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생애 ‘최고의 해’ 망친 아베
코로나19 지원금 두고 ‘헛발질’
반(反)아베로 존재감 키운 유력 지자체장들
‘포스트 아베’ 주자들 ‘고만고만’
[뉴시스]
당초 아베 총리에게 2020년은 정치 인생 ‘최고의 해’로 예상됐다. 각각 4월과 7월로 예정된 중·일 정상회담과 도쿄 하계올림픽이라는 이벤트 때문이었다. 일본은 올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방일을 계기로 중일관계의 근본적인 개선을 시도했다. 2008년 ‘전략적 호혜관계 포괄적 추진’에 이어 중요한 양국 합의가 도출될 전망이었다. 중·일 정상회담이 3월 5일 코로나19 확산으로 연기돼 대중국 외교 성과를 과시할 기회가 날아간 것.
도쿄 올림픽 연기 경제 손실 45조6000억 원
3월 24일 아베 총리와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올해 7월 개최 예정이던 도쿄 올림픽을 1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정부는 도쿄 올림픽을 ‘부흥 올림픽’으로 부각하던 터였다. 국내총생산(GDP)이 2조 엔(22조8000억 원) 이상 늘어날 것이란 경제적 부수효과를 기대했다. 도쿄 올림픽 연기로 인한 경제 손실은 최대 4조 엔(45조6000억 원)으로 추산된다.경제 대책을 둘러싼 ‘헛발질’도 악재다. 당초 아베 총리는 코로나19로 소득이 급감한 가구에 한해 긴급 경제대책 차원에서 30만 엔(330만 원)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각의에서 4조 엔(45조6000억 원) 규모의 예산안이 통과됐다.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내에서 지원 대상과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조회장이 ‘30만 엔 선별 지급안’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연립여당 공명당이 반발하고 나섰다. 지원 대상이 적고 ‘소득 급감’을 증명하는 과정이 까다롭다는 여론을 의식한 것이다. 결국 4월 16일 아베 총리는 기존 선별 지급안을 철회해 국민 1인당 10만 엔(110만 원)씩 일률 지급하기로 발표했다. 각의 통과 후 추경예산을 재편성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아베 총리는 혼란을 초래한 책임을 느낀다면서 사과했다. 그 와중에 아소 다로 재무상은 4월 17일 기자회견에서 “먼저 손든 사람에게 1인당 10만 엔을 지급하자”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코로나19 정국에서 아베 총리의 위기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5월 8일 교도통신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57.5%는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긴급사태 선언이 너무 늦었다는 응답이 80.4%를 기록하는 등 일본 여론은 아베 내각의 코로나19 대응에 대체로 부정적이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아베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43%)이 ‘지지한다’는 응답(41.7%)을 역전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6월 아베 퇴진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4월 28일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66%는 아베 4연임에 반대하고, 57%는 차기 총리가 아베 정권의 노선을 계승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포스트 아베’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자민당 전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후생노동상 등이다.
자민당 내 ‘6월 아베 퇴진설’도
이시바 전 간사장은 아베 총리의 잇따른 코로나19 실책을 비판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자민당 내 파벌 간의 역학관계다. 이시바 전 간사장이 당내 최대 파벌인 ‘호소다 파벌’과 지나친 갈등을 벌이면 차기 총리직은 멀어진다. 당내 파벌 중에는 아베 총리가 소속된 호소다 파벌(소속 의원 96명)이 다수다. 아소 파벌(54명)·다케시타 파벌(53명)·기시다 파벌(46명)·니카이 파벌(44명)·이시바 파벌(19명)·이시하라 파벌(11명)이 뒤를 잇는다. 이시바 전 간사장의 이시바 파벌의 세는 미미한 편. 당내 다수 파벌의 지원이 없으면 총리직은 요원하다. 일본 의원내각제에서 총리 선출권은 국민이 아닌 다수당 현역 의원들에게 있다.다른 유력주자들은 아직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기시다 정조회장은 여러 차례 외무상을 지내며 정치인으로서 몸집을 키웠다. 한국에는 2015년 12월 윤병세 장관과 ‘한일 위안부합의’를 발표해 잘 알려졌다. 다만 최근 코로나19 관련 지원금 논란에서 자신의 30만 엔 선별 지급안이 철회돼 모양새를 구겼다. 아베 총리가 사실상 기시다 정조회장의 제안을 뒤집은 셈이라 당 안팎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스가 관방장관은 내각의 ‘넘버2’ 관방장관직을 안정적으로 수행해 주목받았다. 다만 1인자를 보좌하는 참모형 정치인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만약 총리가 돼도 문약한 이미지로 당내 지배력이 약했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높다.
가토 후생노동상은 아베 총리 측근으로 과거 자민당 핵심 인물이던 가토 무쓰키(加藤六月)의 데릴사위다. 당내 조정 능력이 뛰어나 포스트 아베 후보로 거론됐지만 후생노동상으로서 이번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한 약점이 있다.
아베 총리의 위기가 자민당의 위기로까지 번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NHK가 4월 14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당별 지지율은 자민당(33.3%)이 압도적이다. 무당파(45.3%)가 많지만 제 1야당 입헌민주당(4.0%)에 이어 공명당(3.3%)·공산당(2.9%) 등 야권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야당 고전 속 뜨는 지자체장들
아베 총리에 대한 비판도 존재감 옅은 원내 야당보다 유력 지자체장이 주도하는 모양새다. 요시무라 히로후미(吉村洋文) 오사카부 지사(관서지방 지역정당 일본 유신회 소속)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3월 코로나19의 대규모 확산 가능성을 예측한 후생노동성 내부 문건을 공개해 파장을 일으켰다. 아베 총리가 정치적 이유로 후생노동성의 코로나19 대확산 경고를 은폐했다는 의혹이다. 이후 도내 학교들의 입학·개학 시기를 9월까지 미루자고 주장하는 등 코로나19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중·참의원 의석은 없으나 도쿄도의회 다수당인 도민퍼스트회 소속)는 ‘도쿄 봉쇄’까지 거론해 자신이 철저한 방역에 나섰다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도내 다중이용시설 폐쇄를 두고 경제 둔화를 우려해 망설이는 중앙정부에 각을 세움으로써 ‘안일한 정부’ vs ‘방역에 철저한 도쿄도’라는 구도를 만들었다.
야당의 존재감이 극히 희박한 일본의 정치 지형에서 아베 내각이 무너져도 결론은 ‘도로 자민당’일 공산이 크다. 자민당 내 파벌 구도는 여전히 아베 총리에게 유리하다. 아베 총리가 물러난 후에도 총리직을 둘러싼 도전자들의 운신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정국에서 주목받은 지자체장들은 자민당 소속이 아니다. 중의원 의석 465석 중 284석(61.3%)을 차지한 자민당 우위가 깨지는 이변이 없는 한 총리가 되긴 어렵다. 이들의 코로나19 대책이 사실상 반(反)아베 정서를 자극하는 보여주기식 정치에 그친 점도 한계다. 코로나19에 지친 일본 국민은 아베 총리에게 등을 돌렸지만 일본 정치에 민심이 투영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양기호
● 1961년 출생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일본 게이오대 정치학 박사
● 청와대 국가안보실 정책자문위원·외교부 정책자문위원
● 성공회대 인문학부 일본학 전공 교수
● 저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과 한일관계’(공저) ‘일본의 지방정부와 정책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