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이완구 총리후보자가 ‘충청 민심’ 덕에 기사회생하면서 충청 대망론이 재점화했다. 충청 인구가 호남 인구를 앞질렀고, 세종시 이전과 지역경제 급성장으로 자신감도 충만하다. 이완구, 반기문, 안희정 등 충청 출신 인사들의 약진은 든든한 날개까지 달아줬다. 막강 충청 파워의 실체는?
2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이 후보자가 선서를 하고 있다.
신년교례회에서 오장섭 충청향우회 총재는 “충청도가 21세기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다. 충청도가 이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며 분위기를 띄웠고, 충청권 광역단체장들은 충청인의 자부심을 북돋웠다.
“충청도 양반 동네가 충청인들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전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엄청도’로 발전하고 있다. 600년간 이어온 수도 서울에서 경제부처가 세종시로 많이 이전하면서 경제 중심의 신수도권으로 태어났고, 역사상 처음으로 충청 인구가 호남을 추월하면서 영충호 시대를 맞고 있다.”(이시종 충북지사)
“이제 드디어 충청인들이…”
이날 향우회 신년교례회에 참석한 전직 고위공무원 A씨는 2월 25일을 ‘충청인들이 대한민국 정치 중심지를 점령한 상징적인 날’이라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 신년교례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충청’의 ‘충(忠)’은 ‘중심(中心)’을 뜻하는 만큼 이제는 충청도가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 거라며 서로를 격려했다. 충청 출신 중진 정치인들이 여야 가리지 않고 머리를 맞대 우리의 꿈(충청 출신 대통령 탄생)을 이뤄야 한다는 데 의기투합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결속력이 아주 강해졌다. 예전에는 모여도 정치 얘기는 거의 안 했는데, 이번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이 생겼다. 45년 전 상경해 공직생활하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설움을 당했는데, 이제 드디어 충청인들이….”
A씨에 따르면, 참석 인사 대부분은 이완구 총리의 인사청문회 얘기와 충청 출신 정치인들의 대권 가능성 등 주로 충청 대망론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충북 음성 출신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수도권과 젊은 층에게 인기가 높고, 앞으로 남북 문제나 통일 분야에서 성과를 내면 대망론을 실현할 수 있다는 등의 선거전략 얘기도 오갔다. 충청도의 급성장으로 충청 인구가 호남 인구를 넘어선 만큼 이제 그에 합당한 정치·경제적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는 게 A씨의 전언이다.
그의 말마따나 한동안 ‘뜬구름’ 같던 충청 대망론은 이완구 총리의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불이 제대로 붙었다. 청문회에 앞서 역대 총리 후보자들을 낙마로 이끈 단골 소재인 병역 기피와 부동산 투기 의혹을 비롯해 교수 특혜 채용, 차남 건강보험료 미납 의혹 등이 불거졌고, 언론사 인사와 보도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발언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이 총리 후보자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2월 11일 “웬만하면 넘어가려 했는데 더는 그럴 수 없게 됐다”며 낙마시킬 의지를 내비쳤고, 새누리당도 이 후보자의 인준 찬성을 만장일치 당론으로 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안대희, 문창극 전 총리후보자의 ‘낙마 트라우마가’ 짙게 드리워진 순간 돌연 ‘충청 민심’이라는 구원의 손길이 뻗쳐왔다. 당시 이 후보의 차기 총리 적합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10%포인트 이상 높았지만, 이후 충청 지역 민심은 달라졌다.
“호남 의원이 질문한다”
한국갤럽이 이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첫날인 2월 10일부터 12일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충청지역에서 이 후보자가 ‘차기 총리로 적합하다’는 응답 비율은 33%로 ‘부적합하다’는 응답(38%)보다 5%포인트 낮았다. 그러나 리얼미터가 2월 13일 충청지역 여론조사를 한 결과 ‘총리로 적합하다’는 응답 비율은 무려 65.2%로 나타나 ‘부적합’(29.2%) 응답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인사청문회를 거치며 ‘적합’ 의견이 두 배 가까이 급상승한 것.
여론분석 전문가들은 2월 11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강희철 충청향우회 명예회장이 전북 순창 출신의 새정치연합 진선미 의원의 질문에 “충청 총리 후보가 나오는데 호남분이 계속 질문한다”고 한 발언이 반전의 시작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1월 새정치연합 전당대회 과정에서 당시 문재인 당대표 후보가 한 ‘호남 총리 발언’이 오버랩되면서 충청지역 여론을 움직이게 했다는 분석이다. 결국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충청 민심을 의식한 야당은 표결 불참 대신 자유투표를 선택했고, 임명동의안은 찬성률 52.7%(재석의원 281명 중 찬성 148명)로 가결됐다.
전직 고위공무원 A씨도 “향우회에서 만난 인사들은 ‘강희철 명예회장을 국회의원 시켜야 한다’며 내놓고 강 명예회장을 칭찬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건국 이래 충청 출신 직선 대통령이 없었고, 수도권·호남 대(對) 영남의 세력균형 정국에서 캐스팅보트 노릇에 머물렀던 오랜 ‘한(恨)’이 대망론의 기저에 흐른다는 게 그의 분석.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은 ‘동일시 개념’으로 충청 대망론을 분석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보통은 이성적 판단과 감성적 판단을 병행한다. 평소에는 이성적 판단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이지만 불안한 상황에서는 주로 감성적 판단을 한다. 충청도 사람들은 ‘여론이 나빠져 충청도 사람(이완구)이 총리를 못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감성적 판단을 할 수 있다. 가족이 잘못하더라도 일단 감싸주는 감성적 판단을 하는 것처럼, 충청인들은 곤경에 처한 이완구 후보를 어려움에 처한 자기네 형, 삼촌처럼 느낄 수 있다. 일종의 동일시 현상이다. 과거에 ‘핫바지론’이 먹힌 이유도 비슷하다.”
역대 선거에서 충청 대망론의 원조는 김종필(JP) 전 자유민주연합 대표였다. 지방선거가 한창이던 1995년 6월 13일 충남 아산의 한 유세장에서 JP는 이른바 ‘핫바지론’을 꺼내 들며 감성에 호소했다.
“경상도 사람들은 충청도 사람들을 핫바지라고 한다. 아무렇게나 대접해도 소견도 없고, 오기도 없어 그런 거다.”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의 민주자유당을 뛰쳐나온 JP는 자민련을 만들어 지방선거에 뛰어든 터였다. 그의 발언은 충청인들의 잠재된 소외감에 불을 지폈고, 이를 발판으로 JP의 자민련은 충청권 광역단체장 3석을 싹쓸이하고 강원도지사를 당선시키는 저력을 드러냈다. 강력한 지역 맹주와 지역 정당이 출현한 것이다.
이후 역대 선거에서 충청도가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캐스팅보트로서 맹활약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7년 대선에서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등에 업은 DJ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39만여 표 차이로 따돌렸다. 전체 득표 차에서 충청권 비중은 27.7%(10 만여 표)를 차지했다. 5년 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맞붙은 대선에서는 노 후보가 충청권에서만 25만6286표(전체 57만0980표 차)를 더 얻었다.
“파워에 합당한 대우를!”
1995년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종필 당시 자유민주연합 총재가 충남 천안에서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역대 선거 때마다 수도권 40대와 충청 표심(票心)이 선거 승리의 열쇠였다. 이른바 ‘중원 장악론’이다. 지금까지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면서 표가 갈렸지만, 충청 출신의 대선후보가 전국적 지지를 얻는다면 호남 못지않은 압도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충청 출신 거물급 인사들의 등장은 분명 대망론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해부터 충청 대망론의 상징으로 부상했고, 여전히 차기 대권 레이스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3선(選)의 이완구 총리가 큰 문제 없이 총리직을 수행하고 내년 총선 성적표도 괜찮을 경우 친박(친박근혜)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6선의 이인제 의원(충남 논산)과 3선의 정우택 의원(출신지는 부산이지만 충북 인사로 분류), 강창희 전 국회의장(대전), 충남도지사 출신의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충남 공주) 등 새누리당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물급 충청권 인사도 많다. 이들이 한목소리로 힘을 실어주면 충청 대망론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 야권에서도 안희정 충남지사(충남 논산), 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던 이인영 의원(충북 충주) 등이 잠룡(潛龍)으로 거론된다. 이명박 정부 때의 박근혜 후보 같은 확실한 차기 대권주자가 현재 없다는 사실도 충청 대망론을 부채질한다.
충청 대망론의 또 다른 한 축은 급성장한 지역 파워에서 찾을 수 있다. 이시종 충북지사는 2013년 8월 ‘이젠 영충호 시대’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5월 이후 충청권 인구가 호남권 인구를 추월해 영호남 중심의 지방 구도가 이젠 영충호 시대로 바뀌게 됐다”고 했다. 충청권의 비중과 구실이 그만큼 커졌다는 점을 강조한 것.
충청지역 인구는 2013년 5월 주민등록 기준 525만136명으로, 건국 이후 처음으로 호남 인구(당시 524만9728명)를 앞질렀다. 차이는 갈수로 커져 지난 2월 기준 충청 인구는 534만370명(대전 152만9431명, 세종 16만9762명, 충북 157만8253명, 충남 206만2924명)으로 호남의 525만1288명(광주 147만7340명, 전남 190만3220명, 전북 187만728명)보다 8만9082명 많다.
충청 인구가 급증한 것은 지역경제발전과 세종시 이전 영향이 크다. 통계청에 따르면 호남권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2003년 75조2970억 원에서 2011년 126조4990억 원으로 늘어난 데 비해 충청권은 같은 기간 81조1030억 원에서 151조4400억 원으로 불어나 증가 폭이 더 컸다. 2013년에는 176조 1488억 원에 이르렀다.
이 기간 충남의 지역경제 성장률은 천안·아산지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부문의 성장, 서산·태안·당진 지역의 제철·자동차 부문이 견인하면서 9.4%에 달했다. 2%대인 서울·부산을 압도한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여기에 정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으로 18개 부처 1만3000명의 공무원이 근무하는 대한민국 행정중심지로 거듭났다. 덕분에 세종시 인근 대전 유성구 지역 호텔의 투숙률이 평균 50%대에서 80%대로 치솟기도 했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충청 파워 급성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충청지역 파워가 세지면서 그동안 ‘정치 변방’에 머물렀던 충청인들에게 강한 자부심을 심어준 건 사실이다.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는 지역 정서가 정치적 요구로 분출되는데, 이에 따라 충청 출신 의원들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나 중요 상임위원회에 충청 출신을 배정해달라고 요구한다. 지갑이 두둑해지고 ‘쪽수’가 많아지다보니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 속에 충청 대망론이 용틀임을 하고 있다.”
大望論, 大亡論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는 “사람들은 열등감으로 인한 심리적 긴장에 대한 보상으로 과시 등 우월감을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손석한 원장은 “아들러의 관점에서 보면, 권력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부를 쌓은 뒤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나를 알아달라’는 요구가 집단으로 표출되는 게 충청 대망론에 깔린 심리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치권은 충청지역 인구 증가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이 2013년 11월 “충청권 인구가 호남권보다 많은데 국회의원 수는 호남(30명)에 비해 5명 적다”며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냈고,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현재의 선거구는 국민의 평등권에 위배된다”며 공직선거법상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정치권은 선거구 개편작업에 나섰다. 정 의원은 “영호남은 상수(常數), 충청은 변수(變數)라는 전통적 캐스팅보트론은 이제 덩치가 커진 충청에 맞지 않는 옷이다. 이젠 ‘충청권 대접론’ ‘충청권 역할론’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영남은 대구·경북, 부산, 울산, 경남으로 나뉘어 정치 색채가 다양하고, 호남도 광주·전남과 전북이 독자성을 띠지만, 충청은 단일한 정치공동체 성격을 지녔다는 점도 대망론의 기대를 높인다. 박동원 대표는 “영남 대망론, 호남 대망론은 없지만 충청도를 하나로 묶는 충청 대망론이 호명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충청 출신 대선후보가 전국적 지지를 획득한다면 호남 못지않은 압도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충청 대망론이 현실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도 많다는 게 선거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충청 대망론이 충청인에게는 감성적 호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자칫 지역주의로 비칠 경우 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출향 인구나 표 결속 면에서 봤을 때도 지역주의가 작동할수록 충청지역은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고 한다.
이완구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할 즈음 충청사모회 등의 명의로 내걸린 ‘충청총리 낙마하면 다음 총선 ·대선 두고보자’는 현수막이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완구 총리와 안희정 지사를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의 다음과 같은 분석이 예리하다.
유력 주자들의 과제
2월 11일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하는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왼쪽)과 증인 선서하는 강희철 충청향우회 명예회장.
충청지역은 지금까지 가치 중심의 투표 행태를 보인 만큼, 전국적인 지지를 받은 충청 출신 인물이 대권후보가 되지 않으면 대망론이 현실화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EAI) 여론분석센터 수석연구원은 “충청 민심은 영호남처럼 한쪽으로 쏠리기보다는 충청의 이익을 실현해줄 후보를 선택해왔다”며 “충청 대망론이 현실화하려면 여야 중 한 곳에서만 전국적 지지를 얻는 유력한 충청 후보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경우의 수는 희박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차기 대망론에 근접한 후보들도 지난한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반기문 총장은 오랜 관료생활로 인한 현실부합형 행태와 부족한 권력의지 극복, 이완구 총리는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 회복과 내년 총선 승리, 안희정 지사는 전국적 인지도 상승과 친노 권력투쟁에서의 승리 등 저마다 쉽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명분으로는 중원 소외론, 충청 대망론을 내세울 수 있겠지만, 대권은 현실”이라며 “대망론이 현실화하려면 수도권에서 영·호남 영향력을 대체하는 ‘수도권 영향력’을 갖춰야 하고, 보완재로서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어야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정부세종청사와 주변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