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경제교육 수준 낙제 겨우 면해
유대인 잘사는 이유, 조기 경제교육
경제 과목 흥미 제고가 선결 과제
모두가 근로자이자 자본가… “대중자본주의 시대 임박”
표준 역량 + 혁신 역량 + 포용 역량 = 경제발전
[+영상] 박재완 경제교육단체협의회 회장
9월 4일 만난 박재완 경제교육단체협의회 회장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실생활과 밀접한 경제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태식 객원기자]
금융권에서는 잊을 만하면 횡령 사고가 일어난다. 지난해엔 4월 새마을금고에서 40억 원, 우리은행에서 700억 원, 6월 KB저축은행에서 95억 원 규모 횡령 사건이 터졌다. 해를 넘겨서도 이어져 올해 8월 경남은행에서도 1000억 원 규모 횡령이 발각됐다. 누군가의 피와 땀이 서린, 어쩌면 삶 전부일지도 모를 돈이지만 이는 고려되지 않는다. 사건 관련 기사엔 “수백·수천억 원 해 먹고 몇 년 살다 나오면 남는 장사네”라는 식의 냉소적 댓글이 달린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결국 ‘돈’. 돈을 숭상하는 자본주의는 인류에 풍요를 가져다줬지만 “먹어서 죽는다”는 고(故) 법정 스님의 말처럼 독(毒)도 쌓았다. 이른바 ‘물질만능주의’라고 불리는 폐해다.
8월 3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전직 BNK경남은행(경남은행) 부장과 ‘1000억 원대 횡령’을 공모한 혐의를 받는 증권사 직원 황모 씨가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기획재정부 장관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무리한 뒤엔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현재 한반도선진화재단과 성균관대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올해 2월 경교협 회장으로 취임했다. 올바른 경제관을 확립해 국민의 경제의식 수준을 높이고, 나아가 국가경쟁력 제고를 달성하겠다는 취지다. 경교협은 경제교육 활성화를 위해 2018년 경제 5단체(한국경제인협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한국경영자총협회)가 중심이 돼 설립한 조직이다. 기업·언론·공공기관·시민단체 등 46개 회원사를 두고 있다.
9월 4일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서초타워에서 만난 박재완 회장은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지만 공정·투명 등 의식수준은 그에 걸맞지 못하다. 각종 사회문제가 촉발되는 근본 원인”이라며 “올바른 경제교육 확립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경제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론 “실생활과 더 밀접한 내용으로 경제 공부에 대한 유인을 높이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제교육을 통한 국민 역량 강화가 저출생·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 경제발전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 일탈, 불공정 시스템에서 비롯
7월 12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조6733억 달러로 세계 13위다. 2021년 10위에서 3단계 내려오긴 했으나 여전히 경제력 부문에선 수위권 국가다. 국민의 경제교육 수준은 이와 동떨어진 양상을 보인다. 2021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밝힌 국민 경제 이해력 점수는 100점 만점에 56.3점, 올해 3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국민 금융 이해력 점수는 66.5점에 그쳤다. 2018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세계 금융 이해력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 가운데 금융 이해력을 갖춘 이는 33%로 ‘금융 문맹률’이 67%에 달했다. 조사 대상 142개국 가운데 77위다.한국의 경제력 수준 대비 국민의 경제 의식수준이 낮게 나타났다.
“그렇다. 국민 경제 의식 상태는 낙제점을 겨우 면한 수준이다. 그나마 30~40년 전에 비하면 향상된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근래 한국엔 디지털 대전환이 진행되고 있고 한국 역시 디지털 강국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노인·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의 디지털 금융 이해력은 더 낮다. 경제교육이 시급한 상황이다.”
국민의 경제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 같진 않은데.
“경제에 대한 관심과 의식수준은 다르다. 경제 의식이란 △시장경제 작동 원리 △기업가 정신 △직업의식·근로 윤리 △상생의 노사관계 △상도의 △연금·저축·투자 이해 등에 대한 인식과 역량을 일컫는 것이다. 또 이를 키우는 것이 경제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한 범죄가 빈번하다. 경제의식 수준과 관련 있다고 보나.
“그렇다. 물질만능주의는 경제교육 부재가 원인이다. 유대인이 좋은 예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가난한 것은 죄’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땀을 흘리지 않고 남의 물건이나 생각을 훔치는 등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를 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철저히 교육한다. 그 결과 근면함과 창의성이 함양됐고, 유대인은 세계 어떤 민족보다도 더 부유한 민족이 됐다. 이 교육에서 배울 점은 재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깨끗하게’ 벌어야 한다는 인식을 조기 학습시킨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더 고양될 수 있도록 교육이 필요하다. 또 개인의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선 공정한 사회·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경제교육이 보탬이 될 수 있다.”
보탬이라 한다면.
“먼저 몇 가지 예를 들어 시스템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실업급여 관련 이슈가 있었다. 일부 근로자들이 회사에 잠시 다니다가 퇴사하고, 다시 다니다 퇴사하길 반복하며 실업급여 제도를 악용하는 일이 발생해 논란이 됐다. 개인이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인 셈인데, 이를 순전히 개인의 잘못으로만 볼 수 있을까. 실업급여 시스템 자체가 공정하지 않게 설계된 탓이 크다고 본다. 의사 쏠림 현상도 마찬가지다. 성형외과·피부과·안과 등 이른바 ‘돈 되는’ 과에만 지원자가 몰린다는데, 이는 건강보험 수가 시스템이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복지 혜택을 받던 취약계층이 취업해 소득을 얻게 되면 복지 혜택 일부를 잃게 되고, 소득이 생기니 그에 따른 세금도 낸다. 이를 ‘참여소득세율’이라고 하는데,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참여소득세율이 100%가 넘는 국가다. 즉 복지 수혜자가 취업해 돈을 벌면 수혜자로 머무는 것보다 더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 복지 수혜자가 취업하지 않고 혜택만 받는 것을 나무랄 수 있을까. 조세 및 복지 시스템을 손봐야 하는 일이다. 시스템은 국민 의식을 바탕으로 변화한다. 경제교육을 통해 국민 의식을 제고하면 시스템도 발전시킬 수 있다.”
재미없는 것 중요하다고 해봤자…
한국 국민의 경제교육 수준이 낮은 원인은 뭘까.“우선 학교에서부터 경제를 배울 기회·시간이 부족하다. 또 배우기엔 너무 어렵고 천편일률적이다. 전반적 한국 교육 실태와도 맞물린 문제다. 암기식·강의식으로 전달하는 교육이 일반적이기에 흥미를 끌지 못한다. 사실 ‘국민’이라고 통칭하지만 국민은 연령대·성별·소득 등에 따라 수많은 계층으로 나뉜다. 예컨대 20대 초중반에 군대에 가 제대를 기다리는 장병과 시장경제 적응을 앞둔 북한이탈주민의 경제교육 수요는 다르다. 각자 눈높이에 맞춘 교육을 제공해야 하지만 실제론 ‘금리란 무엇인가’식의, 일반론적으로 진행되니 흥미를 끌 리 만무하다. 사회에서도 많은 단체가 경제교육을 하고 있긴 하지만 수강생 상당수가 정부 보조금을 받기 위해 교육을 이수하는 상황이라 ‘시간 때우기’ 정도에 머물고 있다. 한국 경제 외형은 커졌지만 국민 경제교육 수준이 그만큼에 다다르려면 시간이 꽤 필요할 것 같다.”
경제교육 상황은 악화일로다. 학교에서 경제 과목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8월 9일 교육부에 따르면 6월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에서 응시생 38만1673명 가운데 경제 선택자는 5588명으로 1.5%에 그쳤다. 지난해 치른 2023학년도 수능에선 응시 인원 44만7669명 가운데 경제를 선택한 수험생은 4927명으로 1.1%에 그쳤다. 2007학년도엔 16.0%였지만 1% 선도 위협받고 있다. 2028년부턴 교육부 교과목 개편에 따라 아예 수능 선택과목에서 빠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6월 1일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가 치러졌다. 응시생 38만1673명 가운데 경제 선택자는 5588명으로 1.5%에 그쳤다. 사진은 이날 부산 해운대구 양운고 3학년 교실에서 학생들이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 [뉴스1]
“경제 과목 자체의 매력도가 낮다. 우선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다 보니 학생들이 선택을 안 하고, 그래서 관련 교사도 적은 악순환 상태다. 일각에서는 경제 과목을 의무화하자는 강성 발언까지 하고 있는데…. 재미없는 것을 중요하다고 억지로 강요해 봐야 효과는 없으리라고 본다. 한국은 중고등학생·대학생 등 청년층의 학업 역량 수준이 굉장히 높은데, 나이가 들수록 저하된다. 물론 나이가 들면 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지만 한국 경우 세계 기준 하락 폭이 더 크다. 30대 이후엔 평균보다도 못하게 되고, 60대가 되면 꼴찌 수준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공부를 안 한다는 뜻도 되지만 배운 지식이라는 게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점수 잘 받으려고 무작정 외운 거라 시간이 지나면 다 잊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경제를 선택과목으로 존치한다 해도 실생활과 연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교과서에 학생의 눈높이에 맞는, 학생이 흥미를 느낄 만한 콘텐츠를 담아야 한다.”
어떤 콘텐츠를 담아야 할까.
“실생활과 접목할 수 있는 사례가 많이 수록됐으면 한다.”
100세 시대 대한민국, 국민 경제 역량 높여야 지속 가능
3월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현행 제도가 유지될 경우 2055년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된다는 추계 결과를 발표했다. 1990년생이 수령을 시작하는 때로, 청년층의 노후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9월 5일 국무회의에선 개인 투자용 국채를 도입하기 위한 ‘국채법 시행령 일부 개정령안’이 심의·의결됐다. 이듬해부터 개인도 국채에 투자해 10년·20년 뒤 혜택을 볼 수 있게끔 한 것인데, 연금을 대체하는 기능으로 국민의 노후 불안이 반영된 정책으로 해석된다. 박재완 회장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비단 학생에게만 경제교육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다. 평균수명 증가로 인해 도래할 대중자본주의 시대엔 사회 모든 층에 대한 경제교육 중요성이 더 커진다”고 강조했다.9월 4일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종합상담실에서 한 시민이 상담을 받고 있다. 3월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현 제도 유지 시 2055년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된다. [뉴스1]
“모두가 근로자이자 자본가인 사회를 말한다. 현재는 100세 시대다. 퇴직 후 남은 삶이 길다. 직장 생활을 통해 번 근로소득만으론 살아가기 어렵다. 근로소득을 저축·투자해 번 자본소득도 있어야 살 수 있다. 각자 물고기 잡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 한국은 국민의 자산 쏠림현상이 심각하다. 대부분 자산이 부동산으로 이뤄져 있고, 금융자산·기타 자산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산 운용 포트폴리오를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 암호화폐 등 위험자산에 무분별한 ‘올인’ 투자도 경계해야 한다. 연금도 마찬가지다. 국민 스스로 지속가능성을 판단해 제도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식을 함양·개선하는 것도 경제교육의 기능이자 역할이다.”
박재완 회장은 “한국의 정치·문화 발전은 경제력이 뒷받침된 덕분”이라며 “경제력은 국가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경제성장이 사회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경제 우선주의의 부작용도 있지 않나. 예컨대 인문학 위기 초래 등 학문 다양성을 해친다거나.
“귀담아들어야 할 지적이다. 무엇이든 하나의 가치를 향한 쏠림현상은 경계해야 한다. 다만 현재 대학·대학원의 인문사회계·이공계 졸업생 배출 비율은 55대 45인데, 사회에서의 수요는 25대 75로 거꾸로 돼 있는 상황이다. 경제성만 우선해서도 안 되지만 사회 수요와 동떨어져서도 안 된다고 본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발전을 위해 선행돼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하는 공정한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예컨대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신분에 따라 성취가 좌우돼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독립 초기 당시 존재한 키부츠는 집단 농업공동체로 사유재산을 부정해 각자가 일을 열심히 할 환경이 못 됐다. 1980년대 중반 지나 이스라엘은 키부츠를 폐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비약적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사람의 역량이 발전해야 한다. 국민의 역량이 뛰어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는 나라는 산유국 같은 자원 부국밖에 없다. 잘사는 국가의 국민은 집합적으로 ‘똑똑’하다.
사람의 역량이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기초 역량’, 표준 역량이라고도 한다. 문해·수리·컴퓨팅 능력 등을 말한다. 한국인의 기초 역량은 뛰어나다. 두 번째는 기존 질서와 시스템에 의문을 품고 도전·혁신해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 역량’이다. 과거 한국인이 뛰어난 부문이었지만 최근 들어 많이 사그라진 모양새다. 대개 안전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경향이라 안타깝다. 마지막 역량이 가장 중요하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아픔을 공감하며 갈등을 순화하는 ‘포용 역량’이다. 한마디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역량인데, 현재 한국인은 낙제 수준이다. 정치·노사·남녀·세대 간 갈등이 지나치다. 뛰어난 기초 역량을 토대 삼아 혁신 역량·포용 역량을 키우고, 경제발전과 아울러 ‘너그러운 문명국가’를 이뤘으면 한다. 경제교육이 이를 위한 시민의식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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