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진은 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평가
동기보다 앞서기 위해 선택한 무기 = 어학
‘갤럭시의 아버지’란 별칭은 당치 않아
청력 잃고 ‘이 또한 지나간다’는 교훈 얻어
갤럭시노트7 사태 수습 원칙은 투명성·책임
‘일하며 살아가고, 살아가기 위해 일한다’
고동진 삼성전자 고문은 2022년 3월 주주총회를 끝으로 38년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현직에서 물러났다. [조영철 기자]
어머니는 여섯 살 난 막내아들을 앉혀놓고 “열 자식 중에 한 자식만 잘되면 된다”고 말했다. 일찍 철이 든 막내아들은 ‘그 자식이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는 ‘내 나이 마흔이 되면 점심때 언제든 불고기 백반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온 식구들의 지원으로 학업에 몰두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 덕에 대학에 입학했고, 1984년 졸업과 동시에 국내 최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입사 첫날부터 막내아들의 꿈은 ‘이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118억3800만 원어치의 노고
직장 생활 31년 만인 2015년 12월, 막내아들은 마침내 꿈을 이뤘다. 가진 것 하나 없던 평사원에서 사장이 된 비결이라고는 남들보다 두세 배 노력한 일 외엔 없다. 일하는 날에도 일하지 않는 날에도 자신의 효능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날로 달라져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소중한 것도 잃었다. 2006년 8월, 회의를 마친 직후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날 이후 왼쪽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내의 만류에도 보청기를 끼고 회사 생활을 이어갔다. 청력을 잃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곤욕스러운 순간에 직면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직장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6년여간 선봉에서 조직을 진두지휘하던 그는 2022년 3월 주주총회를 끝으로 38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했다. 회사는 그에게 그해에만 118억3800만 원(급여·상여·퇴직금 포함)을 지급했다. 한 사람이 38년간 회사에 바친 노고의 가치를 단순히 돈으로 환산하기가 저어되지만, 숫자만큼 확실한 것이 또 있을까. 고동진(62) 삼성전자 고문이 삼성에서 흘린 땀방울의 가치는 118억3800만 원 이상일 터다.
퇴직 후 편하게 사는 쪽을 택할 법한데, 고동진 고문은 정확히 1년 4개월 뒤 후배 직장인들을 위한 책 ‘일이란 무엇인가’(민음사)를 출간했다. 제대로 된 멘토의 조언이 목말랐던 직장인이 많았던지 출간 1주일 만에 1만 부가, 한 달여 만에 2만 부가 팔려나갔다. 독자 가운데 “직장인은 ‘회사 노예’ ‘월급 노예’ 같은 단어들로 폄하될 대상이 아니다” “직장인들은 개인, 회사, 더 나아가 국가경제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성실성과 꾸준함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멋진 사람,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책 속 문구에 위로받았다는 후기도 적지 않다.
보통은 잊고 사는, 일의 본질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듣고자 9월 초 서울 한남동 자택으로 그를 찾아갔다.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모여 산다는 고급 주거단지의 삼엄한 경비를 통과하고 공용 커뮤니티센터 회의실에서 그와 마주했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에 사람 좋은 눈웃음, 다부진 체격에서 인생의 정점에 오른 노신사의 여유가 느껴졌다.
퇴임한 CEO들은 동종업계 회사를 설립하거나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는데, 퇴임 후 첫 행보로 출간을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출간도 후학 양성과 같은 맥락이죠.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퇴임 이후 고향에 돌아가 서원을 세우고 저술 활동을 했으니까요. 은퇴 전부터 막연하게 생각은 했습니다. 2021년 사업부장에서 물러나면서 여유가 생겼고, 1주일에 2번씩 신입사원, 학부생, 석사 등 9명 정도와 점심 간담회를 했어요. 그때 질문 하나씩을 가져오라고 해서 즉문즉답을 했죠. 인사부에서 기록을 다 남겼고, 지난해 미국 출장길에 자료를 쭉 살펴봤어요. 우리 삼성은(고동진 고문은 ‘우리’ 삼성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집단으로 그루핑돼 있습니다. 삼성 내부에서 나눈 도움 될 만한 이야기들을 삼성 밖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어요. 20대 초반에 안병욱 교수님이 쓴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 역시 대화하는 멘토로서 도움을 주고 싶어요. 더 정확히는 38년간 삼성과 사회로부터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은퇴란 시속 200~300㎞로 달리다가 60~70㎞로 달리는 기분이라고 했는데, 현재 삶은 만족스러운가요.
“독일을 여행할 때 아우토반에서 시속 200㎞로 달려봤어요. 그때는 아내와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있으니 앞만 보고 운전했죠.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였어요. 이제 속도를 늦추고 보니 주변 풍경이 보여요. 가족, 형제, 함께했던 선배, 동료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퇴임하고 고문으로 지내면서 연락 끊겼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있어요. 주례도 세 번이나 섰습니다(웃음).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젊은 대표가 자문을 구하기에 시간을 내주기도 했죠.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부탁은 거절을 못 하겠어요. 모두 개인적인 환원이라고 생각해요. 나쁘지 않은 일상입니다.”
50환과 돼지껍질의 추억
고동진 고문은 재차 “개인과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환원하려면 받은 게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이룬 성공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노력해 쟁취한 성공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주변 환경, 가족의 응원, 회사의 지원 등 어느 하나 도움 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어린 시절부터 자의식이 강했던 듯합니다. ‘열 자식 중 한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어머니 말씀을 새겨듣고 ‘불고기 백반’을 매일 먹는 삶을 꿈꿨다고 했는데요. 소년 고동진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사람의 인생은 주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제겐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이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아직도 기억나는데, 아버지께서 일을 마치고 교통비 50환을 아끼려 종로에서 아현동까지 걸어오셨어요. 그때 50환이면 밀크캐러멜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그런 아버지를 따라 형제들도 다 절약하며 살았죠. 어머니께서는 제게 늘 ‘한 자식만 잘되면 된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커서 형제들한테 물어보니 아무도 못 들었다는 거예요(웃음). 6남매 중에 막내가 제법 공부를 잘하니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요. 부담이 되기보다는 ‘꼭 지켜야 할 약속’이라고 생각했어요. 커서는 목표를 세웠죠. 초등학교 때 제일 많이 먹은 게 돼지껍질이었거든요. 아버지가 모란시장에서 돼지비계를 사오시면 작은형이 털을 다 벗겨서 나눠 먹었어요. 불고기 백반은 특별한 날 먹는 상징적 음식이었는데, 중학교 때 마흔이 넘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을 만큼 성공하겠다고 다짐한 거죠. 그때는 안정된 삶을 원했으니까요.”
성균관대 산업공학과 졸업과 동시에 삼성전자에 입사했는데, 입사 초 사장을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시대 분위기였는지 특별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2년 전에 신입사원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여기서 사장을 꿈꾸는 사람이 있느냐고. 딱 1명이 손을 들더군요. 다 같이 박수치며 응원해 줬습니다. 제가 입사했을 때는 사장님이 강연을 했어요. ‘나중에 나도 사장이 돼서 강연하면 멋지겠다’ 생각했어요. 1984년에 입사한 그해 이병철 회장이 일본에서 ‘도쿄 구상’을 했습니다. 저도 부산에 내려가서 이틀 동안 나오지 않고 30세부터 60세까지 인생 로드맵을 짰어요.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족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목표를 높게 잡으면 부사장까지는 하겠지 싶어서 처음부터 사장으로 잡았습니다.”
직장인의 표본이 된 남자
고동진 고문은 입사 초부터 남들과 달랐다. 회장이 기업의 미래를 고민하며 로드맵을 짤 때, 그는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며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고 허황된 꿈만 늘어놓은 건 아니다. 성실함은 기본, 자기 객관화도 철저히 했다. 신입사원 당시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깨닫는 일이 있었다. 사무실 이삿날 누구보다 열심히 짐을 날랐는데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동기가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얼굴로 일본어 번역 업무를 마치고 나타났다. 뒤따르던 상사에게서 “고동진 씨는 기대가 컸는데, 아직 뭐가 잘 안 되나?”라는 말을 듣고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그날 이후 퇴근 후엔 일본어를 밤새워 독학하고, 주말마다 이태원에 가서 실전 영어를 익혔다. 회사 일도 먼저 찾아서 효율적으로 처리했다. 상사에게 매일 ‘50초 브리핑’으로 업무보고를 했고, 퇴근 전에는 다음 날 할 일을 정리해 ‘투 두 리스트(To do list)’를 만들었다. 일을 찾아서 하는 사원으로 소문이 나자 상사들이 그를 찾았다. 통역 없이 영어와 일어를 하게 되자 회사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영국 서섹스대 기술정책학 석사를 취득하고 삼성전자 유럽연구소장, 무선사업부 개발관리팀장, 무선사업부 기술전략팀장을 두루 거쳤다.
‘어학은 지갑 속 10장의 마르지 않는 수표’라고 했는데, 주말까지 반납하며 남과 다른 무기를 만들 당시 기분이 어땠나요.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대를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대입 때 전기 대학에서 떨어지고 후기 대학 중에 가장 좋은 성균관대를 갔습니다. 부모님이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는데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우시는 걸 봤습니다. 꼭 갚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 일은 동기들보다 50% 더하면 됐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죠. 해외 유학을 가려면, 과장 이후 주재원으로 가려면, 사장을 하려면? 어학이 답이었습니다.”
관리자로서 평사원일 때의 자신을 돌아보면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그 당시 선배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1990년 삼성전자가 삼성반도체와 합병하면서 종합기획실로 발령이 났는데 회식 자리에서 ‘고동진 대리는 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거기 가서도 성공할 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못 할 이유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 생각에 끌려갑니다. 저는 어떤 일이 닥치든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일은 하면 된다. 안 될 수도 있겠지. 그때는 또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영국 유학과 주재원 시절, 남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통해 어떤 소득을 얻었나요.
“1990년대 초반 2년간의 유학 생활을 통해 배운 건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때까지 장유유서가 심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께서 저더러 퍼스트네임을 불러도 된다기에 놀랐습니다. 교수님 댁에서 매주 부부동반 식사를 했어요. 나이 들어서 간 유학이었지만 공정하게 같은 인격체로 대우해 주는 것에서 어떤 지식보다 많은 걸 깨달았어요. 2000년대 중반 주재원 생활을 할 때는 글로벌 시장에서 부족한 점을 느꼈습니다. 당시 유럽 시장은 노키아, 모토로라, 지멘스, 에릭슨이 점령할 때였어요. 노키아를 보면서 ‘지금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를 이길 수 있을까?’ ‘한국에 사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소프트웨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사고의 폭도 넓히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2020년대 초까지, 고동진 고문은 삼성전자에서 한길을 걸었다. 삼성이 휴대전화 사업에 사활을 걸었던 시기, 10여 년간 개발관리와 기술전략을 담당했고 IM(IT·Mobile)부문 사장 취임 후 갤럭시 스마트폰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S펜슬’ ‘삼성페이’ ‘삼성Knox’ 등 삼성전자가 굵직한 전환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두루 정통한 인물이기에 가능했던 결과라는 평가를 받는다.
갤럭시와 생사고락을 함께
‘갤럭시의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피처폰부터 스마트폰까지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혁신을 이끈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갤럭시의 아버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 앞에 많은 훌륭한 사업부장님들이 계셨습니다. 이기태 사장(피처폰), 최지성 사장(DM), 신종균 사장(스마트폰 하드웨어) 등에 이어 제가 6년여 동안 사장을 맡았을 뿐이죠. 다만 달랐던 건 소프트웨어에 좀 더 신경을 썼다는 겁니다. 삼성 갤럭시는 구글OS를 사용했는데 갤럭시만의 차별화가 필요했고, 연구 끝에 삼성페이와 삼성Knox를 만들었죠. 개발 과정에서 전문가 후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옳다고 생각되면 일할 수 있게 밀어줬습니다.”
2006년 해외상품기획실 무선개발관리팀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청력을 잃었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됐을 듯한데, 어떻게 극복했나요.
“지금도 기자님 목소리가 창호지를 하나 댄 채로 말하는 것처럼 들려요. 그때는 아내가 일을 그만두라고 했어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년만 더 다녀보고 결정하겠다고 하고 복귀했는데 보청기를 알게 됐어요. 끼고 일하니 할 만했습니다. 그 무렵 근무 환경도 바뀌고, 리더도 바뀌면서 적응해 나갔습니다. 배운 게 있다면 ‘이 또한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동진 고문은 40~50대 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1년 평균 180일간 해외 출장을 다녔다. 잦은 비행에 매번 바뀌는 낮밤, 몰아치는 일정에 몸이 성했을 리 없다. 한번은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약속 시각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동행한 상사가 연락이 닿지 않으니 놀라서 경찰을 불러 호텔 방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당혹스러움보다 몸에 큰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날 이후 고동진 고문은 건강을 더욱 철저히 챙기고 있다. 이 일 이외에도 그에겐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더 있다. 그가 IM부문 무선사업부 부장(사장)으로 취임하고 이듬해인 2016년, 갤럭시노트7 배터리 폭발 사건이 터졌다.
회사 내부적으로 큰 이슈였겠지만 국민들도 ‘국내 최고 기업이 쓰러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컸습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삼성에 일류 기업의 격을 느낀 사람도 많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면 어떤가요.
“(고개를 저으며) 회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만 마무리하고 나는 떠난다’고 다짐했을 정도로 중차대한 문제였어요. 리더의 역할이 중요한 때였죠. ‘원칙을 정하고, 원칙을 흔들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그 원칙이란 ‘투명성’과 ‘책임’이었습니다. SNS가 활성화된 시기라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임직원이 납득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야 했고, 소비자·거래선·사업자 등 회사 안팎으로 똑같은 메시지가 나가야 했어요. 이게 첫 번째, 투명성이죠. 또 해당 제품에 대한 전면 리콜을 실시했습니다. 이게 두 번째, 책임이었습니다. 아직도 고마운 게 당시 무선사업부 임직원들이 하나로 뭉쳐서 사태를 수습한 거예요. 안전과 품질에서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
고동진 고문는 38년 직장 생활사를 회고하며 “직장은 내 노력의 대가로 급여를 받는 프로들이 모인 곳” “우리는 일하며 살아가고, 살아가기 위해 일한다” 등의 말을 했다. 그의 말은 일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한 16년차 기자에게 여운을 남겼다.
인간에게 일이 주는 가치가 매우 큰 듯합니다. 일이 하나의 유기체라면 38년을 함께한 일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은가요.
“일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끔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생각해 보면 일이 있어서 살아왔고, 보상을 받았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덧붙여 그런 일 자체를 준 선배들, 상사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남은 인생은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후배 직장인들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급여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이 애국자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후배들에게 ‘잘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정혜연 차장
grape06@donga.com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여성동아, 주간동아, 채널A 국제부 등을 거쳐 2022년부터 신동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부동산, 재태크,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미있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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