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을 밀어낸다’는 고사성어는 이제 그 의미를 잃었다. 싼샤공청(三峽工程 : 삼협댐 건설공사)으로 충칭(重慶)에서 이창(宜昌)에 이르는 창강(長江) 물길은 앞뒤 구분없이 소용돌이치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댐공사로 기록되는 이 댐은 중국 역사에서 치수에 성공한 우왕(禹王)의 업적에 버금가는 일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가져올 것인가.
- 4차례에 걸친 현장 답사를 통해 싼샤댐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해 본다.
싼도우핑에 세워진 싼샤댐 전경. 사진은 물을 채우기 이전의 모습으로, 물을 채운 후에는 이처럼 맑은 하늘을 보기 어려워졌다.
필자는 용머리 배 위로 올랐다. 쏜살같이 달리는 배 주변으로 스치는 풍경은 1년 만에 너무나 바뀌었다. 아무도 살지 않던 산 위에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고, 아래 도시들은 물이 차면서 차례차례 없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났다. 싼샤댐은 중국에 무엇을 가져다줄까.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신화시대에 홍수는 하늘이 인간을 벌하는 대표적인 수단이었다. 위안커(袁珂)가 정리한 ‘중국신화전설’의 앞부분에 나오는 인물은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에 해당되는 ‘황제’다. 하지만 중반부로 넘어가면 황제에 버금가는 인물로 우왕(禹王)이 등장한다. 그가 치수의 왕이기 때문이다.
창강이나 황허(黃河)는 상하류의 고도차가 거의 없는 강이다. 때문에 태평성대로 대표되는 요순임금이라고 할지라도 홍수를 피하기 위해 수많은 지역을 전전해야 했다. 이런 하늘의 권위에 도전한 첫 인물은 곤(툠)이다. 그는 천제에게서 식양(息壤)이라는 법보(法寶)를 훔쳐서 치수를 추진했다. 하지만 곤은 치수에 실패했고, 그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바로 그 곤의 옆구리에서 우(禹)가 태어난다.
우왕은 중국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존재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인류 문명의 기원이다. 중국인들에게 치수는 중국문명의 기원이다. 우왕은 운화부인에게서 치수의 비법이 적혀 있는 책을 받았다. 그는 또한 스스로 곰이 되어 물길을 트는 방법으로 치수에 성공한다.
CCTV의 흥분된 물막이 중계
싼샤는 현대판 신화다. 2003년 6월1일 오전 9시 싼샤댐은 물 채우기에 들어갔다. 댐 안으로 초당 1만2000㎥씩 들어오는 물 가운데 5040㎥만 댐 밖으로 흘려보내, 댐에 서서히 물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창강의 물길은 순식간에 댐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고, 오후 2시 댐 안쪽 수위는 107.08m까지 올라갔다.
중국인들에겐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 장면을 보도하던 CCTV 기자는 자못 흥분하며, “싼샤댐은 수대에 걸쳐 분투한 중화민족의 성과가 농축된 것입니다. 부흥하는 민족의 미래를 증명합니다”라고 말했다. 물은 상류로 서서히 올라가면서 전체적으로 수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후 댐 관리소측은 안전 점검을 위해 수위를 조절하면서 서서히 올려 예정대로 15일에는 135m에 도달했다. 이후 창강은 완만한 U자형에서 서서히 평행을 유지해 지금은 충칭지역의 수위도 상승시켰다. 이제 싼샤댐에서 충칭까지 662km의 물길은 강이 아닌 거대한 호수로 변모했다.
16일 5단계로 만들어진 갑문을 통과해 ‘선주(神州)호’가 처녀 통행에 성공했다. 댐 건설을 위해 200일 동안 단절시켰던 창강 수운을 재개시키는 신호탄인 셈이다. 이후 6월18일부터 7월21일까지 600여 척의 배가 싼샤를 무사히 통과했다.
7월10일 댐측은 발전 2호기를 72시간 동안 시험가동하는 데 성공했다. 물 채우기, 선박 통행, 발전기 가동 등 3대 핵심 기능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된 것이다. 싼샤댐 공사는 성공한 듯 보였다.
싼샤댐은 1992년 공사가 시작됐지만, 그 구상은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은 1894년 당시의 실세 리훙장(李泓章)에게 치수를 위해 수력발전을 권고하는 글을 올렸고, 1917년에는 구체적으로 싼샤댐 건설에 관한 안을 제시했다.
이런 쑨원의 권고는 국민정부를 이끌던 장제스(蔣퉿石)에게도 깊이 각인돼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932년 직접 싼샤를 측량해 관련 보고를 만든다. 당시의 후보지는 거저우바(葛洲?)나 황링먀오(黃陵廟) 등이었다. 1944년에는 미국 수리 전문가 싸판치(薩凡奇·John Lucian Sovage)가 싼샤댐의 개발안을 만들었지만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피신가면서 댐 건설은 유보됐다.
홍수는 이데올로기와 상관 없다.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한 1949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홍수가 발생하자 중국의 행정부 격인 국무원은 1950년 창강수리위원회(長江水利委員會)를 발족시켜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 1954년에 20세기 최대 홍수가 찾아왔다. 둥팅호(洞庭湖)에서 우한(武漢)에 이르는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새로운 치수책에 대한 갈증도 커져만 갔다.
먼저 지금의 싼샤댐 건설지역보다 조금 하류에 제방인 거저우바를 만들자는 대책이 수립되었고, 1958년에 마오쩌둥(毛澤東)이 그곳을 방문해 제방 작업을 점검했다. 하지만 거저우바에 착공한 것은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1970년 12월30일이었다.
1980년 덩샤오핑(鄧小平)은 충칭에서 지금의 싼샤댐 자리인 싼더우핑(三斗坪)까지 순례했다. 이후 싼샤댐의 가능성은 급속히 타진됐다. 1989년 7월 장쩌민(江澤民)이 싼더우핑을 방문했고 1990년 7월에 국무원 산하에 싼샤댐심사위원회(三峽工程審査委員會)가 만들어졌다.
1992년 4월3일 7차 중국 전인대에서 1767명 찬성, 177명 반대, 664명 기권으로 싼샤댐 건설 안건이 통과됐다. 싼샤댐 건설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리펑(李鵬)이다. 모스크바대학 수리공정과를 마친 그는 싼샤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는 1987년 공산당 최고 위치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르기가 무섭게 싼샤댐 건설을 강조했고, 그의 오랜 꿈은 1994년 12월14일 국무원 총리의 신분으로 싼샤댐 건설을 발표하면서 현실화됐다.
이후 기초공사인 1기공정(1994~97년)이 마무리됐다. 물 채우기와 더불어 70만㎾짜리 발전기가 2개 가동하는 2기공정(1998~2003)도 최근 완료됐다. 3기공정은 수몰지역 주민 40만명의 이주, 환경보호 및 재해방지 공사, 175m까지 수위 올리기 사업 등으로 구성되며 2009년 마무리된다. 사실상 2기공정이 싼샤댐 공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번에 마무리가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댐의 긍정적 부분만 외국에 공개
지금까지 싼샤 공정은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진행됐다. 또 그 성과들도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싼샤의 미래는 어떠할까. 필자가 싼샤댐 현장을 취재한 결과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중국 정부가 애써서 부정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댐의 긍정적인 부분만을 이웃 국가들과 세계에 공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싼샤댐은 이창에서 충칭까지 662km가 넘는 긴 ‘수조’를 가진 댐이지만 창강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다. 창강의 발원지는 칭하이(靑海)성 서부 고지대인 커커시리(可可稀立). 이곳에서 발원한 창강은 서서히 지류를 형성해, 칭하이에서는 퉁톈허(通天河)로 불린다. 하늘과 통하는 강이라는 의미를 담음으로써 신성함을 부여했다. 이 강은 쓰촨에서는 진사(金沙)강으로 불리다가, 충칭에서 자링(嘉陵)강을 만나 본격적인 세 불리기에 들어간다.
필자가 충칭을 처음 찾은 것은 1999년 겨울이었는데, 구두닦이들, 대나무 장대에 짐을 묶어 운반하는 운반노동자(搬運工)들, 구릉에 세워진 낡은 건물들로 상징되는 당시 충칭은 너무나도 가난한 도시라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충칭이 변모하기 직전의 풍경이었다. 충칭은 싼샤댐 건설로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준비하고 있었다. 졔팡바(解放?)나 사핑바(沙坪?) 등은 물론이고, 공항으로 가는 길목 주변은 급속한 개발을 앞두고 있다. 이후 매년 충칭이 변하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싼샤댐 건설 이후 충칭은 창강 물류의 핵심기지이면서 서부 대개발의 전초적 위치라는 양축이 맞물리는 곳이 됐다. 서부 대개발의 중심기지를 놓고, 청두(成都)와 경쟁하던 충칭은 자오톈먼(朝天門)이라는 부두 하나로 모든 것을 압도했다. 싼샤댐 이전엔 3000t급 배도 근근이 올라왔는데 댐 완성으로 수량이 풍부해지면서 1만t급까지 올라올 수 있게 됐다. 지난 6월 수위가 110m임에도 화물을 가득 실은 수십t짜리 트럭 스무 대 가량을 실은 배들이 거침없이 창강을 누비고 있었다.
싼샤댐의 건설 목적에서 물류 부분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후 홍콩과 맞붙은 광저우(廣州) 등 주장(珠江)을 우선적으로 개방했다. 이후 1990년대를 기점으로 상하이 등 창강 삼각주 지역이 개발되고,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베이징, 톈진 등 진허(津河)만까지 개방의 바람이 불었다.
이 결과 동부와 서부의 소득격차는 빠른 속도로 벌어졌다. 자연히 지역간 갈등이 발생했고, 호구(戶口)제도를 통해 농촌인구의 도시진입을 막던 정책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서부 대개발을 통해 지역 격차를 해소하는 한편 동남부에서 빚어지는 과잉 개발을 막으려 했다.
용주경기를 보러 나온 수몰지역 주민들
보통 싼샤 여행객들은 상류인 충칭의 자오톈먼 부두에서 배를 갈아탄다. 이곳이 상류여서 하류를 향할 경우 상하이에서 올라오는 것보다 3일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충칭에서 출발한 여행자들은 싼샤에 도달하기 전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는 펑두(豊都),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지어진 스바오싸이(石寶賽), 삼국지의 호걸 장비를 모신 장비사당(廟)을 지나게 된다. 펑두나 스바오싸이는 비교적 상류의 높은 지점에 위치해 있어 그 자리가 보존됐지만 장비사당은 수몰지역에 포함되어 고지대에 새롭게 터전을 잡았다.
장비 사당이 있는 윈양(云陽)에 조금 못미쳐 완저우(万州)가 있다. 충칭에서 완저우까지는 172km. 완저우 역시 싼샤댐으로 인해 도시 대부분이 물에 잠긴다. 그렇지만 싼샤댐은 완저우 부흥의 완벽한 기회다. 완저우가 충칭의 부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완저우를 활용하기 위해 두 가지 안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고속도로와 철도다. 완저우에서는 서부개발의 또 다른 거점인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으로 가기가 좋다. 충칭에서 기차로 시안을 갈 경우 다저우(達州)를 거치게 되는데 두 곳의 거리는 255km이며, 기차로 4시간 정도가 걸린다. 반면 완저우에서 다저우까지는 100km로 1시간 반이 걸릴 뿐이다. 거기에 충칭항의 정체 비용까지 생각한다면 완저우를 활용할 경우, 시간이나 비용면에서 큰 혜택을 볼 수 있다. 또 충칭에서 완저우까지는 지금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중이다.
완저우에서 119km를 더 오면 펑졔(奉節)에 닿는다. 펑졔는 싼샤의 시발점이다. 펑졔 역시 댐 건설로 인해 도시 전체가 고지대로 이동했다. 지난해 방문했을 때 막 철거가 시작된 건물은 이제 흔적도 없다. 옛 도시의 잔해엔 아직 물이 차지 않았다. 신도시 아래쪽으로는 땅이 물에 휩쓸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도시의 축대를 쌓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싼샤댐 건설로 인한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부측 발표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우선 수위상승으로 인한 지반침하가 직접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7월13일 새벽 펑졔와 펑두에서 지반침하로 인한 산사태로 1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반침하는 물 밑과 물 위에서 모두 진행되고 있다. 이번 사태는 펑졔 신도시 일부의 축대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것이다. 수위가 상승하면 도시 전체가 산사태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필자는 수위 110m의 상태에서 펑졔와 펑두를 방문했을 때, 임시로 마련된 간이 정박지의 제방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런 현상이 대규모로 벌어질 경우 완저우, 펑졔, 우산, 파둥, 즈구이의 신도시들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우려는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7월13일 싼샤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즈구이현 사전시(沙鎭溪)진에서 대형 산사태가 발생해 5명이 죽고, 19명이 실종됐다. 이번에 유실된 지역은 길이 1200m, 넓이 1000m에 이른다. 이곳은 싼샤와 3km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싼샤댐이 저수 지점에서 한참 떨어진 지반에도 치명적 영향을 주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댐 접경 시가지들의 위험은 더 클 수 밖에 없다. 대다수 신도시들은 수몰 전 지점보다 고도가 200m 높은 지점에 건설되었다. 그런데 이들 신도시들은 모두 지반보강작업도 없이 산을 깎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들은 경사가 보통 45도 이상으로 가파르다. 싼샤 주변 신도시들은 산사태와 지반침하라는 이중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강주변 지역의 유실로 인한 강바닥의 상승은 더 큰 문제다. 근본적으로는 황토를 머금은 창강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저수상태가 되어 황토가 바닥에 가라앉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싼샤댐의 시공자인 싼샤총공사(三峽總公司)는 이 문제를 그다지 심각하게 보지 않고 있다.
총공사 자료에 따르면 싼샤의 평균 유량은 4510억m3인데, 평균 모래 유입량은 5억2100만t이다. 따라서 모래나 진흙이 쌓이는 것은 자명한 이치인데, 총공사측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축청배혼(蓄淸排渾)’의 방법을 쓴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싼샤댐 하류의 물이 전체적으로 줄어 홍수의 위험이 없을 때, 댐에 물을 가득 채운 후 한꺼번에 방류해 수면 아래의 진흙도 물에 휩쓸려 보내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지난해 진흙이 쌓여 강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황허에서 사용되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적 효과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황허보다 유역이 훨씬 넓고 총길이 662km에 달하는 거대한 저수지인 창강에서도 이 방식이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 것이다. 만약 이 방식의 실효성이 떨어져 강바닥이 높아질 경우 싼샤댐의 기능은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홍수조절 기능 저하는 물론이고 수력 발전 등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펑졔에서 하류로 약간 내려오면 강의 왼편에 우뚝 솟은 바이티청(白帝城)이 있다. 바이티청은 싼샤의 첫머리인 취탕샤(瞿塘峽)의 시작이다. 바이티청은 산위에 세워진 자색(紫色) 건물군을 일컫는데, 그 기원은 서한(西漢) 말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쓰촨 지방에서 촉왕(蜀王)이 된 공손술은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그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우물에서 흰 용이 튀어나왔다. 이를 좋은 징조로 받아들인 공손술은 자신의 호를 백제라고 하고 성 이름도 백제성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곳의 역사를 더욱 안타깝게 한 이는 유비(劉備)다.
그는 청두를 수도로 촉한(蜀漢)을 세우고 황제가 된 후, 징저우(荊州)에서 조조(曹操)와 손권(孫權)의 협공을 받아 사망한 관우(關羽)의 복수를 위해 오(吳)나라 정벌을 지시한다. 하지만 장비(張飛)마저 부하 장달(張達)과 범강(范疆)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 유비는 결국 육손(陸遜)에게 대패한 후 223년 4월 바이티청에서 사망한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부탁하는데 이를 ‘유비탁고(劉備託孤)’라고 부른다. 바이티청엔 이러한 역사를 따서 ‘탁고당(託孤堂)’이 있다. 이곳은 또한 시인 두보가 전란을 피해서 남행할 때 머물렀던 곳이다.
부근 취탕샤는 싼샤에서도 가장 빼어난 절경지다. 8km 남짓의 비교적 짧은 협곡이지만 벼랑이 가팔라 인상적이다. 하류로 내려가면서 왼쪽은 츠쟈산(赤甲山), 오른쪽은 바이옌산(白鹽山)으로 불리는데, 마주보고 있는 산이지만 완연히 다른 빛깔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취탕샤의 절경이 끝나면 다시 밋밋하지만 창강 강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깊은 산속 마을에서 작은 뙈기밭을 일구기도 하고, 낮에는 우산으로 나와 배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한다.
싼샤 주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싼샤댐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존재다. 댐 건설로 싼샤 주변의 풍경이 손상돼 여행객이 줄면 일자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정부로부터 향후 3년간 생활보조를 약속받았지만 그들의 미래는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처지 같은데, 그 안개 문제가 다름아닌 현실로 나타났다. 싼샤댐에 물 채우기를 시작한 이후 강 주변 지역에 연무(煙霧)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이 채워지고 난 후 싼샤를 방문했을 때 그 전에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안개가 잔뜩 끼여 있었다. 이 안개는 이창에서 충칭에 이르는 전지역을 뒤덮었다. 안내하던 중국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자신도 이런 긴 안개는 처음이라며 당혹해했다. 중국정부는 싼샤댐이 생기면 더 많은 볼거리가 생긴다고 했지만 안개로 인해 경관이 훨씬 못해졌다는 말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안개로 인한 선박 전복사고도 잇따랐다. 지난 6월19일 펑두 부근 푸링(?陵)에서는 짙은 안개로 인해 여객선이 전복되는사고가 일어났다. 7월12일에도 배가 침몰했다. 7월14일에도 펑두에서 여객선이 전복됐다. 강폭이 넓어지는 등 배 운항 환경은 좋아졌지만, 안개 때문에 발생한 사고들이다.
이에 충칭시는 기상관측기구인 ‘천리안’을 올해 안에 설치키로 하는 등 대책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고를 줄이는 방법일 뿐 싼샤 주변의 안개를 제거하는 뾰족한 방안은 찾지 못하고 있다. 지독한 안개는 예상치 못한 자연의 복수인지도 모른다. 결국 여행자들이 싼샤를 선택할 이유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①싼샤댐 접경지인 굴원사. 댐에 물을 가둔 뒤로는 매일 짙은 안개가 끼여 뿌옇게 보인다. ②싼샤댐 주변 시랑샤. 협곡 중턱까지 물이 들어차면서 과거의 절경을 보여주진 못한다. ③싼샤 접경도시 펑졔. 윗부분이 신도시며 아랫부분은 구도시다. 신도시 축대의 안전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싼샤 주변의 경우 취탕샤는 물론이고 대부분 지역이 늘 짙은 안개에 덮여 있어 사진 촬영 자체가 쉽지 않았다. 거대한 협곡이 매력인 싼샤가 안개로 덮여있다면 의미가 없다. 상당수 문화재들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문화재도 복제되거나 인공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전과 같은 감흥을 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이곳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배를 운용해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은 싼샤댐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됐다. 20년째 샤오싼샤로 가는 배를 탔다는 한 남자는 조림사업장으로 직장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쿠이먼에서 시작된 취탕샤 등을 보면서 일반 배로 한 시간(쾌속정으로는 40분) 정도 가면 싼샤 여행의 중심도시 우산에 닿는다. 우산은 싼샤의 중간 부분인 우샤(巫峽)의 상류쪽 시작점이자, 샤오싼샤(小三峽) 및 샤오샤오싼샤(小小三峽)의 시작점이다. 우산을 더욱 정감 있게 하는 것은 갖가지 전설 때문이다.
중국 신화엔 우임금의 치수를 도운 운화부인(雲華夫人) 요희(瑤姬)가 몇 차례 등장한다. 그녀는 원래 황제(黃帝)와 경쟁하던 염제(炎帝)의 딸로, 시집갈 나이에 요절하자 염제가 이를 불쌍히 여겨 구름과 비의 신으로 삼았다. 그녀는 새벽이 되면 아름다운 구름으로 변해 골짜기를 오가고 밤이면 비로 변해서 산하에 애통함을 흩뿌리곤 했다. 그런 가운데 전국시대 말 초나라 회왕(懷王)이 이곳을 찾아든다. 회왕은 고당관에서 연회를 열고 즐기다가 잠시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와 말하기를 “저는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왕께서 고당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잠자리를 받들고자 왔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스스럼없이 운우의 정(雲雨之情)을 나누었다.
헤어질 무렵이 되자 그 여인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무산 남쪽의 험준한 곳에 살고 있는 여인이온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 아래에서 아침 저녁으로 당신을 그리워할 겁니다(妾在巫山之陽 高丘之阻 且爲朝雲 暮爲行雨 朝朝暮暮 陽臺之下: 송옥(宋玉) 고당부(高唐賦)중에서).” 말이 끝나자 여인은 자취를 감추었고, 왕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다음날 아침 왕이 무산 쪽을 바라보니 여인의 말대로 산봉우리에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우산을 사랑했던 요희가 지금 이곳을 본다면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을 것 같다. 바로 싼샤로 인한 급속한 오염 때문이다. 필자가 최근 그곳을 들렀을 때, 샤오싼샤로 불리는 다닝허(大寧河)의 맑은 강물은 썩어가고 있었다. 이미 거대한 위용을 갖춘 창강은 우산에서 지류 가운데 하나인 다닝허와 마주친다. 다닝허는 비교적 산세가 좋은 다바산(大巴山) 등에서 시작된 맑은 물이 모여서 만들어진 강물이다.
다닝허의 협곡은 싼샤의 협곡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샤오싼샤로 불린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줄을 매어 여행 배를 끌어올리던 셴푸(纖夫)들이 신비감을 자아내던 곳이다. 동력선이 발달하자 셴푸들은 물길이 깊지 않은 상류의 샤오샤오싼샤로 옮겨갔다. 그러나 싼샤댐의 건설로 샤오샤오싼샤까지 동력선이 들어가자 이들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필자가 들렀을 때, 다닝허는 창강과 만나기 10여 km 앞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누런 창강으로 흘러들던 다닝허의 맑은 물은 온데간데없고, 좁은 협곡에 정체되면서 썩어가는 것이었다. 샤오싼샤엔 강에서 180m 높이에 룽먼다챠오(龍門大橋) 다리가 있다. 그러나 싼샤 수위가 175m까지 올라 이 다리도 1년 안에 철거될 처지다. 중국 정부는 배의 통행을 위해 더 높은 곳에 다리를 건설하기로 했다. 수면이 급상승하므로 협곡의 아름다움도 당연히 그 빛을 잃는다. 더러는 여전히 위용 있는 산세를 자랑하겠지만, 수천년 동안 절벽에 길을 놓아 만든 짠다오(棧道), 팬더동굴(熊猫洞) 등 많은 곳이 물에 잠기게 된다.
물이 썩어가는 수질 문제가 싼샤댐 전체로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관계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싼샤댐은 그간 빠르게 흐르던 창강 물을 거대한 수조에 담아놓은 것과 같다. 기본적인 물의 흐름은 있지만 흐름이 미약해지거나 정체되면서 수질 오염의 문제를 낳는 것이다.
또 하나의 큰 골칫거리는 수몰지구에 남겨놓은 쓰레기들이 강물에 곧바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청두나 충칭 같은 인구 수천만의 대도시 하수가 강에 편입된다. 완저우, 펑졔, 우산 등 싼샤 주변도시의 생활하수가 유입된 창강이 과연 자정능력을 갖게 될 것인지도 문제다. 펑졔 등 각 도시들은 자체적으로 부유물 수거용 배를 띄워서 정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오염을 완벽히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쓰레기 안 치운 채 마을 수몰시켜
우산은 44km에 달하는 협곡인 우샤의 시작점이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요희의 전설이 있는 신녀봉이 있고, 제갈량이 비책을 숨겼다는 공명비(孔明碑)가 있다. 필자가 들렀을 때 이미 공명비는 수장되고 없었다. 사실상 우샤 하루 지역은 댐 만수위인 175m보다 낮은 지대라 고스란히 물에 잠기는 구간이다. 공명비는 물론이고,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의 고향 샹시(香溪)를 비롯해, 명 문장가 굴원(屈原)의 고향 즈구이 등 대부분의 지역이 물에 잠긴다. 120만명에 달하는 수몰지역 주민들은 이제 안후이나 광둥, 후난, 충칭 등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중구은 지역간 방언이 워낙 달라서 나이 든 이들은 낯선 도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싼샤댐이 완공되면서 타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 부근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싼샤댐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고향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싼샤의 여인들은 만만찮은 미모를 갖고 있다. 필자가 중국의 적지 않은 지역을 다녔지만 우샤, 샹시 등 싼샤지역만큼 여인들이 아름다운 곳을 보지 못했다.
우샤의 끝자락은 파둥이다. 파둥에서 시링샤(西陵峽)가 시작된다. 이곳에서 이창에 이르는 길에는 빙수바오졔샤(兵書寶劍峽)을 비롯해 칭탄(淸灘), 니우간마페이샤(牛肝馬肺峽), 쿵링탄(?灘) 등이 이어진다. 소의 간과 말의 폐를 닮아서 이름 붙여진 니우간마페이샤는 바위 자체를 분리해 위쪽으로 올리지만 나머지 지역은 수몰되어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굴원의 고향 즈구이에는 굴원을 기리는 사당이 아직 남아 있었다.
굴원 사당은 135m 수위에 잠기는데, 필자가 들렀을 때는 위태로운 모습으로 잠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수많은 이들이 모여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용주경기를 벌이던 광경이 떠올랐다. 굴원은 둥팅호의 남쪽인 위뤄(퓇羅)의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먹지 않게 하려고 배를 빨리 저어가며 대나무 잎으로 밥을 싼 종자(子)를 던졌다. 이것이 용주경기의 유래다. 굴원의 후손들은 부근 고지대로 이사하거나 마오핑(茅坪)에 만들어진 새로운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궁링탄을 지나면 거대한 위용을 ㄷ자랑하는 싼샤댐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은 호수의 광대합이다. 싼더우핑으로 불리던 이곳에 싼샤댐이 만들어진 것은 바로 2309m의 폭 때문이다. 이 호수의 우측으로는 여객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마오핑항이 있다. 과거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던 마오핑은 싼샤댐의 건설로 인해 완전히 변모했다. 마오핑의 위쪽에 상류 즈구이의 신도시가 건설됐기 때문이다.
물막이 후 강수량 급증, 홍수 빈발
싼샤댐 아래쪽에는 신도시가 완비되어 있다. 싼샤댐은 중국이 최근 가장 역점을 둔 대공사인 만큼 철저한 보안과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2009년 완공 때까지 투자비용은 2000억위안(약 30조원)으로,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필자가 이곳에 들렀을 때는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막바지였다. 싼샤지역 특별병원에서 혈액검사, X-레이, 의사 문진 등을 거친 후에야 진입이 허용됐다. 필자는 댐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댐 측면에 있는 바이허량(白鶴梁)이나 전망대에서 싼샤댐을 볼 수 있었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싼샤댐은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에서부터 전력부문, 댐 조절 부분, 갑문 시설로 나누어져 있다. 수력발전 부분의 경우 26대의 수력발전기가 건설되는데, 그중에 올해까지 2기가 정상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5단계로 된 2개의 갑문시설은 길이 280m, 넓이 34m, 최소수심 5m로 1만t급 배를 움직일 수 있다.
알몸으로 여행객을 실은 배를 끄는 인부들. 이 광경은 샤오샤오싼샤와 선눙시(神農溪)에 일부 남아 있었으나 댐 건설로 사라지게 됐다.
우왕의 치수 철학은 물을 트는 것이었다. 우왕에 앞서 물을 막는 방식으로 치수를 시도하던 곤은 물이 터지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고 죽임을 당했다. 이를 교훈 삼아 우왕은 물을 트는 방식으로 치수를 했던 것이다. 우왕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학자 위치우위(余秋雨)가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문화유산이라고 평한 쓰촨 두쟝옌(都江堰) 등 중국의 전통적 치수책은 물을 트는 방식이었다.
싼샤댐은 물을 막는 방식의 치수다. 창강의 중하류에는 지금 3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다. 만에 하나 싼샤댐이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도 중국이 싼샤댐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별다른 홍수방지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천 km에 이르는 창강의 강바닥을 판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댐을 통한 치수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393억m3에 달하는 저수량을 가지며, 홍수방지를 위해 221억5000m3를 가둘 수 있는 싼샤댐이 완공되면 창강의 홍수를 막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홍수가 사라질 것이라는 성급한 기대는 금물이다. 세계 최대의 댐이라는 싼샤댐도 창강의 치수에는 역부족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싼샤댐을 지난 물은 후난(湖南)과 후베이(湖北)의 중류에 형성된 거대한 호수군에 흘러든다.
올해부터 홍수가 없을 거라는 중국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싼샤댐의 존재를 비웃듯 올해 중국 홍수는 심각했다. 6월초 후난성의 남부인 샹강(湘江)에서 대규모 홍수가 발생해 수십명이 사망했다. 이 지역에 싼샤댐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샹강은 둥팅호로 흘러드는 지류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6월 말부터 창강과 황허의 중부에 쏟아진 비로 한 달 가량 홍수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두 강의 중류에는 화이허(淮河)가 있는데, 올 여름 홍수의 가장 큰 피해지역이 됐다. 필자는 7월초 홍수 상황을 보기 위해 안후이성 벙부(蚌埠)를 방문했다. 한 차례 홍수가 지나간 도시엔 침수돼 온통 흙탕물을 뒤집어쓴 지역이 남아 있었고, 평지보다 수 미터나 높은 제방 위를 넘실대며 흐르는 강물은 일촉측발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7월 중순에는 창강의 중상류 쪽에 폭우가 쏟아졌다. 쓰촨, 청두는 물론이고 충칭에서 싼샤에 이르는 지역도 물난리를 겪었다. 물론 이미 물을 채워 홍수 조절 기능을 한 싼샤댐으로 인해 피해가 줄어든 측면도 있겠지만, 올 여름 홍수는 싼샤댐이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홍수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전망을 낳기에 충분했다.
“담수 감소로 서해어장 황폐화”
싼샤댐은 세계 환경학자들의 주목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싼샤댐의 건설로 인해 우리나라 서해가 심각한 피해를 당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댐 공사로 인해 서해로 유입되는 수량이 줄어들면서 서해 해양 환경이 심각하게 나빠져 특히 꽃게, 갈치, 고등어 등의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서해로 들어오는 담수의 약 80%는 창강 물이다. 창강 물의 유입 감소는 서해의 오염물질 증가, 유기물질 감소, 염분 농도 증가, 수온 상승 등으로 이어져 해양 환경의 변화가 초래될 것으로 우려된다.
여름철 중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지역인 창강 중류 지방에 길이 662km의 거대한 호수를 만든 만큼 이로 인한 기상변화도 클거라는 예측도 나온다. 중국정부에선 여름에 기온이 5℃ 가량 떨어지고, 겨울에는 3℃ 정도 올라가는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환경변화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는 얘기도 있다.
긴 수증기 대는 중국 내륙으로 흐르는 비구름대를 막아 창강의 강수량을 급증시켜 오히려 홍수의 위험성을 증가시키고, 그렇지 않아도 강수량이 절대부족한 산시(陝西), 네이멍구(內蒙古) 등 서북부 지방의 강수량 부족을 가중시켜 이들 지역의 사막화가 빨라질 가능성도 많다는 것이다.
누구도 싼샤댐 프로젝트 성공을 확신할 수 없다. 신화시대 수신(水神) 공공(共工)은 우왕의 치수책에 화가 나 취푸(曲阜)를 물에 잠기게 해 수많은 사람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우왕은 수신 공공과 싸웠다. 당시 공공이 수천의 사람을 죽였다면 이제 싼샤댐은 수억 명의 명운을 좌우하고, 전지구적인 환경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인공 건조물이다.
샤오싼샤 숲속의 원숭이들은 어디로?
필자에게 가장 기억나는 창강의 단상은 쉬안화(許鞍華)의 영화 ‘남자사십(男人四十)’에 나온 창강의 풍경이다. ‘전통과 현대, 홍콩인의 미래에 대한 불안, 부유성(浮游性) 등을 가장 설득력 있게 형상화했다’(슈테판 크라머)는 평가를 받는 그녀의 전작 ‘여인사십(女人四十)’과 대조를 이룬 이 영화는 중년남자로 살아가는 삶의 갈등을 잘 풀어냈다.
영화에서 홍콩의 중(고등)학교 중국문학 교사인 린야오궈(林耀國·장쉐요우 분)는 존경하던 스승이 남겨둔 임신한 제자 원징(文靖·메이옌팡 분)과 가정을 이루며, 20년을 살아온 순수한 남자다. 그런 그 앞에 사라진 스승이 폐인이 되어 돌아오고, 학교에 소문날 만큼 자신을 좋아하는 여학생 차이란(彩藍·린자신 분)이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애정을 요구한다. 존경했던 스승이 남긴 자식과 여자까지 받아서 살면서 누차한 현실을 고적한 한시 구절에 파묻으며 지내온 린야오궈. 문득 다가온 불혹의 나이를 감당해야 하는 그는 어느날 차이란과 선전으로 가는 택시를 탄다.
이 영화에서는 린야오궈가 쓰는 비디오 교재를 통해 창강의 장관이 펼쳐진다. 린야오궈의 상상 속에 전개되는 창강의 유장한 모습을 배경으로 이백, 두보의 시가 낭송된다.
쉬안화가 창강을 영화의 전면에 넣은 것은 중국인들 가슴속에 있는 중국 정신이 창강에서 발원됐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족의 문화는 북방이 아닌 강남에서 태동했고, 이곳에서 시간의 때를 묻혔다. 그 가장 큰 흔적이 묻혀 있는 곳이 바로 창강인 것이다. 싼샤댐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 역사는 이제 적지 않이 훼손될 것이다. 샤오싼샤의 숲속을 헤매던 원숭이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