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기 몇 달 전 40대 사업가와 재혼설(?)
- 낙종한 기자들 집에 초대해 식사 대접
- ‘남편 애인’이 마담으로 있는 술집 찾아가 ‘행패’ 부리기도
- 술 취하면 누군가에게 전화해 하소연하는 버릇
- IMF 환란 때 자진해 ‘노 개런티’ 광고 찍어
- 드라마 상대 남자역 직접 섭외할 정도로 연기에 열성
- “일할 때 빼고는 늘 ‘불행하다’고 말해”
- “성민씨가 좋은 사람 만나 재혼하길 바란다”
‘국민 탤런트’에서 졸지에 사채업자로 둔갑해버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최진실은 그렇게 숨죽이며 울고 있었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큰아들의 한껏 즐거워도 모자랄 첫 가을 운동회. ‘저 아이가 최진실 아들이래’ ‘안재환한테 급전을 빌려줬다지’ 같은 학부형들의 수군거림을 견디기에 그녀는 너무 지치고 약해져 있었다. 경찰은 최진실의 방에서 그녀가 남긴 메모 일부를 찾아 공개했다. 책상 위 달력에서 발견된 메모에는 ‘나는 왕따, 외톨이.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다’ 따위의 세상을 원망하는 내용의 글귀가 발견됐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산 최진실이 41세로 일기를 마쳤다. 아직도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먼 길을 혼자 떠났다. 마치 ‘단칸방 최수제비’로 불리며 연예계에 처음 데뷔했을 때처럼. 그녀가 싸웠던 외로움과 연기 세계,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봤다.
이제 고인이 된 최진실이지만 불과 두 달 전까지 기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재혼 여부를 취재하고 있었다. 제보자에 따르면 상대는 사업가로 40대 초반의 준수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고, 그밖에는 전혀 알려진 게 없었다. 제보한 연예계 관계자는 두 사람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고급 음식점과 남산 하얏트 호텔 커피숍에서 두 번 봤다고 말했다. 두 사람 외에 다른 일행이 없었고, 분위기가 데이트하는 사람들처럼 화기애애했다는 게 둘을 연인으로 판단한 근거라고 했다.
“내가 요즘 연애한대요? ”
직감상 ‘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수첩에 메모해두지는 않았다. 최진실의 넓은 대인관계와 이런저런 사업 제안을 하는 사람들과 호텔 커피숍에서 자주 만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제보자가 가요계 관계자라 연기 쪽 인맥에 밝지 못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최진실은 20년 넘게 연기자로 일하면서 방송 관계자들과 두루 친했을 만큼 오지랖이 넓었고, 최근엔 MBC TV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시즌2 촬영 준비 때문에 마음이 바쁜 상태였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제보를 받고 취재하다 괜한 망신만 당한 적도 있다. 최진실을 만나 어렵사리 마음속 궁금증을 털어놓자 최진실은 하하 웃으며 “내가 요즘 연애한대요? 증말 못살겠다” 하며 박장대소했다. 그녀는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친척 오빠인데 간만에 저녁이나 먹자고 해서 만난 것”이라면서 기자를 안쓰럽다는 듯 쳐다봤다. 그는 이어 “그런 쓸데없는 것만 알아보지 말고 주변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나 해주라”면서 깔깔 웃었다. 기자는 “바쁜데 죄송하게 됐다”면서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최진실은 오히려 “그렇게 당사자한테 확인하려는 자세는 고맙다”면서 덕담을 건네는 여유를 보였다.
이번 제보를 덥석 물지 않은 건 자칫 그 같은 결례를 또 한 번 범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최진실이 이번엔 덕담(?) 대신 파파라치 쳐다보듯 혐오감을 드러내면 어쩌지, 하는 괜한 방어기제가 발동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성민도 재혼해서 잘사는데 당신도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만난다면 기자 직분을 떠나 축하해줄 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쳤다.
최진실과 하얏트호텔. 묘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2000년 야구선수 조성민과 결혼발표 기자회견을 한 곳이 바로 이 호텔이다. 기자도 당시 그 현장에 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 매체가 많아 웬만한 기자회견장에 200~300명 모이는 게 다반사이지만 당시엔 벌떼처럼 모인 취재진의 규모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지역 케이블 채널 로고가 찍힌 ENG 카메라까지 등장한 탓에 기자는 맨 뒤에서 까치발을 서가며 볼펜을 굴려야 했다.
경호원 대신 호텔 직원들이 안전요원 노릇을 했지만 통제가 안 돼 그날 밤 하얏트호텔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기자회견 시작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두 주인공이 입장했고, 쉴 새 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두 사람의 결혼을 한발 앞서 보도한 매체의 기자는 뿌듯해하며 이를 지켜봤지만 낙종한 기자들은 ×씹은 표정으로 “2세는 언제 가질 거냐” “일본에서 신혼 생활하면 국내 활동은 접는 것이냐” “남자 쪽 집안 반대가 있었다는데 어떻게 승낙을 받았냐”는 등 두 사람이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을 질문을 퍼부었다.
발인이 끝난 후 동생 최진영이 영정을 들고 장례식장을 나서고 있다.
최진실은 결혼 후 낙종한 몇몇 기자를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는, 인간미 넘치는 배우였다. 언론사와 틀어져 좋을 것 없다는 계산도 깔렸겠지만, 자신에게 서운해 할 기자들에게 미안함을 나타내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을 것이다. 당시 최진실 집에 초대받았던 한 주간지 기자는 “진실씨는 자기 기사를 쓴 기자에게 ‘잘 봤다’ ‘고맙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었다”면서 “가끔 팩트가 다르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내용에 대해선 전화로 항의하는 일도 잦았다. 그만큼 남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기자가 최진실을 다시 만난 건 2년 후 병원이었다. 얼굴에 멍이 든 최진실이 급하게 마련한 기자회견이었다. 일본에서 평탄치 못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털어놓은 최진실은 조성민에게 폭행당했다면서 기자들을 불렀고, 여자 연예인으로서는 치명적인, 멍이 든 얼굴을 화면에 공개하기도 했다. 기자회견 장소는 청담동 안 정형외과였고 침대에 누워 있던 최진실은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게 돼 죄송하고 면목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진실은 이날 이례적으로 자신의 집 내부 취재를 허용하기도 했다. 가구가 부서지고 엉망이 된 집을 공개하면서 조성민과의 이혼 소송을 서두르려는 의도였다.
당시 최진실의 소속사는 득보다 실이 많다며 이를 끝까지 만류했지만 최진실이 “곪은 문제는 쉬쉬해봤자 소용없다”며 강행했다고 한다.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두 주인공이 불과 2년 만에 폭행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공방을 벌이게 된 것이다.
온 국민이 최진실과 함께 울고 웃던 드라마 ‘장밋빛 인생’(2005년, KBS).
당시 기자는 “폭행당한 사람은 오히려 나”라며 서울 삼성동 모 병원에 입원해 있던 조성민을 단독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는 “최진실씨의 주장처럼 운동선수인 나한테 진짜 맞았다면 어디가 부러지거나 사망 직전 상태가 됐을 것”이라며 “내 와이셔츠를 손으로 찢고 할퀴려고 달려드는 여자를 밀쳐낸 것 뿐”이라며 억울해 했다. 그는 또 “주위의 친한 기자를 통해 교묘히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이라며 최진실의 모든 주장을 부인했다.
법정 공방 끝에 양육권을 갖게 된 최진실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던 지옥 같은 2년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청담동 갤러리아백화점 맞은편, S가 마담으로 있는 유흥업소에 조성민을 처음 데려간 사람이 바로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었다는 것.
떠들썩한 이혼은 두 사람을 모두 벼랑 끝 시련기로 내몰았다. 일본 명문 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로 각광받던 조성민은 국내로 돌아온 뒤 한동안 갈 곳 없는 신세가 됐고, 최진실 또한 드라마뿐 아니라 광고시장에서 퇴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최진실은 지난해 기자와 만나 취중토크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생각해도 그때는 회생 불능 상태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캄캄하고 긴 터널을 통과하던 시기”라고 털어놓았다.
당시 최진실을 지배한 감정은 허탈함을 뛰어넘은 억울함과 분노였다. ‘최진실 사단’으로 불리는 이영자와 엄정화, 이소라, 홍진경 등에게 위로를 받으며 거의 매일 폭음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술에 취한 최진실은 전 남편의 애인으로 거론된 마담 S를 찾아가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망쳐놓았냐”고 따지기도 했을 만큼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S가 일하는 유흥업소에선 영업방해를 이유로 최진실의 출입을 입구에서 막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끔찍한 모닝콜’
이에 대해 최진실은 “내 마음 안에 있는 또 다른 최진실과 약속한 게 있다”면서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그 술집에 딱 10번만 가서 욕을 퍼붓고 원망하고 싶었어요. 더도 덜도 말고 딱 10번만이요. 그냥 앉아서 당하는 내 자신이 싫었어요. 내가 그들에게 뭘 잘못했습니까. 그들이 나한테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뒤 그렇게 10번을 채운 날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어요. 거창하게 얘기하면 체념 같은 거죠.”
당시 기자와 만난 S는 최진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도하는 일부 매스컴 때문에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언론계에도 ‘최진실 사단이 있고, 그들의 편향적인 보도 때문에 적잖게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두 사람이 이혼 소송 중일 때 새벽 여섯시쯤 어김없이 최진실씨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밝히며 “그 전화가 내겐 끔찍한 모닝콜이었다”고 했다. 최진실은 술에 취하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버릇이 있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계속하고 배터리를 빼놓은 뒤 나중에 전원을 켜면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 있을 정도로 전화에 집착증세를 보였다. S의 얘기다.
“최씨는 술에 취한 날이면 내게 전화를 걸어 신세한탄을 했고 저주에 가까운 원망을 수없이 반복했다. 같은 여자로서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위를 넘는 폭언에는 화가 치밀어 몰래 녹음해두기도 했다.”
S는 최진실의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단둘이 캔맥주를 마신 적도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건장한 남자 동생 두세 명을 데려가 최진실이 눈치 못 채도록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게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최진실은 이혼 파동으로 드라마와 영화, 광고에서 모두 버림받아 힘들다고 털어놓은 뒤 조성민에 대한 연민, 두 아이를 키우며 겪어야 하는 고충을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S는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한테 하는 넋두리 같았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게 유일한 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최진실이 S에게 화를 내고 위로를 구했던 건 어쩌면 세상에 대한 원망과 믿었던 방송, 광고 관계자들에 대한 배신감 혹은 자괴감을 투사했던 것인지 모른다.
2~3년 슬럼프를 겪은 최진실은 2004년 초 컴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선택한 컴백 작품은 MBC TV 드라마 ‘장미의 전쟁’이었다. 이창순 PD가 연출을 맡았지만 시청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직 이혼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데다 부잣집 딸에 아쉬울 것 없는 산부인과 전문의 역을 맡은 최진실이 캐릭터에 잘 묻어나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 결국 드라마는 용두사미로 끝났고 최진실의 시대도 그렇게 저무는 듯싶었다.
바나나 사들고 정준호 찾아가 섭외
그런 최진실에게 한줄기 빛이 찾아든 건 이듬해 KBS2 TV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 캐스팅됐을 때였다. 문영남 작가와 김종창 PD는 방송사의 우려를 무릅쓰고 최진실을 캐스팅하며 승부수를 띄웠고 시청자는 30%가 넘는 시청률로 화답했다. 최진실은 2005년 8월부터 그해 11월까지 방송된 이 24부작 드라마에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하며 백상예술대상을 비롯한 각종 연기상을 거머쥐었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건 최진실의 실제 인생과 흡사한 줄거리가 주부들의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바람난 남편 반성문(손현주)과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다가 시한부 판정을 받는 맹순이는 당시 많은 시청자의 심금을 울렸다.
여기에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뒷바라지하고 두 동생을 키우느라 혼기까지 놓친 여상 출신 은행원이라는 설정도 최진실의 실제 삶이 연상돼 몰입을 도왔다. 심지어 극중 남편도 연하여서 마치 문영남 작가가 처음부터 최진실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사점이 많은 드라마였다. 신파 코드였지만 픽션과 논픽션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시청자를 제대로 공략한 결과였다.
비극적인 주인공 맹순이에서 빠져나온 최진실은 이 드라마를 전환점으로 예전의 인기를 서서히 만회하기 시작했다. 마치 헐값에 거래되던 우량주가 반등장을 맞아 치고 올라가는 모습 같았다. 일동제약 후디스를 비롯해 광고시장도 그에게 러브콜을 다시 보내며 최진실은 예전 명성을 되찾았다. 이후 최진실은 MBC TV 일일극 ‘나쁜 여자 착한 여자’에 이어 정준호와 함께 출연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로 여세를 몰아갔다.
최진실의 유작이 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상대역 정준호는 최진실과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렇다 할 친분이 없었는데 어느 날 매니저를 통해 최진실씨가 만나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어요. 올해 초 서울 신사동에 있는 광고회사 TBWA에서 처음 만났죠.”
당시 최진실은 이 드라마의 출연을 결심한 터였다. 제작진과 최진실이 정준호를 남자 주인공으로 기용하자는 데 뜻을 모은 상태에서 최진실이 직접 섭외 요청을 하러 간 것이었다.
2000년 12월5일 결혼식장에서 조성민의 키스를 받는 최진실.
그의 매니저 서상욱 대표는 “최진실은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효시 격인 ‘질투’와 ‘별은 내 가슴에’의 주인공으로서 40대지만 멜로성을 살린 작품에 늘 갈증을 느껴왔다”고 설명했다.
자신뿐 아니라 40대 연기자 누구라도 멜로드라마에서 성공하면 후배 연기자들이 나중에 그 반사이익을 볼 것 아니냐는 게 평소 최진실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작가와 PD들이 30~40대 여자 연기자를 청춘남녀 주인공의 엄마나 이모로 내모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최진실은 “전인화, 하희라, 오연수, 채시라처럼 30~40대 여배우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면서 “20대 때는 다른 여배우들이 잘 되면 배도 아팠지만 요즘은 모두 내 편 같고, 든든한 지원자 같은 생각이 든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후배 연기자들을 살갑게 챙기는 선배로도 유명하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잠원동 집에 달려간 신애가 대표적인 경우. 엔프라니 광고 모델로 데뷔한 신애는 최진실의 두 자녀가 ‘작은 엄마’라고 부를 정도로 최진실과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이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애는 최진실이 매년 여름 괌으로 떠나는 가족여행 때도 유일하게 동행할 만큼 한식구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최진실을 괴롭힌 사건들
김희선도 최진실이 아끼는 후배 중 한 명이었다. 결혼을 앞둔 김희선이 조언을 구한 유일한 선배 연기자가 바로 최진실이었다. 현재 임신 상태인 김희선은 최진실의 빈소를 찾지 못하는 비통한 심정을 미니홈피에 올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최진실은 지난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희선에 대해 “누구보다 희선이의 고민을 잘 안다”라고 말했다.
“연예인들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게 있어요. 저도 그렇지만 희선이도 그런 것 때문에 참 많이 상처 받은 아이잖아요. 아버지뻘이던 대학교 은사와 아프리카 누드 촬영 소송도 겪었잖아요.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제 속이 찢어져요. 아마 제가 데뷔할 때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다면 저는 스타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연기 못 한다는 악플에 시달려 겁먹고 도망갔겠죠. 그런 점에서 요즘 후배들은 정말 우리 때보다 몇 곱절 더 힘든 상황에서 일하는 거예요.”
인터넷이 아니라도 최진실을 힘들게 한 사건 사고는 너무 많았다. 여자 연예인이 겪을 수 있는 고난의 총집합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최진실의 한 전직 매니저는 “누나는 ‘일할 때를 빼고 늘 불행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귀띔했다.
자신을 데뷔시킨 매니저 배병수의 피살, 납치미수 사건 등 끔찍한 일이 많았다. 당시 배병수를 살해한 로드 매니저 전모씨는 현재 강원도의 한 교도소에서 죗값을 치르고 있다. 납치사건 때는 매니저가 배에 칼을 맞는 아찔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납치사건 현장에서 최진실을 살린 매니저 박봉기씨의 증언.
1990년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최진실 납치미수 사건의 범인은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CCTV가 없었고 워낙 용의주도하게 범행을 계획했던 탓이다. 당시 용의자들은 봉고차를 타고 있었다. 경찰은 이들이 최진실의 집 주위를 며칠간 배회하다 D데이를 잡아 최진실을 납치해 돈을 뜯어낼 생각을 했던 것으로 분석했다. 하마터면 대형 참사로 번질 뻔한 위험천만한 사건이었다.
아이들 체벌도 하는 ‘강한’ 엄마
최진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과 감각을 가진 연기자라는 게 전직 매니저와 방송 관계자들의 총평이다.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로 인기 정점을 찍었을 무렵 그의 진가가 발휘된 일이 있었다. 에버랜드가 용인자연농원으로 불리던 1997년이었다. 당시 한국은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으며 경제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은행이 문을 닫고 구조조정 한파가 거세게 불며 나라가 망한다고 하던 일대 혼란기였다.
당시 최진실의 소속사 사장이던 강민씨는 “진실씨가 ‘상의할 문제가 있다’면서 여의도로 와달라고 해 갔더니 느닷없이 ‘노 개런티 광고를 한 편 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당시 최진실은 고소영과 더불어 억대 광고료를 받는 몇 안 되는 스타였고, 드라마도 히트한 상태라 강민 사장은 출연료를 올리려고 하던 때였다.
“처음엔 황당했죠. 뚱딴지같은 제안에 다짜고짜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나라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나만 앉아서 희희낙락할 순 없지 않으냐’면서 ‘공익적 성격의 캠페인 광고를 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한참 들어보니 참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그래서 나온 게 ‘대한민국 힘냅시다’라는 내용의 모 자동차회사 광고였어요. 당시만 해도 노 개런티로 광고를 찍는다는 개념이 없던 시절인데 진실씨가 그 첫 테이프를 끊은 겁니다.”
워커홀릭으로 불렸던 연기자 최진실. 집에선 어떤 엄마였을까. 스스로는 “강하고 엄격한 엄마”라고 평했다. 그는 기자와의 취중토크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나를 자식 앞에서 쩔쩔매며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는 엄마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반대”라며 “아이들이 잘못하고 말을 안 들으면 무섭게 체벌도 가한다”라고 했다. 그는 또 “자식 교육에서 가장 해로운 게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며 “엄마의 기분에 따라 판단의 잣대가 달라지면 아이들이 헷갈려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관성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촬영 때문에 집을 비울 때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대신 “엄마, 돈 벌어 올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가 집 근처 영동호텔 사우나에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가요. 근데 사우나 측에서 내년에 환희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여탕 입장이 곤란하다는 거예요. 아마 다른 손님들이 뭐라고 항의를 좀 했나 봐요. 이럴 때 아빠 빈자리가 엄청 크게 느껴지죠. 환희한테 ‘내년부터는 진영이 삼촌하고 목욕 가야 한다’고 설명했는데 대강 알아듣는 눈치예요.”
당시 최진실이 “기사에 반드시 넣어달라”고 부탁한 내용이 있었다. 바로 조성민에 대한 얘기였다. 최진실은 “우리 두 아이 잘 크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성민씨가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는다”면서 “애들이 어떻게 크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비록 부부 관계는 깨졌지만 그래도 애들 아빠인데 자식들 자라는 건 보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서운해 했다. 그는 이날 “한때 원망도 많이 했지만 이제 성민씨도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하길 바라고 나도 그러고 싶다”며 속내를 밝혔다.
“서로 헐뜯고 증오해봐야 남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잖아도 짧은 인생인데. 성민씨도 괜찮은 사람 만나서 얼른 재혼해야죠. 남자는 여자가 있어야 돼요. 저도 이제는 축하해줄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쇼윈도의 마네킹’
최진실의 죽음을 수사한 서초경찰서는 그가 음주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목을 맨 것으로 결론 냈다. 부검이 끝난 후 한 수사관은 “고인의 체중이 31kg이었는데 죽기 얼마 전 지방 흡입 수술을 해 복부 지방이 거의 제로 상태였다”고 밝혔다. 하루 세 시간씩 한강 둔치에서 자전거를 타며 다이어트를 해왔으면서도, 새 드라마 출연을 앞두고 무리하게 체중 감량을 한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한 결과 31kg이 아니라 45kg이었다. 해당 수사관이 잘못 말하는 바람에 언론도 오보를 낸 것이다. 한 경찰관은 “목에 손톱 파인 자국이 있는 걸로 봐서 고통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했던 것 같다. 재능이 많은 사람이 뭐가 급해 그렇게 세상을 빨리 등졌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사람들은 최진실을 강한 여자로 알고 있었다. 심지어 독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 ‘단적비연수’ 때부터 5년간 최진실을 담당했던 김성훈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조성민이 방송에서 최진실을 이상형으로 꼽자 두 사람을 소개해주며 결혼에 이르게 한 주인공이다.
“진실씨가 강하다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물론 강했죠. 하지만 아내와 엄마가 되면서, 그리고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걸 체득하면서 약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니, 약해졌다기보다는 포기하는 부분이 많아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과거엔 술도 잘 마셨지만 저랑 일할 때부터는 소주 한 병만 마셔도 쉽게 취할 만큼 체력도 눈에 띄게 약해졌어요.”
최진실은 죽기 전 자신과 동고동락한 코디네이터와 남동생처럼 친하게 지낸 모 여성잡지사 기자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우리 애들 크는 것 지켜봐달라”고 하면서.
최진실은 왜 마지막 통화를 그들과 했을까. ‘최진실 사단’으로 불리는 이영자, 엄정화, 홍진경, 이소라는 그의 고립감과 우울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최진실의 자살은 많은 이에게 둘러싸여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쇼윈도의 마네킹 같은 연예인의 고단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국 연예계의 쓸쓸한 자화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