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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극장] 광해군을 압도한 明나라 역관의 실체

  • 윤채근 단국대 교수

[환상극장] 광해군을 압도한 明나라 역관의 실체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한양 돈의문 서북쪽 모화관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단은 마치 도둑처럼 숨죽인 채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그들은 조선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조선 왕이 보낸 영접사는 저물녘이 돼서야 겨우 나타나 명나라 역관 주융기를 몰래 불러냈다.

“주 대인! 우리 사정을 천사 어르신께 잘 말씀해 주시오. 알다시피 후금에서 보낸 사신단이 태평관을 먼저 차지한 채 벌써 보름 넘게 버티고 있소이다. 태평관보다야 허름하지만 이곳도 머무실 만할 거요. 그렇다고 우리 대궐을 내드릴 순 없지 않소이까?”

쓸쓸한 미소를 머금은 융기가 달빛이 들지 않는 건물 그늘 속으로 몸을 감추며 대답했다.

“조선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런 대접은 서운합니다. 비록 정식 사절단이 아닌 밀사지만 그래도 우린 황제께서 보낸 칙사입니다.”

“잘 알다마다요. 한데 후금인을 소홀히 대접하지 말라는 금상의 엄명이 계셨소이다. 게다가 지금 오신 천사께선 밀사 아니시오? 비밀스러운 임무를 띠고 오신 게 아니시오? 조선 복장에 바닷길로 오신 거 하며, 아무튼 양국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요.”



한참 너스레를 떨던 영접사는 급히 가마를 불러 돌아가려 했다. 명나라 사신을 하늘에서 온 사신이란 뜻으로 천사라 부르며 극진히 떠받들던 옛 태도와는 딴판이었다. 융기가 급히 물었다.

“경복궁에는 언제 갈 수 있습니까?”

가마에 오르려다 말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영접사가 속삭였다.

“경복궁은 임진년 전쟁 때 다 타버리고 나서 그대로 방치돼 있소이다. 금상께선 창덕궁에 머물고 계시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지요?”

고개를 끄덕인 융기가 떠나려는 가마를 향해 급히 소리쳤다.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내 예전에 임진년 전쟁 때 수군으로 참전했다가 사귄 조선인 벗이 하나 있는데, 안부가 궁금합니다.”

멈춘 가마 위에 앉은 채 미묘한 표정이 된 영접사가 물었다.

“그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권필입니다. 우리 명군 기지가 있던 한강진에서 만나 자주 노닐었습니다.”

영접사는 물끄러미 융기를 바라봤다. 한참을 상대를 관찰만 하던 그가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그는 죽었소.”

불타 버린 모화관의 유일한 생존자

불은 삽시간에 번져 명나라 사신이 묵던 모화관 객사 전체를 태워버리고 아침에야 가까스로 꺼졌다. 밖으로 탈출하려던 사신 일행은 누군가에 의해 문마다 설치된 자물쇠에 가로막혀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유일한 생존자는 주융기였다.

융기는 한강 주변 지리를 손바닥 안처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잠을 설치던 그는 옛 친구 권필의 집이 있던 마포나루 현석촌을 향해 무작정 말을 몰았다. 조선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민심은 사나워져 있었다. 길을 묻는 그에게 어느 누구도 친절하지 않았다. 잿더미에 다시 지어진 민가는 전란 전보다 높이가 현저히 낮아져 있었는데, 언제든 버리고 피난할 수 있어 쓸모없는 겉치레를 최대한 생략한 듯했다.

권필의 집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안씨 성을 가진 새 주인은 다행히 권필의 죽음에 대해 소상히 말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 양반 임진년 난리 한참 뒤 강화도에 숨어 사셨습니다. 친구시라니 대국 분께서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워낙 술 좋아하시고 주사도 심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이 다 머리를 절레절레했습죠. 그래도 한양 뜨르르한 양반이 죄 친구였으니 대단한 겁죠. 어느 날 강화도로 가셔서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는데, 또 갑자기 돌아오셔서는 똑같이 술로 날을 보내시더라 이 말입니다.”

“술 때문에 죽은 거요?”

“아니오! 나라님께 밉보여 곤장을 세게 맞으시고, 거 뭐야, 아무튼 멀리 귀양을 가다가 흥인문 밖 객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좋아하던 술 한 동이를 단숨에 들이켜고 말이죠.”

작은 주안상을 차려 툇마루에 내온 집주인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눈치였다. 탁주 한잔을 걸친 융기가 다시 물었다.

“성품이 광달했으니 벼슬을 포기하고 포의(布衣)로 산 건 이해가 가오. 하지만 왕에게 미움을 받을 일이 뭐가 있을지 모르겠소만.”

한참을 손만 비비던 상대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술김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전 그분 그런 점을 좋아했습니다만, 그 양반 타고난 반골 아니셨습니까? 아무나 맘에 안 들면 막 욕해 대고 말입니다. 나랏님 처남과 척이 지셔서 원수가 됐다지 뭡니까? 쇤네가 아는 건 뭐 그 정도까지입니다.”

융기는 먼동이 터올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말고삐를 잡았다. 다시 돈의문 쪽을 향하려는데 집주인이 마을 어귀까지 배웅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시 전쟁이 터지지는 않겠습죠? 싸움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대국 분께서 이런 천한 데까지 다 와주시고, 이제 정말 태평성대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쫓기는 이방인

모화관을 찾은 형조참판 유희분은 시신이 한 구 빈다는 말에 격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잠자코 지켜보던 영접사가 살며시 다가와 속삭였다.

“떼놈 한 놈쯤 뭐가 문제겠습니까? 주융기라는 그 역관인데 밤에 관소를 벗어났다고 합니다. 가급적 조용히 처리하시지요.”

상대 가슴을 벌컥 밀어제친 희분이 외쳤다.

“내가 뭐가 무서워 조용히 처리해야 되지? 내가 누군데? 누군데, 잉? 그 자식이 권필이 친구라고 했다며? 조선말을 잘하니 숨기도 잘할 거 아냐? 그놈을 빨리 잡아! 잡으라고, 잉?”

한숨을 내쉬고 몇 걸음 물러선 영접사를 향해 포졸 하나가 다가왔다. 포졸로부터 무언가 보고받은 영접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희분에게 급히 말했다.

“놈을 발견하긴 했는데, 놓쳐서 쫓고 있답니다. 이 근처까지 왔다가 서교 쪽으로 도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판께서는 어서 주상께 이 사실을 고하셔야 될 듯합니다. 일이 커질 수도 있겠기에.”

영접사를 노려보던 희분이 가래 낀 소리로 말했다.

“나와 매형은 이심전심으로 통해. 그거 알지, 잉? 이 일은 절대 커지지 않아.”

모화관을 벗어난 희분은 곧바로 창덕궁 인정전을 찾았다. 광해군은 처남인 유희분의 설명을 들으며 계속 침묵했다. 여간해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왕은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불안해진 희분이 고개를 조아리며 덧붙였다.

“정식 사절도 아닌 밀사들이었습니다. 가뜩이나 후금 사신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우리 쪽을 염탐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선도 이쯤에서 그들에게 신의를 보여줘야 된다 이겁니다. 게다가 화재가 났다는데 뭘 어쩌겠습니까? 명나라에는 적당히 둘러대고 다음에 정식 사절이 오면 이번엔 그쪽도 극진히 대해 주면 될 일이라 생각됩니다.”

눈을 감고 있던 광해군이 느릿느릿 말했다.

“처남이 놓친 게 있어요.”

고개를 들어 용상을 멀뚱히 쳐다보는 희분을 향해 왕이 다시 천천히 속삭였다.

“그들, 밀사들 말입니다. 우리 조선을 다시 세워준 은혜, 그러니까 그들 말로 ‘재조지은’을 갚으라는 요구를 하려 또 온 것이었나요?”

“그렇지 않을까요?”

“제대로 모르겠다? 그건 제대로 알고 일처리를 해도 했어야지.”

희분이 이번엔 목청을 돋워 말했다.

“그거야 불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군자금과 원병을 보내달라거나, 아니면 후금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었겠지요!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지금 후금의 기세로는 명을 치고도 남을 정도 아닙니까?”

고개를 숙이고 오래도록 말이 없던 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쫓고 있다는 명나라 역관 말인데, 반드시 살려 내 앞으로 데려오세요.”

“당장 죽여 입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그깟 역관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갑자기 벌떡 일어선 왕이 주먹을 움켜쥐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후금이 아무리 무서워도 명은 여전히 대국이에요. 난 숙의를 거치지 않은 일은 결코 하지 않아요. 빨리 잡아 후환을 없애되, 조선에 온 이유는 알아야겠어요. 살려서 데려오도록 하세요.”

한강진의 재회

서교 산중턱에 고립돼 좌포청 포졸들에게 생포되기 직전에 놓인 융기는 말을 버리고 뛰기 시작했다.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한양 구석구석을 누벼본 그는 서교에서 마포나루에 이르는 샛길을 잘 알고 있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내달리는 그의 귓전으로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화살 소리가 들렸다. 출동한 조선 궁수들은 틀림없이 그를 죽일 심산이었다.

그저 살려는 본능에 따라 현석촌 권필의 옛집을 향해 달리던 그는 어느 순간 추격병 소리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그의 등 뒤로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몸을 낮춘 융기는 이번엔 자신의 전방을 의심에 차서 노려보았다. 역시 적막만 감돌고 있었다.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현석촌 어귀로 돌아온 그는 절망에 빠져 골목길 구석에 몸을 숨겼다. 당장 살자고 그곳에 이르렀지만 조선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화급히 몸을 돌리자 지난밤을 함께 새운 집주인 안씨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둘은 말을 잊고 한참을 마주 보고만 있었다. 안씨가 먼저 말했다.

“천운이군요. 살아 계시다니! 절 따라 오십시오.”

안씨는 강변을 따라 빠른 속도로 걷고 또 걸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융기는 그저 묵묵히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조선에 파병돼 가장 오랜 기간 주둔했던 한강진이었다. 안씨는 융기를 한강진 주점 한 곳에 인계하곤 말했다.

“여기 계시면 도와주실 분이 찾아올 겁니다. 제겐 아무것도 묻지 마십시오. 지금부턴 본 것도 들은 것도 없는 몸입니다.”

안씨가 사라지고 다시 홀로 남은 융기는 불타버린 모화관에 잠들어 있던 사신단이 염려돼 견딜 수가 없었다. 조선 왕이 후금과 명을 대등하게 다루며 줄타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사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주점 입구가 살짝 열리며 조선인 한 명이 조심스레 들어섰다. 융기가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그대는 이안눌, 이 승지 아닌가?”

다가온 상대는 가볍게 융기를 껴안고 맞은편에 앉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일세. 살아 있으니 이리 만나는군.”

반가운 마음을 뒤로한 채 융기가 다급히 물었다.

“도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긴 한숨을 내쉰 안눌이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자네를 이리 데려온 안막둥이란 자는 우리 집 외거노비일세. 그 자 덕분에 자네 도착 소식을 정오 무렵 알았지. 한데 궐내각사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이상한 소식이 들려오는 거였어. 모화관에 화재가 나고 서교 쪽에선 추격 소동이 벌어졌다고 말이야.”

“추격은 어느 순간부터 중단됐네.”

“중단된 게 아니야. 잘 들어보게. 모화관 화재는 조선 왕이 시킨 게 아닐세. 왕의 처남인 유희분이란 탐욕스러운 자가 후금으로부터 큰 뇌물을 받고 저지른 일이야. 후금은 조선과 명을 이간질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 왔거든. 그런데 이걸 눈치챈 왕이 직접 대궐 금군을 동원해 자네를 생포하도록 명을 내렸어. 포도청 군졸들이 그래서 철수한 거네.”

“그럼 곧 금군이 나를 찾아내겠군?”

고개를 끄덕인 안눌이 초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네. 이번 밀사가 파견된 이유를 알아낼 때까진 자넬 살려둘 걸세. 하지만 왕이 자기 처남을 죽일 순 없을 테니, 그다음엔 이번 사건 증거를 말끔히 없애려들겠지.”

“금군들이 이곳으로 오나?”

슬픈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인 안눌이 천천히 대답했다.

“난 실세한 사람이야. 지금 대궐의 요직이란 요직은 모조리 북인이 차지하고 있네. 자넬 지킬 힘이 내겐 없어. 대신 혹시나 하여 안막둥을 마포로 보내 자넬 한번 찾아보라 했지. 덕분에 천운으로 이렇게 둘이 한잔 나눌 시간만은 벌었네.”

“금군은 언제 오나?”

“안막둥이가 지금쯤 대궐에 발고를 했을 걸세. 하지만 내가 잘 아는 무관에게 하라 해뒀네. 가급적 천천히 와도 좋다고 하라 했어. 우리의 옛 우정을 곱씹을 만큼 천천히 오라고.”

우리 기쁜 젊은 날

[GettyImage]

[GettyImage]

두 차례 왜군의 침략이 무위로 끝나고 조선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남산자락 묵적동에 살던 이안눌은 마포나루의 가난뱅이 권필과 전란 이전부터 죽마고우였다. 둘은 한강진 주점을 순례하며 날을 이어 통음하곤 했다. 절강성 출신 명나라 수군 장교를 만난 건 그 시절이었다.

자신을 주융기라 소개한 장교는 처음엔 필담으로 두 사람과 교제를 시작했지만 점점 조선어 공부에 빠져들었다. 명민했던 융기는 마침내 조선어를 완벽히 구사할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셋은 국적을 초월해 망년지우(忘年之友)를 맺고 한양 도성을 몇 년 동안 휘젓고 다녔다.

조선 지배자들은 그토록 험한 전란을 겪고 나서도 당쟁을 멈추지 않았다. 서인이던 권필은 관료의 삶을 깨끗이 포기한 채 당색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명문가 자제인 안눌은 그럴 수 없어 벼슬살이를 시작했는데, 그런 그를 권필은 승지라고 놀려댔다. 평생 임금 옆에서 맑은 눈과 밝은 귀로 살라는 뜻이었다.

안눌이 외직으로 한양을 비워도 권필과 융기의 우정은 계속됐다. 그러다 끝내 명군의 최종 회군이 결정됐고, 융기는 자발적으로 조선에 낙오하기로 결심했다. 조선에 잔류한 명군은 대개 파병 중에 사귄 조선 여인과 함께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곤 했다. 융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절강에 본처가 있었음에도 조선에서 만난 인연을 버릴 수 없던 그는 번민으로 나날이 시들어갔다.

융기의 번민은 다른 비극으로 인해 끝을 맺었다. 그의 조선 정인이 꽃다운 나이에 병사한 것이다. 한 줌 바람처럼 마른 융기는 마음을 조선반도에 남겨둔 채 어느 봄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융기의 귀향을 보지 못한 안눌은 권필이 쓴 소설 한 권을 받아 보고서야 그 내막을 알았다. 한 명군 장교가 조선에 파병되기 전 두 명의 고향 여성과 벌인 치정을 다룬 ‘주생전(周生傳)’이었다.

소설을 다 읽은 융기가 두 눈이 충혈된 채 안눌에게 물었다.

“이게 권필이 내게 남긴 게 맞나?”

고개를 끄덕인 안눌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맞네. 자네 얘기라고 했어. 그 친구 워낙 해학이 넘치지 않았나?”

“난 이 주씨가 아닐세. 붉을 주(朱) 자의 그 주씨네.”

“음은 같지 않나? 소설에 나오는 명나라 여인들 이름도 꼭 명나라식 이름은 아니잖은가? 그게 소설의 묘미 아닐까? 어쨌든 언젠가 자넨 돌아올 거고 그때 꼭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네.”

“내 반드시 돌아온다 말하긴 했지. 그렇다고 이런 야사를 지어 날 놀려먹다니.”

“여러 번 읽어봤네만, 그야말로 풍류가화 아닌가? 두 여인의 사랑을 동시에 얻어내다니.”

말없이 책을 어루만지던 융기가 울먹이며 다시 물었다.

“도대체 어쩌다 그 한창 나이에 죽었나? 왕의 처남 때문이었나?”

“안막둥이가 말해 줬나? 맞네. 권필 그 친구, 유희분과 여기 한강진 주점에서 우연히 만났다지 뭔가. 금상의 처남으로 패악질이 좀 심했어야지. 시비가 붙자 격분한 권필이 유희분을 두들겨 팼다고 하네. 그 뒤로 유희분이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거지. 풍자시 한 수가 빌미가 돼 곤장과 유배형을 받았지.”

두 사람은 심야의 어둠을 안주 삼아 잔을 나누었다. 어느새 미명이 다가오자 금군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융기는 야릇한 웃음을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승지. 내가 다녀올 동안 기다려주겠나?”

어리둥절한 표정의 안눌이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내 자넬 살릴 힘이 없다고 이미 말했지 않은가?”

제국의 마지막 불씨

독대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인정전에서 이뤄졌다. 광해군은 신중하지만 단호하게 물었다.

“대답만 명확하다면 살려줄 거야. 조선이 나라가 좁지 도량이 좁은 건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인 융기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조선 왕을 쳐다보았다. 두 눈은 부리부리해 야심이 많아 보였고, 입은 좁고 아래로 휘어져 인색하다는 인상을 줬다. 누구도 믿지 못해 외로울 상이었다. 왕이 물었다.

“비록 역관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조선에 파견된 수군 장교였고, 또 네 성씨는 명나라 황제와 똑같구나, 그렇치? 너희 사신의 임무가 무엇이었느냐?”

융기가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아뢰겠사오니, 소청 하나를 들어주십시오.”

왕의 눈썹이 꿈틀대더니 이내 망설임 없는 단호한 응답이 돌아왔다.

“내 처남 유희분이 얘기냐? 오호라! 네가 죽은 권필의 친구였다고 들었다. 그 복수심이 대단하겠구나, 그렇치? 한데 어쩌겠냐? 권필이는 내가 죽인 게 아니었어. 제 화병에 스스로 술 마시고 즉사했지. 그게 아니라면, 뭐 내 처남이 모화관에 불이라도 질렀다고 의심하는 거냐?”

융기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권필의 일은 제가 귀국한 이후의 일이니 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게 누구든 모화관에 불을 지른 자를 밝혀내 처벌해 주십시오.”

오래도록 융기를 노려보던 왕이 쌔근대는 아기 숨을 몰아쉬더니 속삭였다.

“네 태도가 아주 불손하다. 그리 어리석어 보이진 않는데도 말이지. 보통 믿는 구석이 있을 때나 그렇게 굴지. 한데 만에 하나 범인이 유희분이가 맞는다 해도, 내가 처남을 처벌할 사람으로 보이니? 정녕 그리 보이냐? 곧 죽을 놈이 고할 말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만용을 부리는 거냐?”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융기가 명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왕이 소리쳤다.

“조선어로 말해라!”

융기가 같은 말을 조선어로 되풀이했다.

“나 돌아가신 대명황제이신 만력제의 후손 주융기는 조선 왕에게 잠시 투탁(投託)하겠노라. 이는 지엄하신 황제의 칙명이니 정녕 어기지 말 것이며 번국으로서 존명대의를 지키길 바라노라.”

융기의 말을 멈추게 한 왕이 벌떡 일어서서 물었다.

“칙서가 있느냐?”

“모화관을 다 태웠으니 있을 리가 있습니까? 사신을 보내 확인해 보시면 될 일입니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왕이 자리에 앉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 밀사의 임무가 바로 너를 호위하는 거였느냐?”

고개를 끄덕인 융기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지금 황제께선 황실 혈족을 각 지역에 보내 미구에 닥칠 환란에 대비하고자 하십니다. 조선이 명의 운수를 도울 날개가 되는 것이나, 어찌 보면 황실과 한배를 타는 것이기도 합니다, 명과 후금, 과연 어느 편이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상대를 뚫어져라 관찰하던 왕이 물었다.

“황실 후손이 어찌 임진년 전쟁에 수군으로 참전했나?”

“황족으로서 충심을 갖고 기꺼이 참전했습니다. 진린 도독을 도와 조선 남해안에서 활약했고 전쟁 막바지엔 한양에서 보급을 담당했습니다. 조선을 좋아하고 조선어를 잘하니 황실에 불려가 갈 곳을 정하라 하기에 바로 조선을 택했습니다. 대명제국이 후금을 무찌르면 조용히 돌아갈 것이니, 그동안 숨어 기거할 곳이나 마련해 주십시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왕이 속삭이듯 물었다.

“황제께서 조선으로 천도라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인가?”

“이곳 역시 대명천하이니 그리 될 수도 있겠습니다.”

조선의 왕이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까치 한 마리가 반가운 손님이라도 되는 양 인정전 뜨락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광해군 #명나라사신 #임진왜란 #주생전 #신동아

* 이 작품은 권필의 ‘주생전’ 일부를 모티프로 창작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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