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땅의 지수화풍을 짚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되니 그러는 거지.
땅 중에 최고가 경주야. 남산 위의 저 소나무 할 때 남산이 서울 남산인 줄 알지. 그거 경주 남산이거든. 가장 해저가 깊은 바다도 여기 경주 땅 아래 있대요. 토함산은 육산이야. 바다에서 오는 센 바람을 토함산 흙이 다시 한번 맑게 걸러서 경주에 부려놓지. 그러니 저런 소나무가 자라잖아.”
그렇게 경주와 청도를 섞어 말해버리지만 태어난 땅과 사는 땅의 바람과 물이, 그에게 좋은 에너지를 충만케 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열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렸다. 아니 세 살 위 누나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다섯 살난 그는 네모난 공책을 처음 봤다. 누나 공책에 뭔가 그림을 그렸다.
“형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어. 내가 그려놓은 걸 보더니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해요. 그때부터 자꾸 그려댄 건지도 모르지. 어려서 칭찬하는 것이 아이 장래에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거라고.”
청도 운문면에서 금천중학을 졸업했다(박대성은 지금 그 학교에서 가장 출세한 동창이 됐다, 하하). 정규 미술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 정해진 선생은 없었다. 대신 널린 게 선생이었다. 혼자 그림 그릴 때는 개자원화전(介子園畵傳·개자원은 청나라 강희제 때의 부호이자 미술애호가인 이어(李漁)의 별장이며, 개자원화전은 그가 펴낸 동양화 화본집이다)이 선생이었고, 하늘에 도는 구름, 꽃 지고 잎 피는 나무, 아침이면 함뿍 젖는 바윗돌이 다 그의 스승이 되어줬다.
열여덟에 부산으로 갔다. 친척이 화가 한 사람을 소개해줬다. 당시는 직업화가가 따로 없고 그림이라면 주로 초상화를 그려서 먹고 사는 일이었다. 처음엔 신기했지만 곧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걸 알자 부산을 떠났다. 형제들은 7남매의 막내이고 몸도 불편한 그에게 어떻게든 먹고 살길을 찾아주려 애썼다. 도청에 임시직으로 취직시켜주겠다, 갹출해서 가게를 하나 내주겠다 등등의 권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제안에 그는 드세게 맞섰다. 취직을 강권하면, 가게를 강요하면 자살해버리겠다고 버텼다.
63빌딩의 ‘미친 갈대’
“내가 좀 우툴받았지. 먹고 살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건 내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어. 어찌 됐건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부산을 떠나 대구로 갔다. 죽으나 사나 그림을 그렸다. 공모전에 당선도 되고 지역사회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됐다. 앞서 말했듯 국전에 내리 여덟 번을 입선했다. 당시의 국전 입선은 총 22명밖에 뽑지 않아 가히 하늘의 별따기였다. 화가 주경 선생이 박대성이 누군지 보려고 일부러 찾아온 적도 있고, 시인 구상 선생도 가끔 들러 격려해줬다.
아내 정미연에게 미리 듣기를 “혼인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가 대학 총장부터 역전 넝마주이까지 남편 될 사람의 친구 수와 폭이 하도 넓은 걸 보고 뭐가 되도 될 사람이란 감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20대 적에도 60대와 스스럼없이 교우했다. 친한 사람 중에 영남대학 이종우 교수가 있고, 그가 다리를 놓아줘 1977년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다.
“날짜를 잊지도 않아. 11월17일인데 김포엔 눈이 펑펑 내려요. 난생 처음 해외에 나간다고 오버코트를 새로 사 입었지. 아무도 대만은 날씨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거든. 타이베이에 내리니 38℃야. 풍경이 확 다르더라고. 열대식물의 넓적넓적한 이파리를 보고 눈이 확 돌아가데.”
낯선 풍경을 미친 듯이 화폭에 옮겼다. 1년 뒤 대만 공작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전시회에 대만대학 미대 학장인 양우명이 손자를 안고 구경을 왔다가 한국에서 온 젊은 화가의 솜씨에 경악을 한다. 그는 신문에 박대성을 이렇게 평한다.
“우리는 고법에 너무 얽매여 새로운 법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이 청년은 전혀 새로운 화풍으로 우리 풍경을 그린다. 그렇다고 화법을 벗어나지도 않는다.”
대만에 머물러달라는 간청을 뿌리치고 그는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온다. 대만신문을 본 매일신문이 개관기념전으로 그를 초청한 것이다. 돌아온 이듬해 정미연과 혼인한다. 살림을 차린 서울 우이동 18평 집은 천장 높이가 180㎝이었다. 높이 180㎝의 ‘상림’으로 혼인 이듬해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는다. 그 무렵 젊은 부부는 새로 생긴 호암갤러리 앞을 버스로 지나며 장난처럼 이렇게 얘기한다.
아내 : “죽기 전에 당신도 이런 데서 전시회 한번 열었으면….”
남편 : “꿈도 야무지다. 30평짜리 전시장이라면 몰라도 650평 공간을 무슨 수로 채우노?”
정확히 3년 뒤 호암갤러리의 초청을 받는다.
“첫 전시에 홍대냐, 서울대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이도저도 아닌 나한테 차례가 오는 경우가 많았지. 중앙미전 출신에게 주자는 이병철 회장의 뜻도 있었고.”
처음엔 거절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박 대통령도 43세에 혁명에 성공했고 케네디도 43세에 대통령이 됐는데 못할 게 뭐냐?”고 핀잔했다. 정말 못할 게 뭐냐 싶었다.
그 무렵 팔당에 살았다. 친구 강대철의 작업실을 빌려 펄펄 날뛰면서 작업했다. 정미연은 바가지에 물감을 타서 팬티만 입은 남편 곁을 따라다녔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스케치했어요. 일출봉이 보고 싶다면 그날 밤 안으로 제주도로 날아가고.”
어느 날 일출봉으로 갔지만 비바람이 심해 스케치북을 펼 수도 없었다.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천지가 맞붙어버린 듯한 공간에서 사람 키 몇 배가 되는 갈대가 정신없이 휘청거리는 것을 봤다.
“하늘이 도운 거지. 그 신명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어.”
그 미친 갈대는 나중에 63빌딩 로비에 걸렸다. 그 한 해 동안 1000호 넘는 그림을 수십점 그렸다. 호암미술관 전시는 대성공이었고 그는 가장 잘나가는 화가로 화단에 이름을 올린다.
대나무 정자
삼릉은 이상한 황금빛을 띠며 시간성 저 너머에서 평화로웠고, 삼릉 앞 소나무는 인간과 자연의 분별을 지우면서 우뚝했다.
삼릉 소나무는 사진가 배병우가 사진으로 찍어 이미 세계인의 심금을 두드려놓은 바로 그 둥치와 껍질과 곡선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었다. 그 삼릉 소나무밭을 지나 다다른 박대성의 집은 지난 봄날, 300년 묵은 매화나무 꽃 주저리 뒤쪽에서 새로 정자 하나를 출산하고 있었다. 자그만 정자였다.
그러나 균형이나 어울림에서 그 작은 집은 방금 지나온 소나무 숲처럼 완벽했다. 나는 숨이 막혔다. 그 정자의 이름은 ‘묵은당(墨隱堂)’이었고 묵은당은 죽루(竹樓)였다. 대나무로 만든 정자를 난 일찍이 어디서도 본 적 없다. 그건 박대성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종이 위에 스케치해서 만들어낸 현대의 정자였다. 수백년 묵은 노송 아래 대나무 이파리와 함께 흔들리는 자그만 정자의 안정감과 소슬함, 그건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누마루가 아니었다. 1000년 묵은 금강송 아래 이에 조금도 꿀리지 않는 새집을 지을 줄 아는 안목이 바로 화가의 눈이었다.
“조선의 궁과 후원을 설계한 것도 다 화공의 솜씨였어.”
묵은당은 푸른 왕대 기둥에 골기와와 맞배지붕이 이어진 정자다. 두 평 안쪽의 누마루를 가졌고, 천장도 바닥도 다 대나무다. 그러나 대(竹)만으론 2t이나 되는 지붕의 하중을 버틸 수가 없으니 대나무 안에다 스틸을 넣어 골조를 세웠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틀리다. 스틸 골조로 뼈대를 세운 후에 쇠의 꼴을 감추려고 겉에다 정교하게 대나무를 둥글게 말아 감쌌다는 편이 옳겠다. 언뜻 보면 대나무만으로 기와와 흙의 하중을 지탱하는 듯하지만, 실은 현대적인 철근이 유연한 골기와를 떠받치고 있다. 그래서 공사도 간편했고, 수백년이 지나도 끄떡없을 만큼 튼실해졌다.
묵은당은 그의 너른 화실에서 내다보이는 정자다. 물론 누마루에 올라앉아 눈앞의 댓잎과 솔바람 소리를 오관으로 느끼는 것이 정자의 효용이겠지만 저만치 세워놓고 바라보는 정자 또한 올라앉아서 감각하는 정자에 결코 못지않다는 데 나는 쾌히 동의했다.
“뜰은 뒤뜰이 제 맛이지. 앞뜰이야 지나가는 사람을 위한 싱거운 거고, 주인이 즐기는 건 당연히 뒤뜰이거든. 창덕궁 후원을 보라고. 조선집의 참맛은 문 열어놓고 가만히 앉아서 내다보는 뒤뜰이지. 저 정자는 여기 앉아 이렇게 내다보려고 짓는 거야.”
“글씨는 예술의 정수”
과연 그렇고 말고다. 그러고 보니 옛집엔 아무리 작아도 뒤뜰이 필수였다. 건축가 승효상을 만났을 때 내가 물었다.
“좋은 집이 뭔지 간단하게 정의해보세요.”
그는 단숨에 대답했다.
“생각하게 만드는 집이지요.”
묵은당을 보니 그 말이 절로 떠올랐다. 뒤뜰을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전래하던 온갖 미덕을 놓쳐버린 건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깃들었던 통찰과 미감과 천품을 뒤뜰과 함께 잃어버린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뒤뜰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단출하고 고요한 짜임새, 텅 비움, 과하지 않은 식물과 돌, 그 위로 지나가는 바람과 비와 어둠, 자나깨나 그걸 내다보며 사는 이의 심성이 경박하거나 단소할 수 있을까.
솔과 대와 정자를 내다보면서 박대성은 예순이 썩 넘은 요즘도 하루 두 시간 이상 글씨를 쓴다.
“글씨 쓰는 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워밍업이거든. 서법을 익혀야 그림이 가능하다고. 그림은 붓을 어떻게 운용, 장악하는가에 달렸고 붓을 장악하자면 서법을 먼저 익혀야지. 흔히 시서화라고 하잖아? 그게 뜻 없이 하는 말이 아니거든. 시를 익혀야 서가 나오고 서를 익혀야 화에 이를 수 있다고. 아, 심지어 골프도 매일 연습하지 않으면 감각이 둔해진다는데 붓이야 더 말할 나위 있나. 하루도 붓을 놓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는 박대성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나는, 동그랗게 뭉쳐져서 움직이는 근육 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흡사 골프공을 집어넣은 것 같다. 골프공만한 크기로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근육, 벼루 셋을 바닥낸 서예가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손아귀에 골프공 같은 근육이 생긴 사람은 처음이다.
“서예는 최고의 회화야. 그중에서도 최고는 초서와 예서지. 이왕 하려면 제일 좋은 것을 하는 거지 뭐.”
박대성이 묵은당을 내다보며 날마다 2시간 이상 연습하는 글씨의 교본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서첩이다. 마오쩌둥의 초서와 추사의 예서! 그걸 20년 넘게 날마다 써왔다. 그러면서 필법에 대해 나름의 견해와 방법을 터득했다. 마오쩌둥이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필이란 것을 나는 그날 경주에서 알았다.
“중국 서예사에서 마오쩌둥을 넘어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걸. 이봐. 얼마나 힘이 있어? 얼마나 시원하게 써 젖혔어.”
과연 시원하다. 글씨라기보다 그림이다. 그림 중에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추상이다.
“암, 조형의 최고가 서예지. 조형감각을 익히고 공간 운용을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글씨를 써야 해. 내공을 기르는 데도 글씨를 써야 해. 배추장사를 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요량이 있는 사람이라면 글씨를 써야 해. 글씨의 힘을 알려거든 획을 한번 따라 써봐. 따라 쓰면 어떤 기세로 어떤 심정으로 붓을 다뤘는지 금방 느낄 수 있거든.”
호기심을 버릴 수 없는 나는 붓을 잡고 마오쩌둥의 글씨를 따라 써본다. 따라 하기 어렵다. 과연 획의 움직임 속에서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던 것들이 느껴진다.
“마오쩌둥이 혁명을 한 것은 순전히 글씨의 힘이야. 우임이란 서예가와 중국 서예계에서 쌍벽을 이뤘거든. 우임은 장제스 도망길에 따라가버렸지.”
추사를 때려잡자!
그가 붓을 잡는 자세는 독특하다. 종이위에 90°로 세우되 엄지와 검지로 붓대를 당기고 약지로 붓대를 민다. 이런 지필법은 손아귀에 말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간다. 붓으로 종이 위에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크기의 칼로 나무를 파내는 형국이다.
“한 스님을 만났는데 고려불화를 그릴 때는 붓을 그렇게 잡았다는 거야. 그렇게 붓을 잡으면 팔만대장경 수만자를 써도 한 점 한 획 틀린 글자가 나올 수 없다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느낌이 팍 오데. 온 몸과 정신을 붓대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는 동작이지. 이렇게 잡고 붓을 운용할 수만 있으면 그때는 바위덩어리라도 파낼 수 있는 힘이 붓 안에서 나오는 거지.”
그렇게 붓을 잡으니 무명지 둘째마디 바깥 쪽에 호두알만한 혹이 생기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골프공 같은 근육이 생길 만하겠다. 그는 이야기 도중에도 쉬지 않고 글씨를 연습했다. 중국 여행길에 일부러 마오쩌둥 고향 창사(長沙)에 들른 얘기도 한다. 오석에다 마오쩌둥의 글을 새겼는데 가슴이 벌렁거려 자세히 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와, 참말로 호기가 있데. 천하 명필이데. 앞으로 1000년 안에 그런 명필이 또 나올까 몰라. 우리는 이제 몸으로 보는 감각이 있어 보기만 하면 척 알지.”
이런 식의 평면비교를 해버릴 수야 없겠지만 마오쩌둥 글씨가 암만 좋다 해도 추사에 비하면 어림없다. 추사를 그는 지절치도록(‘지절치도록!’ 이 경상도 사투리는 이후 박대성과 늘 한덩어리로 떠오른다. 표준말 ‘진저리쳐지도록’보다 훨씬 사무치는 격정이 느껴져 실제로 몸 안에 슬쩍 진저리가 지나가게 만든다) 좋아한다.
그렇게 좋았으니 한 시절 추사 글씨를 맹렬하게 모은 적이 있다. 한 50점 이상 모았다. 박 아무개가 비공개의 추사 명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도 났다. 그런데 어느 때 집을 짓느라고 그걸 모조리 남에게 넘겨버렸다.
“추사를 남에게 넘기고 나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어. 밤에 잠이 안 와. 그때 딱 결심했지. 추사를 한번 때려잡아보자. 추사도 결국 인간이 아니겠나. 따라가보지 못하란 법이 없지 않으냐.”
그는 한번 목표를 정해놓으면 앉은 자리에서 샘이 솟도록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눈만 뜨면 추사를 따라 써댔다. 잠자리에 들면 이불깃, 차를 타면 앞좌석 등받이, 남들과 이야기할 때면 왼손 엄지손톱 위에 끊임없이 글씨를 쓰고 또 썼다. 근기는 그의 힘이었다. 추사를 때려잡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매달렸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羅漢)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였다. 필사적으로 글씨를 썼다. 박대성이 추사에 미쳤다는 소문이 돌자 어떤 사람이 추사의 서론과 화론을 적어놓은 ‘우일동합기(又一東閤記)’라는 책을 구해다줬다. 내로라는 추사 연구자들도 본 적 없다는 귀한 책이었다. 그는 우일동합기를 한자 한자 짚어가다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경험을 한다.
‘난경지세 옹치지규’
“‘난경지세 옹치지규’라는 말이었어. 갑자기 전기가 팍 오는 것 같더라고. 순식간에 깨달음을 얻은 거지. 그 후부터 글씨 쓰는 법을 제대로 알게 된 거야. 난은 황제를 상징하는 큰 새인데 그 새가 온몸을 부르르 떠는 모양으로, 옹은 머리에 난 오래 곪은 종기인데 그 종기가 한순간에 살 속을 파고드는 기세로 붓을 움직이라는 것이지. 추사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상황을 묘사해가면서 필법을 가르쳤더라고.”
난경지세 옹치지규를 알고 난 뒤 추사 글씨를 보면 그 힘이 실체적으로 느껴졌다. 글씨 앞에서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현판 하나를 쓰고 사나흘을 앓아눕는다는 말도 확실히 알게 됐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이젠 추사를 가졌다 없앤 것을 애통해하지 않는다. 덤덤해졌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굳이 원한다면 세한도도 강산무진도 추사와 한 획 한 호흡 다르지 않게 방작(倣作)할 수 있다. 부러 세한도를 그려 걸어놨더니 어떤 평론가가 와서 말했다. 국보를 이런 데 걸어두면 위험하지 않느냐고. 그 후로 추사에 큰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깨쳐가는 사람이었다.
“예술이 사기라고? 나는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한 것이 뭔 소린지 모르진 않지만 일반인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거 아냐. 예술은 사기의 반대지. 한 치도 사기여서는 안 되는 게 예술이지.”
한 치도 사기 치지 않기 위해 그는 요즘도 날마다 반복해서 글씨를 쓴다. 글씨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한 워밍업이다. 삼릉으로 향한 통창으로 신라 적 소나무를 내다보며 시공을 뛰어넘는 눈을 뜨고, 그는 기운차고 자유로운 마오쩌둥의 초서를 쓴다. 힘이 안으로 응축되어 고요하기 짝이 없는 추사의 예서를 쓴다. 추사를 말할 때 그의 음성은 열정으로 들뜬다.
“먹은 인류 태동의 정신이라고도 하지만 추사는 ‘먹은 문학이다’라고 했어. 추사만 생각하면 나는 하나도 외롭지 않아. 온갖 설움이 일시에 상쇄돼! 한인으로서 강대국 중국에서 추사만큼 대접받은 사람은 역사상 없다고. 몰라 신라의 최치원은 어땠는지….추사가 얼굴이 살짝 얽었었나 봐요. 22세에 연경에 가서 일흔 살 난 옹방강을 만났어. 옹방강이 나와봤더니 조선서 온 젊은이 얼굴에 서광이 돌거든. 그 자리에서 당장 자기 아들과 의형제를 맺게 해버려. 그래놓고 죽으면서 유언을 해. 이 책과 글씨들을 조선의 추사에게 전하라고. 나중에 옹방강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소바리로 세 바리나 싣고 추사를 찾아와. 장엄하잖아. 남의 나라 청년에게 유품을 남기는 옹방강도, 그걸 싸들고 조선까지 먼 길을 오는 아들도. 제주도 귀양에서 추사는 이웃에 병이 나면 한약을 처방해줬대. 추사의 명성이 중국까지 자자하니 소문 듣고 그 처방전을 받으려고 중국에서들 몰려왔다지. 약이 아니라 추사 글씨가 쓰인 처방전을 받으려고.”
그러나 이제 그는 마오쩌둥에서도 추사에서도 벗어났다. 소산의 자재로운 경지를 이미 획득했다. 소산체라고 불러도 좋은 한글 글씨체를 개발(‘개발’이란 말의 천박함이여. 그 체는 따로 개발한 게 아니라 수십년 글씨를 써온 그의 몸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라는 말이 알맞다)했고, 그 글씨를 자주 그림의 바탕화면으로 놓기를 좋아한다.
“난 운명이란 말을 믿지 않아. 믿는 건 기도의 힘이지. 뭐든 저절로 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지금 내게 온 것은 그게 뭐든 애타게 찾고 구하니까 온 것이지. 그렇게 찾아 헤매는데 하늘이라고 안 주시고 배기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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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맹렬정진의 현장에서 나는 벅찬 마음으로 묵은당을 내다본다. ‘묵은’은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먹이 숨은’이기도 하고 ‘먹 속으로 숨는’이기도 하다. 세상을 다 버리고 먹 안으로 들어간다는 적극적인 결의도 엿보인다.
여든세 살에 집을 나와 낯선 역에서 생을 마감한, 최후까지 깨어 있는 영혼이기를 택한 톨스토이의 언어가 줄곧 그의 곁을 지킨다. 일찍 양친을 여읜 것도, 육식을 끊은 것도, 넉넉한 환경에서도 애써 자신을 불편 속에 내모는 것도 그는 톨스토이를 닮았다. 경주에 김대성에서 추사로, 다시 마오쩌둥과 톨스토이로 이어지는 고독하고 굳센 길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는 그림으로 구도한다. 전통을 현대로 변용하고 문화와 역사를 혼합한다. 그는 남산 아래 크게 솟아오른(大成) 또 다른 산봉우리(小山)다. 그 산에 묵향 그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