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디스플레이 탕정단지 30조 투자… 추가 투자 예정
- 10년새 인구 10만 증가…삼성이 지방세 26% 납부
- 고층아파트, 유럽풍 쇼핑몰…백화점 종합병원은 없어
- 교육 생활시설 부족해 ‘소비는 천안에서’ 해결 과제
충남 아산시 탕정면 일대에 자리 잡은 삼성디스플레이시티 삼성단지 전경.
“포도밭이 지천이었어요. 길도 좁고 비포장이었고요. 농가도 드문드문해 밤에는 불빛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충남 아산시 탕정(湯井)면. 외지인들이 알아주는 것이라곤 ‘탕정포도’ 밖에 없었던 이 시골마을에 세계 1위의 디스플레이 기업, 삼성디스플레이가 들어오면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39층짜리 고층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충남 유일의 외국어고도 생겼다. 봄이 되면 유럽풍의 쇼핑몰도 문을 연다.
재정자립도 50% 육박
탕정에서 깨끗하게 포장된 왕복 4차로의 ‘삼성로’를 따라가면 140만여 평의 삼성디스플레이 탕정단지 ‘디스플레이시티’가 위용을 드러낸다. 단지 앞 건물 꼭대기에선 수증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겨울 하늘로 사라진다. LCD 생산라인 내 항온항습을 유지하느라 발생한 수증기다. 여기서 연간 출하하는 물량을 TV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로 환산하면 40인치 TV 패널 6500만 개와 4인치 갤럭시S 패널 2억5000만 개를 합친 양에 달한다. 머지않아 영화에서나 보던 투명 디스플레이나 플렉서블(flexible) 디스플레이도 여기서 양산될 것이다.
탕정에서 서쪽으로 20여 km를 달리면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 이른다. 아산에 ‘산업시대’를 연 것은 현대차가 삼성디스플레이보다 8,9년 앞선다. 차체공장에선 거인 팔처럼 생긴 로봇이 척척 철판을 자르고 차체를 조립한다. 생산공정이 90%가량 자동화된 덕분에 63초에 한 대꼴로 차가 완성된다. 70%는 내수용이고 나머지는 전 세계로 수출된다. 프레스공장, 차체공장, 도장공장을 거쳐 의장(艤裝)공장에 이르러 마지막 검수를 기다리는 신차마다 ‘국내’ ‘미국’ 등 최종 목적지를 표시한 딱지가 붙어 있다.
삼성은 경기 기흥에서 휴대전화용 소형 패널 생산을 시작으로 디스플레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천안에는 모니터용 패널 생산라인을 갖췄고, 이후 LCD 수요가 폭증하자 탕정 일대에 디스플레이 전용 산업단지를 개발했다. 탕정단지는 1단지(74만여 평)와 2단지(64만여 평)로 나뉘는데, 현재 조성이 완료된 1단지에 투자한 금액만 30조 원가량으로 추산된다. 삼성은 추후 디스플레이 시장 상황을 고려해 이미 부지를 확보한 2단지에 생산라인을 추가 증설할 계획이다. 천안아산복합단지장 안재근 전무는 “탕정 지역은 대규모 사업장 입지가 가능하면서도 KTX 천안아산역과 경부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인접해 교통 편의성 면에서 유리하다”고 평가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삼성전자 LCD사업부로 있다가 2012년 4월 독립법인이 됐다. 이후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주)와 삼성과 소니가 합작한 SLCD(주)를 인수했다. 연간 매출액은 30조 원에 육박하고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점유율은 26%로 독보적이다.
현대차는 1996년 울산, 전주에 이어 아산공장을 준공했다. 수출용 차량 생산에 집중한다는 전략하에 평택항과 15분 거리인 아산시 인주면에 터를 잡고 8500억 원을 투자했다. 연간 중·대형 승용차 30만 대와 55만 대의 완성 엔진이 아산공장에서 생산된다. 아산의 생산능력은 울산공장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쏘나타와 그랜저의 국내 생산을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수익성은 가장 높다고 한다. 이성규 아산총무팀 과장은 “2011년에는 1500억 원 이상을 투자해 대대적으로 설비를 교체하고 품질 차량을 생산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구 10만 명 이상 증가
현충사가 수학여행 코스로 각광을 받고, 마이카 붐을 타고 온양온천이 신혼여행지로 인기를 누린 건 1980년대 얘기다. 1990년대 들어 온양의 관광산업이 쇠퇴하면서 과거 16만~17만 명이었던 아산 인구는 1990년대 중반 15만 명대로 주저앉았다(온양 포함 인구. 아산군 온양읍은 1986년 온양시로 승격 분리됐다가 1995년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돼 아산시가 되었다).
그러나 아산은 삼성과 현대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들어오면서 ‘온천 고장’에서 기업도시로 변신에 성공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부터 대규모로 조성되기 시작한 삼성디스플레이 탕정단지의 힘이 컸다. 아산 인구는 2002년 18만8000명에서 현재 29만1000여 명(2012년 11월 말 기준)으로 10년 새 10만 명 이상 증가했다. 2010년과 2011년에는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수출 1위, 무역수지 1위를 차지했다.
삼성샛별유치원. 재원생 전원이 아산 탕정면 삼성트라팰리스단지에 거주하는 삼성 직원들의 자녀다.
인구 25만~30만 명 규모의 전국 지방도시 중 아산의 재정자립도는 단연 높다. 2009~2011년 3개년 평균 재정자립도가 49.4%로 경남 거제(39.2%), 전북 군산(25.2%), 전남 목포(25.6%) 등을 크게 앞선다. 과거엔 이웃한 천안에 비해 재정자립도가 한참 뒤떨어졌었지만 ‘삼성 입주’ 후 무서운 기세로 추격하더니 2006년부터 비슷한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아산시청 홍보실 이모완 팀장은 “다른 기초 자치단체보다 넉넉한 세수는 교육과 복지 등 서민생활 향상에 투자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산시는 2012년 교육경비로 250억 원을 집행했다. 충남 도내 최고 수준이다. 얼마 전에는 대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이스링크를 개장했다. 아산시 풍기동 소재의 이순신빙상장이 그것으로 충남 지역 최초의 아이스링크다. 65세 이상 노인들에게는 온천입장권과 이·미용권을 매년 12장씩 지급한다. 2008년에는 충남 지역 유일의 외국어고등학교인 충남외고가 탕정단지 내에서 개교했다. 학교 부지와 기숙사동 일부를 삼성이 기부 채납해 산업체 연계 특성화고의 첫 사례로 기록됐다. 주민 임채원 씨는 “공원이나 호수 주변을 깨끗하게 꾸며놓아 운동하기 좋다”며 “최근 몇 년 사이 여러모로 많이 발전했다는 걸 체감한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살고 싶다”
충남 아산은 고속도로, 철도, 항만 등이 인접해 기업 입지로 각광받고 있다.
임 과장 역시 연세대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뒤 삼성디스플레이에 입사, 2006년부터 탕정단지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의 가족은 온양 부모님 댁 근처에 터를 잡았다. 아산의 어제와 오늘을 아는 임 과장은 격세지감을 느낀다.
“1990년대 아산은 관광산업이 쇠퇴일로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여기선 먹고살 게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동네 어른들이 ‘어떻게 하면 삼성에 우리 아이를 들여보낼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굳이 서울에 가지 않아도 고향에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까요.”
현대차 아산공장 직원인 김덕수 씨(39)는 명절 때마다 고교 동창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온양이 고향인 그는 천안공고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1996년 아산공장이 가동을 개시할 때 현대차에 입사했다.
“그 시절에는 거제나 울산의 중공업체에 많이 취직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저도 제대하면 그쪽으로 직장 구하러 갈 참이었는데, 마침 현대차 아산공장이 세워진 거죠. 명절 때 고향에 온 친구들이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좋은 직장에서 돈 잘 벌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들 합니다.”
삼성디스플레이 김희동 LCD사업부 기획팀 부장(42)은 해외파 아산 시민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삼성맨이 됐다. 아산 생활은 벌써 9년째. 그는 사원아파트인 삼성트라팰리스단지에 살면서 도보로 출퇴근한다. 아내는 아산과 가까운 공주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는 아이를 적어도 고교까지는 아산에서 다니게 할 생각이다.
“가끔 서울에서 물건을 사고 택배 주소를 적으면 사람들이 놀라요. 제가 25층에 사는데, 시골에 웬 25층이 있느냐고요(삼성트라팰리스는 아산시 탕정면 명암리에 소재한다). 서울 친구들도 온양은 온천 때문에 알지만, 아산이나 탕정은 잘 모르죠. 하지만 회사 가까이 살며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주변 여건도 점점 좋아지고 있어 만족합니다.”
탕정 원주민들이 옮겨온 이주택지 내 ‘블루크리스탈몰’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원주민들은 공동 쇼핑몰을 운영하며 삼성과의 공존공생을 도모한다. 뒤로 보이는 고층아파트는 삼성의 사원아파트인 삼성트라팰리스단지.
‘삼성 자녀’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탕정면 내 탕정초등학교와 탕정중학교에도 삼성은 원어민 교사 채용과 각종 기자재 기부 등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탕정면 내에 일반 고교가 전무한 점을 고려해 자율형 사립고를 만들기로 하고 충남교육청으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김 부장은 “고등학생 자녀 교육문제로 기러기 생활을 하거나 천안으로 나가 사는 임직원들이 꽤 된다”며 “삼성 사람들을 아산에 정착하게 하려면 고교 설립이 선결과제”라고 말했다.
자체 경쟁력 확보 ‘사활’
“출근시간에는 천안에서 아산 방향으로, 퇴근시간엔 아산에서 천안 방향으로 길이 막힙니다. 일은 아산에서 하지만, 주거와 소비는 천안에서 하는 게 가장 아쉬운 대목이지요.”(유선종 아산시청 문화관광과장)
삼성과 현대 없이 아산의 발전을 논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산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바로 이웃해 있는 천안이 생활여건이나 교육수준에서 아산보다 앞서 있기 때문에 직장은 아산에 있지만 천안에 살거나, 아산에 살더라도 주요 소비는 천안에서 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산에는 영화관이나 백화점, 종합병원이 없다. 스타벅스도 천안에는 4군데 있지만 아직 아산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산시가 교육에 많은 예산을 들이는 것도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2004년만 해도 중학교 성적 상위 10%인 학생이 아산 소재 고교로 진학하는 비율이 46% 그쳤다. 아산시가 ‘내 고장 학교 다니기’ 운동을 적극 펼친 결과 이 비율은 2012년 80%까지 올라갔다.
현대차 이 과장은 “총각 때는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신혼집은 아산에 차리고 아이가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 천안으로 이사 가는 경향이 있다”며 “천안 쌍용·백석·불당동 등이 현대 삼성 직원들이 선호하는 주거지”라고 말했다. 김덕수 씨는 “서울에서 인기 있는 공연도 천안까지는 내려오지만 아산으로 오진 않는다”며 “영화도 천안에 가서 보고 대형마트도 천안에 있는 곳이 시설이 더 좋아서 주로 거기서 장을 본다”고 했다.
2012년 초 나온 ‘아산시 미래비전과 도시마케팅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아산시민들은 구도심 온양의 침체된 상권 부활을 아산의 주요 과제로 꼽았다. 아산시 공무원들은 지금까지의 시 발전의 공(功)을 ‘외부의 힘’, 즉 국책사업이나 기업 유치에 돌리면서 “앞으로는 이런 성장환경이 되기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아산시 이 팀장은 “이런 배경에서 아산 스스로의 산업경쟁력 확보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아산시가 택한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기업 유치를 여전히 중요 과제로 삼으면서, 온천산업을 활성화해 자생적 산업역량을 갖추자는 것이다.
아산시는 2개의 산업단지를 추가 건설 중에 있다. 이성연 기업지원과장은 “수도권 규제가 완화됐어도 아산의 평당 분양가가 3~4분의 1 수준이고 교통도 날로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아산시는 온천산업 활성화를 위해 대전대 한방병원, 파라다이스도고와 손잡고 온천의료관광 육성에 착수했다. 온천수와 한방의 만남이라는 콘셉트로 ‘온궁’이라는 화장품 브랜드를 만들고 도고파라다이스 내에 한의사가 상주하는 온천치료센터를 설립했다. 유선종 문화관광과장은 “수도권 지하철이 개통된 후 아산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1500만 명으로 급증했지만 대부분 저가 관광을 하는 노인들”이라며 “노후한 온천시설 개선에 투자하고 온천을 상품화함으로써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삼성트라팰리스단지 건너편에는 2만6000여 평의 상가단지 조성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몇몇 건물에선 커피숍과 식당이 성업 중이다. 이곳은 탕정단지에 땅이 수용된 원주민들을 위해 삼성이 마련한 이주택지. 삼성은 자기 땅을 양보한 원주민들에게 이주택지를 원가 이하로 분양하고 건축비도 일부 지원했다. 이제 곧 200여 원주민 가구는 1층 상점, 2층 원룸에서 임대 수익을 얻고 3층 자가 주택에서 살게 된다. 그중 66가구는 공동 쇼핑몰 사업에 뜻을 모아 유럽풍 콘셉트로 디자인을 통일해 건축하고 ‘블루크리스탈몰’ 공동 임대 및 운영에 나섰다. MD 구성을 위탁받은 진영원 스타존 대표는 “패션매장과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MD를 구성해 2013년 3월 그랜드 오픈을 할 예정”이라며 “인근 삼성 가족과 온양 관광객, 그리고 천안 시민들까지 찾아오는 상권을 만드는 것이 주민들의 꿈”이라고 말했다. 보통은 원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리는 그간의 개발산업 패턴에서 벗어나 원주민과 기업이 어울려 사는 첫 번째 모델이 곧 가동되는 셈이다.
삼성-지역 주민 간 相生
해마다 11월이면 삼성디스플레이 임직원과 가족들은 한자리에 모여 김장을 담근다. 아산과 천안 지역 소외계층에게 김장을 나눠주는 봉사활동으로 8년째 이어지고 있다. 배추 등 김장 재료는 아산 지역 농가에서 재배한 것을 사용한다. 현대차 아산공장도 매년 7억 원의 예산을 들여 40~50건의 지역 대상 사회공헌활동을 펼친다. 비즈니스만 하는 기업이 아닌, 지역과 소통하고 상생하는 기업이 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안재근 단지장은 “아산과 삼성은 시너지를 내는 공동체”라며 “삼성은 지속적인 투자와 고용 증대를 도모하고 아산시는 인프라 지원을 맡아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협력 모델을 만들어낼 것으로 자신한다”고 밝혔다.
아산시 온양온천역 인근 버스정류장.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온양까지 연장되면서 온천 관광객이 늘었지만 노인층의 저가 관광이 대부분이다.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여 관광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아산시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